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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지혜! (요 11:45-57)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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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지혜! (요 11:45-57)

 

요한복음 11장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 만에 살아나는 사건을 중심
으로 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을 마감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이 본문과 나사로 사건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연결된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
문은 온 성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오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므로 의심하는 사람들은 직접 찾아가서 나사로를 만나보면 문제는 해결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나사로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요새 같으면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고 TV방송이다, 신
문이다 하고 야단났을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소문은 빨리 퍼지게 되어 있는데, 유대
사람들은 특별히 소문에 민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 살아난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
라, 죽은 자를 살려낸 바로 그 분이 혹시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입니다. 메시야가
과연 언제 오실는지, 소위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꽉 차있는 그들에게는 큰 관심사였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언서들을 보면 하나같이 많은 고난을 예언하고, 그리
고 고난 뒤에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구월심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메시야가 왔다는 소문도 있고,
또 왔다면 어느 분이며, 어느 때부터 메시야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메시야의 왕권을 행사할
것인가에 대해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으면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어보는 사건입니다.(마11:3) "오실 이가 당신이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우리가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분명히 예수가 메시야인 줄 알고 있었는데, 자
기가 의로운 일로 고난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옥문이 열리거나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소식
이 없자, 답답하고 궁금해서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토록 초조하게 메시야를 기다리는
상황 중에 나사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다. 그러면 죽은 자를 살린 그
가 누구냐?" 나사로가 분명히 살아난 것만 확실하다면, 그를 살린 자가 메시야임에 틀림없
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메시야의 왕권적인 행사가 나타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큰 의미를 가
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믿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
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요11:45-46)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믿는 이에 대하여 신경을 쓰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많이 믿으
면 자연히 예수가 높아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게 되면, 반대로 낮아져야 할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로마 군인들입니다. 만약, 메시야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로마가 무
너지는 것으로써 정치적으로 굉장한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사람들은 신
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 일을 빙자해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상당히 복잡
하게 되므로 로마의 정치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둘째는 헤롯왕입니
다. 원래 헤롯은 대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만 그의 교활한 정치적인 수단으로 유대 나라 왕
이라는 보좌에 앉아서 로마사람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영화를 누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적인 수명이야 대단한 것이 아닌데, 만약 메시야가 왔다면 유대 나라
왕으로 오시는 것이므로 당장 보좌를 내놓아야 할 입장이니 신경을 아니 쓸 수 없습니다.
세째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지 못하기 대문에 메시야가
오면 당장 심판을 받아야 하므로 그들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
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조금 극단
주의자로 에세네스파(Essenes)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이 속되다고 해서 아예 광야에
들어가서 사는 은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중의 하나입니다. 이들
은 철저하게 하나님만 섬기면서 극단주의적인 은둔 생활을 하는 무리들로서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서는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순수한 종교 단
체로써 정치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람들도 아니었지
만 다만 보다 잘 믿어 보겠다고, 보다 율법적으로 깨끗하게, 구별되게 믿겠다는 무리들입니
다. 원래 바리새라는 뜻은 구별하다라는 말로써 거룩하게 구별해서 신앙 생활을 하겠다는,
소위 종교 생활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 사람들로부터 정신적으로 존경을 많이
받았습니다. 세째가 사두개인들입니다. 대개 제사장의 무리들로 조직된 종교 단체로써 정치
적인 면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인 단체라 할 수 있으며, 부귀를 누렸고
세속적이고 타협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치와 잘 타협하여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롯당이 있었습니다. 이상의 네 부류 중에 당시에 가장 민족의
지도자로 나타나는 것이 바리새당과 사두개당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리새당은 율법과 종
교적인 면에 전적으로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고, 사두개당은 정치적인 수완을 가진 정치적인
사람들로서 주로 제사장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이라는 공회가 있는데 (지
금의 국회와 비슷한 성격의 기관으로 종교의 정치를 겸한 유일한 최고 의회), 이 의회 회원
의 과반수가 사두개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자 그 중에 어떤 자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말했다는 것입니다.(요 11 :
45-46)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같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서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또
는 누가 더 백성의 지지를 받느냐로 신경을 쓰며 서로 미워하고 질투를 하는 사이입니다.
그들이 특히 다른 점은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과 천사를 믿는데 비해, 사두개인들은 부
활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서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당신들의 교리가 옳고 사두개인들
의 교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바른 신앙이냐고 큰소리치며 한 등급 올라가게 되는 중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더 큰 지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
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흥미가 없지만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에는 흥미
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이용해서 사두개인들의 기세를 꺾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들이 공회를 모아 걱정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회의 소집은
사두개파들이 했을 것이라 상상이 됩니다. 회의를 소집해 놓고 하는 말이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
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11:47-48) 하며 걱정을
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게 되고, 그러면 우리 처지는 말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해서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을 깨끗이 하신 사건입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고 제사장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성전까지 쳐들어가서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되
니 제사장들은 견디기가 어려웠고 이래저래 부득이 예수를 처단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
게 됩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유대 나라 왕으로, 종말론적 계
시자로 믿어서 온 백성들이 정치, 종교, 경제, 문화할 것 없이 단결될 조짐이 보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정치, 종교, 경제, 문화가 합
쳐지면 이것처럼 무서운 전체주의는 없습니다. 이것을 일명 유대주의라고 하는데, 전체주의
중에 가장 강한 단체입니다. 또 하나의 전체주의로는 모슬렘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와 종
교가 합쳐진 것으로 이것 역시 강합니다. 중동지구가 항상 싸우는 것도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고 종교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무섭도록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전체주의입니다. 공산주의가 강한 것 같지만 유대주의에 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유대
주의는 곧 메시야주의로서 단순한 종교적인 단합이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모든
것이 합쳐서 하나이므로 가장 강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걱정하는 것은 백성들이 메시
야주의로 뭉쳐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하면 분명히 혁명은 일어날 것이고, 그러면 로마 사
람들이 다시 이 땅을 때려부술 것이다라고 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큰소리를 한 번 칩니다. "가야바가 저희
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
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 11 : 49-50) "너
희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우둔하다고 업신여기며 멸시해서 하는 말입
니다. 소위 너희들은 머리 회전이 빠르지 못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자기는 지혜롭다는 뜻입니
다. 그 지혜라는 것이 한 사람을 죽여서 무사하다면 죽이자는 것으로, 제사장으로서 정신나
간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발언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으로 여러 가지 무서운 잘못을 저지
르고 있습니다. 첫째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만 하
고 있습니다. 예수의 출현이나 혹은 메시야가 나타났다, 또는 죽은 자가 살아났다 등 이 사
건들을 놓고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정치적으로만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생각
입니까? 둘째는, 신앙적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의 말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째로, 이 사람은 과정의 진실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방
법이 얼마나 선하냐를 생각지 않고 다만 결과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무사하고
유익하기만 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불사하겠다고, 어이없는 발상을 했습니다. 우리말 중
에서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무서운 내용입니다. 이것은 곧 공산
당의 이론입니다. 공산당의 이론 중에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즉 프
로레타리아의 낙원만 이룰 수 있다면 혁명도 좋고 무슨 방법이든 괜찮다는 것입니다.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무서운 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서울을 가지 못하더라도 가는한 바로 가야 합니
다. 필자가 학장으로 있을 때 입학시험 시기만 되면 난처한 부탁을 가끔 받습니다. 어떻게
연줄을 찾아서 뒷문으로 좀 들어가는 길이 없나 하고 부모님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합
니다. 돈은 얼마든지 내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자녀를 그렇게
가르쳐서 되겠습니까? 지금 돈을 들여서 입학을 했다해도 그 아이는 버려진 것입니다. 얘가
커서 이다음에 자기 자녀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생을 통해서 '진실하라'
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하게 자녀 교육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비록 대학을 못 다녀도 사람답
게 키우자"고 권유를 합니다만, 그러나 답답한 부모들은 우선 입학부터 시켜놓고 보자고 고
집을 부립니다. 결과만 생각하고 방법과 수단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가는 데까지 가다가 쓰러지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우리가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또한 가야마는 공리주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가장 적은 수를 희생시켜서 가장 많은 사
람에게 유익을 주겠다는 수학적인 계산입니다. 그에게는 공리주의가 옳으냐 그르냐를 알 바
가 아니고, 적은 희생으로 많은 이익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분명히 죄입니다. 왜
냐하면, 한사람이라도 의인이면 죽을죄인 만 명과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 명 아닌 십만 명이라도 의인 한 사람의 값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의인 한 사람이 죄 없이 죽어 가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
서는 민주주의에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양심인데, 양심을 떠나서 수학적으로
풀이한다면 다수가 옳은 것입니까? 수는 진리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주
장이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백 사람이 주장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집스러운 데가 있어서 융통성이 없다고들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 옳다고 해도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야바는 그가 의인이냐 죄
인이냐를 먼저 생각지 않고 수학적으로 풀이한 것으로, 이것은 공산주의요 불신앙적이며 다
수주의로서 근대적인 악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진리란, 한 사람이 주장해도 진리인 것입니
다.
옛날에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황청에 불려갔습니다. 지동설을 취소하지 않으
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마지막에 가서 아니다라고 취소했습니다. 그는 풀려서 문밖으로 나
오며 하는 말이 "내가 취소는 했지만 지구는 여전히 돕니다"라고 지동설을 다시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이 주장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써 돌아가는 지구를 어
떻게 돌지 않는다고 다수로 취소할 수 있습니까? 가야바의 또 한 가지 실수는 그것이 의냐
불의냐를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사하냐 유익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의인을 살리는 것이
중요함을 그는 몰랐습니다. 간디의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해서
평생 원하는 이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니까." 얼마나 위대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평생
을 나라 독립을 위해 바친 몸이지만, 자기 한 마디의 거짓으로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거짓
말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지금 대제사장으로써 의냐 불의냐를 묻지 않고
나라가 무사할 것인가, 요새 말로 전쟁없이 나라가 안정할 수 있느냐만 생각했습니다. 우리
도 자주 통일을 이야기합니다만, 통일이 먼저가 아니라 의가 우선되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
니다. 안정만 위하겠다고 하는데, 그래 가지고서는 총화가 되지 않습니다. 의가 있고서야 총
화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야바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임하고 하나님
께서 이 땅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다만 로마 사람의 권력만 의식하고 무서워
했습니다. 진리는 무시하고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되겠느냐만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메시야의 나라와 먼 미래에 대해 생각지를 않고 현재에만 집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제사장의 권좌를 계속 누리고자, 나라를 위하는 것
처럼 말했지만 자기 중심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
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재판받을 때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예수는 죄가 없으니
놓아주자고 하자 그 때에 가야바는 한 마디 했습니다. "만일에 이 사람을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로마사람에 대하여 충성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언
제 로마에 충성했습니까? 단지, 지금 자기 중심적으로 척하고 나서서 이 큰 죄를 범하고 있
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를 드디어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그러면, 그 후에 로마가 어떻게 되었
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주 후 70년에 로마가 다시 쳐들어와 완전히
망하고 맙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복음은 주후 100년경에 기록이 된 것으로 보는
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록한 셈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면, 예수를 죽
여 가면서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겠다고 머리를 썼는데, 그 나라가 안정되었습니까? 오히려
안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반대로 가야바가 무릎을 꿇고 예수를 영접했다면, 아마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나라를 위하고 무엇이 안정을 위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교훈입니다.
가야바는 인간적인 지혜를 내세우고 자기가 가장 똑똑한 척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으며 신앙적인 지혜가 참지혜임을 알게 됩
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세상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를 택하사 지혜롭게 하셨다는 말씀
이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어리석은 길을 가는 듯해도 그것은 참 지혜의 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51절 이하에서 사도 요한은 굉장히 신앙적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11:51-52) 대제사장직은 원래 종신직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대제사장이 되면
교황처럼 죽을 때까지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의 뜻은
무슨 말입니까? 대제사장은 종신직이기에 로마 사람들이 와서 볼 때, 권력이 너무 강한 것
같이 생각되어 이를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대제사장을 역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대제사장은 안나스인데 그의 후계자로 사위인
가야바가 정치적인 타협에 의해 그 해의 대제사장직을 맡은 것입니다. 사실, 율법대로는 안
나스가 대제사장이지만 나타나지 않고 가야바가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본문에서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썼고 이어서 요한의 간증과 해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함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굉장한 신앙입니다.
쉽게 말해서 가야바의 허튼 소리가 예언적인 성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어디까지나 가야바는 예수를 죽여서 그들이 편하자는 의도인데, 결과는 한 사람이 죽
어서 만 백성을 구원하게 될 것을 미리 가야바가 말했다는 놀라운 해석입니다. 사도 요한의
입장은 대제사장은 가야바의 말은 기름 부은 자의 말이기 때문에 개인이 함부로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입을 통하여(비록 다른 목적으로 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만백성
의 구주 되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가야바의 어리석은 지
혜요, 나쁜 의도였지만 하나님은 그 나쁜 입을 고용하셔서 이같은 말을 하게 했다는 요한의
해석입니다. 믿음으로 듣는 자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고, 믿음으로 보는 자는
무엇을 보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고,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건에서나 하
나님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야바의 폭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요
한의 귀한 신앙을 우리도 배워야겠습니다.
다음 5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핍박이 너무 심하여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떠나 빈들 가까운 곳으로 잠깐 나와 계십니다.(요11:54) 바꾸어 말하면, 적절한
시기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유월절 잔치에 다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 전체의 말씀 속에는 주님께서 역사 하시는 역사는 어
디에 있으며, 나는 어떤 지혜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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