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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확신(요 9:13~25)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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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확신(요 9:13~25)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이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사람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에 발을 붙이고 사는 것 같아도 과거의 결과로 오늘을 살며, 또한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현재는 잊어버리고 미래에 대한 꿈만 허황되게 꾸며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에 얽매여서 과거를 잊지 못하여 현재의 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과거지향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정신적 출애굽을 하지 못한 자라고 말합니다. 홍해를 건너 나왔으면 애굽을 잊어야 하는데, 여차하면 애굽을 생각합니다. 배고프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은 했지만 배불리 먹었다는 생각을 하고, 고기 생각이 나면 고기 가마 옆에서 끓여 먹던 시절이 좋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자꾸 매이게 되면, 오늘과 내일에 대한 중요한 생의 의미가 흐트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내가 아무리 결의를 하고 과거를 깨끗이 잊었다 하더라도 남들이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전과자들의 어려운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인 스스로는 한 번 죄지은 전과를 깨끗이 잊고 바르게 살려고 결심해도 세상이 용납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사건마다 조사를 받고 걸려드는 것입니다. 이력서를 써도 문제요, 호적을 보아도 문제며, 결혼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문제화되는 것입니다. 평생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어 얼마나 살아가기가 힘든지 모릅니다.

이 본문은 계속해서, 태어나면서 장님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내용 전부가 장님이 눈을 뜸으로써 파생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입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축하할 일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시비가 벌어집니다. 그가 장님 그대로 있었으면 조용하고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는데, 눈을 뜸으로써 출교를 당하게 됩니다. 출교당한 대표적인 예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출교당하면서 돌에 맞아 죽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이 장님도, 장님 그대로 있었으면 구걸이나 해서 제 명대로 살 것인데 눈을 떴다는 사실 때문에 시비가 되고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을 위험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는 사실에 왜 시비가 붙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영적으로 눈을 감은 사람들은 이 세상 물결 따라서 되는대로 쉽게 살아갈 수 있지만 예수를 믿고 영적인 눈을 떠서 바로 살아가려고 하면 문제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용납치 않습니다.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칭찬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에도 시비가 있고 오해가 있음은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난 기적에서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 나면서부터 장님이 되어 40년을 살아온 불쌍한 이 사람에게도 축하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것으로 족해야 하는데, 시비와 비판이 왜 있어야 합니까? 그가 과거를 청산하고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세상을 살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과거가 그를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시비한 것은 전승과 습관, 그리고 자기 경험 때문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는 항상 개혁적이고 때로는 혁신적입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좋지 않은 전통, 습관은 박차고 일어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크게 이루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장님을 눈뜨게 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 날 그 일을 행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안식일 날 그런 일을 했느냐고 답답하게 따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율법을 이기고, 사랑은 모든 법을 초월한다는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전승에 매여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거룩하고 저렇게 하는 것이 거룩하다고 자기 마음대로 규례를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과장을 하게 됩니다. 점점 더 복잡하게 살이 붙고 조항이 많아졌습니다. 창세기에서도 그와 같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중에 보면 혹이 붙어서, 보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덧붙이지도 말고, 감하지도 말고 직선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아담은 혹을 덧붙여서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의 잘못을 흐리게 하려는 저의가 있는 것입니다. 덧붙인 규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율법화되어 교리가 되어 버립니다. 종교적인 규례는 오래 반복하다 보면, 그 자체가 교리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우리들도 매 수요일마다 저녁 예배를 드립니다. 어느 초신자가 "수요일 날 교회 나오라는 말이 성경에 있습니까?" 하고 필자에게 물어왔습니다. 성경에 수요일에 교회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없습니다. 단지, 주일과 주일 사이에 기도회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수요일을 목요일로 바꾸자고 한다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관례가 오래되면 자연히 법이 되어,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 들며 절망하게 되고, 또 잘 지키면 교만해집니다. 이것은 행동력이 없고 생명력이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주의,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법이 619가지, 또는 700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정말, 복잡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모든 법이 그러하듯이 법은 법 자체가 있고, 법에 대한 해석이 있으며, 그리고 법을 정당화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안식일이지만 생명에 관한 문제는 다소 예외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나귀가 함정에 빠져서 지금 당장 건져 주지 않으면 죽게 되었을 경우에는 안식일이라도 건져냅니다. 그러나, 건져내었는데 아직도 힘이 있어 즉시 뛰어간다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됩니다. 하루 더 함정에 두었어도 죽지 않을 형편이면 안식일을 지나서 건져 주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다투는 위급한 일이 아니면 어떤 선한 일도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됩니다. 이런 논리에 의해서 오늘 장님이 눈을 뜨게 된 것은 문제였습니다. 혹 이 사람이 다 죽어 가는 환자였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장님이란 하루 지나서 눈을 떠도 별 지장이 없는 것이므로 안식일을 범했다고 단정을 하고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 얼마나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는지 그 흔적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형식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에 대해 본래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처럼 원인적인 것, 본래적인 의미를 우선 알아야 하고, 또 하나는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주신 율법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법을 지키든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아버지, 어머니가 훈계하는 것이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면 그 훈계에 뜻이 있지만, 잔소리로 듣거나 부모 자신들의 감정 대상으로 우리들을 야단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나에게 주신 것임을 분명히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가령, 주일날 교회 나올 때, "하나님께서 내게 안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데, "주일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나, 바빠 죽겠는데" 하며 안 지키자니 꺼림칙해서 마지못해 지킨다면 예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은 무엇이든지 사랑의 표시이므로 감사하는 자세로 지키는 것이 정도입니다. 요즘, 선불 십일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천만원을 벌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미리 백만원을 꾸어다가 선불로 바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천만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원망투성이겠지요.

이것은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것으로 대단히 나쁜 마음입니다. 좋은 일도 하고 나서 칭찬듣는 것이 좋지만, 칭찬듣기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기회주의자로서,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중심으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일해야 하는데, 미리 표창 받고 복받겠다고 눈치 보아 가면서 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바칠 때, "하나님, 십일조를 바치는 특권을 누리니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할 때에 누구에게 빼앗기는 마음으로, 아까운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주는 자가 되었나이까?" 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율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항상 개혁적인 의미에서 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본래적인 의미로, 원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을 예로 들면,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안식일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므로 영원불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는, 즉 그 방법은 계속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언제나 똑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라면 모든 규례를 이길 수가 있고, 모든 율법을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란 쉰다는 뜻입니다.

쉰다는 의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을 듣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멋있는 휴식이요 바른 휴식입니다. 보다 차원높은 휴식이란, 나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환자를 방문하거나 고아원을 방문한다면 얼마나 좋은 휴식입니까? 선한 일을 하고 돌아올 때의 그 기분은 주일 낮에 낮잠 자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들은 어떤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까? 여름이면 누구나 휴가를 즐긴다고 없는 돈을 꾸어서라도 갑니다. 갔다 오고나니 생각하면 진정 휴식이 되었습니까? 빚진 돈 생각나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고, 여러 가지 손해만 났습니다. 또한 마땅히 도와야 할 가까운 분들을 만나면, 외면한 것이 미안해서 휴가 다녀왔다는 말도 못하고 이래저래 괴로우니 무슨 휴식이 됩니까? 선한 일을 함으로써 참된 휴식, 멋있는 휴식을 즐기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휴식이란, 영어로 후레쉬민트(freshment)로써 소생하고 힘을 다시 키운다는 뜻인데, 육신은 잠을 자거나 편히 쉼으로 피로를 풀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영적으로는 영혼이 피곤해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깨달아야,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해야 영혼이 살아납니다. 영혼이 살아나야 내게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게 되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안식입니다. 도덕적인 휴식은 구제하고 봉사하고 친교함으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휴식에는 육체적인 차원, 도덕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영혼을 구원하시고 안식하셨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다 새로운 의미에서의 안식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님이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이라고 시비를 걸었는데, 은혜를 깨달았다면 은혜 안에서 규례와 율법을 다 소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 인물의 특이한 성격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면서부터 눈이 먼 장님과, 그리고 그의 부모와, 시비를 걸고 있는 바리새인입니다. 이상 세 인격을 자세히 비교하면 재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 장님은 처음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만약 눈을 뜨지 않았다면 제 명대로 평생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뜸으로써 출교를 당하고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을 위험한 곳까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했습니다. 바리새인이 시비를 걸며 네 눈을 뜨게 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요 9:17).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죄인이라고 말했지만, 장님은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단지 분명한 것은 그 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요 9:25). 체험적 신앙입니다. 내 생활 속에서 체험적으로 얻은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아니라 해도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분명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체험은 필요합니다. 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은 때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체험적인 것만으로도 안 됩니다. 비록 제한적인 지식이라 하더라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장님은 지식이 부족합니다. 너를 고친 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선지자입니다" "어디 있느냐" "나는 모릅니다" "그 사람이 죄인인 줄 아느냐" "나는 모릅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내가 눈을 뜬 사실뿐입니다"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체험은 했지만 의식화하지 못했습니다. 좀더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체험을 신학화하지 못하면 결국 얼마 못 가서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체험을 했지만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확실히 체계화하지 못하면,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투명해져 그날 재수가 좋아서 눈을 떴거나 아니면 이제 때가 되어서 눈이 열렸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고 희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체험적 신앙이 참 좋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내가 체험한 그 내용을 성서적 진리에 의해서 완전한 것은 아니더라도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가 오직 알고 있는 것은 눈을 떴다는 사실로써 제한적인 신앙을 가졌으므로 이대로 나가다가는 많은 시비 속에서 믿음을 지켜나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다음 장에서 나옵니다만, 예수께서 그를 만나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의 신앙은 단순하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서 그의 믿음을 도와 주셨습니다. 체험은 한 가지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번의 체험으로 부족해서 사건마다 체험을 가지려고 하는데, 체험을 남발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해서 한 번 병이 나았으면 다음부터는 "이제 더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지난날의 체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깨달았으면 이제는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체험은 벌써 잊어버리고, 또 구하고 구하면 끝이 없고 이 신앙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장님의 부모입니다. 바리새인의 시비가 부모에게까지 건너가서,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요?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누가 눈을 뜨게 했소? 등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부모들은 눈치가 빨랐습니다. 잘못하면, 자기들도 출교할 것 같으니까 발뺌을 합니다. 그가 내 아들이고 장님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했는지는 도저히 모른다고 섭섭하게 말을 합니다. 어려울 때에 서로 거들어서 아들 편을 도와 주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이라 해도 믿음은 따로따로입니다. 남편이 잘 믿는다고 아내가 함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의 믿음으로 남편이 구원얻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의 체험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또한 체험없는 신앙은 핍박을 이기지 못해 조그마한 사건에서도 도망가고 맙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바울 혼자만 들었던 것처럼,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째,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이 좋은 일을 가지고도

끝까지 시비를 벌립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관습과 전통에 매여 있기 때문에 과거지향적인 사람들로서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또한 합리적인 이해를 먼저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확신에서 합리적인 이론이 나오는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체험하고, 그리고 그 체험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이해를 다해서 확신을 얻으려면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됩니다. 이론은 이래도 저래도 이론입니다. 어차피 이론은 완전하지 못하므로 반론 없는 이론은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사랑을 보더라도 먼저 사랑부터 하고 그 다음에 키가 커서 좋고, 키가 작아서 좋고, 똑똑해서 좋고, 공부 잘해서 좋고 등 이론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반대로 키가 작아서 싫고, 키가 커서 싫고, 별 이론이 다 나옵니다. 자,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합리적인 이론이 과연 먼저입니까? 마음이 먼저고 사랑이 먼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론을 따져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사랑해 놓고 이론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은 합리적인 이해를 먼저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체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들의 생각의 틀 속에다 예수님을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들어갈 리가 있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다음, 유대인들은 누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들을 무서워했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요 9:22). 이 말은 처음부터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기로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핍박하기로 결정해 놓고 사건을 당하니, 이 사건이 이해될 리가 있습니까? 문제는 불신입니다. 이론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 깊이 있는 불 신앙이 문제였습니다. 표적은 중요한 것으로 우리에게 체험을 주며 확신을 얻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을 체험적인 것에만 머무르게 하지 말고 바로 이해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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