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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되게 하는 비결(4장 2절~3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읽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전도하러 갔을 때에 여기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바울은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고 루디아는 기꺼이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개방(open house)하고 그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요새말로 하면 가정 교회(House church)인 셈입니다. 건물을 세우고 시설을 갖추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교회가 이처럼 루디아의 집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렇게 시작된 빌립보교회는 모름지기 여성 주도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전체 교인 가운데서 소위 지도자급에 속한 분들이 여성입니다. 아울러 그 교회의 성격도 계속 여성적이었던 점을 미리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에 있는데, 이 고대 마게도냐는 여인들의 위치가 좀 특별했던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몇 가지 특징을 꼽아 보겠습니다. 우선 부인이 요구해서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법률의 제재를 받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인이 원해서 무슨 일을 추진할 때에는 법률의 제재 없이 이룰 특권이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즉 여성에게 굉장한 자유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성씨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이른바 부계(父系)로 이루어집니다마는 마게도냐에서는 모계(母系)로 성(姓)을 이어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개인 재산도 인정되었다고하며, 부인들을 위한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이것은 오늘까지 남아 있는 많은 유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인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했을 때에 그 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남편들이 그런 기념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열녀비는 있으나 부인이 사회를 위해 큰 일을 했다고 공덕비를 세워주는 예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마게도냐의 여성들이 그처럼 활동적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안에서도 역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따른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었습니다. 우선 여성 특유의 사랑이 넘쳤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상부상조(相扶相助)가 잘 되고 봉사 정신이 두드러졌습니다. 옥중의 사도 바울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고 위문금을 모아 보낸 자상함은 그 좋은 보기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성들이므로 역시 시기와 질투가 승했다는 것은 큰 단점이었습니다. 이런 단점은 필경 적잖은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여성 특유의 그러한 시기와 질투가 분쟁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파벌이 생기고서로 양보 없이 맞서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가장 큰 문젯거리는 바로 이런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기, 질투의 죄는 아주 뿌리가 깊은 죄입니다. 가령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선한 일에까지 찾아드는 죄입니다. 악한 세계에만 질투와 시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데도 있고 믿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선행의 자리 거기에도 시기․질투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거기에도 시기․질투는 뿌리깊게따라다닙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마귀가 시험하는 것 중 가장 고등 시험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흔히선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싸우지 않으면 된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만 생각하고 말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는 어디까지고 따라 갑니다. 세상이 물질로 인해 문제가 많으니까 혹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내가 산으로 도망을 가야지' 하거나 '기도원에 한 번 가볼까' 합니다마는 그렇게 하면 시기와 질투가 없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산에 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에도 시기와 질투는 있습니다. 참으로 끈질긴 죄악이 바로 이 시기와 질투입니다. 뿌리깊은 죄요, 무서운 시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음의 번민이나 고통의 밑바닥에는 반드시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시험에 빠지고 본의 아니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봅시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지금 빌립보교회의 문제점은 시기와 질투요 거기 따르는 분쟁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견입니다마는 바울은 이 편지에서 "너희는 그러면 못 쓴다"고 따끔하게 책망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편지는 그 성격이 어디까지나 감사(感謝)입니다. 귀한 헌금을 받고 감사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내면서 비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굳이 아픈 데를 찔러서 잘했느니 못했느니 따지고 해결하려는 것은 소인배의 방법입니다. 당장에는 책망하고 싶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적극적 암시적 창의적인 방법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게으른 아이를 보고 자꾸 게으르다고 책망만 하는 것은 바람직한 훈육 방법이 못됩니다. 어쩌다가 아침에 일찍 일어났거든 "야, 너 오늘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구나. 잘했다!"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해 줌으로 게으름을 이기도록 길들이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녀를 보고 밤낮없이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채근하기보다는 어쩌다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든 그 때에 칭찬을 한 번 해주는 편이 더 효과적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극장에서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막이 오르기 전에 사회자가 바라보니 청중석에 한 할머니가 모자를 벗지 않은 채 앉아 있습니다. '저 모자를 벗게 해야 되겠는데…' 궁리를 하던 사회자가 기지(機智)를 발휘했습니다. 그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당극장에서는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모자 쓰시는 것을 허용합니다." 할머니가 그 즉시 모자를 벗은 것은 물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대한 감사의 편지 지면을 책망하는 말로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사람들'인 그들의 마음을 행여라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암시적이요 적극적이요 창의적인 높은 차원에서 충고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도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것이니 이 4장에서는 "하나되라"고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들 싸우고 야단이냐" "그러면 못 쓴다"라고나 누구는 잘했다 누구는 못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마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우리는 흔히 어느 한 쪽을 비판해 보려고 합니다. 나를 비판하고 남을 비판합니다. 나는 잘했고 남은 잘못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모두가 잘못했습니다.
서로 반반씩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로 해서 남이 잘못했다면 잘못한 원인을 제공한 죄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죄도 있습니다. 화목하지 못한 죄도 있습니다. 그 뿌리에는 더 큰 죄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 가지고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분명히 누군가가 잘못했고 누구는 조금 더 잘 했겠지만 이것을 전혀 가리지 않고 사도 바울은 다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하나 되라."이렇게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합니다. 본문에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들이 교회 분쟁의 양대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둘이 버티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주도적인 인물인 루디아가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루디아가 나이 많아 죽고 없는지 어른이 되어서 원로급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기 때문에 이 두 여인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진 나머지, 이 두 사람 중의 한 이름이 루디아의 별명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추측이 맞는다면 루디아는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에 주도했던 인물이요 다른 한 사람은 뒤에 믿었으나 더 열심을 내어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주류와 비주류로 분열되어 있는 셈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조심스럽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충고 가운데서 하나되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같이하라, 사업을 같이하라는 등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되라고 합니다.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사회학적으로 풀이할 문제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심령의 문제입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리면 인권의 문제도 아니요 신앙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 '주 안에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려 한다고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서 "I love you." "You love me." 한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하나되게 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네 옛날 부부들을 보면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닭이나 소를 몰 듯이 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가문을 소중히 여기고 자녀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를테면 둘 사이에 난 자녀가 두 사람을 묶어 주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고 아버지도 자녀를 사랑함으로써 그 부부가 하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평적인 관계에 앞서 수직적인 일치부터 있어야 합니다. 둘을 하나로 맺어 줄 수 있는 '끈'이 있어야 합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을이라는 사람도 주님을 사랑 한다면, 이것이 진심이라면, 주안에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아내도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생전에 "I love you."소리 한번 하지 않아도 자연히 하나가 됩니다. 함께 앉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다같이 교회에 나와 찬송 부르는데 어떻게 하나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아무리 같이 살고 별일을 다 한다 해도 신앙적으로 하나 되지 못하면 이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수직적인 사랑을 떠나서는 일치가 불가능합니다.
그런고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아니고는 절대로 하나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이지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만날 때마다 반갑습니다. 가까이 지내다 보면 부모형제보다 더 밀착됩니다. 여러분이 오늘이라도 무슨 어려운 이을 당한다면 진심으로 기도해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심으로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은 성도뿐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무슨 사업 관계니 이해 관계니 동창 관계와 같은 세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이이유가 되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관계야말로 가장 절실하고 강한 유대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되고, 이 구원받은 간증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라고 합니다. 함께 복음에 힘쓰던 자라는 뜻입니다. 멍에를 같이했다는 것은 협력자라는 것이요 '쉬쥐고스'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yoke fellow입니다. 일찍이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밭을 갈 때 황소와 암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한 마리가 다른 소보다 빨리 가거나 더디 간다면 삥 돌아버립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여러번 보습 쟁기를 잡아 보았습니다. 소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딥니까? 그런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도 보습을 땅에 대고 보니까 막 달아나는 것처럼 빨라 보입디다. 양쪽 소를 번갈아 가면서 이쪽으로 몰기도 하고 저쪽으로 몰기도 하는데, 그 모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른쪽 소의 고삐를 탁 채서 빨리 가게 하면 보습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왼쪽 소를 빨리 몰면 이 쟁기는 오른쪽으로 돌아갑니다. 두 마리 소를 같은 보조로 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어느 한 쪽이 앞서거나 뒤져도 안 되고, 가다가 한 마리가 숨을 돌리고 쉬어도 안 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멍에를 같이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동업자간에도 이 말을 씁니다. 동반자요 가까운 협력자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은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나와 함께 멍에를 같이 한 자"란 이토록 절실한 관계입니다.그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에게 혹시 사모님이 계셨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억측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함께 멍에를 맨다는 말이 부부 사이처럼 더없이 가까운 관계를 의미하지만 그렇다 하여 여기서까지 부부 사이로 풀이할 문제는 아닌 것같습니다. 이것은 유기적이요 균형잡힌 공존적 관계인 것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도 3절에는 "복음에 함께 힘쓰는 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위해서 똑같이 힘을 합친 소중한 지난날의 업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마다 퇴역장교 모임에서 6년째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침 7시에 시작하는데, 200여 명이 아주 열심히 모이기 때문에 저는 좀 피곤한 시간이지만 그 분들의 열심에 감동되어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서로 그렇게 가까울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왕년의 전우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군인 생활, 같은 과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함께 수고했다면 실로 굉장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더구나 빌립보교회 초기에 교회 설립을 위해 모두가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헌신도 아낌없이 했습니다. 매도 맞고 위험도 함께 겪었습니다.
그처럼 핍박을 당한 지난 날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하나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날 협력하여 이루어 놓은 거룩한 사업과 업적을 생각할 때, 오늘의 사소한 문제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이처럼 시기 질투를 할 수 있는가?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져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오직 지난날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 전파에 한마음으로 힘썼다는 그런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될 수 있다고 바울은 그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도우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극적 봉사의 자세를 취하라고 하는 듯입니다. 언제나 협력하는 자세로,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대체로 분쟁하고 시비를 벌일 대에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소극적이 됩니다. 나쁜 말로 하면 '될 대로 되라'는 자세입니다.
깨질 테면 깨져라, 망할 테면 망해라 하고 자빠집니다. 이런 경우에는 좀더 큰 안목을 지닐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덕이 되는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우리 교회를 위해 유익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이와 같이 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무모한 것입니다 .싸움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좀더 도울 생각을 하라, 저 사람을 비판하려 하지 말고 내가 저를 돕도록 하라, 약한 점도 돕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하는 자세를 취하라 - 이렇게 할 때에만 하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세계관, 비협력적인 자세, 무책임한 비판 - 이런 것들이 바로 화(禍)의 근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마치 부부싸움 할 때 무엇을 내던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내던지면 누구의 것이 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부인은 남편이 버릇이 고약해서 하도 잘 던지기에 나중에는 남편이 하나 던지면 자기는 두 개를 던졌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버릇이 차츰 나아졌다고 합니다.
네 번째,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인식입니다. 서로 사이가 좋든 나쁘든 어차피 천당가면 서로 만나야 할 사이요, 오늘 보고 그만 둘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한 천당에 갈 것입니다. 나 보기에는 나쁜 사람인 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또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은 나만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주실 것이니 그 때 만나자는 종말론적인 친교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란 이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사람과는 이 세상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만나야 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구 비판하고 헐뜯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손해를 입힌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입니까?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그러니 지금 내 기분에 맞느니 맞지 않느니, 네 의견이 나쁘다느니 틀리다느니 그런 이야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함께 생명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간 믿음의 조상도 만나야 되겠고 먼저 간 내 형제자매,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불과 몇십 년 안에 하늘나라에 가서 또 만나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합니까? 시기와 질투의 시험에서 벗어나 하나되기 위하여 우리가 주안에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멍에를 같이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과 종말론적인 친교의 의미를 재확인할 때에 진정한 하나됨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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