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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마태복음 7장 7절~12절)

by 【고동엽】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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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마태복음 7장 7절~12절)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날마다 성공을 위해서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애쓰고 그렇게도 바라는 성공은 그리 쉽사리 얻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허무로 끝나기도 합니다. 스스로 성공했노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너나할것없이 거의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모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잡았다 싶으면 그 순간에 오히려 허망(虛妄)을 느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무엇이 성공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도 그렇고, 오늘도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느냐? 내 생의 목적을 결정해 주는 내 확실한 목표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이 목적도 목표도 없이 무작정 뛴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재삼재사(再三再四)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 헤아림 없이 무작정 뛰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는 잘못 왔구나, 잘못 생각했구나,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아도 좋고 영원히 궤도 수정하지 않아도 좋을 확고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목적은 추상적인 것이고 목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이 목적과 목표에 의미가 있고 또 그 의미에 따르는 결론이 있는 것입니다.

 

출발에 앞서 목적을 물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3년 동안에 되어진 사건들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출발하실 때부터 십자가가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하여 예고를 하셨고,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셨고, 십자가가 가까웠을 때에는 영광받을 때가 왔노라며 기뻐하기도 하셨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년을 함께 지냈는데도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벌벌 떨었고, 근심했으며,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는 다 흩어지고 절망했습니다. 지난 일은 다 꿈으로 돌리고 갈릴리로 돌아가자며 실패의 낙향을 하게 됩니다.

한쪽과 다른 한쪽이 이토록 대조적이었습니다. 왜 똑같은 사건에서 한쪽은 성공을 하여 다 이루었다며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한쪽은 실패를 맛보아야 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달랐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묻고 확고히 해 두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물어야 할 것은 거듭거듭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어디로 가는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는 무엇이 성공인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성공을 위해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두 번째 문제는 성공의 방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목표는 동(東)에 두고, 가기는 서(西)로 간대서야 성공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동쪽에 있는데 육신이 서쪽으로 간다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 하고 예수님께서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목적에 합당한 길을 가야 합니다. 공부를 해서 성공하겠다는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업이 목표라면 사업에 합당한 투자와 근면한 생활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경우에나 목표를 향한 합당한 방법, 합당한 길을 물어야 하고 또한 거듭거듭 물어 가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세 번째 문제는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생각도 있고 뜻도 있는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헛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어떤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의 회사에서, 그것도 아침 7시에 만나기로 해서 찾아갔었습니다. "이렇게 일찍 출근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가까운 친구

들은 5시에 출근합니다." 하고 대답해요. 그렇게 출근해서 일 좀 보고 식사를 하고, 그리고 하루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는 감동을 했습니다. 어떤 권위 있는 통계 자료에 의하면, 성공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3시간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잠잘 것 다 자고는 성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양심적이라 할 만합니다. 게으름 피울 것 다 피우고도 무엇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어딘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보통 정신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저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합니다. "성적이 나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이 잘못이다. 남들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얼마나 더 정성을 쏟았느냐, 얼마나 성실하게 집중했느냐---그것만 묻자!" 입시에 합격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합격을 위하여 과연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성공을 시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 1천만 원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막상 1천만 원을 가지게 되니까 이것을 성공으로 여기지 않고 다시 또 1억 원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1억 원이 생기면 또 10억 원을 바라겠지요. 이런 끝없는 욕심으로는 한 번도 성공했다는 만족감을 가져보지 못합니다. 성공의 이정표(里程標)를 계속 옮기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성공을 시인할 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노력도 하고 수고도 합니다. 목적도 좋고 방법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란 별도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 인간의 노력과 수고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입니다. 농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비가 와야 한다든지 햇빛이 나야 한다든지 적당한 바람이 불어 주어야 한다든지 해서 갖은 조건이 다 맞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일년 내내 일껏 수고했다가도 추수철에 가서 행여 우박이라도 한번 내렸다 하면 헛농사가 되고 마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해야 한다는 마음, 곧 신앙적 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하나님의 축복이 도처에 있고 모든 사람에게 있다 하더라도 나는 예외다. 나는 사람이 워낙 못돼먹었으니까. 나는 축복받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 하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각성을 해야 합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 믿음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복에 대해서 좀더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고, 복이 의미하는 신비적 여유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실패가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실패로 보여도 실패라고 단정하지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가 곧 더욱 큰 축복으로 향하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실패했다고 낙담했는데, 얼마 후에 보니까 그것이 바로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를 내 생각대로 속단해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에 축복의 신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있음을 항상 겸손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모세가 그렇고, 야곱이 그렇고, 이삭이 그렇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때로 역경에 처할 때에는 만사가 끝나는가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뒤에 가서 보면 그 역경이 바로 복이었고, 복의 과정이었으며, 축복을 받게 될 고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간증(干證)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막막해 보이는 실패와 역경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건을 늘 겸손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로 신비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일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이 야고보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기도해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욕심으로 잘못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일에 실패했을 때에 보면, 사람들은 흔히 자본이 부족했다든가 지식이 없었다든가 경험이 부족했다는 식으로 후회를 합니다. 또한 주구 때문에 실패했다는 식으로 남을 핑계대는 일도 있고, 조금 겸손한 사람이다 싶으면 '다 내 탓이지' 하고 맙니다. 기도를 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참되게 뉘우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든 실패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는 데에 있음을 다시 한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없이 결정했고, 기도 없이 대답했고, 기도 없이 판단했고, 기도 없이 절망했기 때문에 실패에 빠진 것입니다. 기도가 없고, 기도가 끊어지고, 기도가 잘못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하고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실패자가 된 것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잤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 귀로 흘려 들었기 때문에 영락없이 시험에 걸려 실패했다는 것을 베드로는 뒤늦게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혜도 능력도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복잡하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생활을 평할 때, 그의 덕망있는 사회 생활이나 그의 남다른 정직함이나 그의 숱한 선행을 가지고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은 바로 기도 생활

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은 곧 기도 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서 그러한 모습을 봅니다. 그토록 많이 교훈하시고 그토록 많은 역사를 이루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가장 중요하게 하셨던 일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미명(未明)에 조용히 기도하시고, 슬플 때에 기도하시고, 기쁠 때에 기도하시고,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시고, 시험당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도 기도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도 기도하셨으며, 숨을 거두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권면하셨고, 기도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아가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을 듣는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듭니다. 이 때에 하시는 말씀---"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것도 밤새 기도하고 얻으신 응답이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응답을 받으셨기에 간사한 사람이 눈앞에서 위선의 모습을 보이는데도, 그리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능욕을 하는데도, 당신은 끝내 아무 말씀이 없고, 오히려 십자가 지우는 자들을 용서하시기까지 하면서 십자가에서 승리(성공)하시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돈이 굴러들어온다든지, 지위가 높아진다든지, 죽어가는 환자가 살아난다든 지 하는 돌발적인 일이 있어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기 쉽습니다마는 기도의 응답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가리켜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생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못 받았다고 불평합니다. 어떤 분은 일생 동안 계속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자기 뜻대로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고 나옵니다. 이렇게 경박해서는 안 됩니다. 깨끗이 비운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다. 얼마나 마음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그러므로, 못 받는 여러분도 답답하지만 주시지 않는 하나님은 더 괴롭답니다. 왜 안 주실까요? 주어서는 안 되겠으니까 안 주시는 것입니다. 달라는대로 주었다가는 사람 버리겠거든요. 얼마전에 제가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을 한 분 만났습니다. 그분이 미국땅에 처음 발을 디디었을 때에는 수중에 돈이 20불밖에 없어서 막막했답니다. 죽는 줄로만 알았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버젓이 성공을 했어요. 이런 경우, 그 때에 20불밖에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었음을 오늘에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알고보면 허다한 곡절들이 많겠습니다마는, 수중에 수천 불 수십만 불 쥐고 갔다가도 자신을 망치고 가정도 파괴되어 비참해 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분명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응답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이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식에게 꼭 필요한 것인데도 주기 싫어서 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주면 자식에게 해로운 줄 번연히 알면서도 조른다고 주는 어리석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위험한 칼을 가지고 놀면 울어도 빼앗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려 하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내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다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일찍이 상처(喪妻)를 하고 후취를 해서 살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후처로 들어온 이 부인은 칠팔 년 동안이나 전처의 자식들을 알뜰히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새어머니에게 한번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비상 수단을 썼습니다.

일용품이고 용돈이고 옷가지고 간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단속한 다음,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내어주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은 가령 양말을 갈아신어야 할 때면 슬그머니 겉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엄마, 양말." 하고 겨우 입을 열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때에야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소리가 그렇게도 힘이 들더냐? 칠팔 년이나 너희들을 키워 왔는데도 어머니 소리 듣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니?"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마음, 구하는 자세, 구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이 한마디의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찾으라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물 것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듯이,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그리스도를, 영생을 찾으라 하십니다. 끝없이 자기를 부정하여 끈기있게 탐구하는 자세로 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만나게 해주겠다, 만나 주겠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드리라 하십니다. 찾다가 "여기다, 여기가 분명하구나, 이 집이구나, 이 교회다, 여기에 있구나!" 하고 알았거든 열릴 때까지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는 줄 알았거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때까지 계속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나 때문에 닫힌 문, 용서하시고 열어 주실 때까지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죄, 나의 교만, 나의 거짓, 나의 위선 때문에 닫힌 문을 회개하며 두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깨끗한 마음으로 출발하고, 기도함으로 출발해서 진리를 찾는 자세로 헤매고 문 앞에 서서, 돌아온 탕자처럼 인내로 기다려 보십시다.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 다. 그 문이 열릴 때에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성공은 이미 허락되었습니다. 약속되었습니다. 문제는 두드리는 사람의 자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구하고, 찾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되면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을 때까지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문을 열고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평생 기도하고, 평생 탐구하고, 평생 인내와 겸손으로 두드려 보십시다. 성공의 비결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성경에서 원인을 찾으십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  

성공의 비결(마태복음 7장 7절~12절)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우리는 날마다 성공을 위해서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애쓰고 그렇게도 바라는 성공은 그리 쉽사리 얻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허무로 끝나기도 합니다. 스스로 성공했노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너나할것없이 거의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뿐입니다. 모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잡았다 싶으면 그 순간에 오히려 허망(虛妄)을 느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무엇이 성공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도 그렇고, 오늘도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느냐? 내 생의 목적을 결정해 주는 내 확실한 목표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이 목적도 목표도 없이 무작정 뛴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재삼재사(再三再四)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 헤아림 없이 무작정 뛰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는 잘못 왔구나, 잘못 생각했구나,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아도 좋고 영원히 궤도 수정하지 않아도 좋을 확고한 목적과 목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목적은 추상적인 것이고 목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이 목적과 목표에 의미가 있고 또 그 의미에 따르는 결론이 있는 것입니다.

 

출발에 앞서 목적을 물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3년 동안에 되어진 사건들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출발하실 때부터 십자가가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하여 예고를 하셨고,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셨고, 십자가가 가까웠을 때에는 영광받을 때가 왔노라며 기뻐하기도 하셨으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3년을 함께 지냈는데도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벌벌 떨었고, 근심했으며,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는 다 흩어지고 절망했습니다. 지난 일은 다 꿈으로 돌리고 갈릴리로 돌아가자며 실패의 낙향을 하게 됩니다.

한쪽과 다른 한쪽이 이토록 대조적이었습니다. 왜 똑같은 사건에서 한쪽은 성공을 하여 다 이루었다며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한쪽은 실패를 맛보아야 했느냐 하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달랐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묻고 확고히 해 두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물어야 할 것은 거듭거듭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어디로 가는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내게 있어서는 무엇이 성공인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성공을 위해서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두 번째 문제는 성공의 방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목표는 동(東)에 두고, 가기는 서(西)로 간대서야 성공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동쪽에 있는데 육신이 서쪽으로 간다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 하고 예수님께서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목적에 합당한 길을 가야 합니다. 공부를 해서 성공하겠다는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업이 목표라면 사업에 합당한 투자와 근면한 생활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경우에나 목표를 향한 합당한 방법, 합당한 길을 물어야 하고 또한 거듭거듭 물어 가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세 번째 문제는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생각도 있고 뜻도 있는데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헛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어떤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의 회사에서, 그것도 아침 7시에 만나기로 해서 찾아갔었습니다. "이렇게 일찍 출근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가까운 친구

들은 5시에 출근합니다." 하고 대답해요. 그렇게 출근해서 일 좀 보고 식사를 하고, 그리고 하루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는 감동을 했습니다. 어떤 권위 있는 통계 자료에 의하면, 성공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3시간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잠잘 것 다 자고는 성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양심적이라 할 만합니다. 게으름 피울 것 다 피우고도 무엇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어딘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성공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보통 정신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저는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합니다. "성적이 나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이 잘못이다. 남들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얼마나 더 정성을 쏟았느냐, 얼마나 성실하게 집중했느냐---그것만 묻자!" 입시에 합격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합격을 위하여 과연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성공을 시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 1천만 원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막상 1천만 원을 가지게 되니까 이것을 성공으로 여기지 않고 다시 또 1억 원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1억 원이 생기면 또 10억 원을 바라겠지요. 이런 끝없는 욕심으로는 한 번도 성공했다는 만족감을 가져보지 못합니다. 성공의 이정표(里程標)를 계속 옮기는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성공을 시인할 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하여 노력도 하고 수고도 합니다. 목적도 좋고 방법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란 별도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 인간의 노력과 수고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입니다. 농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비가 와야 한다든지 햇빛이 나야 한다든지 적당한 바람이 불어 주어야 한다든지 해서 갖은 조건이 다 맞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일년 내내 일껏 수고했다가도 추수철에 가서 행여 우박이라도 한번 내렸다 하면 헛농사가 되고 마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해야 한다는 마음, 곧 신앙적 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만한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간혹 '하나님의 축복이 도처에 있고 모든 사람에게 있다 하더라도 나는 예외다. 나는 사람이 워낙 못돼먹었으니까. 나는 축복받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 하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각성을 해야 합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 믿음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복에 대해서 좀더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고, 복이 의미하는 신비적 여유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실패가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실패로 보여도 실패라고 단정하지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가 곧 더욱 큰 축복으로 향하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실패했다고 낙담했는데, 얼마 후에 보니까 그것이 바로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를 내 생각대로 속단해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에 축복의 신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 있음을 항상 겸손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모세가 그렇고, 야곱이 그렇고, 이삭이 그렇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때로 역경에 처할 때에는 만사가 끝나는가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뒤에 가서 보면 그 역경이 바로 복이었고, 복의 과정이었으며, 축복을 받게 될 고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간증(干證)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막막해 보이는 실패와 역경일지라도 우리는 그 사건을 늘 겸손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로 신비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일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이 야고보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기도해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욕심으로 잘못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일에 실패했을 때에 보면, 사람들은 흔히 자본이 부족했다든가 지식이 없었다든가 경험이 부족했다는 식으로 후회를 합니다. 또한 주구 때문에 실패했다는 식으로 남을 핑계대는 일도 있고, 조금 겸손한 사람이다 싶으면 '다 내 탓이지' 하고 맙니다. 기도를 하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참되게 뉘우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든 실패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는 데에 있음을 다시 한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없이 결정했고, 기도 없이 대답했고, 기도 없이 판단했고, 기도 없이 절망했기 때문에 실패에 빠진 것입니다. 기도가 없고, 기도가 끊어지고, 기도가 잘못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하고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실패자가 된 것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잤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 귀로 흘려 들었기 때문에 영락없이 시험에 걸려 실패했다는 것을 베드로는 뒤늦게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혜도 능력도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신앙 생활이라는 것을 복잡하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생활을 평할 때, 그의 덕망있는 사회 생활이나 그의 남다른 정직함이나 그의 숱한 선행을 가지고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은 바로 기도 생활

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 생활은 곧 기도 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서 그러한 모습을 봅니다. 그토록 많이 교훈하시고 그토록 많은 역사를 이루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 가장 중요하게 하셨던 일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미명(未明)에 조용히 기도하시고, 슬플 때에 기도하시고, 기쁠 때에 기도하시고,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시고, 시험당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에도 기도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도 기도하셨으며, 숨을 거두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권면하셨고, 기도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아가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을 듣는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듭니다. 이 때에 하시는 말씀---"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것도 밤새 기도하고 얻으신 응답이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응답을 받으셨기에 간사한 사람이 눈앞에서 위선의 모습을 보이는데도, 그리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능욕을 하는데도, 당신은 끝내 아무 말씀이 없고, 오히려 십자가 지우는 자들을 용서하시기까지 하면서 십자가에서 승리(성공)하시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돈이 굴러들어온다든지, 지위가 높아진다든지, 죽어가는 환자가 살아난다든 지 하는 돌발적인 일이 있어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기 쉽습니다마는 기도의 응답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가리켜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생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못 받았다고 불평합니다. 어떤 분은 일생 동안 계속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자기 뜻대로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고 나옵니다. 이렇게 경박해서는 안 됩니다. 깨끗이 비운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다. 얼마나 마음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그러므로, 못 받는 여러분도 답답하지만 주시지 않는 하나님은 더 괴롭답니다. 왜 안 주실까요? 주어서는 안 되겠으니까 안 주시는 것입니다. 달라는대로 주었다가는 사람 버리겠거든요. 얼마전에 제가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을 한 분 만났습니다. 그분이 미국땅에 처음 발을 디디었을 때에는 수중에 돈이 20불밖에 없어서 막막했답니다. 죽는 줄로만 알았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버젓이 성공을 했어요. 이런 경우, 그 때에 20불밖에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었음을 오늘에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알고보면 허다한 곡절들이 많겠습니다마는, 수중에 수천 불 수십만 불 쥐고 갔다가도 자신을 망치고 가정도 파괴되어 비참해 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 분명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응답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사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이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식에게 꼭 필요한 것인데도 주기 싫어서 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주면 자식에게 해로운 줄 번연히 알면서도 조른다고 주는 어리석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위험한 칼을 가지고 놀면 울어도 빼앗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려 하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내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다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일찍이 상처(喪妻)를 하고 후취를 해서 살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후처로 들어온 이 부인은 칠팔 년 동안이나 전처의 자식들을 알뜰히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새어머니에게 한번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비상 수단을 썼습니다.

일용품이고 용돈이고 옷가지고 간에 자기 말고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단속한 다음,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기 전에는 절대로 내어주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은 가령 양말을 갈아신어야 할 때면 슬그머니 겉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엄마, 양말." 하고 겨우 입을 열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때에야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소리가 그렇게도 힘이 들더냐? 칠팔 년이나 너희들을 키워 왔는데도 어머니 소리 듣기가 왜 이렇게 힘이 드니?"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마음, 구하는 자세, 구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이 한마디의 고백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찾으라고 하십니다. 잃어버린 물 것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듯이,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그리스도를, 영생을 찾으라 하십니다. 끝없이 자기를 부정하여 끈기있게 탐구하는 자세로 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만나게 해주겠다, 만나 주겠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변화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두드리라 하십니다. 찾다가 "여기다, 여기가 분명하구나, 이 집이구나, 이 교회다, 여기에 있구나!" 하고 알았거든 열릴 때까지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는 줄 알았거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때까지 계속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나 때문에 닫힌 문, 용서하시고 열어 주실 때까지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죄, 나의 교만, 나의 거짓, 나의 위선 때문에 닫힌 문을 회개하며 두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깨끗한 마음으로 출발하고, 기도함으로 출발해서 진리를 찾는 자세로 헤매고 문 앞에 서서, 돌아온 탕자처럼 인내로 기다려 보십시다.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 다. 그 문이 열릴 때에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성공은 이미 허락되었습니다. 약속되었습니다. 문제는 두드리는 사람의 자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구하고, 찾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되면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을 때까지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문을 열고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평생 기도하고, 평생 탐구하고, 평생 인내와 겸손으로 두드려 보십시다. 성공의 비결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성경에서 원인을 찾으십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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