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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쌍히 여기노라(마태복음 15장 32~39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않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오늘 본문의 주제랄까 초점이 되는 것은 "내가 저들을 불쌍히 여기노라"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나 읽는 분들에게 가끔 문제되는 바가 있는 대목입니다. 성경에 오 천 명 먹이신 사건도 기록되어 있고 사천 명 먹이신 사건도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 두 번 있었던 일이냐, 아니면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로 기록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우리는 늘상 '오병이어(五餠二魚)'라고 하면서 오 천 명 먹이신 이야기만 하지 사천 명 먹이신 이야기는 기억에도 거의 없다시피 되어 있지 않습니까?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잘 아는데, '칠병이어(七餠二魚)-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사천 명 먹이신 기적 역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과 칠병이어 사건은 같은 사건인데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는 것은 억지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두고 변론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의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하는 짓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점 하나 획 하나도 그대로 사실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에 오 천 명이라 하면 오 천 명이고, 사천 명이라 하면 그것은 또 사천 명입니다. 분명히 두 가지 사건인 것입니다. 성경의 본래적인 정확성과 권위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사건을 한 가지 사건으로 보려 하는 억지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두 사건으로 알고 비교할 때에 더욱 중요한 은혜를 깨닫게 되면서 계시적인 말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경은 순수한 마음으로 읽어야만 은혜가 됩니다. 순수하게 묵상하며 읽느라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많은 은혜를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홍해를 건너갔다'하면 홍해가 갈라져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믿을 때, 거기에 따르는 모든 영적 교훈을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이것을 의심하기로 든다면, 의심 자체도 문제가 될 뿐더러 그에 따르는 계시적 말씀과 교훈은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게 되고 맙니다. 오 천 명 먹이신 것과 사천 명 먹이신 것은 두 사건입니다. 분명한 사실이므로 이를 인정하고서 오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같은 마태복음에 14장에는 오 천 명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오늘의 이 15장에는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 사건으로 볼 수 없거니와, 오 천 명 먹이신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고,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은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8장에만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두 사건을 한번 비교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상이 다릅니다. 오 천 명 먹이신 사건의 대상은 유대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복음서가 다같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던 순례자들이 코스를 바꾸어서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이 갈릴리 벳새다 들로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해를 같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억지로 받들어 저들의 정치적인 왕으로 삼겠다고 들끓는 일까지 생기지 않습니까? 그 모두가 유대사람 순례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오늘의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은 그 대상이 대부분 이방사람들입니다. 대상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사람들에게만 구세주인 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에게도 떡을 먹이시고, 이방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또 한번 복음의 세계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건은 일어난 장소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천 명 먹이신 사건은 갈릴리 벳새다 들에서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천 명 먹이신 사건은 데가볼리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건은 장소도 다르거니와 또한 동정의 동기가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 저들에게 떡을 먹이시게 되었느냐를 살펴보면, '오천 명' 때에는 광야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십니다. 양들인데 목자가, 지도자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도 참 지도자가 없어서 실망을 하는 무리들이거든요. 순례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언제나 결과는 허탈감으로 끝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교만한 바리새인들, 위선자들, 또 제사장들의 허다한 그릇됨을 보고는 실망하고 돌아옵니다. 이 사람들이 순례의 길을 다시 떠나다가 갈릴리에서 메시야가 났고, 그 메시야 예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벳새다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을 보시매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주님은 보신 것입니다. 정신적인 방랑자들, 영적인 방랑자들로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천 명 먹이신 사건에서는 단순히 굶주림을 보시고 불쌍하다 하십니다. 영적이기보다는 육체적으로 배고픈 사정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또다른 교훈을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실 때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는데 여기서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입니다. '두 마리'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남은 광주리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실 때에는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곱 광주리'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기간도 다릅니다. 순례자들의 경우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던 사람들이 그냥 코스를 돌려서 모여든 것이므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하루를 지낸 것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고 했으니 하루입니다. 그러므로 한 끼 정도 굶은 셈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사흘 동안이라고 합니다.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이 이방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천 명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광야집회요, 산상집회라 할 수 있겠는데, 참으로 엄청난 집회였습니다. 그들이 소지했던 음식은 이제 다 떨어지고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도록 사흘 동안을 내리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를 시사해줍니다. 시기로 보았을 때, 오천 명 먹이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봄입니다. 그러나 사천 명 먹이신 일은 여름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흘 동안 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천 명 먹이신 사건 때에는 그 이적 뒤에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하는 정치적 욕망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메시야관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강요, 강권적으로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사천 명 먹이신 이적 뒤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아무 반응이 없고, 예수님은 급히 저들을 떠나서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바 바구니와 광주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말로는 바구니나 광주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두 사건에서 바구니와 광주리는 그 크기부터 다릅니다. '열두 바구니'의 바구니는 '코피누스' 곧 휴대용 백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바구니라기보다는 그저 '구럭'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여자 분들 핸드백도 이상하게 커져서 마치 꼴 망태기 같아 보이는 것이 많아요. 꼴 망태기는 꼴을 베어 담아 메고 다니는 것입니다. '코피누스'라는 것이 그와 비슷한 것인데, 거기에 자질구레한 것을 많이 넣어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 것으로 열두 개니, 별로 많지 않은 양입니다. 열두 제자가 돌아다니면서 주워 모은 것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일곱 광주리'의 광주리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스푸리스'라고 하여 이방사람들이 떡을 담는 데 쓰는 그야말로 큰 광주리입니다. 사도행전 9장 25절에 보면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 나오는 광주리가 '스푸리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광주리'가 '열두 바구니'보다 훨씬 더 양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사건에서 쓰인 코피누스와 스푸리스도 이와같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유대사람이 쓰던 것이요, 하나는 이방사람이 쓰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물'입니다. 몇 사람이 등장하는데,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발견하십니다. "저희가……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예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가르치시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형이하적 사정까지 돌아보십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영적으로 빈곤한 사람들, 지도자가 없이 헤매고 다니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의 영적인 문제에만 마음쓰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배고파서 가다가 기진 할라'까지 걱정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영적 빈곤도 담당하시지만 육체적 빈곤도 담당하시는 것을 봅니다. 문제를 제시한 이도 예수님이요 해결한 이도 예수님인데,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고 영적인 교훈을 주고 진리를 가르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다, 경제 문제도 해결해줘야 한다고 하는 귀중한 교훈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빈곤에 대해서만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정에 대해서도 깊이 동정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을 한번 보십시다. 참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둔할 수가 있나 싶어요. 아시다시피 바로 앞의 14절에 오천 명 먹이신 이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름이니 그때로부터 기껏해야 이삼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떡을 얻으리이까?"-보리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불과 이삼 개월 전에 있었던 그 엄청난 이적을 까맣게 잊었는지, 오늘 이따위로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실 때에는 빌립이 '이거 뭐 200데나리온 가지고도 안되겠는데요' 하고 돈으로 계산하더니, 오늘도 제자들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옆에 있었다면 한마디했을 것입니다. "이 멍청한 사람들아!"하고요. 그러나 우리, 이 사람들 나무라지 맙시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도 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과거에 얻은 경험, 우리가 신앙적으로 깨달은 간증이 있으면 그것을 현재와 연결하고, 나아가 미래로 연결해서 앞에 있는 문제를 지난날의 간증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풀이할 수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흔히들 '옛날이 좋았다'라는 소리를 합니다. 옛날이 좋았다면 오늘도 좋은 것이지 왜 옛날만 좋습니까? 지난날이 좋았다면 오늘은 더욱 문제가 없는 법입니다. 앞으로의 걱정은 더 없고요.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늘 지난날에 받은 은혜는 항상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오늘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은혜를 모르는 자인 것처럼, 한번도 은혜를 간증해본 일이 없는 자인 것처럼 답답하게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그 깊은 간증, 거기서 깨달은 바가 있었으면 이제는 그것을 잊지 말고 그것에 따라서 모든 문제를 볼 줄 아는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 다음날 배를 타고 가시다가 제자들보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삼가하라." 그러자 제자들은 '아 떡이 없어서 그러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떡 문제를 놓고 시비를 벌입니다. 식구는 열 셋인데 그 배에 떡이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 '누구 때문이냐'고 신경전을 벌였겠지요. '가룟 유다 당신이 좀 준비해 가지고 왔어야 하지 않소?' '무슨 소리! 수제자인 베드로 당신이 미리 좀 챙기지 그랬소? 나야 돈이나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오?' 이런 식으로 시비를 벌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답해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 얼마가 남았더냐?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내가 누룩 얘기를 한다고 떡 없는 것으로 문제삼고 있느냐? 어찌하여 기억도 하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기억도 하지 못하느냐-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을 하나 배워서 깨달았으면 다음에는 그것을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운 것은 배운 것 대로고 응용은 하나도 되는 게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따로따로 입니다. 경험과 현실이 따로 놉니다. 우리가 뭔가를 배웠으면, 오늘이라도 여기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다면, 집에 돌아가서 적어도 부부싸움만은 하지 말아야지요. 뒀다가 내일 아침에 싸우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문만 나서면 똑같습니다. 전혀 교회 갔다온 사람 같지가 않고 은혜 받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악순환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자들이 그 짝입니다.
칼뱅 선생도 말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미래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을 기대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경험한 바가 있다면 그로 해서 앞에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 우리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습니다. 생각지도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그 큰 능력, 기적 같은 은혜 속에서 살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기적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만 있는 기적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는 기적입니다.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무슨 문제가 또 있습니까? 그런데 일만 닥쳤다 하면 지난날 은혜 받은 경험은 까맣게 잊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니 될 일입니까? 오늘 본문의 이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또다시 불 신앙적으로 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발전한 것이 조금은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지난번에는 그저 막연하게 있다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나이다(막 14 : 17)"하고 나옵니다마는, 오늘은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하시니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하고 내놓습니다. 아마도 조금은 정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천 명 먹이신 사건에서는 상당히 영적인 데에 치중했습니다. 그에 오늘은 상당히 물질적입니다. 본문에 다 배불리 먹고 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사흘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사흘 동안이나 같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동안에 뭘 먹을까 뭘 마실까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한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체험했습니다. 저들은 이 시간 동안 유대사람들처럼 정치적인 욕망을 가진 것도 아니며 물질적인 욕망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그 위대한 교훈에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흘이나 함께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역시 유대사람들보다 이방사람들이 더 열심을 냈습니다. 그 당시에도 벌써 충성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백부장같은 사람도 로마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훌륭해서 이미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온 이스라엘 중에서 그 사람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노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습니까? 그밖에도 이방사람들 가운데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사천 명도 대체로 이방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순수한 동기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사흘 동안 부흥회를 가질 것으로 작정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에 취하면서 함께 하다보니 저들도 모르게 사흘이 지나갔다는 이야깁니다.
이에 대해서 플러머(Plummer)라고 하는 유명한 주석가는 재미있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6장 33절의 성취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물질을 구할 때에는 물질도 얻지 못하고 영적인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을 추구할 때에는 먼저 영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신령한 것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물질적인 것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을 따라 나아갈 때, 그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할 때에는 신령한 것도 얻고 영생도 얻고 동시에 물질도 얻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빵을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빵이 예수님께로부터 오리라고 기대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양식을 먹으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예수님께 빵을 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신령한 말씀만을 구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양식이 떨어지는데도 아랑곳없이 말씀을 듣는 데 넋이 빠졌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저들에게 마침내 주님께서는 물질까지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에 동정하시고 충분한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한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도 깊이 동정하고 계셨습니다.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마셔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를 다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배고픔을 아신다는 게 얼마나 귀중합니까? 우리의 배고픈 사정을 아십니다. 우리의 외로움도 아십니다. 육체의 아픔도 아십니다.
억울함도 아십니다. 그가 우리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기에, 능력이 많으신 분이기에,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요, 우리 같은 인간이 느끼는 배고픔도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언젠가 우리 장로님,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죄송한 말씀이지만, 장로님 한 분과 제가 얘기하면서 우리끼리 뭐가 통한다고 한일이 하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고학을 할 때, 아주 어렵게 배고프게 살았거든요. 하루에 두 끼 먹는 것이 어렵고, 그나마도 어떻게 하면 더 싸게 먹을까를 궁리하던 때였습니다. 돈이 없으니 어쩌다 식당에라도 가게 되면, 제일 싼 집만 찾게 마련이었습니다. '어디 가면 싸게 사먹을 수 있을까?' 될수있으면 작은 집, 집보다는 천막 같은 데로 가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식사를 하더라도 좀더 많이 주는 데로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싼값이고 밥그릇 큰 데를 찾았던 것이지요. 배고픈 사정을 실감 할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같이 먹는 중에도 '내 것은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뭐든지 같은 찬이라도 조금 더 큰 것, 많은 것을 찾으면서 지냈습니다. 거기서 탐식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정이 그 장로님 한 분하고만 통하더라는 말입니다. 그 분도 옛날에 많이 고생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통하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정말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내일은 또 무엇을 어디 가서 먹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가 해결해나가야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니 예수님께서 나의 배고픈 사정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배가 좀 고프면 대순가? 고작 사흘밖에 안 지났고 또 며칠 더 굶는다 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니 배고픈 것을 참으라'-이렇게 몰아붙이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까지는 먹었지만 이제 돌아갈 때에는 배고파 기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염려해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말씀 들으러 왔다가 허기지고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고 가난해지지는 않습니다. 배고픈 사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남보다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배부를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 의를 이렇게 갈망할 때에야 의도 채워지고 배도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시는데, 방법이 전과 똑같습니다. 이적을 행사하시고자 축사(祝謝)를 하십니다. 떡을 가지시고 사천 명 앞에서 비록 적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형편에서도 기도하면서 작다고 하지 마십시오. 부족하다고 하지 마세요. 식사기도, 감사기도 할 때에, 음식이 좋을 때는 '좋은 음식 감사합니다'할 것이요 음식이 시원치 않아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이상하게도 식사기도 때 감사기도를 안하더랍니다. 늘 그냥 먹더랍니다. '목사님, 왜 감사기도 안 하십니까?' 하고 누가 물었더니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 메뉴로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이 음식은 못마땅해서'라는 소리지요. 또 '그 동안 줄곧 똑같은 음식만 자꾸 주니까 똑같은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라는 소리지요.
여러분, 오늘 음식이 아무리 불만스럽더라도, 막말로 '어쩌자고 밤낮 똑같은 것만 처먹이노?' 싶더라도 그것은 사람한테나 가질 불평이지 하나님 앞에서 불만스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른 떡 하나라도 감사할 것입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더라도 감사할 것입니다. 내 앞에 음식이 있을 때에는 무조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천 명 앞에 떡 다섯 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천 명 앞에 떡 일곱 개라니 냄새나 맡고 말일이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이것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유카리스테오'-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할 때에 거기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감사해보십시오. 거기에 특별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돌아봅시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스프랑크니조마이'라고 하는 이 동사는 '스프랑크논'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무슨 말이고 하니 '창자'입니다. 창자, 곧 '배알이 뒤틀린다' 할 때의 '배알,' '애가 탄다' 할 때의 '애'가 스프랑크논입니다. 원문 그대로 말한다면 '나의 애가 끊나니'--애끊는다는 뜻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육신에까지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그냥 안됐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보는 순간에 불쌍해서 애가 끊어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내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에 대하여 그런 정도로 마음 아파하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정말로 불쌍히 여길 때에 그 아픔은 내 몸의 속속들이 전달돼오는 것입니다. 창자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감상적으로 안됐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혀나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동정심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육신에까지 절실하게 전달되는 역사로 나타날 때에 거기에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병에 걸려 아픔으로 숨을 몰아쉬며 괴로워할 때, 그런 때라면 진실로 괴롭겠지요. 얼마 전에 제가 명륜동 명성교회에 볼일이 있어 혼자 차를 타고 잠깐 다녀오는데, 어떤 사람이 복잡한 길 한가운데서 차를 세우라고 합디다. 그래서 섰지요.
그랬더니 젊은 사람이 조그마한 어린아이를 안고 태워달라는 것입니다.
곁에서 어머니가 "이 애가 지금 자꾸 숨이 넘어가요"합니다. 아이가 새D똕TXT+ 파래져서 헐떡거립니다. 아무리 택시를 잡아도 택시가 안태워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선생님이 좀 태워주세요." 그래서 태웠는데, "어디로 갈까요?"하고 물었더니 "좌우간 가세요." 밑도 끝도 없이 자꾸만 그냥 가자는 겁니다. 가다가 병원을 찾아 그 앞에 세워주었습니다.
가는 동안에 이 아이가 자꾸 숨이 넘어가니까 아버지가 얼굴이 새까맣게 질리고, 어머니가 엉엉 울고, 난리가 났습니다. 도착해서 차 문을 열고 내려주었더니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뛰어올라갑니다. 한참 서 있어도 내려오지 않기에 그냥 돌아왔습니다 마는 그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가 아플 때에 그 부모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사천 명, 당장 죽게 된 것도 아닌 이 사람들을 보시고 애끊는 동정을 느끼시며 '가다가 지치겠다, 기진 하겠다'라고 염려하십니다. 집에까지 돌아가느라면 가다가 지칠 사람들이 있겠다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배가 아플 만큼,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하십니다. 먹여 보내야겠다고 하시는 마음이 인정 많은 우리네 할머니들 마음씨와도 같습니다. 콧마루가 시큰하도록 고마운 마음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생각으로야 하나님의 말씀 들었으면 됐지 육신까지 염려하실 것 뭐 있나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히 듣고 은혜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가다가 배고파서야 되겠느냐-'육체가 지쳐서야 되겠느냐, 이로 인해서 약해져서야 되겠느냐'고 걱정하셔서 굶겨 보내지 못하십니다. 이적을 베푸셔서 모두들 배불리 먹고도 가마니 만한 광주리로 일곱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쁘게 하시되 영적으로 충만하게, 육적으로도 배부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가난하게 살지도 말아야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성껏 절약하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실하게 사는 동시에 육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넉넉하게 먹고 쓰고, 배부르고 남게,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두루 샬롬이 있기를 그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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