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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과 그 생수(요 4:1~15)
이 본문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고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가끔 이렇게 깊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이미 서론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공관복음과는 달리 좀 독특한 방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데 비해 요한복음은 주관적인 저자의 해석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기록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석학적으로 미루어 보면 요한의 나이가 아주 많았을 때 기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신약 중에서 맨 처음 기록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요, 맨 나중에 기록한 책이 요한복음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복음은 저자인 요한이 주석을 덧붙여서 설명을 함으로 읽는 우리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본문과 주석의 구별이 어려운 점으로, 어느 것이 요한의 설명이고 어느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지 엄격하게 나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 말씀은 누가 하신 말씀입니까? 성경의 앞뒤 문맥을 열심히 보아도 요한의 말인지 예수님의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는 구절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그 외의 것은 구별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난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영감을 믿기 때문에 그의 설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요한의 주석 때문에 성경의 의미를 요약해서 알게 되고 친근감까지 느끼는 것입니다. 지금 공부하고자 하는 위의 본문도 사도 요한의 주석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는 중에 특별히 3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중생의 교리입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하는 질문을 소개하면서 중생의 교리를 설명하며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독생자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며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느니라, 즉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고 중생과 독생자의 심판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믿지 않고는 하나의 심판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서 이 본문은 지금까지 설명한 중생교리의 요약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데, 한 마디로 그는 "위로부터 오신 분"(요 3:31)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간증이요, 증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소개할 때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가령 신상카드의 내용사항을 보면, 이름, 생일, 본적, 현 주소 등을 어디서나 기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자 할 때에는 불가피하게 두 가지 사항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누구의 아들인가", 즉 가족사항을 묻고, 또 하나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를 묻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사람됨에는 배경을 무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만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받지 못했기 때문에 줄 수가 없습니다. 화목도 그렇습니다. 화목한 가정에서 화목을 배우는 것이지,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가정에서 어떻게 화목을 배웁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면, 가난한 집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면 알뜰하게 경제적으로 사는 법은 최고이지만 손님 대접에 익숙지 못하고, 부잣집 딸은 손님 대접에는 최고이지만 낭비가 심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자라난 가정 배경을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할 때에는 본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배경에서 살았느냐 하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권이 전혀 다른 사람끼리 어울려서 지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에는 부득불 그의 배경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신학자들을 소개하는 현대신학 강해론을 몇 년 강의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에도 신학자의 신학이론 이전에 신학자들의 가정환경 자라난 곳 등 그들의 백 그라운드(back ground)를 먼저 소개합니다. 가령, 루터의 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게 되었는가 그의 배경을 먼저 봅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로서 아들을 많이 때렸다고 합니다. 그러한 배경 때문에 루터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이 무섭게만 생각되는 느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배경을 보면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교민입니다. 유대교민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헬라 철학적인 문화와 히브리 종교문화의 두 문화권에 걸친 정신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면 보다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고자 할 때도 그는 어디서 오신 분이며, 그의 뿌리가 어디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본문에서 말하기를 그의 배경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소개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땅에 있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나사렛이란 촌 동네에서 어떻게 위대한 사림이 나겠는가 하고 예수님의 육신으로서의 출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땅으로부터 오신 분이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며 어디서 태어났느냐",등 일반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그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방법은, "그는 하늘로부터 온 분이시다,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이해하고 그리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기슭의 불붙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영어로 말하면 "I am who I am, I am because I am", 즉 "내가 있으니 내가 있다, 나는 스스로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누구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있고 그 다음에 있는 자는 더욱 아니며, 스스로 있는 자, 자존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이 예수를 소개하는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 분은 위로부터 존재하는 분으로서 그의 근원은 위에 있다라고 소속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위로부터 오신 분을 영접해서 위로부터 생명을 이어받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6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런고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해 여기지 말라"고 귀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근원은 위에 있고, 또 그 운명도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땅에 속한 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요 위에 것을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의 역사, 말씀은 모두가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그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따라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위대한 성현의 말씀이다, 훌륭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끈질기게 당신이 하늘로부터 온 분이라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미 병도 고쳤고, 죽은 사람도 살렸으며, 오천 명을 먹였는데도 불구하고 또 따라가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표적이란 받는 자에게만 표적입니다. 마치 사랑과도 같은 원리입니다. 사랑이란, 사랑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사랑으로 받을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사랑이 사랑으로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증거를 바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가 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구석 하나라도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가 보이지 않으니 문제인 것입니다.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주머니가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고민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신앙적인 내용이 전혀 없어서 목사님이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자매님, 하나님을 아십니까?" 질문을 받은 아주머니는 대답대신 그 질문을 목사님께 되돌렸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목사님은 "나도 모릅니다(No, I don't)"라고 대답하시며, 이어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놀라고 있습니다. (But I am surprised by God every moment.)" 믿음으로 보면 이 세상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품안에서 존재하므로 새삼 하나님을 안다 모른다 할 것이 없습니다.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믿음이 문제입니다. 증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보지 않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당신이 하늘로부터 온 분이라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더 이상하실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고래 뱃속에 요나가 3일 동안 들어갔던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를 질 것이다. 십자가 외에는 더 보일 증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누가 십자가의 증거를 보았습니까? 십자가의 증거를 보고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나를 위한 십자가하고 하는 증거로 받으면 놀라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증거란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증거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보고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요 3:32-33). 증거를 받는 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도장(sign)을 찍었다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증거는 충분합니다. 문제는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본문 35절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또 하나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랑하시어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마태복음 28:18 이하에도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가 주어졌음을 믿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계시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훌륭한 스승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믿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이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신령한 눈으로 볼 때에는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예수께서 온 세계를 다스리고 계심을 우리는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을 악이 다스리고 마귀가 다스린다고 불행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의 손길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 불과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에 대하여 이같은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으시고 하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권세를 그가 쥐었고, 역사의 주인이심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사건들은 그 증거로써 오천 명을 먹였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물위를 걸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생명의 권세를 잡으셨으므로 사건들은 조그마한 증거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 34절에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성령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써, 즉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임하는 그것이 성령이며, 둘째는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케 해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도록 역사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야만 진리를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요 위로부터 오는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자가 없으며,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들려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를 따라 계속해서 들리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항상 진리를 깨닫게 하고 진리에로 나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렀느니라"(요 3:36)고 요한복음 3장을 끝맺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즉, 흔히 말하는 "예수 믿는다"는 말인데, 믿는다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가 병을 고치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심을 믿는 것입니까? 적어도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는, 예수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고, 만물이 다 그의 권세에 있으며, 생명의 주인으로 그가 곧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동시에 그는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즉 이처럼 사랑이 계시되었는데 무엇이 아까워서 주시지 않겠느냐는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대로"가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최대의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더 바랄 것이 없이 "이대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바른 뜻입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길 믿는다는 것은 어린 아이 상태입니다. 지금 나의 형편 이대로가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최대 사랑임을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의 수준이 올라갈 때는, 하나님은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고 깨닫지만 이것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이시오 만유의 권세를 가졌다고 믿으며 그 사랑에 충만해 있는 상태를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영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이 영생은 현재적인 영생입니다. 그는 현재 미래 영원을 통한 그런 의미에서의 영생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영생의 현실성으로써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요한복음은 구원이나 영생을 말할 때 미래를 전제로 하거나 죽은 다음에 되어지는 미래를 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현재로부터 영생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 바로 여기서부터 영생은 시작됩니다.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벌써 믿는 그 순간 영생이 들어간 것입니다. 필자는 요한의 허락이 있다면 36절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고쳐보고 싶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믿어지지 않는 자는 그 위에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느니라."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복음을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만일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은 나에게 가혹하시다고 느끼는 사람은 구제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관대하셨습니다. 나에게 너무 많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사랑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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