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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권능의 소재(시편 62편 5절~12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를 좇아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우주는 큰 힘으로 존재합니다. 인간 역사도 그 힘이 주관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자본, 정치, 지식, 기술의 모든 것이 다 이 힘으로 해석됩니다. 이 힘이라고 하는 것은 균형과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이 무서운 힘이 무질서해진다던가 그 궤도를 잃어버린다던가 하면 세계는 그 날로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오존층이 조금만 엷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는 막대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지구의 기온이 조금만 올라간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터전은 북극의 얼음이 녹아 생긴 물로 뒤덮여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서 조그마한 변형이라도 일어난다면 지구의 모든 육지는 사막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우주가 무질서한 세계, 궤도를 잃어버린 세계가 된다면, 모든 것이 우발적이고 돌발적으로만 되어 진다고 하면 필경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을 맞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우주는 질서를 가지고 가장 합리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이 우주는 물질로 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이 물질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이 물질이 인격까지도 지배한다고 보는 입장으로, 이를 가리켜 유물사관이라고도 합니다. 인격을 자연의 일부, 곧 물질의 일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에서 본다면 자연이 최상이요 자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믿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인격이 먼저 존재하고 그 인격에 따라서, 그 힘 안에서 자연과 물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분명히 주인은 초월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의 인격성을 믿습니다. 힘의 도덕성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격적 존재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질서를 믿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평생을 두고 역사를 연구한 어느 학자가 쓴 수필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미친 사람들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라든가 알렉산더왕 같이 그 옛날에 역사를 뒤흔들어놓았던 인물들, 히틀러라든가 스탈린이라든가 동조(東條)와 같이 근자에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정신병자였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하긴 그 미친 사람들을 우상으로 떠받들며 미쳐 돌아간 사람들이 더 미친 것이지요. 그 수필의 말미에는 '이렇게 해서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이것이 역사다'라고 씌어 있더군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힘과 권력,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힘을 사랑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권력을 화평의 근본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 힘을 느끼면서 평화를 느낍니까? 아니면 힘을 느끼면서 함께 공포를 느낍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황해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우리 해군 군함이 몇 척 있었습니다. 그 군함의 함장 가운데 해군 대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결혼식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혼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신혼 중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배를 타고 수고를 합니다. 갓 결혼한 그 아내는 남편이 어떤 곳에서 어떤 배를 타고 지내는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급기야는 자신이 동행해서 직접 눈으로 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옛날에는 더더욱 여자들이 배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군함에, 그것도 전쟁 중인데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할 수 없이 그는 딱 하루 만이라는 조건을 걸고는 아내에게 남자군복을 입혀서 몰래 함장 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배는 떠났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쯤 나왔을 때에 공교롭게도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파도에 밀려서 공중으로 치솟았다가는 뚝하고 떨어집니다. 아주 요란하게 흔들립니다. 배를 처음 타본 부인은 죽는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함정에는 젊은 군인들만 가득합니다. 민간의 여자가 함정에 탔다고 하는 것은 불법일 뿐더러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목소리가 밖에 새나가면 큰일나니까 조용히 하라고 달랩니다. 그러나 부인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릅니다. 보다못해 그는 권총을 뽑아들고는 더 소리지르면 죽인다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쏘아보세요"라고 합니다. 기가 막힌 그는 "총이 무섭지 않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내가 대답합니다. "총이야 무섭지마는 사랑하는 당신의 손에 있는 총을 내가 왜 무서워하겠어요? 당신의 손에 있는 총은 무섭지 않아요. 맘대로 해보세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강도에 들려진 칼은 무섭지만 의사의 손에 들려진 칼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힘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분, 나를 위하는 그분에게 힘이 있다면 그 힘은 클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힘은 크나 작으나 무서운 멸망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에 배를 타고 가실 때에 갑자기 돌풍과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센 파도에 밀려 배는 침몰 직전까지 갑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이 갈릴리바다에서 평생을 산 어부들이요 능숙한 사람들이지만 너무나도 엄청난 풍랑이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늘에서 편히 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시어 제자들을 꾸짖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바람이 누구의 것입니까? 이 배가 누구의 것입니까? 이 풍랑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민을 구원해야 될 엄청난 경륜과 사명을 지녔고,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앞에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어갈 줄 아느냐? 적게 믿는 자들아, 어찌 의심하느냐?"라고 제자들을 엄히 꾸짖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격심해도 그 풍랑을 주관하시는 저 위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평화의 근본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을 때, 그 원리를 발명한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박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원자탄은 가공할 무기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원자탄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원자탄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원자탄을 사용하는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악이 문제요 죄가 문제란 말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상과 사람의 마음,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밖의 모든 문제에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자를 바로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만이 쓸데없는 일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62편의 전체 12절 가운데 '나' 또는 '나의'라고 하는 일인칭의 말이 열 다섯 번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5절로 12절 가운데만도 이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의 진실하고 경건한 신앙고백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다윗 왕의 신실한 신앙간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능력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랑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힘이란 영어로는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violence(폭력)로 폭력적인 힘이요, 다른 하나는 ability(능력)로 건설적인 힘입니다. 이렇듯 힘에는 파괴적인 힘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힘이 있습니다. 죽이는 힘이 있는가 하면 생명적인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어떤 때에는 파괴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늘 건설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전부 죽이는 것 같은 능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마는 역시 그 깊은 곳에는 사랑의 역사가 있고,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모조리 쓸어버리시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이루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5절)"----들뜨지 말고 흥분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씀함입니다. 하나님만 소망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9절)"----세상에 천한 자도 높은 자도 별것 아니요, 권력자 하나님께서 입김으로 훅 불어버리면 날아가는 것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씀함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10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돈 좀 벌었다고 교만할 것도 없으며, 출세했다고 목에 힘줄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부귀함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어렵고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비굴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라"하신 말씀대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며 사는 사람은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대충 보며 살아가도 됩니다. 너무 세상문제에 치심(置心)하여 죽느니 사느니 할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4천 년 동안의 우리 인류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한 어떤 역사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가 4천 년을 지내는 가운데 이백육십팔 년만 전쟁이 없었고, 그 남은 해는 모두 전쟁 속에 있었다. 주전(主前) 삼천육백 년 이래에 전쟁은 일만사천오백삼십일 회 있었고, 이로 인해서 삼십구억사천만 명이 죽었다.' 삼십구억사천만 명의 죽음, 이것은 자연사가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사십억이나 되는 생명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뿐입니까? 이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에 주는 상처가 얼마나 큽니까? 전쟁이야말로 엄청나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수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흔을 남겨준 것이 6․25전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6․25를 경험하신 분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실 것입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저는 전쟁통에 피난민도 되어보았으며, 북한에도 있어 보았으며, 광산에도 끌려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인으로 직접 전쟁에 참여해 최일선에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실상을 많이 보았습니다. 차마 여기서는 말씀드릴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저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똑똑히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6․25전쟁 당시 저의 아버님은 제가 보는 자리에서 북한군에게 총살당하셨습니다. 지난번 평양에 갔을 때에도 그쪽 고관들이 맨 먼저 그것을 제게 사과하더군요. 목사님의 아버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조국을 방문해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더군요. 그래서 제가"누가 죽고 누구를 죽이고 한 그때의 일을 지금 와서 따져본들 뭣하겠습니까? 지난날은 잊고 진정 이 민족을 위하여 다시 일을 해나갑시다"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전쟁을 통하여 너무나도 비참한 일을 많이 보았으며 겪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다소 냉정한 편입니다. 누가 아프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누가 죽었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하며 담담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사실 평안히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집에서 죽었다거나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면, 몇 살에 죽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평안히 죽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마는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전쟁의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구석에선가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는 지금도 죽이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내 귀에 포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전쟁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전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무서운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전쟁이 무엇입니까? 인간 죄악의 극단적 표출입니다.
인간의 지혜, 인간의 능력, 인간의 악, 인간의 죄가 바로 전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라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전쟁이 바로 인간 그대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이 하나님의 능력 밖에 방치된, 유기사건(遺棄事件)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전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악한 사람이 승리해서 전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전쟁은 미친 사람에게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전쟁에는 뜻이 있습니다. 전쟁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전쟁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삼상 17:47)"이라는 다윗의 고백대로 전쟁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을 할 때마다 "저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야 나가서 싸우고, "저 땅을 네게 주리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야 전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여러분, 좀더 멀리 내다보십시오. 좀더 깊은 세계에서 이해하십시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전체가 전쟁사(戰爭史)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때려부수는 이야기, 전쟁을 앞에 두고 예언하는 이야기, 전쟁을 치른 뒤에 후회하는 이야기…… 전부가 전쟁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건을 다같이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바벨론 포수(捕手) 사건을 생각해봅시다. 무도한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치고 들어와 모든 것을 불질러 버리고 헐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까지 불태워버립니다. 이 때에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우상 섬기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듯 죽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포로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예루살렘성을 불지르게 놔두시는 것입니까? 왜 이 전쟁은 일어나야 했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생 막대기로 치느니라."
여러분, 전쟁을 두고 악하냐 선하냐를 묻지도 따지지도 마십시오. 전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치시는 막대기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말합니다. "막대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막대기를 들고 계신 하나님을 무서워하라. 그분께로 돌아 오라. 그 막대기에 대해서, 느부갓네살에 대해서 의문이 많으냐?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칠 자를 치신 다음에 그 막대기는 꺾어버리실 것이다. 모름지기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전쟁은 분명코 하나님 사역의 비상수단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득이 이 방법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을 향하여 내려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며 훈련시키시는 성화(聖化)의 역사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제사가 토인비(Toynbee, Arnold)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신학에 귀결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어떤 말로도 그 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종교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취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종교적 이유가 아니고는 전쟁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채찍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고 구체화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모든 것은 목적론적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사건은 경륜적으로 발생합니다. 국가적으로건 개인적으로건 우연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악한 사람의 발에 짓밟혔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합동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경륜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응답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당초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말 것이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말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전쟁 없는 평화를 운위합니다마는 사실 우리는 전쟁의 요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요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죄를 두려워할 줄 알고, 평화를 사랑하기에 앞서 진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권능이 있고 인자(仁慈)가 있습니다. 권능은 사랑과 함께 있고, 사랑은 권능과 함께 역사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권능과 인자를 함께 경험하고 찬양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그 권능과 인자는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권능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한 우리 민족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권능을 위로로, 그 크신 능력을 우리의 피난처로, 그 사랑을 내게 향한 축복으로 바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참권능의 소재(시편 62편 5절~12절)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를 좇아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우주는 큰 힘으로 존재합니다. 인간 역사도 그 힘이 주관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자본, 정치, 지식, 기술의 모든 것이 다 이 힘으로 해석됩니다. 이 힘이라고 하는 것은 균형과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이 무서운 힘이 무질서해진다던가 그 궤도를 잃어버린다던가 하면 세계는 그 날로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오존층이 조금만 엷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는 막대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지구의 기온이 조금만 올라간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터전은 북극의 얼음이 녹아 생긴 물로 뒤덮여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에서 조그마한 변형이라도 일어난다면 지구의 모든 육지는 사막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우주가 무질서한 세계, 궤도를 잃어버린 세계가 된다면, 모든 것이 우발적이고 돌발적으로만 되어 진다고 하면 필경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을 맞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우주는 질서를 가지고 가장 합리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세계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이 우주는 물질로 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이 물질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이 물질이 인격까지도 지배한다고 보는 입장으로, 이를 가리켜 유물사관이라고도 합니다. 인격을 자연의 일부, 곧 물질의 일부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에서 본다면 자연이 최상이요 자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믿으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둘째, 인격이 먼저 존재하고 그 인격에 따라서, 그 힘 안에서 자연과 물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주인이 아닙니다.
분명히 주인은 초월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의 인격성을 믿습니다. 힘의 도덕성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격적 존재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질서를 믿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평생을 두고 역사를 연구한 어느 학자가 쓴 수필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미친 사람들에 의해서 다스려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라든가 알렉산더왕 같이 그 옛날에 역사를 뒤흔들어놓았던 인물들, 히틀러라든가 스탈린이라든가 동조(東條)와 같이 근자에 세계를 시끄럽게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정신병자였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하긴 그 미친 사람들을 우상으로 떠받들며 미쳐 돌아간 사람들이 더 미친 것이지요. 그 수필의 말미에는 '이렇게 해서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이것이 역사다'라고 씌어 있더군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힘과 권력,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힘을 사랑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권력을 화평의 근본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 힘을 느끼면서 평화를 느낍니까? 아니면 힘을 느끼면서 함께 공포를 느낍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입니다. 황해 한가운데에 조그마한 우리 해군 군함이 몇 척 있었습니다. 그 군함의 함장 가운데 해군 대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결혼식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혼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신혼 중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는 배를 타고 수고를 합니다. 갓 결혼한 그 아내는 남편이 어떤 곳에서 어떤 배를 타고 지내는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급기야는 자신이 동행해서 직접 눈으로 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옛날에는 더더욱 여자들이 배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군함에, 그것도 전쟁 중인데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할 수 없이 그는 딱 하루 만이라는 조건을 걸고는 아내에게 남자군복을 입혀서 몰래 함장 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배는 떠났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쯤 나왔을 때에 공교롭게도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파도에 밀려서 공중으로 치솟았다가는 뚝하고 떨어집니다. 아주 요란하게 흔들립니다. 배를 처음 타본 부인은 죽는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함정에는 젊은 군인들만 가득합니다. 민간의 여자가 함정에 탔다고 하는 것은 불법일 뿐더러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목소리가 밖에 새나가면 큰일나니까 조용히 하라고 달랩니다. 그러나 부인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릅니다. 보다못해 그는 권총을 뽑아들고는 더 소리지르면 죽인다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쏘아보세요"라고 합니다. 기가 막힌 그는 "총이 무섭지 않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내가 대답합니다. "총이야 무섭지마는 사랑하는 당신의 손에 있는 총을 내가 왜 무서워하겠어요? 당신의 손에 있는 총은 무섭지 않아요. 맘대로 해보세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강도에 들려진 칼은 무섭지만 의사의 손에 들려진 칼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힘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분, 나를 위하는 그분에게 힘이 있다면 그 힘은 클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원수에게, 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힘은 크나 작으나 무서운 멸망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에 배를 타고 가실 때에 갑자기 돌풍과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센 파도에 밀려 배는 침몰 직전까지 갑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이 갈릴리바다에서 평생을 산 어부들이요 능숙한 사람들이지만 너무나도 엄청난 풍랑이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늘에서 편히 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시어 제자들을 꾸짖어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바람이 누구의 것입니까? 이 배가 누구의 것입니까? 이 풍랑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만민을 구원해야 될 엄청난 경륜과 사명을 지녔고,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앞에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어갈 줄 아느냐? 적게 믿는 자들아, 어찌 의심하느냐?"라고 제자들을 엄히 꾸짖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격심해도 그 풍랑을 주관하시는 저 위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히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평화의 근본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했을 때, 그 원리를 발명한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박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원자탄은 가공할 무기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원자탄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원자탄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원자탄을 사용하는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악이 문제요 죄가 문제란 말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상과 사람의 마음,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밖의 모든 문제에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자를 바로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만이 쓸데없는 일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62편의 전체 12절 가운데 '나' 또는 '나의'라고 하는 일인칭의 말이 열 다섯 번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5절로 12절 가운데만도 이 말이 무려 아홉 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 왕의 진실하고 경건한 신앙고백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다윗 왕의 신실한 신앙간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능력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랑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힘이란 영어로는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violence(폭력)로 폭력적인 힘이요, 다른 하나는 ability(능력)로 건설적인 힘입니다. 이렇듯 힘에는 파괴적인 힘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힘이 있습니다. 죽이는 힘이 있는가 하면 생명적인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어떤 때에는 파괴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늘 건설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전부 죽이는 것 같은 능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마는 역시 그 깊은 곳에는 사랑의 역사가 있고, 살리시는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모조리 쓸어버리시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이루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5절)"----들뜨지 말고 흥분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씀함입니다. 하나님만 소망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9절)"----세상에 천한 자도 높은 자도 별것 아니요, 권력자 하나님께서 입김으로 훅 불어버리면 날아가는 것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씀함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가 유념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10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돈 좀 벌었다고 교만할 것도 없으며, 출세했다고 목에 힘줄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의 부귀함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 어렵고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비굴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라"하신 말씀대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며 사는 사람은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대충 보며 살아가도 됩니다. 너무 세상문제에 치심(置心)하여 죽느니 사느니 할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4천 년 동안의 우리 인류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한 어떤 역사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가 4천 년을 지내는 가운데 이백육십팔 년만 전쟁이 없었고, 그 남은 해는 모두 전쟁 속에 있었다. 주전(主前) 삼천육백 년 이래에 전쟁은 일만사천오백삼십일 회 있었고, 이로 인해서 삼십구억사천만 명이 죽었다.' 삼십구억사천만 명의 죽음, 이것은 자연사가 아닙니다. 사람들끼리 사십억이나 되는 생명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그뿐입니까? 이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에 주는 상처가 얼마나 큽니까? 전쟁이야말로 엄청나게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수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흔을 남겨준 것이 6․25전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6․25를 경험하신 분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실 것입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저는 전쟁통에 피난민도 되어보았으며, 북한에도 있어 보았으며, 광산에도 끌려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인으로 직접 전쟁에 참여해 최일선에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실상을 많이 보았습니다. 차마 여기서는 말씀드릴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저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똑똑히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6․25전쟁 당시 저의 아버님은 제가 보는 자리에서 북한군에게 총살당하셨습니다. 지난번 평양에 갔을 때에도 그쪽 고관들이 맨 먼저 그것을 제게 사과하더군요. 목사님의 아버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조국을 방문해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더군요. 그래서 제가"누가 죽고 누구를 죽이고 한 그때의 일을 지금 와서 따져본들 뭣하겠습니까? 지난날은 잊고 진정 이 민족을 위하여 다시 일을 해나갑시다"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전쟁을 통하여 너무나도 비참한 일을 많이 보았으며 겪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다소 냉정한 편입니다. 누가 아프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누가 죽었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하며 담담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사실 평안히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집에서 죽었다거나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면, 몇 살에 죽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평안히 죽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마는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전쟁의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구석에선가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는 지금도 죽이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내 귀에 포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전쟁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전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무서운 전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전쟁이 무엇입니까? 인간 죄악의 극단적 표출입니다.
인간의 지혜, 인간의 능력, 인간의 악, 인간의 죄가 바로 전쟁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간이라고,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이라고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전쟁이 바로 인간 그대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이 하나님의 능력 밖에 방치된, 유기사건(遺棄事件)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전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악한 사람이 승리해서 전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전쟁은 미친 사람에게 맡겨진 것도 아닙니다.
전쟁에는 뜻이 있습니다. 전쟁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전쟁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삼상 17:47)"이라는 다윗의 고백대로 전쟁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을 할 때마다 "저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야 나가서 싸우고, "저 땅을 네게 주리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야 전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여러분, 좀더 멀리 내다보십시오. 좀더 깊은 세계에서 이해하십시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전체가 전쟁사(戰爭史)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때려부수는 이야기, 전쟁을 앞에 두고 예언하는 이야기, 전쟁을 치른 뒤에 후회하는 이야기…… 전부가 전쟁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사건을 다같이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바벨론 포수(捕手) 사건을 생각해봅시다. 무도한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치고 들어와 모든 것을 불질러 버리고 헐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까지 불태워버립니다. 이 때에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우상 섬기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렇듯 죽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포로되게 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예루살렘성을 불지르게 놔두시는 것입니까? 왜 이 전쟁은 일어나야 했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생 막대기로 치느니라."
여러분, 전쟁을 두고 악하냐 선하냐를 묻지도 따지지도 마십시오. 전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치시는 막대기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말합니다. "막대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막대기를 들고 계신 하나님을 무서워하라. 그분께로 돌아 오라. 그 막대기에 대해서, 느부갓네살에 대해서 의문이 많으냐?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칠 자를 치신 다음에 그 막대기는 꺾어버리실 것이다. 모름지기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전쟁은 분명코 하나님 사역의 비상수단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득이 이 방법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교만을 향하여 내려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며 훈련시키시는 성화(聖化)의 역사가 있습니다.
영국의 경제사가 토인비(Toynbee, Arnold)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신학에 귀결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어떤 말로도 그 목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종교적 근거에 의지하지 않고는 성취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종교적 이유가 아니고는 전쟁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채찍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고 구체화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모든 것은 목적론적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사건은 경륜적으로 발생합니다. 국가적으로건 개인적으로건 우연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악한 사람의 발에 짓밟혔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합동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섬세한 경륜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응답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당초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말 것이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말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전쟁 없는 평화를 운위합니다마는 사실 우리는 전쟁의 요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요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죄를 두려워할 줄 알고, 평화를 사랑하기에 앞서 진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12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권능이 있고 인자(仁慈)가 있습니다. 권능은 사랑과 함께 있고, 사랑은 권능과 함께 역사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권능과 인자를 함께 경험하고 찬양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그 권능과 인자는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권능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한 우리 민족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권능을 위로로, 그 크신 능력을 우리의 피난처로, 그 사랑을 내게 향한 축복으로 바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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