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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말씀(요 1: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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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말씀(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이 신령한 의미에서 창세기가 됨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천지를 창조하는 창조가 먼저 있었으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불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창조는 곧 타락했고 어둠이 깔렸었습니다. 이 창조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천지만물이 창조된 그런 의미에서의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로서 재창조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 하여 생명을 얻게 되는 창조로서, 이 창조에 의해 공동체가 이루어지면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신령한 의미에서의 재창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천지창조에 비해서 보다 더 본질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재창조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에서 신령한 창조를 설명하는데, 구약에 나타난 천지창조의 구조와 그 과정을 그대로 재창조에 도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창세기 1장에 있는 창조 형식과 요한복음의 재창조가 일맥상통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창세기 창조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있었던 것처럼, 요한복음의 창조 역사에도 먼저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고스로서 천지보다 먼저 계셨고 먼저 계신 그가 곧 창조주이시며 또 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이미 말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리스도는 빛이며 빛은 생명임을 주제로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빛으로서 사람들 속에 있는 빛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생명의 시작을 말씀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천지창조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되 생물들은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많은 생명들이 어떻게 그토록 이루어졌는지 그 신비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작은 것으로 보아도 무한히 작고, 큰 것으로 보아도 무한하여 생명의 신비에 대해 인간은 늘 감탄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있기 전에 창조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빛입니다. 빛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빛에 의해서 다시 생명이 창조되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빛이 없이는 생명이 유지되지 못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생명의 근본을 빛이라 말씀하셨고, 요한복음에 와서는 생명의 시작은 말씀이며 그 말씀이 곧 빛이라고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빛이요, 로고스라고 한 것은 다 하나의 비유로써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깊은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많이 나타나는 단어는 생명, ,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단어가 곧 요한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서에서만 생명이란 말은 54, 빛은 23, 사랑은 60회나 기록되어 있음은 그 중요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에서는 빛과 생명을 연결해서 설명하고 다시 그 생명을 말씀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잠시 생각하겠습니다. 천지창조시에 제일 먼저 창조된 것은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의 역사가 먼저 있었고, 다음 그 빛으로부터 이어져서 모든 식물, 동물 등 생물들이 창조되었습니다. , 모든 생물들이 빛에 의존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

빛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며 종류도 다양합니다. 요즘의 과학의 발달로 제 1의 빛, 2의 빛, 3의 빛, 4의 빛까지 말합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제 4차원의 빛인 영적인 빛입니다. ()도 대체적으로 4차원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개발한 일반적인 불과 전깃불이 있고 원자력의 불, 그리고 영적인 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영적인 불이며 우리는 이 신비로운 불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깃불은 세상을 밝게도 하고 또한 열로써 우리를 따뜻하게도 하지만 식물을 자라게 하지는 못합니다.

, 생명을 자라게 하는 오묘한 빛을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이 불은 죽은 빛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빛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빛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 생명력보다 한층 높은 차원인 말씀의 빛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으로 영적인 생명이 발아되고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어떤 말로서도 설명이 부족하지만 가장 적절하고도 순수한 표현은 그리스도적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빛은 종합적이며 구체적이고 높은 차원의 빛으로서 인간은 이 빛을 받아야만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우리가 아는 대로 태양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 속에서 캐내는 석탄이나 기름까지도 모두 태양열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흔히 석유는 광물성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동물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름도 그대로 생명으로서 먹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광물성이라면 합성하기도 쉬울 것인데, 동물성이기 때문에 간단히 합성할 수 없어 자연적인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추측하는데, 옛날에 커다란 물고기가 화산이 터지면서 그 속에서 썩어 생긴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름의 양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하루에 소비하는 기름의 양을 원유로 계산하면 장충체육관만한 양을 없앤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세계 곳곳에서 소비하는 모든 양을 계산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겠습니까? 땅 속에 얼마나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머지않아 생태학적인 문제가 오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생각할 것은 땅에서 캐내어 불을 때는 것까지도 모두가 태양열로써 만물이 태양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빛은 단순한 밝음이나 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보면 양심의 빛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마음의 빛이 어두워지면 캄캄하여 방향을 잃게 됩니다. 어두움에서는 모든 가치가 무효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오색찬란하지만 어두움 속에서는 무효입니다. 빨강이나 노랑 등 색채가 나타나질 못하니까요.

, 빛은 가치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빛을 잃으면 귀한 것이 없습니다. 부자가 더 말썽이 되고 머리 좋은 것이 더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마음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빛은 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반사되는 것입니다. 원래의 빛이 있고 그 빛을 내가 받아서 작은 빛으로 반사하는 것이 마음의 빛입니다. 종합해 보면 빛은 생명이요, 영적 가치관과 힘과 그리고 방향의 의미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즉 습한 곳에서는 여러 가지 벌레들이 들끓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곳은 항상 문제가 있으므로 빛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밝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문제의식이 있음을 뜻합니다. 필자는 예배당을 지을 때도 어떻게 하면 불을 켜지 않고 좀더 밝게 지을 수 없을까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논에 있는 벼도 며칠간만 날이 흐리거나 비가 와서 햇빛을 보지 못하면 도열병이니 뭐니 해서 뉴스가 되고 야단입니다. 햇빛이 내려쪼이는 곳에서는 벌레들이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사과가 유명한데, 특별히 맛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역적으로 비가 적고 햇빛이 많이 쪼이는 곳이라 사과에 벌레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스프링 쿨러를 돌려서 과일나무에 물을 줄 정도로 비가 적어 소독할 필요가 없으므로 캘리포니아 상표가 붙어 있는 사과는 안심하고 껍질째 먹는 것입니다. 곡식이 성장하는 과정에도 일조 시간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듯이 영적인 그리스도의 빛이 조명되지 않는 곳에는 여러 가지 어두움이 있습니다. 이 어두움은 죽음을 의미하며 죄와 타락을 의미하며 그리고 부끄러움을 의미합니다. 부끄러움은 자랑의 반대되는 말로써 빛 앞에서 언제나 감추려고 하지만, 빛은 항상 자랑스럽습니다.

다음으로 생명이란, 하나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과 산다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존재는 있는 그대도 가능하지만 산다는 것은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하나님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빛은 생명으로 빛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숨쉬고 움직이고 열매 맺으며 감각이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빛은 자라게 한다"라는 말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빛이란 살아 있는 것에게는 더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지만, 죽은 것에게는 햇빛이 쪼일수록 더 마르게 합니다. 한 포기의 풀의 밑둥을 잘라 놓았을 때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말라가지만, 살아 있는 풀은 햇빛을 통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우리들은 빛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을 받아서 생명 속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수용성입니다. ,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내가 말씀을 순종하므로 그 능력이 내 안에서 행사됩니다.

요즘 태양열 집을 짓기도 하는데, 이것은 될 수 있는 한 빛을 많이 받도록 장치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충분히 받도록 수용적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수양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곧 그를 영접하는 자로서 빛을 영접하는 자세를 가진 자입니다. 그래야만 그 속에서 생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에게 빛을 주고 또 밝음을 주고 소생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저주 의식에 매이고 무기력하게 되며 혼돈을 가져다줍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마음이 어둡고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으면 마음속에 밝은 빛을 지니며 나도 모르게 많은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빛이며 우리는 이미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또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생의 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빛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생명의 질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생이라고도 합니다. 어두움에 묻힌 과거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생을 의미합니다. 간혹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옛사람으로 알고 그대로 평가를 하더라도 나는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과거를 못박았으므로 상관이 없습니다. 어두움을 벗어나서 이제 객관적으로 나를 보게 되고 그런 시야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또한 사망의 매임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합니다. 사망에 매어 사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며 죽을까 하는 걱정 외에도 지금 현재에도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활 자체가 어두움에 있고 심령이 계속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소망도 미래도 없는 절망적인 삶입니다. 그러한 노예 상태에서 해방을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두움은 매인 것을 의미하고 빛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빛 가운데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발휘할 수 있고 지혜가 있는 대로 다 활동할 수 있으며, 이것은 바로 창의력입니다.

빛이 있는 생활은 미래를 직시하며 미래에 약속된 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가 훤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가서 보면, 일등 대합실과 삼등 대합실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찰이 시작될 때 일등 대합실의 손님들은 천천히 여유 있게 들어가는데, 삼등 대합실 손님들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밀치고 뛰어서 가끔 사고까지 일으키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한 쪽은 교양 있고 고급 인간이며, 또 한 쪽은 무식하거나 하급 인간이라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 단지 일등 대합실을 통해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 표에 좌석이 지정되어 있어서 천천히 가도 내 자리가 있지만, 3등칸은 빨리 가지 않으면 먼 거리를 서서 가야 하는 고역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미래에 확실한 보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여유가 있게 되고 자신이 있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면 불안하고 초조하여 다툼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을 환하게 바라다보며 자기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면 면류관이 있음을 알았고, 스데반은 돌더미 속에서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을 때 그를 기다리며 두 팔 벌리고 환영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스데반이 왜 슬퍼하며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생의 질이 있고 과거 지향적인 생의 질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10년 동안을 전도했는데, 남편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을 먹고 또 2차로 자기 집으로 와서 늦은 밤에 술상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이 부인은 불평 없이 정성껏 술상을 차려 대접을 했더니, 남편의 친구는 이상해서 그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정도면 자기 부인은 난리가 나는데, 왜 이렇게 대접을 잘해 주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믿음이 좋은 부인은 자꾸만 묻는 남편 친구에게 대답하기를 "제 남편에게 10년 동안을 전도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제 거의 포기하고 보니 저는 천당을 갈 것이고 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이라도 좀 편안하게 잘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라고 엉뚱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두 남자는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미래가 확실한 사람, 즉 빛 안에 사는 사람은 생의 질이 다릅니다. 약속된 미래를 살기에 오늘의 생활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부하고, 병들고 건강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연결된 미래지향적인 생은 빛이며 곧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에게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적 빛 된 생으로서 생의 질이 다른 생활입니다. 똑같은 집에서 같은 여건으로 살아가지만 한 사람은 영에 연결된 생활이요 또 한 사람은 땅에 속한 생이므로 사는 것이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있는데,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지만 끊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무엇이든지 가능하지만 그 빛이 끊어지면 절망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생명 자체가 그리스도로부터 왔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생은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빛을 내어 비추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사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밝아졌는지 모릅니다.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라도 각 부문에 많은 밝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직도 일부다처주의가 공산국가를 제외하고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이 제도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많은 비기독교 국가에서는 현재에도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남자들과 균등하게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마음놓고 거리를 다니지 못하는 나라들도 아직 있습니다. 예수님(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공산국가에서는 남녀 동등이라는 미명하에 여자들도 광산에서 노동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빛이 들어간 곳은 정말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개적 차원에서 밝아진 곳이 대단히 많습니다. 봉건시대에는 노예제도 등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차별대우했습니까? 이제 세상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점점 어두워져 가는 것이 아니라 밝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 우리들은 굉장한 혜택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 원인은 다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본문 5절 하반 절에서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다소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깨닫지 못한다"라는 말을 한편으로 "이기지 못한다"라고도 번역을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어두움과 빛이 공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풀이하면 어두움과 빛이 함께 있는데, 빛이 있다고 해서 전체가 일시에 환하게 되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괴테의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광선이 강한 곳에는 더 강한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습니다. 사실, 밝은 빛이 있을 때 그 빛을 막는 물체가 있다면, 그 물체 뒤에는 그림자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강한 의가 있는 곳에는 강한 악이 있고 강한 저항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빛이 강한 곳이라고 죄악이나 어두움이 없어지기보다는 보다 더 확실하고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적인 요소입니다. 밝은 빛이 어두움을 향해서 비추고 있는 동안에는 한 쪽에서는 계속 어두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빛이 계시되고 빛이 인도하고 강하게 역사 하지만 어두움은 물러가면서도 점점 더 강하게 더욱더 강하게 역사하고 발악한다는 말입니다.

빛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점점 강하게 비추어지지만 한 쪽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극과 극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앞에 있는 심판입니다. 어두움이 지금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장차는 물러가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적으로 빛의 승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며 우리는 그 빛 안에 살고 있고 이 빛을 반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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