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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되려 함이라! (막 13:9-13)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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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되려 함이라! (막 13:9-13)

 

우리가 종종 유럽을 여행하게 되 면, 많은 기독교회의 유적들을 보게 됩니다. 나름대로 베드
로 성당에서 부터 시작해서 많은 기독교 문화의 흔적들을 보게 됩니다만은 제가 개 인적으
로 생각할 때에 가장 중요한 유적은 '카타쿰'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타쿰' 이라고 하는 동
굴, 많은 기 독교인들이 들어가서 거기서 일평생 을 살고,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던 그 카타
쿰을 제일 소중하게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로마에 처 음 갔을 때에 저를 안내해 준
분은 아주 젊은 청년 집사님이었는데, 그 는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로마에
유학을 갔다가 '관광 과'라고 하는 공부를 하면서 많은 유적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됐고 많은 안내자들을 많은 유적지 로 안내하던 중에 이러한 내용 저러 한 사실들을 그대로
역사적으로 설 명을 해 갔지마는 카타쿰이라고 하 는 그 굴 앞에 서서는 할 말이 없더 랍니
다. 자기는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도대체 이것은 신 앙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거 예요. 그런 그 카타쿰 앞에서
"이 굴은……"
하고 설명하다가 결국은 본인이 예수를 믿게 되고 신실한 청 년으로 많은 전도사업에 봉사
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카 타쿰이라는 것은 그 연장 길이만 해 도 다 연결한
다면 수백만 ㎞가 된다 고 합니다. 숫자도 수십만개가 됩 니다. 응외암을 땅 속으로 파고 들
어가서 갱도를 만들고 갱도의 벽에 수평으로 묘혈을 팠는데 대개가 직 사각형으로 되어 있
고 벽암을 만들 고 그 크기도 다양합니다. 로마에 만도 육십개의 카타쿰이 있습니다. 이 카
타쿰은 소리없는 언어요 복음 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말없이 말해주
는 증거입 니다. 그 속에 있는 그림, 그 속에 있는 상징물들 그 많은 해골들, 여 기서 우리
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카타
쿰' 하고 옛날 공부하면서 책을 읽을 때 는, 우리 고향에 동굴이 많거든요. 그래서 '아마 바
위로 된 동굴이 있 어서 그 동굴 속에 들어가서 신앙인 들이 아마 핍박을 피했나보다' 하고
생각을 했댔습니다. 내가 카타쿰을 보고 놀란 것은 그건 인공적으로 만 든 거예요. 산도 아
니요 평지를 파 고 들어간 거예요. 이걸 볼 때 깜 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 십시오.
옛날엔 전등불도 없었습니 다. 도대체 이 깊은 굴을 어떻게 파는 거예요. 무슨 등불을 들고
이 렇게 파고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 까? 그 속에서 깜깜한데서 불 켜 봤댔자 그 호롱불이
라는 게 대단한 겁니까? 2000년 전에, 그 깊은 굴 속에서 빛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
고 거기서 죽어갔습니다. 기쁘 게,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참 놀라 운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
다. 이것 은 중부 이탈리아에 키우시 혹은 볼 세나 나폴리 그리고 북 아프리카까 지 구라파
전역에 이 카타쿰이 있습 니다. 이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지나간 다음에는, 기독교인들이
이 카타쿰을 성지화하고 순례의 중심이 되고 그리고 신앙의 중심, 신앙의 고향이 된 것입니
다.
여러분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카타 쿰 에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이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 복음이 있고 진리가 있고 말해주는 증거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증거,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특별히 사도행 전에 나타난 사도행전적 기독교인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
다. 기독교가 무엇이며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이 었습니까? 예수는 단순한, 배우는 그런 대
상자가 아니에요. 배움의 대상이 아니고, 예수는 따르는 분이 었어요. 만일에 교육을 말한다
면 삼년밖에 일하지 아니하고 설흔세살 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있습 니까? 삼년밖에. 그런고로 예수를 그의 교훈이라든가 그의 가르침 속
에서 이해하려고 해선 안됩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 부활! 여기서부터 이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어도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세상적 인 복과는
상관없습니다. 성공하고 잘살고 병났고 출세하고, 이런 이야 기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
다. 흔히 말하는 기복 적 신앙하고는 전 혀 관계가 없는 것이 초대교회 사람 들의 믿음입니
다.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이렇 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 하는 '나를 좇으라'는 말은 추상적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적입 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십 자가의 종교라는 말은 추상적인 얘 기가
아닙니다. 참으로 역사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는 말씀도 실제 상황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십자가 를
져야 교인이요, 십가가에 죽음으 로써, 죽어야 교인이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
기에 기독 교인의 뿌리가 있습니다. 핵심이 있습니다. 그래 예수를 믿는다 하 는 것은 그 십
자가가 무엇을 의미하 는지를 알아야 되고, 그것이 말하는 제사적 의미를 알아야 되고 그것
이 말하는 속죄적 역사를 알아야 되고 창조적 능력을 믿어야 그래서 그 능 력의 증인으로,
증거로 살아갈 때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특징은 뚜렷하 게 몇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 원적인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고 통이요 죽음입니다. 성경복음서가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계속적으로 말 해주고
웅변적으로 말해주려고 하는 핵심이 뭐냐하면 십자가는 우연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피치 못
해서 도 망 다니다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죽 은 그런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이죠.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고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고 처음부터 선택적인 것이었다, 자원적이었다, 그게 특
징 이에요. 그것이 메시지의 전부요. 그래서 예수는 누가복음 9장에도 보 면
"예루살렘을 향하야 올라가시기 로 굳게 결심하시고", 결심하고 이 번 유월절에 올라가서
죽으실 거라 고 알고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 하여 올라갑니다. 제자들에게 마지 막으로
교훈하십니다. 그리고 예루 살렘에 올라가서 그 당당한 당시의 그 무서운 종교가들과 정면
충돌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하면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돌아가
시게 됩니다. 그런 고로 이 고난은 자원적이고 자발적 이고 결코 나약함에서 온 것이 아니
고 피치 못해서 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한가지는 십자가는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 분명히 십자가에 죽었는데
이것이 실패가 아니고 승리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 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본 래적으로 바랬던 것이기에 승리로 그렇게 끝
나게 됩니다. 또 뿐만 아 니라 이것은 만백성을 위한 것이요, 자기를 위한 게 아니라 만백성
의 죄 를 위한 것이고 특별히 대신 죽으셨 다는 거예요. 대신 고난 당하셨다 는 바로 거기
에 십자가의 의미가 있 습니다. 나를 위하여 내 죄를 위하 여 내가 받을 저주를 받으시고
내가 죽을 대신에 그가 죽으십니다. 대 신 속죄적 의미! 거기에 십자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제사적 의미, 그리고 특별히 귀중한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
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폭풍이 몰아치고 태 풍이 불고 지진이 나고
뭐 그런 겁 니까? 아니 전쟁이 나고? 하나님 의 능력은 그렇게 파괴적으로 비인 격적으로
나타나는데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 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을 구원
하 는 일에 나타납니다. 거기에 능력 이 있고 나를 구원하시는데 십자가 에 하나님의 능력
이 계시됩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고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엄 청난 창조적 능력이 나
타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복음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
력이요 하나님의 지혜 요, 최상의 지혜요 여기에 신비, 미 스테리가 거기에 숨어있는 것입니
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런 의 미에서 계시적 사건입니다. 속죄하 심과 그의 구원과 그
리고 우리 모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영생의 약속의 표적입니다. 십자가 속에
서 우리는 나 자신을 알고 내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얼 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만큼 나는 소중합니다. 거기 십 자가 안에
서 내 생의 의미, 내 생의 가치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런고로 이 십자가는 말씀이며
십자 가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그 말씀에 대한 증거적 의미가 있습 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그 십자가의 능력을 증명하는 증거로서 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증거 라고 하
는 말을 헬라 말로 '마루트 리아'라고 합니다. 제가 이 헬라어 를 쓰는 이유는 여러분이 영
어를 잘 아십니다. 영어에 '마터(Martyr)'라 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Martyr라 고 하는 말은
순교자라는 뜻이 입니 다. 마털덤(Martyrdom), 순교자입 니다. 그 마터라는 말의 어원이 마
루티리아 입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직역을 하면은 순교자가 증거요 증 거가 순교요, 이걸 알
아야 합니다. 증거가 곧 순교다!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그래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
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 리라'하고 말씀합니다. 너
희가 내 증거가 되겠다. 그리고 주께서 부 탁하신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을 가르치
라, 또 지켜 행하게 하 라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지만은 가 장 큰 교훈은 마지막 교훈은 '증
거 하라'입니다. '증인이 되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훈령 중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언하십니다.
"너희는 공회에 끌 려가겠다."
이 제자들보고 하는 말 이요, 공회에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 겠다. 매질을 당하겠다. 내 이름
을 인하야 미움을 받게 되겠다. 왜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증거입 니다. 예수가 핍
박받은 세상에서 핍박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 니다. 예수가 배척받은 세상에서 환영
받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 다. 악한 세대로부터 미움
받고 핍 박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악인으로 부터 칭찬받는 사람은 악인입니다. 구부러진 세
대에서 환영받는 사람은 그 사람은 세상과 타협한 사람입니 다.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를 위
하 여 핍박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 이 바로 그리스도인 된 증거입니다. 증거라는 말은 사
건과 사실을 말하 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여기 에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믿거나 말거
나 알거나 모르거나 사실은 사 실인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것이 사실화되고 사건화 되어
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보세요. 어느 집에 불이 났 다고 합시다. 모두가 불이 났다고 피신을 하지만 불이 났다
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끝까 지 안 믿으면 여러분 불에 타 죽어 도 그 사
람에게는 불이 나지 않은 겁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내게 병이 있어요 병이 있다는 걸 믿
으면 서부터 치료의 길이 있습니다. 내 병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은 그 사람 은 병으로 죽어
도 병은 그 사람에게 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사건과 이 사실과 사
실에 대한 사건화는 같은 게 아니고 사실 사건과 신앙 사건은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러면 내
가 믿어서 내 게 그 사실이 사실로 다가올 때, 사 실이 될 때 가서 구원의 역사는 이 루어
집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 럴려면은 믿어야 하고 믿을려면 어 때야 되겠습니까?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요게 문제올시다.
거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는 걸 봐 도 그래요. 이 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해요. 그런
데 이 여자 가 믿질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 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겁 니다. 그
래서 똑똑한 여자가 노처 녀 될 가능성이 많아요. 안 믿거든 요. 누가 뭐래도 안 믿거든요.
"세 상 누굴 믿어?"
그러면 그냥 늙어 야지요. 그럼
"믿는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믿어야 그 사랑이 내 게 사랑되는 것이에요. 안 믿는 동 안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모독일 수도 있고 욕이 될 수도 있 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진실을 믿고 진리를 믿고 십자가의 역사적 사실을 믿는 그것, 믿게 하려고 하면
은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 증거 상황이 꼭 필 요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증인이 어떤 때 증인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올시다. 참 진리는 고통 중에서 진리됨이 드러
납니다. 그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 분석학자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 다. 그의
"창조적 고통"이라고 하 는 책에서 많은 말로 하는 중에 이 렇게 말합니다.
"위대한 용기는 가 장 위급한 시련기에 생기는 것이다"
필요한 용기는 오직 시련 그 자체와 함께 생기는 것이다. 여러분 참 사 랑, 참 진리 그것은
꼭 고난 중에 나타납니다. 어려운 핍박과 고난 중에 그 참됨이 나타납니다. 여러 분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아무리 사랑한다고 좇아다녀도 소용없어요. 고난 중에 그 참 사랑이라고 하
는 것이 드러납니다. 나타납니다. 이 걸 알아야 합니다. 참은 이 고난 중에 드러나게 마련이
에요.
자 그런데 또 한가지 있는 것은 고난 중에 정체가 드러날 뿐만 아니 라 고난 중에만 대화가
이루어집니 다. 평안한 때는 대화가 되지 않습 니다. 우리가 뭐 이렇게 좋은 음식 차려놓고
축하 파티를 하면서 축배 를 들어 봤댔자 거기서 주고받는 말 은 말짱 거짓말이에요. 진실
한 대 화는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고난 중에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많은 우리 교인들 병원
에 입원해 있는걸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은 지 금 아주 중환자로 선언을 받고 암 환자
가 되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아내가 그 옆에 앉았습니다. 저들 이 주고받는 말은 많지 않
습니다. 그러나 본인들의 입을 통해서도 말 을 듣고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모 처럼 데이트
한 번 하는 겁니다. 그 동안에 이런 저러한 얘기 많이 했지만은 다 거짓말이에요.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을 앞둔 남편하고 이야기하는 그 아내와의 대화 속에 서 비로소 진실된 오랜
만의 사랑이 야기를 할 수 있어요.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은 제가 6·25 전쟁 때 군대에 나가 있었습 니다. 거기서 말입니다
좀 작전에 좀 문제가 있어서 여러 사람이 실수 했습니다만은 제가 책임자였기 때문 에 끌려
들어가서 기합을 받았는데 요 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기억입 니다. 좌우간 얼마나 때렸는
지요 열 네개를 제가 셌습니다.
"하나, 둘. . . 열 넷"을 세고 세지 못했습 니다. 정신을 잃었으니까. 그 다음 에 때린 건 무
효입니다. 암만 때렸 어도 나는 모르니까요. 어쨌든 이 러고 영창에 들어갔습니다. 깜깜한
방에 한참 있다가 정신을 차리면서 추웠어요. 몸이 춥고 떨리는데 또 가만 생각하니까 좀
슬프기도 하더 라구요. 나이도 어릴 때니까 훌쩍 훌쩍 울었더니요 옆에 앉은 분이 나 를 흔
들면서,
"울지 말게. 세상이 다 그런 거라네."
딱 한 마디 하셨 는데 작전참모요. 그런데 그 한 마 디의 대화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 었
어요. 그 후에 그는 목사가 됐고 저도 목사가 됐습니다만은 만날 때 마다 악수를 하면 그
때 생각이 납 니다. 아주 어려운 고난 속에 그 때에 주고받은 한 마디, 그게 진짜 예요. 여
러분 돈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거 봤습니까? 아무리 전도해 도 안 믿어요. 믿었다면 병들
었지. 출세한 사람이 예수 믿는 거 봤습니 까? 그 사람이 만약 예수 믿었다면 실패했죠. 어
려운 중에 진실이 있 어요. 어려운 중에 참 대화가 있어 요. 어려운 중에 전도하기도 하고
전도되기도 해요. 이걸 잊지 말아 야 합니다. 그런고로 복음사역에는, 전도는 이 전도가 이
루어지기 위해 서는, 증인이 증인 되기 위해서는 고난은 필수요.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는 고
난과 질병을 통해서만 이 루어 졌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성과 생명성, 사실
성, 그 능력, 지혜, 참 사랑이 바로 이 고난 중에서 전달되는 것이요.
룩트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미 국의 기독교 신문에 기고한
"그리스 도의 증인"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글 이 있는데 거기 이런 얘기가 있습니 다. 어느
날 친구되는 부흥사 목사 님과 같이 식당에 갔더랍니다. 점 심 먹으러 갔는데 아 이 부흥사
목 사님이 좀 교만해서 거기에 있는 종 업원들보고
"이놈아 이래라 저래 라……"
하고 막 명령을 하는 거요. 같이 갔던 목사님이 너무 민망해 가 지고 '원 이럴 수가 있나'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 감사기도를 해 야 겠는데 '우리 기도할 때 종업원 이 제발
우리 기도하는 것 좀 안 보 았으면 좋겠다'고 '저런 사람이 예수 믿는가'하면 이거 곤란하
잖아요. 그 랬다는 겁니다. 몇 일 후에 또 다 시 친구와 함께 갔는데 그날, 종업 원이 커피
를 옷에 그만 엎질러 버렸 어요. 그래서 매니저까지 나와서 미안해 가지고 그럴 때,
"아니올시 다. 그러잖아도 이 옷은 너무 오랫 동안 입어서 세탁하려던 참인데 잘 됐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으니 걱정 하지 말라고 북북 씻고서 식사를 했 어요. 그 다음 주일날 보니까 그
종업원이 교회에 나왔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라고 해서 너무 거 창하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손해를 보세
요. 때로는 명예에 손해보기도 하고, 자존심에 손해보기도 하고, 물질에 손해보기 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 름으로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손해 를 보고 고난 당할 때, 바로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시고 이렇게 증인될 때 주께서 채워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을
보세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이게 증인이요. 사도 바 울
은 감옥에 있으면서
"항상 기뻐하 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찬 송합니다. 이것이 증인이요. 그리 스도인들
은 생활을 통해 증인되고 특별히 죽음을 통해서 영생의 기업 을 얻는 자의 증인이 되는 것
이올시 다.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 게 가르쳐 줍니다.
"내 이름을 인 하야 핍박을 받으리라. 너의 이것 은 증인이 되고 증거되기 위한 것이 다. 내
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증 거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일들이 있 으리라."
이 은혜와 이 축복 가운 데서 증인의 축복, 증인의 영광, 함 께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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