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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이름(빌립보서 2장 5절~11절)

by 【고동엽】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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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이름(빌립보서 2장 5절~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지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기가 처음으로 어머니를 알아보기 시작하면 그 어머니는 너무도 기쁘고 귀해서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안다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 것입니까? 그 아기는 다만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상의 지식을 그 아기는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어머니를 알게 됩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누구다 라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서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토록 사랑을 받고 살아가면서도, 그 사랑 안에 살면서도 어머니를 바로 알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근방을 지나가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에 중동 지구를 다스리는 로마 군대의 본영이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수십만의 로마 군대가 거기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 군인들이 위풍당당하게 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에 속한 사람인지라 저들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계시적으로 한순간 고백을 한 것일 뿐, 베드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고백이 나온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것을 이야기하실 때에 베드로가 만류하고 나섭니다. 그러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고 예수님께서 엄히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그 고백은 특별한 영감이었을 뿐, 그 자신의 인격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고백이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그의 그 되심, 그 사실, 그 본체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 알고 있는 예수, 때로는 고백하는 예수가 반드시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과 지식이 같은 것입니까? 사건과 역사가 같은 것입니까? 사건은 어디까지나 말없는 사건으로, 사실로 남아 있을 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역사를 제 마음에 그리는 대로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씁니다마는 사건 자체는 엄연히 사실이 아닙니까? 그것을 사람이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또 편견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마는 종합적인 완전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 우리가 신문 기사를 봅니다. 우리는 그 신문 기사를 일단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 보면 사건과 기사가 영 다릅니다. 영 다를 수도 있으려니와 어떤 때에는 사건의 주인공이 나 자신일 때가 있습니다. 냉정하게 살펴보니 기자가 지금 엉뚱한 방향으로 글을 쓰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때로는 다르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합니다. 오해되기도 하고 미흡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인간의 지식이 과장될 때도 많습니다. 허와 실을 바로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를 누구로 보십니까? 예수라고 하는 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빌라도는 예수를 눈앞에 두고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재판하는 중에 외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많은 능력이 있는데, 말 한마디만 하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죄 없는 사람인데, 이 자리에 서서 그 누명을 쓰고 말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람을 보라!'

인간의 지식은 제한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경험에 제한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철학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경험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어떤 때에는 내가 무엇을 경험하면 좋을 것 같고, 경험하면 다 알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경험하고 나면 경험하기 전에 알던 것마저도 풍덩 소리가 나면서 아무 것도 모르게 되고 맙니다. 남는 것은 아집과 고집밖에 없습니다.

연세가 높은 분들, 경험이 많은 분들. 말조심합시다. 내가 경험했으니 다 안다는 말을 하지 맙시다.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몰라지고 마는 수가 있습니다. 바보스러워지고 맙니다. 그래서 생긴 고집이 지나치면 정신병자 취급받습니다.

여러분,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얼마나 한심스러운 것입니까? 여자들에게서 가끔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다면서 남자는 모두가 나쁘다고 몰아붙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남자를 몇 사람이나 겪어 보았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경험, 자기 필요, 자기 욕망에 얽매여서 바른 지식,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로, 억눌린 사람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이해하고 따르려 했습니다.

이따금 처음 믿는 분들 가운데서 기독교에 관한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저는 참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설명하는 책이 허다히 많지만 전부가 편견이거든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내 얼굴 생긴 대로 예수님 얼굴을 그려놓았습니다. 신학자들의 손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입니다' 하고 내줄 수 있는 책이 얼른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예수로, 사실을 사실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한 아주머니가 옆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 어머니가 열 네 살 난 아들을 앞에 두고 목을 놓아 울더랍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그 어머니의 이야기인즉 아들을 낳았는데 불행하게도 그 아이가 저능아였다는 것입니다. 백치요 멍청이였습니다. "내 생활 다 버리고, 내 지식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그렇게 다 포기한 채 십사 년 동안이나 이 아이 하나만을 정성껏 키워왔는데 글쎄, 이 아이는 날 보고 '어머니'라는 말 한마디를 못합니다. '어머니'라는 말 한 마디만 제대로 해도 내가 이렇게 속상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똑바로 하나님을 쳐다보며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 바보 같은 사람, 이 멍청한 사람을 하나님은 언제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기다리셔야 합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똑바로 안다고 하는 것,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요 ----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마는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서 자기 욕망에 따라서 보자기를 쓰고 수건으로 틀어막은 채 예수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그 베일을 벗고, 좀더 깨끗이 벗어버리고, 눈을 닦고 마음을 열고 선명하게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고 보고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 이런 아집과 굳은 마음이 깨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상당한 사건이 지나갑니다. 상당한 고통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만신창이가 되고, 어떤 사람은 피 흘린 흔적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에야 제대로 한번 예수 이름을 부릅니다.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저는 성경을 볼 때에 간간이 답답하게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성경을 볼라치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늘 '인자가, 인자가'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고 그리스도라느니 주()라느니 선생이니 랍비니 하고들 부릅니다. 어느 제자도 '인자여' 하고 불러 드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부르짖습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 이것이 단 하나의 예외일 뿐, 어느 입에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답답한 사람들과 지내시느라고 삼 년 동안 고생 깨나 하셨겠습니다. 도무지 통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하고 말입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제일 나이 많도록 산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거의 백 살이 되어서 다른 제자들이 다 순교하고 없을 때에 요한복음을 씁니다. 이때에 가서야 비로소 바른 고백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을 봅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바른 고백입니다. 이제야 바로 보았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이 고백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환난을 겪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아야 했으며 얼마나 많이 신비로운 체험을 했어야 했는지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흔히들 '바울의 기독론'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예수를 이렇게 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는 그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바로 그것, 그 이름을 높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 이 귀중한 고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종의 형체를 입었어요. 둘 다 '모르페'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형체'이자 '본체'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요, 종의 형체를 입었으며, 그 다음에 영광된 이름으로 높임을 받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깊이 읽어보면 이 세 가지를 함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압니다. 그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본체가 하나님이셨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첫째 고백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종의 몸을 입었다, 사람이 되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되어지는 과정을 완전히 비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있으나 없는 것처럼, 아나 모르는 것처럼, 할 수 있으나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것처럼 ----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종의 형체라고 표현합니다. 비어서 이렇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셔 영광의 주를 삼으셨습니다. 영광의 주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의 주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에 참 진리가 있고 참 사건이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십자가를 단순한 약자로서 지시는 것으로 알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왕의 대관식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본래 왕이라고 하는 것을 계시적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부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 아마도 제자들이 제일 기분이 좋았겠지요. '호산나, 호산나' 하고 만세를 부르기는 했는데 영문이나 알고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뜻 없이 그저 따라 부르다가 보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나옵니다. 제사장들이 "이거 웬일이냐? 웬 무리들이냐?" 하니 대답하는 말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왕이여, 왕이여' 하고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그 순간에 가서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입니다. 시골 사람들 서울 와서 장난 좀 하는 것이니 봐주구려"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초라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제 그 왕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충성이 거기에 왜 기울어지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헛된 호산나를 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에 있고 우리의 생명에 있어야 합니다. 그를 선지자로, 왕으로, 그리고 제사장으로 우리는 모십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현존하십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믿은 예수는 결코 역사 속에 지나간 예수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이셨습니다.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사 영광을 얻고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 이름은 기적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에 병이 낫고,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사단을 이기고 죄를 이겼으며,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저들은 이 이름을 곧 예수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영광된 이름, 능력의 이름을 저들은 그처럼 소중히 여기고 높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성전 문간에 앉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이 사람을 일으키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해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보는 순간 일으켜야 되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엄청난 일이올시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하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앞으로 몰려와 그를 추앙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리고 16절에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의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 그 이름을 믿으므로 내가 권능의 사람이 되고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오늘 이 사람을 낫게 했다고 갈파합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그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따를 때에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높일 때에 주께서 그를 높이십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무엇입니까? 누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가시겠습니까? 625동란 때에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죽었습니다. 그때의 군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죽으면서 이러더랍니다. "신선한 우유한 컵!" 어머니 젖은 먹어본 적이 없고 우유만 먹어보았으니 죽어가면서도 그렇게 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한국 청년들은 "어머니!" 라고 외치면서 죽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누구의 이름입니까? 스데반을 보십시다. 순교할 때에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고 잠들었습니다.

그 생명을 주께서 받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속받고 예수의 이름과 함께 그를 높이며 살아가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이름을 높이고, 이 이름에, 그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의 생활을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름, 그 이름과 함께 참된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이름(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지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기가 처음으로 어머니를 알아보기 시작하면 그 어머니는 너무도 기쁘고 귀해서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안다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 것입니까? 그 아기는 다만 '저렇게 생긴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상의 지식을 그 아기는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어머니를 알게 됩니다.

더욱이 어머니가 누구다 라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서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가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토록 사랑을 받고 살아가면서도, 그 사랑 안에 살면서도 어머니를 바로 알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근방을 지나가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에 중동 지구를 다스리는 로마 군대의 본영이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수십만의 로마 군대가 거기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로마 군인들이 위풍당당하게 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에 속한 사람인지라 저들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해서 계시적으로 한순간 고백을 한 것일 뿐, 베드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고백이 나온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것을 이야기하실 때에 베드로가 만류하고 나섭니다. 그러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고 예수님께서 엄히 책망하십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그 고백은 특별한 영감이었을 뿐, 그 자신의 인격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고백이었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그의 그 되심, 그 사실, 그 본체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 알고 있는 예수, 때로는 고백하는 예수가 반드시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과 지식이 같은 것입니까? 사건과 역사가 같은 것입니까? 사건은 어디까지나 말없는 사건으로, 사실로 남아 있을 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역사를 제 마음에 그리는 대로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씁니다마는 사건 자체는 엄연히 사실이 아닙니까? 그것을 사람이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또 편견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마는 종합적인 완전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로 우리가 신문 기사를 봅니다. 우리는 그 신문 기사를 일단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 보면 사건과 기사가 영 다릅니다. 영 다를 수도 있으려니와 어떤 때에는 사건의 주인공이 나 자신일 때가 있습니다. 냉정하게 살펴보니 기자가 지금 엉뚱한 방향으로 글을 쓰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때로는 다르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합니다. 오해되기도 하고 미흡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인간의 지식이 과장될 때도 많습니다. 허와 실을 바로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를 누구로 보십니까? 예수라고 하는 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빌라도는 예수를 눈앞에 두고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재판하는 중에 외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 많은 능력이 있는데, 말 한마디만 하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분명히 죄 없는 사람인데, 이 자리에 서서 그 누명을 쓰고 말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람을 보라!'

인간의 지식은 제한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경험에 제한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철학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경험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어떤 때에는 내가 무엇을 경험하면 좋을 것 같고, 경험하면 다 알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경험하고 나면 경험하기 전에 알던 것마저도 풍덩 소리가 나면서 아무 것도 모르게 되고 맙니다. 남는 것은 아집과 고집밖에 없습니다.

연세가 높은 분들, 경험이 많은 분들. 말조심합시다. 내가 경험했으니 다 안다는 말을 하지 맙시다.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을 어둡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몰라지고 마는 수가 있습니다. 바보스러워지고 맙니다. 그래서 생긴 고집이 지나치면 정신병자 취급받습니다.

여러분,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얼마나 한심스러운 것입니까? 여자들에게서 가끔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다면서 남자는 모두가 나쁘다고 몰아붙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남자를 몇 사람이나 겪어 보았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경험, 자기 필요, 자기 욕망에 얽매여서 바른 지식,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로, 억눌린 사람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이해하고 따르려 했습니다.

이따금 처음 믿는 분들 가운데서 기독교에 관한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저는 참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설명하는 책이 허다히 많지만 전부가 편견이거든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그리고 있습니다. 내 얼굴 생긴 대로 예수님 얼굴을 그려놓았습니다. 신학자들의 손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본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입니다' 하고 내줄 수 있는 책이 얼른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예수로, 사실을 사실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한 아주머니가 옆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 어머니가 열 네 살 난 아들을 앞에 두고 목을 놓아 울더랍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그 어머니의 이야기인즉 아들을 낳았는데 불행하게도 그 아이가 저능아였다는 것입니다. 백치요 멍청이였습니다. "내 생활 다 버리고, 내 지식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그렇게 다 포기한 채 십사 년 동안이나 이 아이 하나만을 정성껏 키워왔는데 글쎄, 이 아이는 날 보고 '어머니'라는 말 한마디를 못합니다. '어머니'라는 말 한 마디만 제대로 해도 내가 이렇게 속상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똑바로 하나님을 쳐다보며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 바보 같은 사람, 이 멍청한 사람을 하나님은 언제까지 사랑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기다리셔야 합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똑바로 안다고 하는 것,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요 ---- 이렇게 불러왔습니다 마는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서 자기 욕망에 따라서 보자기를 쓰고 수건으로 틀어막은 채 예수를 보고 있습니다. 이제 그 베일을 벗고, 좀더 깨끗이 벗어버리고, 눈을 닦고 마음을 열고 선명하게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고 보고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 이런 아집과 굳은 마음이 깨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상당한 사건이 지나갑니다. 상당한 고통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만신창이가 되고, 어떤 사람은 피 흘린 흔적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에야 제대로 한번 예수 이름을 부릅니다.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저는 성경을 볼 때에 간간이 답답하게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성경을 볼라치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늘 '인자가, 인자가'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고 그리스도라느니 주()라느니 선생이니 랍비니 하고들 부릅니다. 어느 제자도 '인자여' 하고 불러 드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부르짖습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 이것이 단 하나의 예외일 뿐, 어느 입에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답답한 사람들과 지내시느라고 삼 년 동안 고생 깨나 하셨겠습니다. 도무지 통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하고 말입니다.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제일 나이 많도록 산 사람이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거의 백 살이 되어서 다른 제자들이 다 순교하고 없을 때에 요한복음을 씁니다. 이때에 가서야 비로소 바른 고백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을 봅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바른 고백입니다. 이제야 바로 보았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이 고백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환난을 겪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아야 했으며 얼마나 많이 신비로운 체험을 했어야 했는지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흔히들 '바울의 기독론'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예수를 이렇게 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는 그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바로 그것, 그 이름을 높이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 이 귀중한 고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종의 형체를 입었어요. 둘 다 '모르페'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형체'이자 '본체'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요, 종의 형체를 입었으며, 그 다음에 영광된 이름으로 높임을 받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깊이 읽어보면 이 세 가지를 함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압니다. 그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본체가 하나님이셨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첫째 고백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종의 몸을 입었다, 사람이 되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 되어지는 과정을 완전히 비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있으나 없는 것처럼, 아나 모르는 것처럼, 할 수 있으나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것처럼 ----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종의 형체라고 표현합니다. 비어서 이렇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셔 영광의 주를 삼으셨습니다. 영광의 주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의 주를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에 참 진리가 있고 참 사건이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십자가를 단순한 약자로서 지시는 것으로 알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왕의 대관식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본래 왕이라고 하는 것을 계시적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부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 아마도 제자들이 제일 기분이 좋았겠지요. '호산나, 호산나' 하고 만세를 부르기는 했는데 영문이나 알고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뜻 없이 그저 따라 부르다가 보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나옵니다. 제사장들이 "이거 웬일이냐? 웬 무리들이냐?" 하니 대답하는 말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왕이여, 왕이여' 하고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그 순간에 가서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입니다. 시골 사람들 서울 와서 장난 좀 하는 것이니 봐주구려"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초라해질 수가 있습니까? 이제 그 왕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충성이 거기에 왜 기울어지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헛된 호산나를 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에 있고 우리의 생명에 있어야 합니다. 그를 선지자로, 왕으로, 그리고 제사장으로 우리는 모십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현존하십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믿은 예수는 결코 역사 속에 지나간 예수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이셨습니다.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사 영광을 얻고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 이름은 기적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에 병이 낫고,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사단을 이기고 죄를 이겼으며,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저들은 이 이름을 곧 예수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영광된 이름, 능력의 이름을 저들은 그처럼 소중히 여기고 높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성전 문간에 앉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이 사람을 일으키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해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보는 순간 일으켜야 되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엄청난 일이올시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하니 벌떡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앞으로 몰려와 그를 추앙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리고 16절에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의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 그 이름을 믿으므로 내가 권능의 사람이 되고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오늘 이 사람을 낫게 했다고 갈파합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그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따를 때에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의 이름을 높일 때에 주께서 그를 높이십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무엇입니까? 누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가시겠습니까? 625동란 때에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죽었습니다. 그때의 군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죽으면서 이러더랍니다. "신선한 우유한 컵!" 어머니 젖은 먹어본 적이 없고 우유만 먹어보았으니 죽어가면서도 그렇게 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젖을 먹고 자란 한국 청년들은 "어머니!" 라고 외치면서 죽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누구의 이름입니까? 스데반을 보십시다. 순교할 때에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고 잠들었습니다.

그 생명을 주께서 받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속받고 예수의 이름과 함께 그를 높이며 살아가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이름을 높이고, 이 이름에, 그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의 생활을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름, 그 이름과 함께 참된 영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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