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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증거(요 1:6~9)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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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증거(1:69)

 

앞장에서는 예수께서 빛되시며 그 빛은 생명으로 우리 각 생명에게 비추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공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빛에 대한 증거와 빛의 증인에 대해서 공부하려 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1:6-7). 빛은 빛대로 있는 것이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꼭 두 가지 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빛을 증거 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마음을 감동케 하는 자, 즉 성령이 함께 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빛에 대해 전달자가 꼭 필요하다는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이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내시가 어느 날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 속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때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차 가까이 나아가서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 내시가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음을 알게 되자 빌립은 내시에게 "읽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내시는 대답하기를 "지도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빌립에게 청하여 자기 마차에 같이 타고서는 자기가 읽고 있는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에 내려서 곧 세례 받기를 원하여 세례를 받은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내시 한 사람이 그러한 연유로 예수를 믿고 자기 나라에 돌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2천년 동안 이디오피아에 기독교가 있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믿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먼저 성경인 빛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없다면, 즉 가르쳐 주는 자가 없다면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증인인 전도자가 필요하므로 성령은 증인을 고용하시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누군가의 수고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고 예수 믿는다는 자세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전해야만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자의 입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식과 철학과 세계관과 경험까지, 즉 그의 인격 전체를 다 고용하십니다. 좋은 본보기로 사도 바울을 보면, 그는 아주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고용하여 쓰실 때에는 유식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베드로는 좀 무식한 사람이어서 그 나름대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전도하도록 고용되었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고난 당하는 자에게, 부자는 부자에게, 동창은 동창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고용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증거는 네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입니다.

첫째는 예언적 증거입니다. 만약, 어느 분이 여기에 오신다 하면 오시기 전에, 즉 사건 전에 이러이러한 분이 오실 것이다라고 미리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전에 오실 것을 준비해 놓았기에 그 분은 나타나시기만 해도 이제 효력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몇 년전에 빌리그레함 전도대회가 있었습니다. 준비위원회에서는 그 목사님이 오시기 1년 전부터 세례 요한 격인 선발대를 미리 보내어 교회마다 다니며 설명하고, 작은 집회를 만들어 또 설명하고 조직하여서 대집회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오셔서 몇 마디 말씀만 하셔도 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미리 알고 준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미리 마음이 왜곡되어 있고 비뚤어져 있으면 그 마음을 돌리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먼저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어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이면 말씀이 잘 들려집니다. 준비되지 아니한 마음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진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필자가 특별집회를 거의 200여 교회 다니면서 경험하였는데, 기도를 많이 하고 준비한 교회는 단 위에 서자마자 은혜가 되었지만, 준비하지 아니한 교회는 산을 마주 대한 듯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웃지도 울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전에 미리 증 거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자신이 오셔서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기적, 그리고 많은 표적들이 전부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확실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언젠가 중풍병 환자를 지붕을 뚫고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고 권위 있게 말씀하시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참람하도다. 하나님 외에 누가 사죄할 권한이 있느냐?"고 힐난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내가 사죄할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상을 들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셨고 환자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상을 들고 일어나라는 말씀에 환자가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예수께서 사죄권을 행사한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기적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하나님 대신 예수님이 사죄권을 행사하신다고 하는 것에 대한 증거요 그런 증거를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볼 수 있음에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증거 중에 가장 큰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증거입니다. 이 증거를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못되게 굴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고구마를 캘 철이 되면 고구마 밭은 땅 속에서 자란 고구마로 인해 땅 위에 금이 가고 땅이 볼록하게 올라옵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고 고구마를 하나 둘 정도 꺼내 먹으면 남의 밭이라도 고구마밭 주인은 내버려둡니다. 그런데, 그것이 귀찮아서 줄기를 그냥 쑥 잡아당겨 여러 개의 고구마를 뽑아서 그 중에 하나만 잘라먹고서는 나머지는 다 버립니다. 어린 시절에 이렇게 못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제가 먹으려고 한 고구마는 하나인데 잡아당기면 다른 것도 따라 올라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랑하시는 자는 예수님 뿐이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활할 자격이 있어 그를 부활하게 하셨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활시킨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 함께 포함되어 같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 그 분의 생명 속에 우리가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말이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으면 우리도 영화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었다"라고 귀한 진리를 말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세째는 사후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고 말씀하시고 부활하신 경험 등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증거해 주는 제자들의 증거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께서도 증인이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여기에 어떤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그 사건은 무효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중요합니다. 가령, 지금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불이야" 하고 소리질렀다고 합시다. 이 때 불났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모두가 타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여러 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렇게 근본으로서 믿어야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아 산 속에서 27년간이나 혼자 살아온 일본 사람의 이야기는 의심이 많기로 기록을 세운 사건입니다. 아무리 전쟁이 끝났다 해도 믿지 않는 데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토록 중요한데, 이 믿음을 갖도록 하는 데는 증거가 있어야 하고 증거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거 중에서도 참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만, 열한 제자가 모두 순교한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 부활한다는 그 생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죽는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활을 믿기에 순교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순교자를 보더라도 원형극장에서 수십만 명씩 죽어간 많은 증인들 앞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확신하기에 기쁨으로 순교했던 것입니다.

넷째는 성령이 증거 하십니다. 성령이 증거하지 아니하면 그 증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증거하고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도록 성령이 동시적으로 역사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의 역사는 2천년 동안 살아서 오늘날까지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증거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1 : 7 하반절)에서 "믿게 하려 함이라", 즉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믿음을 주어야 합니까? 믿어야 그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역사 사건과 신앙 사건을 구분해서 말했는데, 다소 위험하기도 하고 오묘한 뜻이 있는 이론입니다. 역사적 사건은 엄연히 여기에 있어도 믿지 않으면 사건이 아니 되지만, 신앙 사건화가 되면 사건이 사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구원 사건도 그것을 믿을 때만이 사건화 되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증거와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여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증인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이 없이는 증인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란 추상적인 이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법정에 출두한 증인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증인에게 묻기를 "너는 들었느냐, 보았느냐, 그 곳에 있었느냐" 하고 경험한 것을 묻게 됩니다.

그런데, 증인으로 출두해서 "나는 그 당시 없었지만 내 생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증인이 못됩니다. 반드시 경험이 있고서야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건도 추상적인 이론이나 도를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내 속에서 사건화되어야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진리의 의미가 있고 그 진리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증인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보았고 경험을 했지만, 그 사실을 전할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보지 못했다고 슬그머니 피한다면 본 것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만약, 보았다고 했다가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해서 아예 보지 못했다고 비열하게 거짓을 말하기도 하는데, 증인은 내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셋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저 분을 위한 증인으로, 내가 경험한 사실을 말하여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해도 그 고난을 다 받아들일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위하여 증거하는 저 분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사랑이 없이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도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증거라는 말을 헬라어로는 '말튜리아'라고 하는데, 이 말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 보면 마터(Martyr)로서 순교자라는 말이 됩니다. 증인은 순교자적인 각오가 아니고서는 증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혹 그렇게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어 40년 동안을 장님으로 지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는 순종하여 그대로 행하여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는 직접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묻기를 네 눈을 누가 어떻게 고쳤느냐, 또는 안식일날 눈을 고쳤으니 그 사람은 아마 죄인인가보다 하며 떠들고 야단했습니다. 답답하게도 소경은 자기 눈을 뜨게 한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그 분이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증인은 없습니다. 그는 후에 갖은 핍박을 받고 순교까지 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내 눈을 뜨게 한 사실이며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한 때는 소문난 깡패여서 마을 사람들이 시장에 오고 갈 때마다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예수를 믿은 후에 증거하기를 "나를 보라, 만약 예수가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가 궁금하면 나를 보면 된다"라고 간단하게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를 믿고 사도가 된 다음에 자기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선 그가,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1:8). 세례 요한은 증인으로서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언자적인 의미에서 증인이요, 또 하나는 예수를 직접 만나 세례를 주었으니 경험자로서의 증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400년 동안 선지자의 음성이 없었다가 400년만에 광야에서 외친 음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메시야가 이제 곧 오심을 미리 증거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마지막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을 앞에 놓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 하고 눈으로 보면서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성격을 다 가진 증인이었기에 세례 요한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며,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그보다 더 큰 자가 없다라는 예수님의 찬사까지 받았던 훌륭한 증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증인은 어디까지나 증인이요, 증거일 뿐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직자들이 설교하는 것도 성경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직자는 종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일 뿐 중보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위치가 분명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신임을 받았고 메시야가 아니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끝까지 부인하며 "나는 광야의 소리다, 나는 증인이다"라고 자기 위치를 정확히 밝혔습니다. 간혹, 우리 주변에도 재림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인에게 물어보면 남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메시야는 아니며 주님도 아닙니다. 우리는 증거의 기구가 되어 있을 뿐이며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의 변속적인 역할을 할뿐입니다. 다시 설명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우리 자신이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예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예언자적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추종했으나 그는 말하기를 "나는 증거하는 자이다, 오시는 메시야의 신 매듭을 풀기에도 감당할 수 없다"라고, 착각하려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는데 우리 쪽보다 그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간다고 불평했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며 비유까지 들어 설명했습니다. 결혼 잔치 집에서 신랑이 입장하면 신랑의 친구가 기뻐하는 것과 같이 신랑 친구가 아무리 잘나도 결혼식 날은 신랑신부를 위해 봉사하며 함께 기뻐할 뿐이지, 친구가 곧 신랑이 될 수는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자기 한계를 분명히 아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리스도의 위치로 올라가거나 그리스도의 존경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언제나 증인이며 봉사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가 영광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만 높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본문에 자기 위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기란 높은 존경을 받는 위치에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유명한 디 엘 무디 선생님의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도 그는 설교를 은혜스럽게 잘 하셨습니다. 단상을 내려오는데, 한 여집사님이 따라오면서 말하기를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잘하셨습니다. 제가 목사님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오늘은 정말 훌륭했습니다"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때 무디 목사님은 껄껄 웃으시며 "그렇지 않아도 강단을 내려서는데, 마귀가 그런 소리를 하더군요"라고 대답하셨답니다. 아마 자기 스스로도 오늘 내가 설교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말할 뿐이며 자기는 빛도 진리도 아니고 그 빛을 증거하는 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1: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서 예수를 믿도록 하는 것이지 나를 믿게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때때로 교역자들에게 위험한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교회가 어지러워졌다고 의논을 하러 오셨는데, 여러 가지 말씀 중에 자기를 반대하는 신도들을 가리켜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내 양과 네 양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의 양을 내 양으로 만들겠다고 하니 교회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메시야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은 감옥 생활이 힘들고 어려워서였는지, 어쨌든 그는 고난을 통한 영광의 메시야보다는 정치적 혁명을 일으키시어 죄된 나라를 의의 나라로 평정해 주실 영광의 메시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옥으로 달려와 악수라도 청하며 그 동안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실 메시야로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참다못해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이옵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질문이 세례 요한의 뜻이 아니고, 그의 제자들이 메시야에 대한 의혹의 질문을 계속하자 직접 가서 물으라고 요한이 보냈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동기가 어쨌든 이 질문은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흔들림이 있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합니다.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 자가 복이 있다" 고 지금 세례 요한이 실족하고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하고 십자가의 주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내가 가진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만족하지 않으면, 실족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세례 요한도 자기 생각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실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광야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메시야로 온 줄로 알았으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 분의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인데, 감옥에 갇혀 다소 힘들다고 해서 지난날에 스스로 증거한 것을 부인해서 되느냐는 말씀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복음은 복음이요, 빛은 빛이요, 진리는 진리며,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결론을 내리시는데, "그는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다" 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앞에서는 세례 요한의 증거가 지극히 작은 것보다 더 작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작은 증거를 붙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큰 증거를 붙들고 있습니까? 기도함으로써 병이 나은 것이나 기도함으로써 사업이 잘된 것은 작은 증거입니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 이것만을 가장 큰 증거로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계시된 확실한 증거를 받고 보면 내 생활의 여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게 됩니다. 이 증거는 추호도 변할 수 없는 절대적 증거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증거를 붙들고 나갈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증거, 즉 영원히 변치 않는 십자가의 증거를 붙잡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빛은 빛을 증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 해가 있고 해를 반사하는 것은 달로서, 달빛은 어디까지나 달빛입니다. 달빛이 결코 햇빛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가 작은 빛으로 반사하는, 즉 증거를 받는 자의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를 알고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증인입니다. 누구나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는 먼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그리고 예수를 만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을 먼저 만나고 다음으로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지 생활 속에서 증인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보는 사람들이 나의 어딘가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필자는 교회에 자원해서 나왔다는 어느 성도에게 교회를 나오게 된 동기를 물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을 오랫동안 두고 보니 무엇인가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으며 그 중에 특히 겸손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자기도 교회에 나오고 싶었다고 말해서, 정말 기뻤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한 사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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