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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소원(잠언 30장 5절~9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마거릿 허킨스라는 여기자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에 종군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전쟁상황을 온 세계에 전했던 공로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미 해병대를 따라 최일선에 가 있던 때입니다. 전세는 불리해지고 설상가상으로 강추위까지 덮쳐와서 하는 수없이 후퇴를 단행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끼니때가 되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앉아 통조림 한 통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어느 병사 하나가 유독 그 여기자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못한 텁수룩한 얼굴에 흙탕물까지 뒤집어써서 그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길게 자란 수염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고 옷도 얼어서 장작개비처럼 뻣뻣합니다. 그런 몰골로도 살겠다고 통조림을 뜯어 요기하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여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그렇다고 마땅하게 해줄 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물어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이어서 당신에게 소원을 묻는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병사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엽니다. "Just give me tomorrow."----"나에게 내일을 달라."
여러분은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한테 요긴한 것, 유익한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영어의 'want'와 'need'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want'는 단순한 욕망이요, 'need'는 정말로 필요해서 가지는 소원입니다. 아시는 대로 욕망과 소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현재를 위하여,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아니 영원한 생을 위하여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여한이 없을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급급합니다. 현실은 현재의 문제입니다. 배부르고 굶주리고, 기쁘고 슬프고, 편안하고 불편하고----모두가 현재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소원은 다릅니다. 소원은 미래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지닌 소원이 무엇이냐로 평가됩니다. 지금 부하냐 가난하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품은 소원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의 존재가치는 가름됩니다.
바라는 바 소원은 나이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먹을 것이 소원입니다. 사탕 하나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소원이 없다는 듯이 졸라댑니다.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하는 것이 소원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아무 대학에나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나가 그때 나름의 절박한 소원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은 그야말로 유치한 소원입니다. 이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모든 면에서 무르익으면 소원도 달라집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바라왔던 것들은 소원도 아니었습니다. 소원이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마침내 알게 됩니다. 소원이 달라진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간이라면 성숙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성숙한 소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자신의 인격을 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한 나이 많은 성자가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우연하게도 초면인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됩니다. 한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동안 함께 길을 갑니다. 갈림길을 만나 헤어지게 되었을 때, 성자가 두 사람보고 말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보답으로 내가 소원 한가지를 들어드리리다.
무엇이든 말해보시오.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되 다음 사람에게는 그것의 배를 드리겠소." 두 사람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사람이 나보다 두 배를 받겠지. 암, 절대로 먼저 말해서는 안돼'----저마다 이렇게 생각하느라고 입을 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꽤 흐르자, 기다리다못해 욕심 많은 사람이 시기심 많은 사람을 을러멥니다. "네가 먼저 말해.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상황이 이토록 험악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시기심 많은 사람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성자보고 먼저 입을 엽니다.
"내 눈을 하나만 뽑아주시오." 이것이 그의 소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욕심많은 사람은 두 눈을 모두 뽑히고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제대로 된 소원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야기 속의 두 사람은 시기, 질투, 욕심으로 인하여 결국 어처구니없는 것을 바라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을 소원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혹 나의 소원도 시기와 욕심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른 소원 한번 가지지 못한 채 일생을 보내고 말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솔로몬이 소원을 간구하는 대목입니다. 아시는 대로 솔로몬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지혜를 구합니다. 기브온의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의 꿈속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솔로몬은 지혜를 구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이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썩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하여 지혜의 왕으로 40년 동안 전쟁 없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고, 삼천 잠언을 쓰는 위대한 군주가 됩니다. 이제 그가 나이 들었습니다. 갖은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습니다. 성숙한 인격이 된 오늘에 그는 생각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소원은 무엇인가?' 오늘의 본문은 그 위치로 보아 잠언의 결론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결론에서 솔로몬은 지혜로운 소원을 말하게 됩니다. 이 소원이야말로 겸손한 소원이요, 정직한 소원이요,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소원이라 하겠습니다. 동시에 종말론적인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아마도 이것이 그가 평생토록 지녀왔던 소원인 것 같습니다. 즉흥적으로, 우발적으로 품은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일평생 이런저런 소원을 다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대로 다 누려왔지만, 마음 깊은 곳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것으로 이루지 못한 소원이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그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보십시다.
첫째로 진실을 구하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경」에는 "하나님이여,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마는, 본문에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8절)"입니다. 진실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진실을 위하여 힘써보지 않은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진실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모릅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 만나기가 꺼림칙합니까? 거짓말을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운 것도 내가 진실에서 떠나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진실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은 용기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진실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으뜸가는 소원은 마땅히 진실, 정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대학의 사무실에 있는데, 막 강의를 끝냈는지 손에 분필가루를 허옇게 묻힌 교수가 책을 들고 들어옵니다.
후련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을 것이 분명한데 먼저 와 있던 짓궂은 교수가 그 교수를 보자마자 한마디합니다. "수고했소만,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수?" 그런데 상대방 교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이 소리 저 소리 쓸데없는 소리 좀 늘어놓았지"라고 대꾸합니다. 그래서 좌중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흔히 남의 말을 내 말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못 가진 것을 가진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지성인의 죄입니다. 여러분은 가진 것이 있습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업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줄 알았더니 땅투기 해서 벌어들인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남의 돈으로 회장이다 사장이다 하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면서 가진 자인 양 거드름을 피워왔습니다.
다시 한번 진실하게 되돌아보십시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가졌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들 잘났다고 떠벌립디다마는, 오늘까지의 그 많은 날 노벨상 타는 사람 하나 못 보았습니다. 솔직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진실(眞實)'이라는 말에는 본디 '사실'과 '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reality'와 'truth'가 어우러진 말입니다. 무엇이든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실이 진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대로의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기가 힘듭니다마는 한시바삐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허황된 생각, 허황된 꿈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개념으로는 말을 속에 두면 사상이요, 입으로 내뱉으면 말이요, 말이 움직이면 행동입니다. 허황된 말은 곧 허황된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허황된 생각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웃에, 또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링컨 대통령과 참모총장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겼습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끄집어내면서 의논을 거듭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버립니다. 끝내 일은 실패로 끝납니다. 참모총장은 부아가 났습니다.
대통령은 참모총장 앞으로 사과문을 써서 비서를 통하여 보냅니다. 참모총장은 사과문을 펴보더니 침을 뱉듯 소리칩니다.
"That's a ridiculous guy(에이, 멍청한 녀석)!" 대통령을 거침없이 욕합니다. 비서가 돌아오자 대통령이 묻습니다. "사과문은 전해주었는가?" "예." "그래, 그것을 보고 무어라고 하던가?" 비서가 감히 사실 그대로를 옮길 수 없어서 쩔쩔매고 있자 대통령이 다그칩니다.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보게나." "멍청한 녀석이라고 욕했습니다." 뜻밖에도 대통령은 파안대소하고 말합니다. "그 사람,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구먼!" 링컨은 이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평안한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자신의 잘못을 사실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겹겹이 쌓여 있는 거짓과 헛됨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살고 있으니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진실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부가 있기에 진실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세상이 변하기를 구하지 마십시다. 나에게 변화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내가 더 훌륭하고, 더 지혜롭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다만 "진실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구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합니다. 또한 10절에서는 그것을 구함이 주의 마음에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수(壽)를 구할 수도 있고 부(富)를 구할 수도 있고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할 수도 있는데 오직 지혜를 구한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만을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절름발이 하나가 들어와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보면서 지나가던 사람이 싱거운 소리를 한마디합니다. "저 사람, 없는 다리 고쳐달라고 기도하나? 그렇다고 없는 다리가 생길까." 기도하던 절름발이가 이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없는 다리를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다리 하나로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절름발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랍니까? 정치가 바뀌기를 원합니까? 이대로 좋습니다. 내가 더 성장하고 더 능력 있어지고 더 굉장해져야 합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더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진실하게 해주십시오"----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민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니는 소원입니다.
둘째로,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8절)." 이스라엘사람들의 물질에 관한 세계관은 대개 이렇습니다.
'배부른 지갑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빈 지갑은 나쁘다.
돈은 저주도 악마도 아니다.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가난하다고 옳고 부하다고 죄인이 아니다. 부하면 걱정이 많지만 가난하면 더 많대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렇다고 명예도 아니다. 돈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요,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의 돈에 대한 세계관입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적으로 '나의 수준'을 알고 하는 말씀입니다. 내 수준을 알고 나의 나됨을 알고, 나의 인격을 알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부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경제적인 안정을 얻으면 게을러지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나쁜 친구를 사귀고 향락을 즐길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권력이 주어질 것이고 권력이 있으면 교만하여 사람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돈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자기본위로 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선한 일도 독선이 됩니다. 나는 이 정도의 인간밖에 안되기에 부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이렇듯 지혜로운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 무신론자가 되고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면 차라리 가난한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것도 문제가 됩니다.
조선왕조 후기에 기록된 '일사유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김학성이라고 하는 유명한 재상의 어머니에 얽힌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청상과부로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면서 바느질을 하는데,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예전과 다릅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가보니 추녀에서 빗물이 떨어져 패인 땅바닥에 솥뚜껑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파헤치고 뚜껑을 열어보니 은 전이 솥 안에 가득합니다. 어머니는 가만히 생각한 끝에 땅을 더 깊이 파고 은전이 가득한 그 솥을 도로 묻고 나서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아들들이 그 돈을 보고 마음이 안일해져서 공부를 게을리하고 못된 것들을 가까이하게 될까봐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집으로 이사가서 똑같은 고생을 그대로 하여 마침내 그 아들들이 훌륭하게 되었을 때에야 어머니는 비로소 그때의 그 일을 털어놓습니다.
여러분, 불로소득 좋아하지 마십시오. 나를 망하게 하고 가문을 망칩니다. 복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땀흘려 벌지 않은 것은 내게도 남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부하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하지도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나는 가난하면 도적질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원합니다. "나는 가난하면 죄지을 사람입니다. 너무 가난하지 않게 해주소서." 저의 인격을 알기에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돈으로 약을 살수는 있으나 건강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말 한 필을 살수는 있으나 가정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벗을 살수는 있으나 좋은 친구를 사귀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향락을 살수는 있으나 행복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음식을 살수는 있으나 좋은 입맛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수는 있으나 단잠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명예를 살수는 있으나 구원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여유 있는 생을 살아갈 수는 있으나 영생을 사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소원이 절실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중도(中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중도적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육체의 첫째 원리는 '호메오스태시스(homeostasis),' 곧 항상성(恒常性), 평형성(平衡性)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많이 먹을 수도 없고 적게 먹어서도 안됩니다. 너무 춥게 해도 안되고 너무 더워도 안됩니다. 조심을 해야 합니다. 고기가 좋다고 고기만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채소만 먹어서도 안됩니다. 균형잡힌 식생활을 해야 합니다. 정신도 그렇습니다. 학대만 받아서도 안되지만 칭찬만 들어서도 안됩니다. 평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탈무드'에 도(道)를 넘으면 안 되는 것 여덟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여행'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니다보면 아예 바람이 나서 집에 들어오기조차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다니기 시작하면 자꾸 나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너무 많으면 안 되는 것이 여행입니다. 둘째는 '친구'입니다. 여자친구 남자친구 할 것 없이 너무 많아도 좋지 않습니다. 셋째는 '일'입니다. 지나치게 일해서는 안됩니다. 넷째는 '술'입니다. 절대로 술이 과하면 안됩니다. 다섯째는 '잠'입니다. 잠도 절도 있게 자야 합니다. 잠자기로 들면 점점 더 졸음이 옵니다. 너무 많이 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섯째는 '약'입니다. 약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보약도 많이 먹으면 보약중독증에 걸린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향료'입니다. 지나치면 향은커녕 구역질이 납니다. 알맞은 양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여덟째는 바로 '돈'입니다. 돈이야말로 인격에 맞게 적당히 주어져야 합니다. 지위니 감투니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감투도 머리에 맞아야지 크면 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작아서도 안되지만 커서도 안되는 것이 감투입니다. 모든 것이 모름지기 저의 그릇에 맞아야 됩니다. 무조건 많이, 무조건 크게--안될 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봅시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그러면 도대체 어째야 하겠습니까? 본문9절의 말씀입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의 말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삶을 재정리해보십시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바른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만을 이루어가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지혜자의 소원이 있고, 지혜자의 생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소원(잠언 30장 5절~9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마거릿 허킨스라는 여기자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에 종군하여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전쟁상황을 온 세계에 전했던 공로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미 해병대를 따라 최일선에 가 있던 때입니다. 전세는 불리해지고 설상가상으로 강추위까지 덮쳐와서 하는 수없이 후퇴를 단행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끼니때가 되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앉아 통조림 한 통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어느 병사 하나가 유독 그 여기자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못한 텁수룩한 얼굴에 흙탕물까지 뒤집어써서 그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길게 자란 수염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고 옷도 얼어서 장작개비처럼 뻣뻣합니다. 그런 몰골로도 살겠다고 통조림을 뜯어 요기하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여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그렇다고 마땅하게 해줄 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물어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이어서 당신에게 소원을 묻는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병사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엽니다. "Just give me tomorrow."----"나에게 내일을 달라."
여러분은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한테 요긴한 것, 유익한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영어의 'want'와 'need'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want'는 단순한 욕망이요, 'need'는 정말로 필요해서 가지는 소원입니다. 아시는 대로 욕망과 소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현재를 위하여,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아니 영원한 생을 위하여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여한이 없을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급급합니다. 현실은 현재의 문제입니다. 배부르고 굶주리고, 기쁘고 슬프고, 편안하고 불편하고----모두가 현재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소원은 다릅니다. 소원은 미래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지닌 소원이 무엇이냐로 평가됩니다. 지금 부하냐 가난하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품은 소원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의 존재가치는 가름됩니다.
바라는 바 소원은 나이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먹을 것이 소원입니다. 사탕 하나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소원이 없다는 듯이 졸라댑니다.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하는 것이 소원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아무 대학에나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나가 그때 나름의 절박한 소원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은 그야말로 유치한 소원입니다. 이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모든 면에서 무르익으면 소원도 달라집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바라왔던 것들은 소원도 아니었습니다. 소원이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마침내 알게 됩니다. 소원이 달라진 것입니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간이라면 성숙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성숙한 소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자신의 인격을 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한 나이 많은 성자가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우연하게도 초면인 두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됩니다. 한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동안 함께 길을 갑니다. 갈림길을 만나 헤어지게 되었을 때, 성자가 두 사람보고 말합니다. "당신들 덕분에 여기까지 잘 왔습니다. 보답으로 내가 소원 한가지를 들어드리리다.
무엇이든 말해보시오. 먼저 말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되 다음 사람에게는 그것의 배를 드리겠소." 두 사람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말하면 저 사람이 나보다 두 배를 받겠지. 암, 절대로 먼저 말해서는 안돼'----저마다 이렇게 생각하느라고 입을 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간이 꽤 흐르자, 기다리다못해 욕심 많은 사람이 시기심 많은 사람을 을러멥니다. "네가 먼저 말해.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상황이 이토록 험악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시기심 많은 사람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성자보고 먼저 입을 엽니다.
"내 눈을 하나만 뽑아주시오." 이것이 그의 소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욕심많은 사람은 두 눈을 모두 뽑히고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제대로 된 소원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야기 속의 두 사람은 시기, 질투, 욕심으로 인하여 결국 어처구니없는 것을 바라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을 소원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혹 나의 소원도 시기와 욕심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른 소원 한번 가지지 못한 채 일생을 보내고 말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솔로몬이 소원을 간구하는 대목입니다. 아시는 대로 솔로몬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지혜를 구합니다. 기브온의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의 꿈속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솔로몬은 지혜를 구합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이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썩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하여 지혜의 왕으로 40년 동안 전쟁 없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고, 삼천 잠언을 쓰는 위대한 군주가 됩니다. 이제 그가 나이 들었습니다. 갖은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습니다. 성숙한 인격이 된 오늘에 그는 생각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소원은 무엇인가?' 오늘의 본문은 그 위치로 보아 잠언의 결론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결론에서 솔로몬은 지혜로운 소원을 말하게 됩니다. 이 소원이야말로 겸손한 소원이요, 정직한 소원이요,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소원이라 하겠습니다. 동시에 종말론적인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아마도 이것이 그가 평생토록 지녀왔던 소원인 것 같습니다. 즉흥적으로, 우발적으로 품은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일평생 이런저런 소원을 다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대로 다 누려왔지만, 마음 깊은 곳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것으로 이루지 못한 소원이 하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그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보십시다.
첫째로 진실을 구하고 있습니다.「공동번역성경」에는 "하나님이여,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마는, 본문에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8절)"입니다. 진실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진실을 위하여 힘써보지 않은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진실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모릅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 만나기가 꺼림칙합니까? 거짓말을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운 것도 내가 진실에서 떠나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진실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보다 귀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은 용기의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진실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으뜸가는 소원은 마땅히 진실, 정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대학의 사무실에 있는데, 막 강의를 끝냈는지 손에 분필가루를 허옇게 묻힌 교수가 책을 들고 들어옵니다.
후련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섰을 것이 분명한데 먼저 와 있던 짓궂은 교수가 그 교수를 보자마자 한마디합니다. "수고했소만,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수?" 그런데 상대방 교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이 소리 저 소리 쓸데없는 소리 좀 늘어놓았지"라고 대꾸합니다. 그래서 좌중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흔히 남의 말을 내 말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못 가진 것을 가진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지성인의 죄입니다. 여러분은 가진 것이 있습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업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줄 알았더니 땅투기 해서 벌어들인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남의 돈으로 회장이다 사장이다 하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면서 가진 자인 양 거드름을 피워왔습니다.
다시 한번 진실하게 되돌아보십시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가졌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들 잘났다고 떠벌립디다마는, 오늘까지의 그 많은 날 노벨상 타는 사람 하나 못 보았습니다. 솔직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합니다. '진실(眞實)'이라는 말에는 본디 '사실'과 '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reality'와 'truth'가 어우러진 말입니다. 무엇이든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실이 진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대로의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기가 힘듭니다마는 한시바삐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허황된 생각, 허황된 꿈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개념으로는 말을 속에 두면 사상이요, 입으로 내뱉으면 말이요, 말이 움직이면 행동입니다. 허황된 말은 곧 허황된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허황된 생각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웃에, 또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링컨 대통령과 참모총장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겼습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끄집어내면서 의논을 거듭해도 결론이 나지 않자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버립니다. 끝내 일은 실패로 끝납니다. 참모총장은 부아가 났습니다.
대통령은 참모총장 앞으로 사과문을 써서 비서를 통하여 보냅니다. 참모총장은 사과문을 펴보더니 침을 뱉듯 소리칩니다.
"That's a ridiculous guy(에이, 멍청한 녀석)!" 대통령을 거침없이 욕합니다. 비서가 돌아오자 대통령이 묻습니다. "사과문은 전해주었는가?" "예." "그래, 그것을 보고 무어라고 하던가?" 비서가 감히 사실 그대로를 옮길 수 없어서 쩔쩔매고 있자 대통령이 다그칩니다.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보게나." "멍청한 녀석이라고 욕했습니다." 뜻밖에도 대통령은 파안대소하고 말합니다. "그 사람,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구먼!" 링컨은 이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럴 수 있는 사람이 평안한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자신의 잘못을 사실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겹겹이 쌓여 있는 거짓과 헛됨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살고 있으니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진실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지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부가 있기에 진실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세상이 변하기를 구하지 마십시다. 나에게 변화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내가 더 훌륭하고, 더 지혜롭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다만 "진실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구할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합니다. 또한 10절에서는 그것을 구함이 주의 마음에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수(壽)를 구할 수도 있고 부(富)를 구할 수도 있고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할 수도 있는데 오직 지혜를 구한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만을 간절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절름발이 하나가 들어와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보면서 지나가던 사람이 싱거운 소리를 한마디합니다. "저 사람, 없는 다리 고쳐달라고 기도하나? 그렇다고 없는 다리가 생길까." 기도하던 절름발이가 이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없는 다리를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다리 하나로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절름발이라고 경멸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바뀌기를 바랍니까? 정치가 바뀌기를 원합니까? 이대로 좋습니다. 내가 더 성장하고 더 능력 있어지고 더 굉장해져야 합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더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로 하여금 진실하게 해주십시오"----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민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니는 소원입니다.
둘째로,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8절)." 이스라엘사람들의 물질에 관한 세계관은 대개 이렇습니다.
'배부른 지갑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빈 지갑은 나쁘다.
돈은 저주도 악마도 아니다.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요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가난하다고 옳고 부하다고 죄인이 아니다. 부하면 걱정이 많지만 가난하면 더 많대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렇다고 명예도 아니다. 돈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요,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다.' 이스라엘사람들의 돈에 대한 세계관입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전적으로 '나의 수준'을 알고 하는 말씀입니다. 내 수준을 알고 나의 나됨을 알고, 나의 인격을 알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부한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나는 경제적인 안정을 얻으면 게을러지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나쁜 친구를 사귀고 향락을 즐길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권력이 주어질 것이고 권력이 있으면 교만하여 사람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돈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자기본위로 살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선한 일도 독선이 됩니다. 나는 이 정도의 인간밖에 안되기에 부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이렇듯 지혜로운 소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 무신론자가 되고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면 차라리 가난한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것도 문제가 됩니다.
조선왕조 후기에 기록된 '일사유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김학성이라고 하는 유명한 재상의 어머니에 얽힌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청상과부로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면서 바느질을 하는데,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예전과 다릅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가보니 추녀에서 빗물이 떨어져 패인 땅바닥에 솥뚜껑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파헤치고 뚜껑을 열어보니 은 전이 솥 안에 가득합니다. 어머니는 가만히 생각한 끝에 땅을 더 깊이 파고 은전이 가득한 그 솥을 도로 묻고 나서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아들들이 그 돈을 보고 마음이 안일해져서 공부를 게을리하고 못된 것들을 가까이하게 될까봐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집으로 이사가서 똑같은 고생을 그대로 하여 마침내 그 아들들이 훌륭하게 되었을 때에야 어머니는 비로소 그때의 그 일을 털어놓습니다.
여러분, 불로소득 좋아하지 마십시오. 나를 망하게 하고 가문을 망칩니다. 복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땀흘려 벌지 않은 것은 내게도 남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부하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하지도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나는 가난하면 도적질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원합니다. "나는 가난하면 죄지을 사람입니다. 너무 가난하지 않게 해주소서." 저의 인격을 알기에 이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돈으로 약을 살수는 있으나 건강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말 한 필을 살수는 있으나 가정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벗을 살수는 있으나 좋은 친구를 사귀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향락을 살수는 있으나 행복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음식을 살수는 있으나 좋은 입맛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수는 있으나 단잠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명예를 살수는 있으나 구원을 살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여유 있는 생을 살아갈 수는 있으나 영생을 사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소원이 절실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중도(中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중도적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육체의 첫째 원리는 '호메오스태시스(homeostasis),' 곧 항상성(恒常性), 평형성(平衡性)입니다.
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많이 먹을 수도 없고 적게 먹어서도 안됩니다. 너무 춥게 해도 안되고 너무 더워도 안됩니다. 조심을 해야 합니다. 고기가 좋다고 고기만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채소만 먹어서도 안됩니다. 균형잡힌 식생활을 해야 합니다. 정신도 그렇습니다. 학대만 받아서도 안되지만 칭찬만 들어서도 안됩니다. 평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탈무드'에 도(道)를 넘으면 안 되는 것 여덟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여행'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니다보면 아예 바람이 나서 집에 들어오기조차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다니기 시작하면 자꾸 나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너무 많으면 안 되는 것이 여행입니다. 둘째는 '친구'입니다. 여자친구 남자친구 할 것 없이 너무 많아도 좋지 않습니다. 셋째는 '일'입니다. 지나치게 일해서는 안됩니다. 넷째는 '술'입니다. 절대로 술이 과하면 안됩니다. 다섯째는 '잠'입니다. 잠도 절도 있게 자야 합니다. 잠자기로 들면 점점 더 졸음이 옵니다. 너무 많이 자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섯째는 '약'입니다. 약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보약도 많이 먹으면 보약중독증에 걸린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향료'입니다. 지나치면 향은커녕 구역질이 납니다. 알맞은 양을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여덟째는 바로 '돈'입니다. 돈이야말로 인격에 맞게 적당히 주어져야 합니다. 지위니 감투니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감투도 머리에 맞아야지 크면 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작아서도 안되지만 커서도 안되는 것이 감투입니다. 모든 것이 모름지기 저의 그릇에 맞아야 됩니다. 무조건 많이, 무조건 크게--안될 말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봅시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그러면 도대체 어째야 하겠습니까? 본문9절의 말씀입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의 말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삶을 재정리해보십시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바른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만을 이루어가면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지혜자의 소원이 있고, 지혜자의 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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