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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시간 관리(에베소서 5장 15절~21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친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서점을 경영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한 손님이 책방에 들어와 책들을 뒤져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이 책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1달러라고 프랭클린이 대답하자 손님은 "조금 싸게 안됩니까?"라고 흥정을 합니다. 이에 프랭클린은 "그렇다면 1달러 15센트를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손님은 "여보시오, 깎자는 데 더 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천연스럽게 다시 "1달러 50센트입니다"라고 값을 더 올려 부릅니다. 급기야 화가 난 손님이 따지고 덤빕니다. "왜 오히려 점점 더 비싸게 부르는 거요?" 프랭클린은 그 손님에게 대답합니다. "시간은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말씀으로 남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입니까?" 여러분, 시간은 돈이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곧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는 시간만을 생명이라고 이해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서 죽을 때까지의 그 시간이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시간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별할 줄 압니다. 그래서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자신의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그것을 극대화하여 큰일을 이룹니다. 반면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이 설 때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참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가능한 일, 아주 쉬운 일은 시시하게 생각하여 아예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소중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불가능한 일만을 하겠다고 목숨걸고 일생을 모두 바쳐버립니다.
세상에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시간에는 헬라말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고 하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이 시간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시간입니다. 나와 관계없이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이 시간은 그대로 흘러갑니다. 이에 비하여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으로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시간은 내 경험 속에 있으므로 내가 관리할 수 있습니다. 더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고 소중히 여길 수도 있고 경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시간되게 할 수도 있고 진공시간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시간에는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시간, 관리할 수 없는 시간과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별도로 있습니다.
「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러시아의 대 문호(文豪)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 날, 그는 사형 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 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 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레닌그라드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
여러분, 시간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더 늘릴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습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일회적입니다. 한번 지나감으로 끝입니다. 시간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러기에 소중합니다. 또한 시간은 공평합니다. 고맙게도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부하다고 반드시 오래 사는 것도 아니요, 가난하다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닙니다. 공산주의체제 아래서 가난하게 부자유스럽게 사는 북한사람들이라고 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북에 계셨던 저희 어머니도 94세까지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듯 시간이란 공평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시간은 기회입니다. 소중한 기회입니다. 일 분이든 한 시간이든, 하루든 일 년이든 그 시간은 그대로가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시간은 은사입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듯 느리게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두려워하는 시간은 조급하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비탄의 시간은 그렇듯 길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기쁨의 시간은 짧게 느껴집니다. 병든 시간은 아주 지루합니다. 반면에 건강한 시간은 그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시간이란 어떻습니까? 사랑의 시간은 영원한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원래 시간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인식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에 예속된 현재가 있고, 현재에 속한 현재가 있고,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기억일 따름입니다. 다만 과거에 속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미래도 그렇습니다. 다만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동물과 같이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현재에 예속된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 A.)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라고 생각하는 철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에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시간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절대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시간은 사람에 따라 질적으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시간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시간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인가 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없어야 할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어떤 시간은 참으로 귀중하고 뜻 있게 보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시간은 없어야 할만큼 무의미하게 보내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시간, 잃어버린 시간이 많습니다. 진공시간이 그렇습니다. 의식이 없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18절)"---술 취해 가지고 몽롱해서 헛소리하는 시간을 말씀함입니다. 이것이 진공시간이요, 엄청나게 바보스러운 시간입니다. 또한 아무 생각 없는 반복적인 시간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먹고 마시고 자고…… 마냥 의식 없이 반복하는 것이 바로 무의미한 시간입니다. 생명은 의식입니다. 밝은 의식에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평소 일면식도 없는 분인데 때없이 찾아와서는 "목사님, 한번만 만나주세요"하고 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분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유익하고 해서 오늘은 참 좋은 일을 했다 싶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만나자고 해놓고는 아무 말이 없거나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보내고 나면 그 소중한 시간을 강도에게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세상에 이렇게 시간을 빼앗길 수도 있나 하는 허망한 기분이 드는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던 것과 하던 일을 중단하고 만났는데 나에게나 그분에게나 소용없는 시간이 되고 마는 만남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남의 시간을 뺏지 마십시오. 시간은 생명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도적질하거나 강도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 시간을 금덩이의 값어치에 비기겠습니까, 돈의 값어치에 비기겠습니까? 시간은 지중한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에게 빼앗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증오에 빼앗기고 정욕에 빼앗깁니다. 육신의 욕망에 빼앗깁니다. 때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게 됩니다. 사랑만 해도 모자라는 시간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나의 천금같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일입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페이스는 생각지도 않고 남만 견제하고 시기질투 하느라 그만 전체를 다 잃어버립니다.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 시간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맙니다. 참으로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잃어버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부자유한 시간이 있습니다.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문제에 걸쳐서 내가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대로 끌려가면서 시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소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간 역시 온전히 내 것으로 산 시간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16절)." 여기서 '아끼다'는 헬라어로 '엑사고라조'라고 합니다. 이 단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redeem이며, 곧 '속량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는 이 말씀을 다시 풀이하면 '세월을 속량하라, 시간을 속량하라'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말씀을 영어로 'redeem the time' 혹은 'make your time best'라고도 번역했습니다. 또한 요즘 새로 나오는 번역서들 가운데는 'make the most of the time'이라고 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말씀은 '최선의 시간, 최고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시간의 가치를 높이라는 아주 귀한 의미가 오늘의 본문말씀인 "세월을 아끼라"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시간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좋은 시간이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다. 먼저, 맑은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잠자는 시간, 그것은 죽은 시간입니다. 산 시간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잠은 적게 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을 자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씁니다. 몽롱하게 잠에 취해 가지고 있었던 시간은 우리가 산 시간에서 빼내야 합니다. 잠에 취한 시간, 그것은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앞으로 푹 쉴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미리부터 쉬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죽은 뒤에는 길게 잘 터이니 사는 동안만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많이 사는 길이요, 길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잠을 많이 자고 80세까지 사는 것이나 잠을 덜 자고 50세까지 사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우리 국민은 너무 잠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을 보아하면 아주 부지런합니다.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자처합니다마는 보세요. 선진 국민이 없습니다. 선진 국민이 있고야 선진국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선진 국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지난해 겨울, 로스앤젤레스에 집회인도 하러 갔을 때에 겪은 일입니다. 집회 인도를 마치고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기에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아이와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차를 빌렸습니다. 아침에 떠나면 출근시간이므로 고속도로가 막힐 것 같아서 일찌감치 서둘러 새벽 다섯 시 반쯤에 출발했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그맘때도 아주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벌써 고속도로는 차들로 꽉 차 있더군요. 그것을 보고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일곱 시에만 나가도 차가 별로 없어 길이 훤합니다. 이래서야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통 사정이 어떻고, 러시아워가 어떻고, 교통 체증이 어떻고……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불평만 합니다. 적어도 선진국의 국민들은 새벽부터 달립니다. 시간을 아끼며 부지런히 살아갑니다.
어느 사회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세 시간은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보통사람들보다 세 시간이나 덜 자고 부지런히 산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려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루 평균 다섯 시간 정도 잠을 잤습니다. 그다지 넉넉하게 자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건강합니다. 어느덧 목사가 된 지도 32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아파서 주일설교를 못한 적은 없으니까요. 이 정도면 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혹 주위에 보면 건강을 위해서랍시고 잠자리에서 뭉그적뭉그적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될 일입니다. 여러분, 저는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를 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자리에 오지 않은 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잠자리에서 뒹굴고 있겠지.' 물론 모두가 새벽기도에 참예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다면 아무래도 좀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새벽 시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맑은 공기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찬송 부르고 성경 읽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이 답답한 백성들이 잘 모릅니다. 이래가지고 무엇이 되기를 바랍니까?
우리는 얼마나 굉장한 일을 하느냐는 묻지 말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꽉 차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살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매순간을 알차게 살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사실 부지런하지 않고는 우리는 자신의 건강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우리에게 맑은 의식으로 특별히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라,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옳게 관리하는 비결을 말씀함입니다.
우리는 자유 해야 합니다. 생명은 자유입니다. 죄책감에 매여 있고, 죽음의 공포에 매여 있고…… 이렇듯 어딘가에 매인 삶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받은 자의 자유, 영적인 자유를 누릴 때에 비로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의미 있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마귀에게서 시간을 빼앗으라. 마귀에게 내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마귀로부터 시간을 빼앗으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통하여 의미 있고 보람있는 생을 찾아야 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찬송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봉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소중한 시간을 남에게 줍니다. 그곳에 내 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내가 생명을 줌으로 그 생명을 받은 사람과 더불어 생명의 이중적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봉사하는 시간, 그것은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최고의 시간, 위대한 시간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의 시간, 명상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지세요. 세월을 속량할 수 있고, 영원히 자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능력의 근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젊음의 건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지혜의 원천을 얻게 될 것입니다. 중심에서부터 진정으로 봉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영원한 시간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삶을 적자로 관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흑자로 관리하고 있습니까? 동물적인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인의 시간, 굴욕의 시간, 저주스러운 시간을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구속받은 자의 찬송과 감사가 넘친 영광된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장수가 무엇입니까? 오래오래 사는 것,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동물적인 생을 오래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서른 세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길게 산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살았느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십시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이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내게 향하신 주님의 경륜을 감사하며 주어진 세월을 아낄 것입니다. 매순간을 소중한 기회로 삼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가득히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가리켜 'eternal today'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의 시간을 한 시간 한 시간 살아갈 때에 그대로 영원으로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의 길이 이에 있음입니다. *
지혜자의 시간 관리(에베소서 5장 15절~21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친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서점을 경영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한 손님이 책방에 들어와 책들을 뒤져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이 책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1달러라고 프랭클린이 대답하자 손님은 "조금 싸게 안됩니까?"라고 흥정을 합니다. 이에 프랭클린은 "그렇다면 1달러 15센트를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손님은 "여보시오, 깎자는 데 더 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천연스럽게 다시 "1달러 50센트입니다"라고 값을 더 올려 부릅니다. 급기야 화가 난 손님이 따지고 덤빕니다. "왜 오히려 점점 더 비싸게 부르는 거요?" 프랭클린은 그 손님에게 대답합니다. "시간은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말씀으로 남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입니까?" 여러분, 시간은 돈이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곧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는 시간만을 생명이라고 이해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서 죽을 때까지의 그 시간이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시간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별할 줄 압니다. 그래서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자신의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그것을 극대화하여 큰일을 이룹니다. 반면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이 설 때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참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가능한 일, 아주 쉬운 일은 시시하게 생각하여 아예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소중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불가능한 일만을 하겠다고 목숨걸고 일생을 모두 바쳐버립니다.
세상에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시간에는 헬라말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고 하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이 시간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시간입니다. 나와 관계없이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이 시간은 그대로 흘러갑니다. 이에 비하여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은 주관적인 시간으로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 시간은 내 경험 속에 있으므로 내가 관리할 수 있습니다. 더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고 소중히 여길 수도 있고 경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시간되게 할 수도 있고 진공시간을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시간에는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시간, 관리할 수 없는 시간과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별도로 있습니다.
「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러시아의 대 문호(文豪)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 날, 그는 사형 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 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 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레닌그라드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
여러분, 시간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더 늘릴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습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일회적입니다. 한번 지나감으로 끝입니다. 시간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러기에 소중합니다. 또한 시간은 공평합니다. 고맙게도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부하다고 반드시 오래 사는 것도 아니요, 가난하다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닙니다. 공산주의체제 아래서 가난하게 부자유스럽게 사는 북한사람들이라고 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북에 계셨던 저희 어머니도 94세까지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듯 시간이란 공평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시간은 기회입니다. 소중한 기회입니다. 일 분이든 한 시간이든, 하루든 일 년이든 그 시간은 그대로가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시간은 은사입니다.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듯 느리게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두려워하는 시간은 조급하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비탄의 시간은 그렇듯 길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기쁨의 시간은 짧게 느껴집니다. 병든 시간은 아주 지루합니다. 반면에 건강한 시간은 그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시간이란 어떻습니까? 사랑의 시간은 영원한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원래 시간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인식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에 예속된 현재가 있고, 현재에 속한 현재가 있고,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기억일 따름입니다. 다만 과거에 속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미래도 그렇습니다. 다만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동물과 같이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아무 것도 모르는, 현재에 예속된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S. A.)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라고 생각하는 철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에 절대적인 시간과 상대적인 시간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절대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시간은 사람에 따라 질적으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시간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시간이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인가 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없어야 할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어떤 시간은 참으로 귀중하고 뜻 있게 보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시간은 없어야 할만큼 무의미하게 보내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시간, 잃어버린 시간이 많습니다. 진공시간이 그렇습니다. 의식이 없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18절)"---술 취해 가지고 몽롱해서 헛소리하는 시간을 말씀함입니다. 이것이 진공시간이요, 엄청나게 바보스러운 시간입니다. 또한 아무 생각 없는 반복적인 시간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먹고 마시고 자고…… 마냥 의식 없이 반복하는 것이 바로 무의미한 시간입니다. 생명은 의식입니다. 밝은 의식에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평소 일면식도 없는 분인데 때없이 찾아와서는 "목사님, 한번만 만나주세요"하고 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분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유익하고 해서 오늘은 참 좋은 일을 했다 싶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만나자고 해놓고는 아무 말이 없거나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보내고 나면 그 소중한 시간을 강도에게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세상에 이렇게 시간을 빼앗길 수도 있나 하는 허망한 기분이 드는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던 것과 하던 일을 중단하고 만났는데 나에게나 그분에게나 소용없는 시간이 되고 마는 만남입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남의 시간을 뺏지 마십시오. 시간은 생명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도적질하거나 강도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잘못입니다. 여러분, 시간을 금덩이의 값어치에 비기겠습니까, 돈의 값어치에 비기겠습니까? 시간은 지중한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에게 빼앗기는 시간이 있습니다. 증오에 빼앗기고 정욕에 빼앗깁니다. 육신의 욕망에 빼앗깁니다. 때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게 됩니다. 사랑만 해도 모자라는 시간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미워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나의 천금같이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일입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페이스는 생각지도 않고 남만 견제하고 시기질투 하느라 그만 전체를 다 잃어버립니다.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 시간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맙니다. 참으로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잃어버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부자유한 시간이 있습니다.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모든 문제에 걸쳐서 내가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대로 끌려가면서 시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소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간 역시 온전히 내 것으로 산 시간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16절)." 여기서 '아끼다'는 헬라어로 '엑사고라조'라고 합니다. 이 단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redeem이며, 곧 '속량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는 이 말씀을 다시 풀이하면 '세월을 속량하라, 시간을 속량하라'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말씀을 영어로 'redeem the time' 혹은 'make your time best'라고도 번역했습니다. 또한 요즘 새로 나오는 번역서들 가운데는 'make the most of the time'이라고 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말씀은 '최선의 시간, 최고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시간의 가치를 높이라는 아주 귀한 의미가 오늘의 본문말씀인 "세월을 아끼라"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시간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좋은 시간이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다. 먼저, 맑은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잠자는 시간, 그것은 죽은 시간입니다. 산 시간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잠은 적게 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을 자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씁니다. 몽롱하게 잠에 취해 가지고 있었던 시간은 우리가 산 시간에서 빼내야 합니다. 잠에 취한 시간, 그것은 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앞으로 푹 쉴 시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미리부터 쉬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죽은 뒤에는 길게 잘 터이니 사는 동안만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많이 사는 길이요, 길게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잠을 많이 자고 80세까지 사는 것이나 잠을 덜 자고 50세까지 사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우리 국민은 너무 잠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선진국의 국민을 보아하면 아주 부지런합니다.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자처합니다마는 보세요. 선진 국민이 없습니다. 선진 국민이 있고야 선진국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선진 국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지난해 겨울, 로스앤젤레스에 집회인도 하러 갔을 때에 겪은 일입니다. 집회 인도를 마치고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기에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딸아이와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차를 빌렸습니다. 아침에 떠나면 출근시간이므로 고속도로가 막힐 것 같아서 일찌감치 서둘러 새벽 다섯 시 반쯤에 출발했습니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그맘때도 아주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벌써 고속도로는 차들로 꽉 차 있더군요. 그것을 보고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를 보십시오. 일곱 시에만 나가도 차가 별로 없어 길이 훤합니다. 이래서야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통 사정이 어떻고, 러시아워가 어떻고, 교통 체증이 어떻고……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불평만 합니다. 적어도 선진국의 국민들은 새벽부터 달립니다. 시간을 아끼며 부지런히 살아갑니다.
어느 사회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세 시간은 일찍 일어난다고 합니다. 보통사람들보다 세 시간이나 덜 자고 부지런히 산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려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루 평균 다섯 시간 정도 잠을 잤습니다. 그다지 넉넉하게 자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건강합니다. 어느덧 목사가 된 지도 32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아파서 주일설교를 못한 적은 없으니까요. 이 정도면 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혹 주위에 보면 건강을 위해서랍시고 잠자리에서 뭉그적뭉그적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될 일입니다. 여러분, 저는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를 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자리에 오지 않은 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잠자리에서 뒹굴고 있겠지.' 물론 모두가 새벽기도에 참예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다면 아무래도 좀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새벽 시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맑은 공기 마시며 맑은 정신으로 찬송 부르고 성경 읽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이 답답한 백성들이 잘 모릅니다. 이래가지고 무엇이 되기를 바랍니까?
우리는 얼마나 굉장한 일을 하느냐는 묻지 말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꽉 차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시간 한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살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매순간을 알차게 살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사실 부지런하지 않고는 우리는 자신의 건강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우리에게 맑은 의식으로 특별히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라,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시간을 옳게 관리하는 비결을 말씀함입니다.
우리는 자유 해야 합니다. 생명은 자유입니다. 죄책감에 매여 있고, 죽음의 공포에 매여 있고…… 이렇듯 어딘가에 매인 삶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받은 자의 자유, 영적인 자유를 누릴 때에 비로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의미 있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마귀에게서 시간을 빼앗으라. 마귀에게 내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마귀로부터 시간을 빼앗으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통하여 의미 있고 보람있는 생을 찾아야 하고, 사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찬송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봉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소중한 시간을 남에게 줍니다. 그곳에 내 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듯 내가 생명을 줌으로 그 생명을 받은 사람과 더불어 생명의 이중적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봉사하는 시간, 그것은 아름다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최고의 시간, 위대한 시간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여러분, 회개의 시간, 명상의 시간,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지세요. 세월을 속량할 수 있고, 영원히 자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능력의 근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운동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젊음의 건강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독서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지혜의 원천을 얻게 될 것입니다. 중심에서부터 진정으로 봉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영원한 시간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삶을 적자로 관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흑자로 관리하고 있습니까? 동물적인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인의 시간, 굴욕의 시간, 저주스러운 시간을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구속받은 자의 찬송과 감사가 넘친 영광된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장수가 무엇입니까? 오래오래 사는 것,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동물적인 생을 오래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서른 세 살에 돌아가셨습니다. 길게 산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얼마나 살았느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십시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이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내게 향하신 주님의 경륜을 감사하며 주어진 세월을 아낄 것입니다. 매순간을 소중한 기회로 삼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가득히 채워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을 가리켜 'eternal today'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의 시간을 한 시간 한 시간 살아갈 때에 그대로 영원으로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의 길이 이에 있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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