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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by 【고동엽】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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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좇아 행하라(갈라디아서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랜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인격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도덕적인 생활이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변화나 새로움을 희망하고 있습니까? 요새 유행하는 말에 '변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신해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따위로 이야기들을 합니다. 정치가가 이 정당에서 저 정당으로 소속을 바꾸면서 변신했네 합니다. 체육인이나 연예인들이 얼마간 쉬다가 다시 나올 때에도 변신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심지어는 직장을 바꾸거나, 가정을 바꾼 것까지도 일컬어서 변신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기 모습이 마땅찮아서 무엇인가 변화를 주고자 할 때에 변신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매스컴의 면면들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실제로 변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바꿔야 하겠다, 무엇인가를 고쳐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내 마음속에 변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변신이라는 말 대신 중생(衆生)이라는 말을 씁니다. 변신이란 자기 의지의 결과요 자기 의지 안에서의 변화입니다. 중생이란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내적 개혁입니다.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중생 해야 하고, 어느 부분에서 변신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람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떠한 속박에도 전혀 부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멍청한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자기가 어떤 억압에 매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 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쳐야 할 것 천지요 모든 것이 마땅찮습니다, 내 의지도 내 생각도 내 생활도 도대체가 마땅치 않습니다. 심지어는 내 존재 자체도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늘 몸부림치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셋째, 자유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의 환경이야 어떻든 간에 영적 상태에서 스스로 자유하며 사는 자유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되는대로 내동댕이치고 사는 멍청한 사람을 보고 바로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해보려고 몸부림만 칠 뿐 실제로는 어떤 변화도 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고민하고 고통하고 자학하고 절망만 하는 사람을 바르게 살고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있고, 자유의 길을 알고,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이 진정 인간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란 완전히 풀려진 무중력상태가 아닙니다.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완전히 내동댕이쳐진 존재로 사는 것은 결코 자유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자연은 그 나름의 법칙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저 내쳐진 하나의 돌멩이로 비칠지라도 그 속에는 인력(引力)이 있습니다. 강한 자연법칙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저 우주에 떠 있는 낱낱의 별도 그렇습니다. 제멋대로 표류하는 것 같으나, 그실 강한 인력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자연에 속한 것 어느 하나라도 그대로 던져진 존재는 없습니다. 그 모두가 자연법칙에 강하게 붙들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릇 동물은 본능에 붙들려 있습니다. 생존본능, 생식본능, 스스로 살고자 하는 모든 본능에 강하게 붙들려 왕래하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마음대로 뛰어다닌다고 해서 자유한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높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서 자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행동은 본능에 매여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높이 날면서도 탐탐이 땅에 있는 먹이를 주시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완전히 본능에 붙들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먹을 것과 안 먹을 것,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 될 말, 가야 될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을 때에는 그에 따른 긍지를 가질 수도 있으며, 잘못되었을 때에는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이성의 능력에 포로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 자유 하는 것 같으나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자기 인격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가장 합리적인 길을 따라가야 하는 이성에 붙들린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정욕과 죄와 율법과 가책에 완전히 붙들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성령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17)"----성령과 육체의 대적함을, 사람의 마음속에 상존 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으로 지향하는 마음, 현재에 매이는 마음, 세속에 끌리는 마음, 율법과 증오와 욕심에 끌리는 마음 이러한 존재를 통칭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은 하늘로 지향하는 마음이요,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마음이요, 신령한 것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살며 사랑에 끌리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와 성령은 타협이 없습니다. 이 둘은 언제나 대립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속했든지 악마에 속했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살든지 세상을 섬기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간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육체와 성령의 힘의 대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행한 무디(D. L. Moody)선생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책상 위에 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컵에는 더러운 공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빼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이 컵에 맑은 물을 부으면 됩니다. 맑은 물을 가득 채우면 더러운 공기는 밀려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채우지는 않고 무리하게 공기만을 빼내고자, 진공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 유리컵은 깨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려고 애써본 적이 있습니까? 정욕을 이기려고, 죄를 이기려고 몸부림쳐본 적이 있습니까? 쓸데없는 짓입니다. 증오를 이기는 길은 은혜로 채움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채움에 있습니다. 욕심을 이기는 길은, 불만과 불평을 이기는 길은 감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은혜로 채울 때에 비로소 나 자신도, 율법도, 죄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실체를 긍정하십시다. 사실과 진실을 인정하십시다. 여러분은 자신이 스스로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인격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육체의 욕심을 스스로 이길 수 있다고 자처합니까? 이것은 언덕 위에 놓여 있는 수레와 같아서 위에서 끌어당기지 아니하면 그대로 내려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편없는 존재인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육체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고 본문 말씀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전제를 어떻게 수용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24)"----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길 외에는 달리 자유할 길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라. 그럼으로써 자유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명의 수여자가 없이 생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없이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가끔 학교에서 교수님들과 담소를 나누곤 합니다. 모두들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인바, 이야기는 주로 강의에 관한 것이 됩니다. 언젠가도 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똑같은 나이의 학생들을 수십 명 앞에 놓고 강의를 하는데 가만히 보면 알아듣는 사람,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시험을 쳐보면 전혀 못 알아들은 학생들도 있거든요. 심지어는 강의하면서도 보면 침 흘리며 졸고 앉아 있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전체를 알아듣게 할 재주가 없어서 문득문득 답답해지곤 합니다. 목사님은 수천 명을 앞에 놓고 설교를 하시는데도 전체가 열심히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다 이해하는 것 같더군요. 목사님은 재주도 참 좋으십니다." 물론 제가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보면 모든 분들이 열심히 들어주더군요.

하지만 대학에서 강의할 때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알아듣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못 알아듣는 학생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잘 듣지도 않고 졸기만 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교육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교수라 할지라도 어떤 설명을 했을 경우, 듣는 사람은 그 시간에 17퍼센트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교수의 설명을 학생이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복해서 강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기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지식 수준도 다르고, 경험도 다른 사람이 매주일마다 수천 명씩 모입니다. 제 말씀을 모든 분들이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에는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여기에 수천 수만 명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일시에 모두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모두가 긍정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진리의 이해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는 성경말씀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나 성령 안에서 진리를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일치의 성령 없이 성도의 교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가 누구인지 모릅니다마는 성령 안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참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없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듬어지고 중생하고 성화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증거의 사역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려면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은사 없이는 주님을 위한 사역도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우리 주위에는 은사 없는 사역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봉사를 하다가도 남들이 알아준다느니 안 알아준다느니 불평합니다. 본인도 피곤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까지도 괴롭힙니다. 은사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참으로 함께 할 때에 우리는 이 선행과,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 항상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 주도적인 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절에 걸쳐 "성령을 좇아 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좇아 행하라'는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좇아 행하라'는 원문에 '페리파테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표본을 따라서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닮아 가는 생을 말합니다. , '성령을 좇아서 변화하여가라'는 말씀입니다. 25절에 나오는 '성령으로 행할지니'는 원문에 '스토이케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용어로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따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가라면 가고 버리라면 버리고, 가부를 말할 것 없이 성령을 좇으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 자신을 이기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 의지, 자기 교양, 자기 명예, 자기 이익, 자기 지식에 의존하려 합니다. 또는 자기 경험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실패했습니다.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실망하고 낙심했습니다. 이제 오직 하나의 길이 남았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부모님을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백부 댁에 의탁하여 사는 16세의 소녀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사춘기를 맞은 그 소녀는 아주 반항적인 성격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집니다. 그 때마다 큰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습니다. 어김없이 그 소녀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반항을 합니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겠다고 대듭니다. 저녁마다 이렇게 한차례씩 싸웁니다. 전쟁을 치릅니다. 난리가 납니다. 이런 날이 거듭됩니다. 피차 못할 짓입니다. 어느 날인가 이 소녀가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심합니다. '이제는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겠다. 밤늦게 돌아다니다 보니 많은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앞으로는 일찍 귀가하고 깨끗하게 살아가겠다. 큰어머니가 수다스럽게 잔소리를 하더라도 절대로 말대꾸를 하지 않고 참겠다.' 부흥회가 끝난 뒤에 집에 돌아와서는 이 결심을 큰어머니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랬더니 큰어머니는 "그 말이 진정이라면 좋겠다마는 어떻게 네 말을 믿을 수 있겠니? 두고봐야지"라고 말합니다. 큰어머니의 그 말에 기분은 상했지만 모처럼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며칠동안 일찍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찌 어찌하다 실수로 늦게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어머니가 면박을 줍니다. "거봐라, 내 그럴 줄 알았지. 네 결심이 며칠이나 가겠니?" 잔소리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욱 주의할게요"라고 의젓하게 말합니다. 큰어머니가 뭐라 말해도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잘 참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 백모님을 미워하는 마음도 슬픈 마음도 말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이 이렇게 내 마음이 평안하다니……'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의지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결심을 새삼스레 하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조용합니다. 아무 불평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없습니다.

이 평화와 온유함과 고요함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화끈하게 확실한 무엇이라고만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저러한 마음이 성령의 역사요, 그 열매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18)"----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모든 규례로부터,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나의 자유를 성령께 반납해야 합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성령에 순종하게 되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성령으로 충만한 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좇아 사는 생을 수영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강가에 나가서 수영을 한다고 합시다. 물이 무릎까지 왔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이 가슴까지 넘칠 때에도 그런 대로 내가 자유를 가지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목 위로 올라오기 시작할 때에는 내 몸이 물에 떠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자유가 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같은 성령의 은사를 경험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다같이 성령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그 역사를 체험합니다.

이제, 가슴을 열고 성령을 맞아 들여보십시오. 순종해보십시오.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또 한번 순종해보십시오. 마음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또 한번 순종해보십시오. 깊은 데로 들어가며 순종해보십시오. 내 의지가 바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순종해보십시오.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성령이 우리를 사로잡아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그 능력으로 우리를 포로해서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내 지식도 의지도 감정도 완전히 성령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그를 기뻐하고 그를 찬양하며, 그리고 자유 하게 됩니다. 여기에 능력과 승리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과신했기에 실패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자기 존재를 일소(一掃)해버리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끌려가는 동안에만 엄청난 사역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판단과 내 지식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인정하십시다. 완전히 포기해버립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두려움도 일소할 것입니다. 성령의 깨우침만 좇을 것입니다. 나도 믿을 수 없는 내 의지와 결심을 남에게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믿어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나를 포기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여기에 참된 용기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믿지 못합니다. 오직 기도 가운데 들리는 주님의 말씀만을,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말씀만을 좇아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본디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 인내 역시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로 인내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시험과 환난 속에서도 고요하게 참고 평화롭게 인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하나,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 뿐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그 열매를 볼 것이다.

죄를 이길 것이다. 그리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라디아서 516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랜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인격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도덕적인 생활이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변화나 새로움을 희망하고 있습니까? 요새 유행하는 말에 '변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신해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따위로 이야기들을 합니다. 정치가가 이 정당에서 저 정당으로 소속을 바꾸면서 변신했네 합니다. 체육인이나 연예인들이 얼마간 쉬다가 다시 나올 때에도 변신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심지어는 직장을 바꾸거나, 가정을 바꾼 것까지도 일컬어서 변신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기 모습이 마땅찮아서 무엇인가 변화를 주고자 할 때에 변신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매스컴의 면면들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실제로 변신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바꿔야 하겠다, 무엇인가를 고쳐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내 마음속에 변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변신이라는 말 대신 중생(衆生)이라는 말을 씁니다. 변신이란 자기 의지의 결과요 자기 의지 안에서의 변화입니다. 중생이란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내적 개혁입니다.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중생 해야 하고, 어느 부분에서 변신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람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떠한 속박에도 전혀 부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멍청한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자기가 어떤 억압에 매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 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쳐야 할 것 천지요 모든 것이 마땅찮습니다, 내 의지도 내 생각도 내 생활도 도대체가 마땅치 않습니다. 심지어는 내 존재 자체도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늘 몸부림치고 고민을 하게 됩니다. 셋째, 자유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의 환경이야 어떻든 간에 영적 상태에서 스스로 자유하며 사는 자유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되는대로 내동댕이치고 사는 멍청한 사람을 보고 바로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변해보려고 몸부림만 칠 뿐 실제로는 어떤 변화도 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고민하고 고통하고 자학하고 절망만 하는 사람을 바르게 살고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자유할 수 있고, 자유의 길을 알고, 자유를 향유하는 사람이 진정 인간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란 완전히 풀려진 무중력상태가 아닙니다.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완전히 내동댕이쳐진 존재로 사는 것은 결코 자유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자연은 그 나름의 법칙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저 내쳐진 하나의 돌멩이로 비칠지라도 그 속에는 인력(引力)이 있습니다. 강한 자연법칙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저 우주에 떠 있는 낱낱의 별도 그렇습니다. 제멋대로 표류하는 것 같으나, 그실 강한 인력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자연에 속한 것 어느 하나라도 그대로 던져진 존재는 없습니다. 그 모두가 자연법칙에 강하게 붙들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릇 동물은 본능에 붙들려 있습니다. 생존본능, 생식본능, 스스로 살고자 하는 모든 본능에 강하게 붙들려 왕래하는 것입니다. 강아지가 마음대로 뛰어다닌다고 해서 자유한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가 높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서 자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행동은 본능에 매여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높이 날면서도 탐탐이 땅에 있는 먹이를 주시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완전히 본능에 붙들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에 붙들려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먹을 것과 안 먹을 것, 해야 될 말과 하지 말아야 될 말, 가야 될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을 때에는 그에 따른 긍지를 가질 수도 있으며, 잘못되었을 때에는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이성의 능력에 포로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 자유 하는 것 같으나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자기 인격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가장 합리적인 길을 따라가야 하는 이성에 붙들린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정욕과 죄와 율법과 가책에 완전히 붙들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한마디로 성령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붙들린 사람,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17)"----성령과 육체의 대적함을, 사람의 마음속에 상존 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으로 지향하는 마음, 현재에 매이는 마음, 세속에 끌리는 마음, 율법과 증오와 욕심에 끌리는 마음 이러한 존재를 통칭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은 하늘로 지향하는 마음이요,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마음이요, 신령한 것을 사랑하고 은혜 안에 살며 사랑에 끌리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성령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와 성령은 타협이 없습니다. 이 둘은 언제나 대립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속했든지 악마에 속했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살든지 세상을 섬기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간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육체와 성령의 힘의 대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행한 무디(D. L. Moody)선생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책상 위에 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컵에는 더러운 공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빼내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이 컵에 맑은 물을 부으면 됩니다. 맑은 물을 가득 채우면 더러운 공기는 밀려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채우지는 않고 무리하게 공기만을 빼내고자, 진공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 유리컵은 깨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려고 애써본 적이 있습니까? 정욕을 이기려고, 죄를 이기려고 몸부림쳐본 적이 있습니까? 쓸데없는 짓입니다. 증오를 이기는 길은 은혜로 채움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채움에 있습니다. 욕심을 이기는 길은, 불만과 불평을 이기는 길은 감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은혜로 채울 때에 비로소 나 자신도, 율법도, 죄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실체를 긍정하십시다. 사실과 진실을 인정하십시다. 여러분은 자신이 스스로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인격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육체의 욕심을 스스로 이길 수 있다고 자처합니까? 이것은 언덕 위에 놓여 있는 수레와 같아서 위에서 끌어당기지 아니하면 그대로 내려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편없는 존재인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육체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한다고 본문 말씀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전제를 어떻게 수용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24)"----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길 외에는 달리 자유할 길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려라. 그럼으로써 자유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명의 수여자가 없이 생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없이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가끔 학교에서 교수님들과 담소를 나누곤 합니다. 모두들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인바, 이야기는 주로 강의에 관한 것이 됩니다. 언젠가도 한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똑같은 나이의 학생들을 수십 명 앞에 놓고 강의를 하는데 가만히 보면 알아듣는 사람,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시험을 쳐보면 전혀 못 알아들은 학생들도 있거든요. 심지어는 강의하면서도 보면 침 흘리며 졸고 앉아 있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전체를 알아듣게 할 재주가 없어서 문득문득 답답해지곤 합니다. 목사님은 수천 명을 앞에 놓고 설교를 하시는데도 전체가 열심히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다 이해하는 것 같더군요. 목사님은 재주도 참 좋으십니다." 물론 제가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보면 모든 분들이 열심히 들어주더군요.

하지만 대학에서 강의할 때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알아듣는 학생이 있는가하면 못 알아듣는 학생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잘 듣지도 않고 졸기만 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교육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교수라 할지라도 어떤 설명을 했을 경우, 듣는 사람은 그 시간에 17퍼센트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교수의 설명을 학생이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복해서 강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기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지식 수준도 다르고, 경험도 다른 사람이 매주일마다 수천 명씩 모입니다. 제 말씀을 모든 분들이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에는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여기에 수천 수만 명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일시에 모두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심으로 모두가 긍정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진리의 이해는 없습니다. 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는 성경말씀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나 성령 안에서 진리를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일치의 성령 없이 성도의 교제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가 누구인지 모릅니다마는 성령 안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참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없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듬어지고 중생하고 성화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증거의 사역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려면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해야만 합니다. 성령의 은사 없이는 주님을 위한 사역도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우리 주위에는 은사 없는 사역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봉사를 하다가도 남들이 알아준다느니 안 알아준다느니 불평합니다. 본인도 피곤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까지도 괴롭힙니다. 은사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은사가 참으로 함께 할 때에 우리는 이 선행과,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 항상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 주도적인 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절에 걸쳐 "성령을 좇아 행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좇아 행하라'는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좇아 행하라'는 원문에 '페리파테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표본을 따라서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닮아 가는 생을 말합니다. , '성령을 좇아서 변화하여가라'는 말씀입니다. 25절에 나오는 '성령으로 행할지니'는 원문에 '스토이케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용어로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따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가라면 가고 버리라면 버리고, 가부를 말할 것 없이 성령을 좇으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 자신을 이기는 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 의지, 자기 교양, 자기 명예, 자기 이익, 자기 지식에 의존하려 합니다. 또는 자기 경험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지함으로써 실패했습니다.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실망하고 낙심했습니다. 이제 오직 하나의 길이 남았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 부모님을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백부 댁에 의탁하여 사는 16세의 소녀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잃었다는 슬픔과 함께 사춘기를 맞은 그 소녀는 아주 반항적인 성격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집니다. 그 때마다 큰어머니로부터 잔소리를 듣습니다. 어김없이 그 소녀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반항을 합니다.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겠다고 대듭니다. 저녁마다 이렇게 한차례씩 싸웁니다. 전쟁을 치릅니다. 난리가 납니다. 이런 날이 거듭됩니다. 피차 못할 짓입니다. 어느 날인가 이 소녀가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심합니다. '이제는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겠다. 밤늦게 돌아다니다 보니 많은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앞으로는 일찍 귀가하고 깨끗하게 살아가겠다. 큰어머니가 수다스럽게 잔소리를 하더라도 절대로 말대꾸를 하지 않고 참겠다.' 부흥회가 끝난 뒤에 집에 돌아와서는 이 결심을 큰어머니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랬더니 큰어머니는 "그 말이 진정이라면 좋겠다마는 어떻게 네 말을 믿을 수 있겠니? 두고봐야지"라고 말합니다. 큰어머니의 그 말에 기분은 상했지만 모처럼 꾹 참았습니다. 그리고 며칠동안 일찍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찌 어찌하다 실수로 늦게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어머니가 면박을 줍니다. "거봐라, 내 그럴 줄 알았지. 네 결심이 며칠이나 가겠니?" 잔소리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욱 주의할게요"라고 의젓하게 말합니다. 큰어머니가 뭐라 말해도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잘 참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그런 잔소리를 들으면서 백모님을 미워하는 마음도 슬픈 마음도 말대답하고 싶은 마음도 없이 이렇게 내 마음이 평안하다니……'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의지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결심을 새삼스레 하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조용합니다. 아무 불평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없습니다.

이 평화와 온유함과 고요함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화끈하게 확실한 무엇이라고만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저러한 마음이 성령의 역사요, 그 열매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18)"----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모든 규례로부터,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나의 자유를 성령께 반납해야 합니다. 이렇듯 전적으로 성령에 순종하게 되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성령으로 충만한 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좇아 사는 생을 수영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강가에 나가서 수영을 한다고 합시다. 물이 무릎까지 왔을 때에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이 가슴까지 넘칠 때에도 그런 대로 내가 자유를 가지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목 위로 올라오기 시작할 때에는 내 몸이 물에 떠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자유가 없습니다. 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같은 성령의 은사를 경험해보지 않은 분은 없을 줄로 압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다같이 성령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그 역사를 체험합니다.

이제, 가슴을 열고 성령을 맞아 들여보십시오. 순종해보십시오.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또 한번 순종해보십시오. 마음에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또 한번 순종해보십시오. 깊은 데로 들어가며 순종해보십시오. 내 의지가 바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순종해보십시오.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성령이 우리를 사로잡아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그 능력으로 우리를 포로해서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내 지식도 의지도 감정도 완전히 성령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그를 기뻐하고 그를 찬양하며, 그리고 자유 하게 됩니다. 여기에 능력과 승리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과신했기에 실패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자기 존재를 일소(一掃)해버리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끌려가는 동안에만 엄청난 사역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판단과 내 지식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인정하십시다. 완전히 포기해버립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과거에 대한 두려움도 일소할 것입니다. 성령의 깨우침만 좇을 것입니다. 나도 믿을 수 없는 내 의지와 결심을 남에게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믿어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나를 포기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여기에 참된 용기가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믿지 못합니다. 오직 기도 가운데 들리는 주님의 말씀만을, 성령이 가르쳐주시는 말씀만을 좇아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良善)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본디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 인내 역시 내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로 인내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시험과 환난 속에서도 고요하게 참고 평화롭게 인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하나,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 뿐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그 열매를 볼 것이다.

죄를 이길 것이다. 그리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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