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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지혜(로마서 5장 17절~21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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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지혜(로마서 517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톨스토이의 작품에돌과 여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혜로운 노인에게 두 여인이 찾아와 삶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은 젊었을 때에 이미 재혼한 경험이 있고 그러한 이성관계로 인하여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생동안 무거운 마음으로 회개하며 사는 그런 여인입니다. 또 한 여인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하는 여인입니다. 지혜로운 노인은 두 여인에게 각각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첫 번째 여인에게는 큰돌을 하나 주워오라고 합니다.

그 여인은 노인의 말대로 힘껏 들 수 있는 아주 큰돌을 주워왔습니다. 또한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기는 두 번째 여인에게 그 노인은 작은 돌을 가능한 한 많이 주워오라고 명합니다. 그 노인의 명대로 그 여인은 작은 돌을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왔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 두 여인에게 모든 돌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놓으라고 합니다. 큰돌을 주워온 여인은 아무리 무거운 돌이지만 어디서 가져온 줄 알기에 제자리에 갖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을 많이 주워온 여인은 어디서 주워왔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기에, 결국 제자리에 다 갖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노인은 두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 합니다. "깨끗한 것도 중요하지마는 어디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죄가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뉘우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것이다."그렇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의식이 희박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어느 사회, 어느 시대든지 죄가 없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죄가 더욱 무서워지고 가혹해지고 잔인해지고 악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괘념도 없습니다. 불가피했다느니, 인간은 본래 약한 존재라느니, 환경이 어떻다느니 하고 쓸데없는 변명만 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나서 그 결과가 괜찮았다고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특별히 무서운 죄의 원인이 되는 죄는 죄 자체를 관념화하는 것입니다. 죄 그 자체보다도 죄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면 초인(超人)이 될 수 있다----이러한 망상 때문에 죄는 점점 더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죄의 관념화----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와 죄의식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엄청난 죄를 다시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렇듯 죄의 원인을 타인 혹은 사회에 귀속시킬 때에 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여러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시절의 일입니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날, 아이들도 나가고 집사람도 외출 중이라 혼자서 이층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전혀 모르는 젊은 여자 하나가 서 있더군요.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죽으려고 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푹 쓰러졌습니다. 이거 큰일났다 싶어 여자를 업고 병원에 가는데 여자가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습니다. 더운 여름이라 되도록 옷을 벗어버리고 간단하게 입었는데도 사람이 축 늘어지니까 어찌나 무겁던지 땀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간신히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더니 약 먹은 사람이라고 반가워하지도 않습디다. 죽으려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왜 데리고 왔느냐며 저까지 나무라더군요. 아무튼 응급처치를 해서 그 여자 분은 살아났습니다. 정신이 들었기에 다가가서 약먹은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여자 분이 제게 늘어놓은 사정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남편과 심하게 다툰 뒤에 화가 나서 죽을 결심을 하고는 약을 먹었다고 합니다. 죽되 남편이 보는 데서 죽으려고 간신히 걸어서 남편의 사무실로 가던 중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지옥문이 확 열리면서 불길이 보이더랍니다. 지금 죽으면 그대로 지옥 간다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나더랍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옥문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전혀 예수 믿지 않는 분이 임종을 맞았을 때에 찾아가서 전도해 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로 전도할까 궁리하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다." "만약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당신은 죽은 뒤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전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생각을 달리하시지요." 이렇게 해서 전도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식이 희미한 것이 문제입니다. 지옥문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것입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답지 못해지는 원인은 바로 이 죄의식의 상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의식이 날로 희미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인간 됨과 도덕성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특별히 로마서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시켜 설명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사망과 생명, 그리고 죄와 의를 대립시켜 말씀합니다. 율법 없는 은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은혜 없는 율법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적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로 인하여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율법의 권능을 약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설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무시해서 안됨은 물론 율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은혜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은혜 때문에 율법이 상실되거나 율법 때문에 은혜가 상실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주장하되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는 긴장 속에서 사도 바울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고민하는 모습을 통하여 그가 율법과 은혜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과 은혜는 관념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에 깔린 리얼리티(reality)를 알고 나서 출발해야 합니다. 죄의 현실주의(realism of sin)와 은혜의 현실주의(realism of grace)를 동시에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우리가 평소에 잘 안쓰는 생소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다소 거슬리게 와닿는 '왕노릇한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왕노릇한다'라는 말은 성경의 도처에 나타납니다. 왜 이런 말을 썼는지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의 헬라어인 '바실류오'라는 단어의 어원을 생각하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바실류오'에서 파생된 '바실레우스'는 왕이라는 뜻이요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실류오'는 왕이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왕은 주인이요 백성은 모두 왕의 노예이지 않았습니까? 백성은 왕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바실류오'는 그러한 제도 아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왕노릇한다'라는 말은 지배한다는 뜻입니다마는 일반적인 지배라는 말로는 개념이 모자랍니다. '지배'라는 말 대신 이 '왕노릇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에는 강한 권력이라는 의미가 개재(介在)되어 있습니다. 왕노릇함에 다스림을 받는 자는 전부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는 전혀 자유와 선택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왕노릇을 하는 그 왕권을 얼마만큼이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한번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죄를 거듭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후회의 노예가 되어 가책과 죄의식에 매입니다. 또한 저주의식과 절망에 매이고 자기환멸과 자기학대에 빠집니다. 나약해지고 피곤해집니다. 초라해지고 비참해집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죄란 한번 지으면 다시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정신도 이성도 생활도 인격도, 심지어 영혼까지도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자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도 판단력도 없어집니다. 지식이나 재산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지은 죄에 노예가 되어 인격 자체가 비참하게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워낙 죄가 많습니다. 제가 교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이제 늙으니까 구원받고 싶은 것이라며 욕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까지 덕이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은 이렇듯 비참한 것입니다. 자식의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람답지 못하게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멀쩡해 보이나 병신이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입니다. 죄의 왕권이 이렇듯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유가 없습니다. 무기력합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어떠한 즐거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왕노릇하는 권세에 붙들려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역설적 진리를 말씀합니다. 은혜 역시 리얼리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에도 왕권이 있어 우리를 주도적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완전히 망한, 절망적인 지경인데도 마음은 평안합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행복하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와 기쁨과 감격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를 지배합니다. 왕노릇을 합니다. 은혜가 나를 강권적으로 주도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날 우리 교회 장로님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시간을 내지 못해 방문을 미루다가 밤 열 시가 넘어 귀가하는 차 속에서 불현듯 생각이 나 차가 안막히는 시간이라 그 길로 차를 돌려 그분을 찾아보았습니다. 장로님은 침대에 홀로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에 다시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간증을 하더군요. "이제 저는 몇 시간 뒤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생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하나하나 기록을 하면서 어떤 때에 죄를 지었는지 차근차근 회개하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사건씩 회개할 때마다 그 즉시 귀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네가 죄를 짓는 바로 그 순간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예외 없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회개하다가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감사와 찬송밖에 없습니다"---은혜의 승리입니다.

은혜가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왕노릇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일화입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서 노래를 배울 수조차 없는 흑인 소녀였습니다 마는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기에 교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뉴욕의 맨해턴 홀에서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표회가 끝난 뒤 많은 백인 기자들이 신문에 악평을 써댔습니다. 형편없는 노래라느니, 수준이 떨어지는 음악회라느니 하고 나쁘게 평을 했습니다. 흑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실의에 빠져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이런 말로 그녀를 위로해주었다고 합니다.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오늘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이만큼의 생활이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함과 재주와 명성도 좋지만, 모든 것보다 은혜를 먼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앤더슨은 이에 용기를 얻어 매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은혜가 먼저입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이 17절과 20절에 나옵니다. 은혜의 우월성, 우세성, 탁월성, 절대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본대로 보면 더 깊은 은혜가 담겨 있지만 우리 나라 말로는 제대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은혜가 '차고 넘친다'는 말의 헬라어에는 '에페리시우센' '페리세이안' '휘페레페리시우센'이 있습니다. 표현은 조금씩 다릅니다마는 그 말의 뜻은 '차고 넘친다'로 같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where sin abounded, grace superabounded입니다. 즉 죄가 많으나 그곳에 은혜는 더 많다(superabounded)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칼뱅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동시에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한 바 있습니다. 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더 크기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회개함으로 은혜를 잃어버리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되 사랑 안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노 안에 사랑의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성, 리얼리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엔나의 임페리얼 박물관에는 누벨이라는 화가가 그린 진귀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의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이 성당 앞에 서 있고, 그 앞에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데살로니가 시민 천오백 명을 학살한 뒤, 교회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령을 내립니다. 어느 날인가 그 황제가 밀라노 성당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그곳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가 앞으로 나와 못 들어가게 가로막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에 성당에 들어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황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다윗 왕 역시 죄가 있지 않았소? 다윗도 죄인이 아니었소?"라고 말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냉혹하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다윗 왕의 죄를 모방하였다면 회개 또한 다윗 왕을 따르시오." 이 담대한 말에 황제는 꼼짝못하고 초라하게 무릎을 꿇습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하나님의 진노는 냉혹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가 더 크고 놀랍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더 큽니다. 그실 회개도 은혜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믿음도 은혜요, 회개할 수 있는 용기도 은혜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죄짓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참고 인내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할 때에 비로소 더 큰 은혜의 왕권, 은혜의 왕노릇하는 권세를 체험하게 됩니다. 은혜는 결코 감상이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은사인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가난한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독주회를 준비한 뒤, 청중을 많이 모으기 위하여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던 리스트의 제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전날, 리스트가 이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이제 거짓이 탄로 나면 죄인이 되고 그 동안 쌓아왔던 노력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큰 망신은 물론 다시는 세상에 나설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에 그는 그 앞으로 달려가서 사정을 합니다. "저는 원래 고아 출신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피아노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렇게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러자 리스트는 그에게 "당신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입니다. ,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몇 군데를 바로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밝게 웃고 위로의 말을 합니다. "잠시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마지막 곡은 제자가 아닌 스승 리스트가 직접 연주를 하겠다고 소개하십시오." 결국 회개함으로 더 큰 은혜를 얻은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피아니스트는 뒷날에 훌륭한 연주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구속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 십자가와 겸손,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가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경제, 정치, 사회의 문제는 저만큼 밀어두십시오. 중요한 문제는 당신의 죄의식입니다. 죄의식에 따른 참된 진실과 회개가 문제요, 그 믿음이 또한 문제입니다. 은혜가 자기의 영혼 외에 인격과 이성을 붙잡고 왕노릇할 때에, 은혜에 사로잡힐 때에 비로소 진정한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와 찬송만이 있을 뿐입니다. 밝은 지혜와 용기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역설적 은혜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설적 지혜(로마서 517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톨스토이의 작품에돌과 여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혜로운 노인에게 두 여인이 찾아와 삶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은 젊었을 때에 이미 재혼한 경험이 있고 그러한 이성관계로 인하여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생동안 무거운 마음으로 회개하며 사는 그런 여인입니다. 또 한 여인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하는 여인입니다. 지혜로운 노인은 두 여인에게 각각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첫 번째 여인에게는 큰돌을 하나 주워오라고 합니다.

그 여인은 노인의 말대로 힘껏 들 수 있는 아주 큰돌을 주워왔습니다. 또한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기는 두 번째 여인에게 그 노인은 작은 돌을 가능한 한 많이 주워오라고 명합니다. 그 노인의 명대로 그 여인은 작은 돌을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왔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 두 여인에게 모든 돌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놓으라고 합니다. 큰돌을 주워온 여인은 아무리 무거운 돌이지만 어디서 가져온 줄 알기에 제자리에 갖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돌을 많이 주워온 여인은 어디서 주워왔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기에, 결국 제자리에 다 갖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노인은 두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 합니다. "깨끗한 것도 중요하지마는 어디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알 수 없는 그 죄가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뉘우치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것이다."그렇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의식이 희박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어느 사회, 어느 시대든지 죄가 없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죄가 더욱 무서워지고 가혹해지고 잔인해지고 악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괘념도 없습니다. 불가피했다느니, 인간은 본래 약한 존재라느니, 환경이 어떻다느니 하고 쓸데없는 변명만 늘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나서 그 결과가 괜찮았다고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특별히 무서운 죄의 원인이 되는 죄는 죄 자체를 관념화하는 것입니다. 죄 그 자체보다도 죄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면 초인(超人)이 될 수 있다----이러한 망상 때문에 죄는 점점 더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죄의 관념화----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와 죄의식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엄청난 죄를 다시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킵니다. 이렇듯 죄의 원인을 타인 혹은 사회에 귀속시킬 때에 죄는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여러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시절의 일입니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날, 아이들도 나가고 집사람도 외출 중이라 혼자서 이층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전혀 모르는 젊은 여자 하나가 서 있더군요.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죽으려고 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푹 쓰러졌습니다. 이거 큰일났다 싶어 여자를 업고 병원에 가는데 여자가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습니다. 더운 여름이라 되도록 옷을 벗어버리고 간단하게 입었는데도 사람이 축 늘어지니까 어찌나 무겁던지 땀이 비오듯 흘러내립니다.

간신히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더니 약 먹은 사람이라고 반가워하지도 않습디다. 죽으려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왜 데리고 왔느냐며 저까지 나무라더군요. 아무튼 응급처치를 해서 그 여자 분은 살아났습니다. 정신이 들었기에 다가가서 약먹은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여자 분이 제게 늘어놓은 사정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남편과 심하게 다툰 뒤에 화가 나서 죽을 결심을 하고는 약을 먹었다고 합니다. 죽되 남편이 보는 데서 죽으려고 간신히 걸어서 남편의 사무실로 가던 중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지옥문이 확 열리면서 불길이 보이더랍니다. 지금 죽으면 그대로 지옥 간다고 생각하니 겁이 덜컥 나더랍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하여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옥문을 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전혀 예수 믿지 않는 분이 임종을 맞았을 때에 찾아가서 전도해 본 일이 있습니다. 무슨 말로 전도할까 궁리하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다." "만약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당신은 죽은 뒤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전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생각을 달리하시지요." 이렇게 해서 전도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식이 희미한 것이 문제입니다. 지옥문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것입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답지 못해지는 원인은 바로 이 죄의식의 상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의식이 날로 희미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인간 됨과 도덕성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특별히 로마서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시켜 설명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사망과 생명, 그리고 죄와 의를 대립시켜 말씀합니다. 율법 없는 은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은혜 없는 율법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적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로 인하여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율법의 권능을 약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설명하기 위하여 율법을 무시해서 안됨은 물론 율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은혜를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은혜 때문에 율법이 상실되거나 율법 때문에 은혜가 상실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주장하되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는 긴장 속에서 사도 바울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고민하는 모습을 통하여 그가 율법과 은혜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과 은혜는 관념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에 깔린 리얼리티(reality)를 알고 나서 출발해야 합니다. 죄의 현실주의(realism of sin)와 은혜의 현실주의(realism of grace)를 동시에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우리가 평소에 잘 안쓰는 생소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다소 거슬리게 와닿는 '왕노릇한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왕노릇한다'라는 말은 성경의 도처에 나타납니다. 왜 이런 말을 썼는지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의 헬라어인 '바실류오'라는 단어의 어원을 생각하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바실류오'에서 파생된 '바실레우스'는 왕이라는 뜻이요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실류오'는 왕이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왕은 주인이요 백성은 모두 왕의 노예이지 않았습니까? 백성은 왕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바실류오'는 그러한 제도 아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왕노릇한다'라는 말은 지배한다는 뜻입니다마는 일반적인 지배라는 말로는 개념이 모자랍니다. '지배'라는 말 대신 이 '왕노릇한다'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에는 강한 권력이라는 의미가 개재(介在)되어 있습니다. 왕노릇함에 다스림을 받는 자는 전부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스림을 받는 자에게는 전혀 자유와 선택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왕노릇을 하는 그 왕권을 얼마만큼이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한번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죄를 거듭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후회의 노예가 되어 가책과 죄의식에 매입니다. 또한 저주의식과 절망에 매이고 자기환멸과 자기학대에 빠집니다. 나약해지고 피곤해집니다. 초라해지고 비참해집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죄란 한번 지으면 다시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정신도 이성도 생활도 인격도, 심지어 영혼까지도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자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도 판단력도 없어집니다. 지식이나 재산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지은 죄에 노예가 되어 인격 자체가 비참하게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분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워낙 죄가 많습니다. 제가 교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이제 늙으니까 구원받고 싶은 것이라며 욕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까지 덕이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자기를 비하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은 이렇듯 비참한 것입니다. 자식의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람답지 못하게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멀쩡해 보이나 병신이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입니다. 죄의 왕권이 이렇듯 무섭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얼마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유가 없습니다. 무기력합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어떠한 즐거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왕노릇하는 권세에 붙들려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역설적 진리를 말씀합니다. 은혜 역시 리얼리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에도 왕권이 있어 우리를 주도적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완전히 망한, 절망적인 지경인데도 마음은 평안합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행복하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와 기쁨과 감격 속에서,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은혜가 나를 지배합니다. 왕노릇을 합니다. 은혜가 나를 강권적으로 주도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날 우리 교회 장로님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시간을 내지 못해 방문을 미루다가 밤 열 시가 넘어 귀가하는 차 속에서 불현듯 생각이 나 차가 안막히는 시간이라 그 길로 차를 돌려 그분을 찾아보았습니다. 장로님은 침대에 홀로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에 다시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물었더니 이렇게 간증을 하더군요. "이제 저는 몇 시간 뒤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생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하나하나 기록을 하면서 어떤 때에 죄를 지었는지 차근차근 회개하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사건씩 회개할 때마다 그 즉시 귀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네가 죄를 짓는 바로 그 순간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예외 없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회개하다가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감사와 찬송밖에 없습니다"---은혜의 승리입니다.

은혜가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왕노릇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일화입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서 노래를 배울 수조차 없는 흑인 소녀였습니다 마는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기에 교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마침내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뉴욕의 맨해턴 홀에서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표회가 끝난 뒤 많은 백인 기자들이 신문에 악평을 써댔습니다. 형편없는 노래라느니, 수준이 떨어지는 음악회라느니 하고 나쁘게 평을 했습니다. 흑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실의에 빠져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노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에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이런 말로 그녀를 위로해주었다고 합니다.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오늘까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이만큼의 생활이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위대함과 재주와 명성도 좋지만, 모든 것보다 은혜를 먼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앤더슨은 이에 용기를 얻어 매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노래를 불러 마침내 세계적인 가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은혜가 먼저입니다. 모든 것보다 은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이 17절과 20절에 나옵니다. 은혜의 우월성, 우세성, 탁월성, 절대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본대로 보면 더 깊은 은혜가 담겨 있지만 우리 나라 말로는 제대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은혜가 '차고 넘친다'는 말의 헬라어에는 '에페리시우센' '페리세이안' '휘페레페리시우센'이 있습니다. 표현은 조금씩 다릅니다마는 그 말의 뜻은 '차고 넘친다'로 같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where sin abounded, grace superabounded입니다. 즉 죄가 많으나 그곳에 은혜는 더 많다(superabounded)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칼뱅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하는 동시에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한 바 있습니다. 죄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더 크기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회개함으로 은혜를 잃어버리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되 사랑 안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노 안에 사랑의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성, 리얼리즘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비엔나의 임페리얼 박물관에는 누벨이라는 화가가 그린 진귀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의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이 성당 앞에 서 있고, 그 앞에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데살로니가 시민 천오백 명을 학살한 뒤, 교회 활동에 대한 전면적인 금지령을 내립니다. 어느 날인가 그 황제가 밀라노 성당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그곳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가 앞으로 나와 못 들어가게 가로막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에 성당에 들어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황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다윗 왕 역시 죄가 있지 않았소? 다윗도 죄인이 아니었소?"라고 말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냉혹하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다윗 왕의 죄를 모방하였다면 회개 또한 다윗 왕을 따르시오." 이 담대한 말에 황제는 꼼짝못하고 초라하게 무릎을 꿇습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하나님의 진노는 냉혹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가 더 크고 놀랍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더 큽니다. 그실 회개도 은혜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믿음도 은혜요, 회개할 수 있는 용기도 은혜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죄짓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참고 인내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할 때에 비로소 더 큰 은혜의 왕권, 은혜의 왕노릇하는 권세를 체험하게 됩니다. 은혜는 결코 감상이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은사인 것입니다.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가난한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독주회를 준비한 뒤, 청중을 많이 모으기 위하여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던 리스트의 제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전날, 리스트가 이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이제 거짓이 탄로 나면 죄인이 되고 그 동안 쌓아왔던 노력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큰 망신은 물론 다시는 세상에 나설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에 그는 그 앞으로 달려가서 사정을 합니다. "저는 원래 고아 출신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가운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피아노독주회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렇게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러자 리스트는 그에게 "당신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입니다. ,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몇 군데를 바로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밝게 웃고 위로의 말을 합니다. "잠시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마지막 곡은 제자가 아닌 스승 리스트가 직접 연주를 하겠다고 소개하십시오." 결국 회개함으로 더 큰 은혜를 얻은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피아니스트는 뒷날에 훌륭한 연주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구속의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과 은혜, 십자가와 겸손,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가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경제, 정치, 사회의 문제는 저만큼 밀어두십시오. 중요한 문제는 당신의 죄의식입니다. 죄의식에 따른 참된 진실과 회개가 문제요, 그 믿음이 또한 문제입니다. 은혜가 자기의 영혼 외에 인격과 이성을 붙잡고 왕노릇할 때에, 은혜에 사로잡힐 때에 비로소 진정한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슬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와 찬송만이 있을 뿐입니다. 밝은 지혜와 용기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역설적 은혜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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