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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기쁨(요 3:22~30)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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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기쁨(3:2230)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임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나타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흉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 시작에서부터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공부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고 그 빛에 대해서 증거 하는 사람이라고(1:8) 분명히 못박았고, 1:23 이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너는 누구냐, 왜 세례를 주느냐"고 했을 때 "나는 메시야가 아니고 그에 대해 증거 하는 사람이다"라고 자기 신분을 정확하게 밝혔습니다. 자신은 광야의 소리요,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그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거듭 말합니다. 원문대로 보면 주님께서 편히 오실 수 있도록 고속도로(high way)를 닦는 자라는 것입니다.

길은 좋아야 합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빨리 갈 수 없지만 고속도로는 얼마나 빨리 갈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도 이처럼 좋은 길이 있어야 합니다. 가시밭이나 돌짝밭이 있어 거치는 것이 많고 구불구불한 길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지지 않습니다. 마음속에도 하이웨이가 있어서 아무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오시는 길을 위해 골짜기는 메우고 산은 낮추어서 큰 실을 만드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도 주었고, 증거도 했으며, 자기 제자까지도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요한 자신은 믿음이 분명한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자들이 흔들렸고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자주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나 혼자서 스스로에게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제법 겸손하기도 합니다만, 다른 사람이 나를 나쁘다고 지적하면 "왜 나쁘냐"고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스스로는 낮출 수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잘못을 지적하면 생각이 달라지고 나아가서는 "너는 어떠냐"고 되받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기 진실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성경 속에서 예를 들면, 창세기에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삼촌을 따라 나섰습니다. 롯은 믿음에서라기보다는 삼촌이 좋아서 동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사이이므로 서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두 집이 점점 커지고 종과 재산이 불어나자 문제가 생깁니다. 종들 사이에서 "우리는 삼촌 종이고, 너희는 조카 종이다. 너희 주인은 어떠하고 우리 주인은 어떠하다"등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 종들이 같은 신분이었지만 롯의 종들보다 으스댔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사이는 내 것, 네 것 없이 좋았지만 밑에 사람들끼리 다툼으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아브라함이 내립니다. 이대로 계속 나가다가는 서로 다치겠기에 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자세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비록 짧은 6개월이었지만 자기 선생님이 복음을 먼저 전했고 최고인 줄 알았는데, 추종자들이 점점 예수께로 가게 되니 참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또한 본문에선 요한의 제자 한 사람이 유대인과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하게 되었다(3:25)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도 유대인들이 요한의 제자들에게 섭섭한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당신들이 요한을 따르고 있지만 이제 너희 선생은 끝났고, 지금은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들이 방향을 바꾸었더라고 말했다면 요한의 제자들은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와서 지금 한마디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3:26). 쉽게 말하면, 고자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저쪽은 커지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섭섭하고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실 중심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말에도 "나는 괴로워도 참을 수가 있는데 아이들 때문에 안 되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집에만 왜 자동차가 없느냐"고 졸라대면 반드시 차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많이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은 자기 위치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3:27-29). 전혀 흔들림이 없이 요한은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기쁨은 바로 여기서 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의 기쁨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자기의 본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자기가 왜 세상에 태어났나 하는 생의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가끔 중년 여성들 가운데서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허무감에 빠져 호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다가, 아이들은 학교에 다 가고 남편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니, 나는 무엇 때문에 어렵게 공부를 했으며, 왜 여기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소유했느냐, 출세했느냐에 문제가 아니라 허무주의에 빠지는 일입니다. 내가 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생일이 두 번 있다고도 말합니다. 하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날이고, 또 하나는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고 생의 목적을 아는 날입니다. 오 헨리의 말처럼 길가의 조약돌도 필요 없이 뒹구는 것은 없습니다. 미처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는 것뿐이지, 세상의 모든 것이 뚜렷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목적을 모르면 비참하고 불행하며, 내가 왜 존재하는가를 뚜렷하게 알면 행복합니다. 요한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전위대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으므로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둘째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변함이 없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상당한 부분의 고민은 변덕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흔들려 이랬다 저랬다 하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우리 주변에 보면,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내가 사는 목적이 여기가 아닌가 하고 기웃기웃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필자는 약 20년 동안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학생들 중에서는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겠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가 흔들흔들해서 이번 학기 마치고 그만둘까, 혹은 다음 학기까지 가 볼까 하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졸업하면서도 왔다갔다합니다. 저는 채플시간마다 강조하기를 "이왕 들어섰으니 이제는 돌아설 수 없다(No turn), 이제는 선택권이 없다(I have no choice), 이대로 가는 거다" 하고 직진하라고 재촉을 합니다.

혹자는 필자에게 목회에 성공한 비결을 묻습니다.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하나님께서 아실 일이고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목사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도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질문을 받으면 목사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목사가 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나는 목사가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만 생각하고 공부했습니다. 목적의식이 뚜렷하되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변덕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제자들이 어떤 고자질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는지 너희들도 증거하라" 고집스러울 만치 변함이 없습니다. 타인의 어떤 충고에 의해서도 변화지 않는 요한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동안에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평판에 신경을 쓴 사람은 자기 상실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로 요한은 자기의 적절한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27절에 보면 하늘로부터 받은 바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누구나 하늘로부터 받은 바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여러 번 낙제했다고 합니다. 담임 선생님은 그를 평하기를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라고 단정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며 "네가 남과 같아지려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남과 다르려고 한다면 크게 될 수 있다"고 격려하여 아인슈타인은 남과 다르게 된 것입니다. 남과 달라야 합니다.

동생에게 형을 닮으라고 해서는 안 되며, 형에게 동생 닮으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법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각각 자기 길이 있는 것입니다. 성공이 따로 없습니다. 장사할 사람은 장사해야 하고 학자할 사람은 학자가 되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성공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다 천직이요 성직입니다. 그러므로, 주제넘게 자기 이상의 일을 생각해도 안 되고 자기 이하의 일을 생각해도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하늘로부터 받은 바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받은 바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통해서 일을 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은 시시하고 다른 사람이 받은 것만 좋아 보입니다. 이래서, 옆을 기웃거리다가 세월만 보내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 보지 마세요. 나에게 있는 것이 소중합니다. 공부를 하는 데도 가만히 보면, 기억력 좋은 사람이 있고 창의력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방향이 좋고 저 사람은 저 방향이 좋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한도 자기 직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요,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선지자다, 그는 주인이요 나는 종이다, 이렇게 분명한 자기 기능이 있음을 알고, 그 기능을 찾아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여자는 남자처럼, 남자는 여자처럼 머리도 길게 파마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되겠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남자도 여자도 못되고 맙니다. 사람마다 자기 위치가 있고 기능이 있습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 위치가 분명했고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그는 기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요한은 전혀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바라는 것이 전혀 없는 그 마음이 그를 기쁘게 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훗날에 주어질 보상을 생각했다면 그는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자기가 쇠하여져서 그 분에게 이로움이 있다면 언제든지 손해를 보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쁨이니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어떤 능욕을 당해도, 아니 오늘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라면 내가 어떤 고난을 당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내가 잘돼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생각을 고집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잘못되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기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요한은 희생되는 그 자체를 기쁨으로 소화하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 자체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자를 위해 수고하면, 수고하는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수고 뒤에 칭찬이나 상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 자체가 기쁨이요, 바로 그 순간이 제일 좋은 시간인 것입니다.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갖는 기쁨입니다. 요한의 기쁨이 바로 이러한 기쁨인 것입니다.

여섯째, 요한은 신랑의 기쁨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절차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녀가 만나게 하기 위하여 중매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며, 또 하나는 결혼식 때 들러리가 있는 점입니다. 지금은 들러리가 거의 사라졌지만 옛날에는 신랑, 신부 옆에 반드시 들러리가 있었습니다. 요한은 지금 신랑의 들러리가 되어 신랑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좋지 못한 속담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요 힘들게 사는 사람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룰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남의 아들 딸 결혼식에 가서 축하할 때 내 아들, 딸을 보내는 것처럼 함께 기뻐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실, 소유라는 개념은 반드시 내 손에 쥐어야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고 나도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여유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신부요, 하나님이 신랑으로 설명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신랑이다. 제발 정숙하게 살아다오" 이렇게 말씀하신 곳도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신랑이요, 우리 모두가 그의 신부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문제는 들러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들러리요, 중매자입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났다 못났다, 소망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역정을 내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책망을 하십니다(20).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그가 교회를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중간 위치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자기 위치를 말하 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교회가 너무 많다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지 무슨 걱정입니까? 좋지 않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또 실제적으로 한번 살펴보면 인구수에 비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강남구의 인구가 65만인데 교회는 260여개입니다. 그런데, 강남 인구의 46%가 교인이므로 이 사람들이 모두 강남에 있는 교회로 나오겠다고 하면 강남에는 아직도 많이 모자라는 실정입니다. 지금 교회의 10배가 더 있어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무턱대고 강남에 교회가 많다고 말들을 합니다. 교회가 아래 위층으로 또는 옆집이면 어떻습니까? 교회가 섰다고 하면 무조건 잘됐구나 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부흥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귀한 마음의 자세로써 일했습니다. 우리가 이웃관계, 교회관계에서는 물론, 어디에서나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리라는 자세로 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내가 쇠해서 그가 흥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쇠하리라, 즉 언제든지 죽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으면 최고의 행복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의 근본입니다. 만일, 반대로 남을 죽여서라도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면 정말 힘들고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진실한 마음으로 요한의 기쁨이 우리 마음에 항상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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