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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 생활의 비결(요한복음 15장 1절~8절)

by 【고동엽】 2024.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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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맺는 생활의 비결(요한복음 15장 1절~8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유의 말씀 문을 여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로 시작되는 이 비유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원수 곧 악마가 뿌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좋은 씨앗이 변질되어서 가라지가 되었구나" "그 좋은 씨앗이 어쩌다가 병들어서 가라지가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난 것은 다른 종자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는 당연한 이치를 부정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아도 '내가 지금 놓인 처지, 내 인격, 내 행위 이대로가 심은 대로 거두어진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누구를 원망하겠으며, 누군들 불평하겠습니까? 불평과 원망으로 차 있는 것은 뿌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간단한 이치를 부정해서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가을은 축복이자 심판입니다. 부지런히 일한 사람에게는 참 아름답고 흐뭇한 계절입니다 마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참 후회스럽고 답답한 계절입니다. 좋은 씨앗을 적기에 뿌려놓은 사람에게는 이 가을이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마는 어쩌다가 나쁜 씨앗, 좋지 못한 종자를 뿌려놓은 사람은 가을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뿌려놓은 씨앗을 추수하면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 이 공정한 심판 앞에 엄숙히 서봅시다. 우리의 마음이 과연 착한 농부처럼 흐뭇하고 즐거운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모르게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지향하는 열매, 우리 인간이 지향하는 좋은 열매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대로 봅시다. 좋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나아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 포도나무를 깨끗케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형통하는 인격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공적인 인격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인격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한 일 년 지내면서 무엇을 생각해보았습니까? 내 신앙과 내 경건과 내 순례의 길, 내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 어떤 열매가 맺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낍니까? 생산적 인격이 되었습니까? 내가 알게 모르게 더 아름답고 선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경험을 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가을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성공이란 세 가지 차원에서 옵니다. 첫째는 목적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목적 자체의 성공입니다. 바른 목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성공입니다. 내가 한번 세웠던 목적을 뒤늦게 후회해야 하고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가 실패입니다. 좋은 목적, 영원한 가치를 지닌 목적을 세워놓고 초지일관 후회 없이 평생을 외길로 산다면 성공입니다. 그러나 목적을 자꾸 바꾸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실패한 사람입니다. 좋은 목적을 설정한다면 그 자체가 성공입니다.

두 번째로 과정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성공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후회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학생으로 말한다면 유감없이 열심으로 공부합니다.

성적이야 어떻게 되건, 상급학교에 입학을 하든 못하든 그것은 지레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최선을 다해 공부할 뿐입니다.

성적이 나쁜 것은 죄가 아닙니다. 공부를 게을리한 것이 죄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감없습니다. 내 길이 어떻게 열리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 수단과 그 방법에서 내게 주어진 최선과 충성을 다하고 진실하게 임했다고 하면 결과야 어떻게 되었건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과정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적과 이에 따르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보면,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은사로 주시는 결과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열매입니다. 아시는 대로 열매는 때로 내가 수고한 것보다 훨씬 클 때도 많습니다. 나딴에는 수고를 많이 했는데도 열매가 시원치 않을 때도 있는가 하면 내 수고는 작은데 열매는 엄청나게 클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요. 이것이 어린아이가 수고한 결과입니까? 때로 우리는 이같이 엄청난 가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교만할 것 없습니다. 고맙게도 은혜스러운 하나님께서 내 목적, 내 작은 수고를 받으시고 엄청난 추수의 가을을 허락해주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감사해 마지못할 또다른 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포도나무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관상(觀賞)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강대에 놓인 화초들을 봅니다. 이것은 여기에 놓여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 푸른 잎만 보여주면 저 할 도리는 다한 것입니다. 어떤 나무는 관상나무요 어떤 나무는 재목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나무는 땔감으로도 쓰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라고 하지만 실은 포도넝쿨입니다. 재목으로 쓸 것도 못되고 땔감 구실도 못합니다. 포도나무의 존재 이유는 오직 포도라는 열매에 있습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그 가지는 찍어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한번 새겨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포도열매는 본디 포도나무에 맺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가지에 맺힙니다. 그러나 이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마다 좋은 일을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선한 일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다 헛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결국은 이렇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고자 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당연히 좋은 열매가 맺히게 마련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문제는 나무 자체입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잘 아는 친구 목사님 한 분은 목회생활을 퍽 잘하던 분인데 도중에 어쩌다 좀 잘못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소위 사회주의적 기독교를 주장하면서 오해도 받고 고생도 많이 하더니 지금은 목회도 못하는 채 여러 모로 어려운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만났을 때, 제게 깊은 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분명 줄을 잘못 탄 것 같습니다. 책을 잘못 읽은 것 같습니다.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책을 보고 연구한 나머지 내 일생은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회개는 왕복거리를 필요로 합니다. 십리 길을 갔으면 십리 길을 돌아와야 합니다. 그 답답한 사정을 눈물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저는 그분의 손을 맞잡은 채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지능이다 능력이다 기술이다 학식이다 하는 것 다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다던가 사람을 채용한다던가 하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도 보면 똑똑한 사람, 인물 잘난 사람, 건강한 사람을 찾고 학벌을 찾고 취미를 따지고 해봅니다마는 여러분, 나이 지긋해서 마지막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못되면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덜 되었는데 머리가 좋으면 겁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못되었는데 돈까지 벌면 더욱 맹랑해집니다. 간혹 주차장에서 자가용 운전기사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네가 모시고 다니는 주인 욕하는 것을 얻어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다 몇 푼 벌었다고 뒷자리에 푹 파묻혀 폼 잡고 앉아서는 이래라 저래라, 이놈 저놈 하는 꼴 보면 참 더러워서……" 그밖에도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사람이 되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어느 때에고 자연히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가지에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좋은 나무에 붙어야 좋은 가지가 됩니다. 나쁜 나무에 붙으면 나쁜 가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가 일본 후쿠오카에 가서 재일본(在日本) 교역자 수양회를 인도하느라고 일주일 동안 있어봤습니다. 한가한 저녁시간에 텔레비전을 틀어봤더니 일주일 내내 다른 내용은 안나오고 한가지만 나오므로 마지막에는 짜증이 났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너무도 심각했기에 그랬습니다. 26세의 청년이 체포되었는데 그 죄목이 끔찍했습니다. 이 청년은 1년 반에 걸쳐 유치원에 다니는 예쁜 어린이들만 골라 하나씩하나씩 유괴해다가 난도질을 해서 토막내고는 상자에 넣어서 아이들의 부모에게 소포로 부쳤습니다. 그런 짓을 네 차례나 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경찰이 법석 떠는 것을 몰래 지켜보면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연스레 전화까지 해서 약을 올리고 우롱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꼬리가 길어서 잡히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텔레비전에서는 일주일 내내 이 문제를 다룹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일본이 어디로 가는 거냐?' 이러쿵저러쿵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마는 요점은 간단했습니다. 그 청년의 방에서 음란과 폭력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무려 2천 개나 발견되었습니다. 이 내성적인 청년은 집구석에 앉아서 내내 이런 것만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청년이 어떤 나무에 붙어 있었습니까?

나뭇가지가 어디에 붙어 있느냐, 운명은 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묻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이렇게 문자대로 간증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게서 예수님을 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는 그것이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느껴집니까? 여러분은 교양으로 삽니까, 인격으로 삽니까? 내 지식으로 삽니까, 내 의지로 삽니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결단코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진실한 간증이 이래야 합니다. 내가 누구한테 속해 있느냐, 어떤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느냐, 이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저 유명한 간증을 합니다. '나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원하는 일은 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일만 자꾸 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내 안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아직도 내 속에 회개하지 않고 뿌리뽑지 못한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런고로 이 악을 제하여야 한다. 나 자신은 믿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나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대할 것이 못된다. 그대로 쳐서 복종케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 한다'---나라는 인격, 아무짝에도 쓸 것이 못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악한 열매만 맺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욕심까지도 다 십자가에 못박고 작은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날 때에만 참인간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유기적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명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가지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버리고 맙니다. 물론 열매도 없습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교회학교 선생님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 그랬더니 냉큼 "그러면 우리 꼬마들은 가지 끝에 있는 눈입니다"하고 대꾸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이처럼 누구나 다같이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못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자유가 있고 자율성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똑같이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가지가 있고 못 맺는 가지가 있습니다. 많이 맺는 가지가 있고 적게 맺는 가지가 있습니다.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다시 한번 정리해봅니다. 간단합니다.

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 어떤 다방 마담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다방 마담으로 지냈고 지금도 다방 마담입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잘 나옵니다. 퍽 기특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 믿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어떻게 그토록 교회에 열심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간단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한 주일이라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그 동안을 울적해서 살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또다시 실수를 하고 맙니다." 맞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 나오고, 어떤 분들은 한 달에 한 번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모자라서 매일 나옵니다. 주일만 나오는 게 안되어서 중간에 하루 더, 수요일 저녁에도 나옵니다. 이렇게 자주 말씀과 가까이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가 나대로 설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사로잡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할 나의 속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들어가면 공산당이 됩니다. 못된 소리만 듣고 못된 노래만 듣고, 못된 것만 속에 가득차면 그 인격에 맺는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침내 폭력과 허무와 절망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맺어야 합니다. 질적으로 좋은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은 열매를 맺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그 가지를 깨끗케 하십니다.

더 생산적인 가지를 만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때에 큰 일을 맡기십니다. 작은 열매라도 바로 맺어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폭력과 반항과 불신, 허무와 절망,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말했습니다. 현대는 허무주의라고 하는 열매 없는 나무에 매달려서 진리의 열매를 구하고 있다고요. 사실입니다. 허무주의와 절망, 이것에 매달려 있으면서 돈번다고 수가 나던가요? 출세했다고 무엇이 되던가요? 결국은 절망과 멸망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바로 붙어 있을 때에, 그로부터 진액을 받을 때에야 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 탬플 대학의 창시자인 러셀 코월 박사가 대전 말기에 미국의 백만장자를 비롯, 성공한 사람들 4,043명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천여 명중에서 69명만이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그 대부분이 공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첫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는 그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다같이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왜 원치 않는 엉뚱한 열매만 맺어나가는 것입니까? 이 사회는 어찌하여 이대로 가는 것입니까? 악한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선한 열매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바라지 말고, 요행을 바라지도 말 것입니다. 좋은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좋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과 진실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기대 이상으로 맺게 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 포도나무 가지가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위하여 그 가지를 깨끗케 하십니다.  

열매맺는 생활의 비결(요한복음 15장 1절~8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유의 말씀 문을 여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로 시작되는 이 비유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원수 곧 악마가 뿌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좋은 씨앗이 변질되어서 가라지가 되었구나" "그 좋은 씨앗이 어쩌다가 병들어서 가라지가 되었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난 것은 다른 종자가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평범하고 당연한 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는 당연한 이치를 부정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아도 '내가 지금 놓인 처지, 내 인격, 내 행위 이대로가 심은 대로 거두어진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누구를 원망하겠으며, 누군들 불평하겠습니까? 불평과 원망으로 차 있는 것은 뿌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간단한 이치를 부정해서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가을은 축복이자 심판입니다. 부지런히 일한 사람에게는 참 아름답고 흐뭇한 계절입니다 마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참 후회스럽고 답답한 계절입니다. 좋은 씨앗을 적기에 뿌려놓은 사람에게는 이 가을이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마는 어쩌다가 나쁜 씨앗, 좋지 못한 종자를 뿌려놓은 사람은 가을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뿌려놓은 씨앗을 추수하면서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 이 공정한 심판 앞에 엄숙히 서봅시다. 우리의 마음이 과연 착한 농부처럼 흐뭇하고 즐거운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모르게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지향하는 열매, 우리 인간이 지향하는 좋은 열매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대로 봅시다. 좋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나아가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 포도나무를 깨끗케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구하는 대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형통하는 인격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여 성공적인 인격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인격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한 일 년 지내면서 무엇을 생각해보았습니까? 내 신앙과 내 경건과 내 순례의 길, 내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 어떤 열매가 맺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낍니까? 생산적 인격이 되었습니까? 내가 알게 모르게 더 아름답고 선한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경험을 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가을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성공이란 세 가지 차원에서 옵니다. 첫째는 목적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목적 자체의 성공입니다. 바른 목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성공입니다. 내가 한번 세웠던 목적을 뒤늦게 후회해야 하고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가 실패입니다. 좋은 목적, 영원한 가치를 지닌 목적을 세워놓고 초지일관 후회 없이 평생을 외길로 산다면 성공입니다. 그러나 목적을 자꾸 바꾸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실패한 사람입니다. 좋은 목적을 설정한다면 그 자체가 성공입니다.

두 번째로 과정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성공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후회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학생으로 말한다면 유감없이 열심으로 공부합니다.

성적이야 어떻게 되건, 상급학교에 입학을 하든 못하든 그것은 지레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최선을 다해 공부할 뿐입니다.

성적이 나쁜 것은 죄가 아닙니다. 공부를 게을리한 것이 죄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감없습니다. 내 길이 어떻게 열리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 수단과 그 방법에서 내게 주어진 최선과 충성을 다하고 진실하게 임했다고 하면 결과야 어떻게 되었건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과정 자체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목적과 이에 따르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보면,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은사로 주시는 결과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열매입니다. 아시는 대로 열매는 때로 내가 수고한 것보다 훨씬 클 때도 많습니다. 나딴에는 수고를 많이 했는데도 열매가 시원치 않을 때도 있는가 하면 내 수고는 작은데 열매는 엄청나게 클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것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요. 이것이 어린아이가 수고한 결과입니까? 때로 우리는 이같이 엄청난 가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교만할 것 없습니다. 고맙게도 은혜스러운 하나님께서 내 목적, 내 작은 수고를 받으시고 엄청난 추수의 가을을 허락해주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감사해 마지못할 또다른 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포도나무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관상(觀賞)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강대에 놓인 화초들을 봅니다. 이것은 여기에 놓여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대로 푸른 잎만 보여주면 저 할 도리는 다한 것입니다. 어떤 나무는 관상나무요 어떤 나무는 재목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나무는 땔감으로도 쓰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라고 하지만 실은 포도넝쿨입니다. 재목으로 쓸 것도 못되고 땔감 구실도 못합니다. 포도나무의 존재 이유는 오직 포도라는 열매에 있습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그 가지는 찍어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한번 새겨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포도열매는 본디 포도나무에 맺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가지에 맺힙니다. 그러나 이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마다 좋은 일을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선한 일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러나 다 헛된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결국은 이렇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고자 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당연히 좋은 열매가 맺히게 마련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문제는 나무 자체입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잘 아는 친구 목사님 한 분은 목회생활을 퍽 잘하던 분인데 도중에 어쩌다 좀 잘못되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소위 사회주의적 기독교를 주장하면서 오해도 받고 고생도 많이 하더니 지금은 목회도 못하는 채 여러 모로 어려운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만났을 때, 제게 깊은 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분명 줄을 잘못 탄 것 같습니다. 책을 잘못 읽은 것 같습니다.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책을 보고 연구한 나머지 내 일생은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회개는 왕복거리를 필요로 합니다. 십리 길을 갔으면 십리 길을 돌아와야 합니다. 그 답답한 사정을 눈물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저는 그분의 손을 맞잡은 채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지능이다 능력이다 기술이다 학식이다 하는 것 다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다던가 사람을 채용한다던가 하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도 보면 똑똑한 사람, 인물 잘난 사람, 건강한 사람을 찾고 학벌을 찾고 취미를 따지고 해봅니다마는 여러분, 나이 지긋해서 마지막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못되면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덜 되었는데 머리가 좋으면 겁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못되었는데 돈까지 벌면 더욱 맹랑해집니다. 간혹 주차장에서 자가용 운전기사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네가 모시고 다니는 주인 욕하는 것을 얻어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쩌다 몇 푼 벌었다고 뒷자리에 푹 파묻혀 폼 잡고 앉아서는 이래라 저래라, 이놈 저놈 하는 꼴 보면 참 더러워서……" 그밖에도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사람이 되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어느 때에고 자연히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가지에 좋은 열매가 맺힙니다. 좋은 나무에 붙어야 좋은 가지가 됩니다. 나쁜 나무에 붙으면 나쁜 가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가 일본 후쿠오카에 가서 재일본(在日本) 교역자 수양회를 인도하느라고 일주일 동안 있어봤습니다. 한가한 저녁시간에 텔레비전을 틀어봤더니 일주일 내내 다른 내용은 안나오고 한가지만 나오므로 마지막에는 짜증이 났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너무도 심각했기에 그랬습니다. 26세의 청년이 체포되었는데 그 죄목이 끔찍했습니다. 이 청년은 1년 반에 걸쳐 유치원에 다니는 예쁜 어린이들만 골라 하나씩하나씩 유괴해다가 난도질을 해서 토막내고는 상자에 넣어서 아이들의 부모에게 소포로 부쳤습니다. 그런 짓을 네 차례나 한 것입니다. 그때마다 경찰이 법석 떠는 것을 몰래 지켜보면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연스레 전화까지 해서 약을 올리고 우롱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꼬리가 길어서 잡히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텔레비전에서는 일주일 내내 이 문제를 다룹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일본이 어디로 가는 거냐?' 이러쿵저러쿵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마는 요점은 간단했습니다. 그 청년의 방에서 음란과 폭력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무려 2천 개나 발견되었습니다. 이 내성적인 청년은 집구석에 앉아서 내내 이런 것만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청년이 어떤 나무에 붙어 있었습니까?

나뭇가지가 어디에 붙어 있느냐, 운명은 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묻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이렇게 문자대로 간증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게서 예수님을 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는 그것이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느껴집니까? 여러분은 교양으로 삽니까, 인격으로 삽니까? 내 지식으로 삽니까, 내 의지로 삽니까?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결단코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진실한 간증이 이래야 합니다. 내가 누구한테 속해 있느냐, 어떤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느냐, 이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저 유명한 간증을 합니다. '나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원하는 일은 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일만 자꾸 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내 안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아직도 내 속에 회개하지 않고 뿌리뽑지 못한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런고로 이 악을 제하여야 한다. 나 자신은 믿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나라는 것에 대해서는 기대할 것이 못된다. 그대로 쳐서 복종케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려야 한다'---나라는 인격, 아무짝에도 쓸 것이 못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악한 열매만 맺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욕심까지도 다 십자가에 못박고 작은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날 때에만 참인간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유기적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명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가지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말라버리고 맙니다. 물론 열매도 없습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교회학교 선생님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 그랬더니 냉큼 "그러면 우리 꼬마들은 가지 끝에 있는 눈입니다"하고 대꾸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이처럼 누구나 다같이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못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자유가 있고 자율성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똑같이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가지가 있고 못 맺는 가지가 있습니다. 많이 맺는 가지가 있고 적게 맺는 가지가 있습니다.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는 비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다시 한번 정리해봅니다. 간단합니다.

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있을 때, 어떤 다방 마담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다방 마담으로 지냈고 지금도 다방 마담입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잘 나옵니다. 퍽 기특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 믿기 어려운 여건인데도 어떻게 그토록 교회에 열심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간단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한 주일이라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그 동안을 울적해서 살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또다시 실수를 하고 맙니다." 맞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 나오고, 어떤 분들은 한 달에 한 번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모자라서 매일 나옵니다. 주일만 나오는 게 안되어서 중간에 하루 더, 수요일 저녁에도 나옵니다. 이렇게 자주 말씀과 가까이하지 않으면 절대로 내가 나대로 설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사로잡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할 나의 속에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들어가면 공산당이 됩니다. 못된 소리만 듣고 못된 노래만 듣고, 못된 것만 속에 가득차면 그 인격에 맺는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침내 폭력과 허무와 절망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맺어야 합니다. 질적으로 좋은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은 열매를 맺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그 가지를 깨끗케 하십니다.

더 생산적인 가지를 만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때에 큰 일을 맡기십니다. 작은 열매라도 바로 맺어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폭력과 반항과 불신, 허무와 절망,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말했습니다. 현대는 허무주의라고 하는 열매 없는 나무에 매달려서 진리의 열매를 구하고 있다고요. 사실입니다. 허무주의와 절망, 이것에 매달려 있으면서 돈번다고 수가 나던가요? 출세했다고 무엇이 되던가요? 결국은 절망과 멸망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바로 붙어 있을 때에, 그로부터 진액을 받을 때에야 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미국 탬플 대학의 창시자인 러셀 코월 박사가 대전 말기에 미국의 백만장자를 비롯, 성공한 사람들 4,043명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천여 명중에서 69명만이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그 대부분이 공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첫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는 그 목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다같이 자신의 무능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왜 원치 않는 엉뚱한 열매만 맺어나가는 것입니까? 이 사회는 어찌하여 이대로 가는 것입니까? 악한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선한 열매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바라지 말고, 요행을 바라지도 말 것입니다. 좋은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좋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과 진실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기대 이상으로 맺게 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 포도나무 가지가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좋은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위하여 그 가지를 깨끗케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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