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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적 증거(사도행전 21:37~22: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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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적 증거(사도행전 21:3722:11)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여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죄목은 로마를 반역했다던가 소란을 일으켰다던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반유대적이라는 것과, 반율법적이라는 것과, 그리고 성전을 더럽혔다고 하는 죄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와서 아는 바와 같이 저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시기 때문이요, 질투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네만이 가졌던 종교적, 정치적 특권을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함입니다. 무너져야 할 것은 무너져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버리게 되어야 할 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아요. 안 버리기 위해서 부득불 예수의 제자인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없애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다른 트집을 잡아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쪽은 유대사람들이요, 그 바울을 죽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체포하는 쪽은 로마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법을 어겼다고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사람들이 죽이려 하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로마 천부장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체포한다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에 이어서 천부장의 보호 하에 바울이 성난 유대군중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변명인 동시에 변증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설교입니다. 전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시간에, 이 귀중한 시간에 전도를 하려듭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섰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나 한 몸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마는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어떻게 해서 죽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성난 군중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몰라서 휩쓸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알게 해서 구원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그 옛날, 자기가 돌로 쳐죽였던 스데반의 죽던 장면을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일장 설교를 했습니다. 긴 설교를 합니다. 그것을 누가 듣겠습니까? 들을 사람 없을 것 같은데도 성난 군중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설교를 하고, 그리고 돌에 맞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충격이 바울에게 되살아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때에 받은 충격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사도 바울은 아무리 저들이 성난 얼굴을 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찢어 죽이려고 대들어도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저들 가운데에는 모르고 행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자기네들이 잘못된 것을 몰라서 그렇지, 다 알고야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 시간에 저들을 향해서 설교를 합니다. 자기변명을 합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성난 군중들을 향해서 일장 연설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21절부터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전에 오늘의 본문 21장 끝 부분을 보세요. 천부장은 로마군인으로서 오로지 정치적 관심 밖에는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헬라말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당신이 애굽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38)"일전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반로마적인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일당들은 다 체포되고, 주동자인 애굽사람은 광야로 도망을 친일이 있는데, 체포 못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천 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반란군의 인원은 삼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리저리 체포되고, 흩어져서 광야를 거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때에는 한 사천 명되었다, 하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천부장의 이 물음에 사도 바울은 '아니요, 나는 유대사람입니다'하고 자기의 정체를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오해와 누명으로 인해 천하게 처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밝히 변명한 것 같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히브리어 방언으로 변명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변명의 결론은 이미 나 있습니다. 결론이 바뀔 수 있는 이야기가 토론이라고 한다면, 결론이 이미 나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 변명입니다.

헬라어로 '프로세포네이'라고 하는 말은 자기변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성난 군중들 앞에서 말하는데, 그 태도가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벌벌 떨면서 자기 생명이나 보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 어떤 처지에서든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 본래적 사명을 추호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아주 담대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담대하였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아마도 스데반의 모습처럼, 천사의 얼굴과 같이 온유하고, 밝고, 여유 있는 얼굴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바울은 확신에 차 있고 사명에 넘쳐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의 바울의 전도 자세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는 그렇습니다. 전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언제든지 그 때가 종말론적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전도할 때,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시는 저 사람을 못 만날 수도 있어요. 내가 전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마다 다음 시간에 또 교회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시간이 나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의 운명이 바야흐로 경각에 달렸습니다. 이렇게 설교한 다음에 그 옛날 스데반이 돌로 쳐죽임을 당했듯이 자기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종말론적 기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언제고 항상 그런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최선을 다합니다. 전도할 때에는 가장 귀중한 말, 그야말로 기본적인 복음, 꼭 전해야 할 말만 하세요. 긴 얘기 할 시간이 없어요. 몇백 번 말했든 간에 꼭 알아두어야 할 그러한 말을 최선을 다해 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렇게 전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이제 그 다음에 되어지는 일은 내게 책임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내게 어떤 결과가 와도, 돌에 맞으면 맞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상관이 없어요. 단지 이 시간만은 내가 할 일은 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평양의 대동강변에 가면 옛날에 토머스 선교사가 우리 나라에 배를 타고 전도하러 왔다가 순교를 당했던 순교 유적지가 있습니다. 토머스 선교사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쪽복음(마가복음) 성경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횃불을 던지고, 불덩이를 던지는 바람에 배가 그만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토머스 선교사는 성경책을 계속해서 강물에 던졌습니다. 자기는 죽지만 이 성경책은 받으라는 것이지요. 그 때 그 성경을 몰래 주어다가 읽고 예수 믿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이 복음을 받는 맨 처음 사건입니다. 나는 이대로 전도하고 갑니다. 그러나 이 복음만은 믿으세요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만히 보니까 지금이 성난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무사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맞아 죽어도 좋소, 하지만 내가 하는 말은 들으시오, 하고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 위탁하고 종말론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귀부인이 길거리에 나왔다가, 노방전도 하는 사람한테 붙들렸습니다. 전도자는 부인을 딱 붙들어 놓고, 30분 동안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인은 오도가도 못하고, 한마디로 그 자리에서 꼼짝못하고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고스란히 다 들었습니다. 마음에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인은 집에 돌아가서 남편에게 내가 오늘 이렇게이렇게 곤욕을 치렀다고 얘기했습니다. 남편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다음에 혹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하오. 아까도 그렇게 말하지 그랬소?" 부인은 대답합니다. "당신도 내가 오늘 만났던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확신에 차 있으니까요. 꼭 전도해야겠다고, 이 말은 꼭 상대방이 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 확실한 믿음 가진 것을 저는 보았거든요." 여러분,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변명하는 내용을 자세히 보세요. 이 내용이 다음 시간까지 이어집니다. 가만히 보면 그 테마가 전부 한마디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코 추상적인 얘기나 철학적인 이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아덴에서 설교할 때처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어떻고……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하겠다든가, 하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 시간에는 순전히 자기가 겪은 사건을 말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사실, 자기가 만난 사건, 그 경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의 같은 점을 말씀함이요, 또 하나는 다른 점을 말씀함입니다. 전도학적으로 보아도 가장 중요하고, 복음적으로 보아도 가장 귀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꼭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하고 설명합니다. 같은 점이 분명하고, 다른 점이 분명할 때에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길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3)"-나는 당신들과 똑같은 히브리사람이요, 생각도 같고, 경험도 같고, 마음도 같소, 하는 것입니다. 또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마는 그의 의도는 이러했을 것입니다. '나도 예수 믿기 전에는 당신들과 똑같았소, 예수 믿는 것만 빼놓고는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요, 오히려 당신들보다 더 극성스러운 히브리인이었소". 당신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어, 당신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달라,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소, 하고 설명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먼저는 같은 민족이요, 같은 히브리언어권이요, 동질의 문화권에 속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 전통에서 살았다는 것이 같다는 말입니다. 같은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무릇 같을 때에 우리가 마음이 통할 수 있습니다.

다르다면 마음이 닫히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당신들과 같이 태어났고, 당신들과 같이 자랐고, 당신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고, 당신들과 같은 행동을 했었습니다.'

여러분, 혹 누구인가 특별히 전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선 그와 나의 동질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고야 전도가 됩니다. 당신과 나는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해야지요. 고생을 많이 하고 외롭게 사는 사람에게 전도를 하는데, 나는 외로움을 모릅니다, 이렇게 전도하면 되겠어요? 전도하는 쪽에서도 '당신도 고민이 있군요.

경제적으로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나도 고민이 많습니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한쪽이 '나는 지금 죽고 싶습니다' 할 때에 '나도 죽고 싶습니다'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전도가 되지요. '오죽 사람이 못났으면 죽고 싶어할까?' 한다면 무슨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사도 바울은 지금 '당신들과 나는 꼭 같습니다,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씀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예수를 핍박했던 것이 같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당신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있지마는 몇 년 전에는 나도 지금의 당신들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었소, 나도 공문을 받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이요,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나를 만나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멀리 다메섹까지 극성스럽게 쫓아가기까지 했던 사람이오, 라며 그 동질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당신들과 나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것 외에는 당신들과 내가 달라질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건만이 다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있고, 오직 은혜로 내가 있고,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내가 있다,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 때문에 당신들과 꼭 같았던 내가 지금은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라고 설명해나가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포로가 되었던 전말을 얘기합니다. 나는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포로 하셨습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3:12)"-잡힌 바 되었다 함은 그리스도께 완전히 포로가 되었다 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그리스도께 붙들렸다고 생각합니까? 내게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예수를 선택했고, 내가 똑똑해서 예수를 믿었고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그실 아무런 자유도 없었습니다. 때로는 질병을 통하여, 때로는 실패를 통하여, 때로는 배반당하는 것을 통하여, 혹은 어떠한 역경과 어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붙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나는 저들과 꼭 같았는데, 나는 붙들려서 포로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는 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9절에 보면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보였다-이것은 계시를 받음입니다. 내가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었고, 하늘에서 오는 사건을 만났는데, 이것은 계시를 받았음이다, 나는 이것을 저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순종하는 것일 뿐이다, 함입니다.

이 말씀의 근본적인 내용은 무엇이냐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지요.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내가 이렇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요, 모두가 하나님의 친히 역사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보면 내가 받은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정쯤 되어(6)"-여기서 오정(午正)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일에 반대로 내가 잠을 자는데, 자정에 꿈을 꾸었는데,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희미한 소리가 됩니다. 아무래도 밤중이라면 몽롱한 가운데 받은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정쯤 되어-정오에, 밝은 대낮에 바로 이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잠자다가, 꿈꾸다가, 몽롱한 가운데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확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확인했다는 말씀까지 있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8)"-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바울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키가 작았다 하니, 역시 작은 고추가 맵다 싶습니다.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나오면서 눈을 뜰 수 없게 되고 게다가 '사울아' 하는 음성이 들렸으니 창황망조하여 그저 '나 죽었네'할 판인데 '당신 누구요?'하고 나오다니 참 대단한 용기의 사람입니다. "주여 뉘시니이까"-당신 누구요, 라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당신 누구요?-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똑바로 듣겠다 함입니다. 이렇듯 '주여 뉘십니까'하는, 항상 확인하는 자세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멍청하게 따라다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벌건 정오에 똑바로 '주여 뉘십니까?' 하고 확인을 한 것이고, 그리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7)" 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아-개인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예수를 핍박한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아마도 한 마디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 당신을 핍박하느냐고요? 말조심하세요. 내가 언제 당신을 핍박했습니까? 내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따라가서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까? 나는 당신과 관계가 없습니다'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그렇게 대들지 못했어요. 왜요? 사실이니까요.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지 않았어요.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요.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임은 몰랐었는데 이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몇 사람 안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을 identify, 동일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어째서 나를 핍박하느냐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가끔 우리는 여기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핍박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예요. 내가 예수를 훼방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사업을 방해하는 것이 예수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 : 40)"-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너희를 핍박하기 전에 나를 핍박하고 있음이니라, 하십니다. 심지어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10:42)"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여기서 사도 바울은 완전히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계속되는 간증을 봅시다. 주님께서 바울의 생각은 묻지도 않으시고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10)"-다메섹으로 들어가라, 그 다음에 네가 할 일을 가르쳐주마,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 때부터는 내게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가고 오는 것도 내 자유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있는 것도 내 자유가 아닙니다, 나는 완전히 그리스도께 붙들려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하는 일은 곧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핍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던 주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을 향하여 어째서 너희들은 나를 핍박하느냐고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울의 말씀하는 요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의견이나 자기 의도, 자기 지식, 혹은 자기 인격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만 다른 것입니다,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헉슬리라고 하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참 점잖은데 예수를 믿지 않아요. 그런데 그의 젊은 조수는 열심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헉슬리 교수가 볼 때에 조수가 사람은 시원치 않은데 예수 믿는 데는 열심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주일날 아침에 조수보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자네, 오늘도 교회에 갈 건가?" ", 가야지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가 알고 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 좀 해보게나." "제가 교수님께 설명드릴 만큼 알고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설명해 드릴만할 주제가 못됩니다." ", 거창하게 복잡하게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야. 예수를 믿어서 자네한테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왜 자네가 열심을 내야 하는지, 그것만 말하라는 거야." "정 그러시다면 제가 말씀드리지요. 저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성경도 다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습니다……"라며 조수는 조용조용히 자기 나름대로 설명을 했습니다. 진실하게, 경건하게, 이래서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 설명하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조수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전에는 내가 이러저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서 이렇듯 달라졌습니다.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헉슬리 교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네가 경험한 것을 나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도 예수 믿을 수 있을 텐데," 그렇습니다. 문제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운명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지식으로도 아니요, 내 철학으로도 아닙니다, 나는 본래 당신들과 꼭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의 은혜, 예수의 복음, 예수의 능력, 예수의 생명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함입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나는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당신을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제는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가 되지 마세요, 하고 바울은 아주 종말론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듯 삼엄하고, 그렇듯 중요한 시간에 생명을 걸고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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