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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구원하시는 이름(사도행전 4:1~12)

by 【고동엽】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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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시는 이름(사도행전 4:1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 천이나 되었더라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病人)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이 사람은 사십 년이 지나도록 앉은뱅이로만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나름의 문화를 토대로 한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자나 환자에 대하여 가지는 나쁜 교리도 그것입니다. 사람이 병드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환자나 병자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풍조는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라든지, 불교를 보면 그렇습니다. 부모가 숱한 고생을 한다고 합시다. 자식은 그 고생을 전생에 죄를 지어 받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업보로 당하고 있는 것이기에 내가 구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도움을 주는 마음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고 보니 누가 고생을 한다거나 병에 걸렸다거나 해도 당연히 업보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니 세상에 구제할 일도 없고 불쌍히 여길 일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이렇듯 무섭습니다. 그런데 오직 기독교만이 환자를 모든 사람과 똑같이 대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대합니다. 나아가 불쌍히 여기고 구제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세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께 처음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이 병자나 환자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시각입니다. 우리도 장애자나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끔 보면 소경을 만나거나 할 때면 '재수 없다'라고 말하거나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제입니다. 우리 의식의 뿌리에는, 맨 밑바닥에는 이런 좋지 못한 종교적 편견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마는 부모도 형제도 다 그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성전 미문에 메어다놓으면 하루종일 거기에 앉아서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서다가 그를 보게 됩니다. 그전 같으면 그냥 보고 지나갔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성령이 임하시어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섭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베드로를 칭송하고, 앉은뱅이에게 축하의 말을 해줄 법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지를 못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 사건을 놓고 시비가 벌어집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9)"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한 일'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공개적 치유입니다. 공개적으로 나타난 능력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시비가 벌어집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했으면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칭찬만 들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 어떤 선한 일에도 비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잊은 채 '내가 좋은 일 했는데 왜 말이 많으냐?' 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행한 착한 일에도 시비가 따랐는데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일에 시비가 없겠습니까? 그 어떤 아름답고 선한 일에도 시비와 비난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한편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대립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영광이 돌아가는 일이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이 앉은뱅이가 몇 년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이 사람을 도울 길이 없습니다. 그저 돈 한푼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별다른 구제의 방법이 없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도 많은 날 동안 들며나며 그 앉은뱅이를 보아왔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적선을 했는지는 모르나 그 역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른 구제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찮은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권위 있게 '일어나라'하는 한마디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그 제사장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성전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높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긴 옷을 입고 영광스럽게 제사 일을 행하면서 높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일은 베드로가 행했습니다. 베드로가 높임을 받는 순간입니다.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각, 제사장의 체면은 말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사는 순간입니다. 명예가 훼손되고 인격과 권세가 격하하고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때로 보면 이 사람에게 칭찬이 돌아갈 때에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돌아가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동생을 칭찬하게 되면 형이 부끄러워지고, 형을 칭찬하면 동생이 부끄러워집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한번 '누구네 집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또 일등을 했다는구나'라고 말해보십시오. 아마도 그 아이는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 공부 못한다고 나무라는 소리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치가 너무 빨라서 걱정입니다. 이 사람을 칭찬하는 순간 저 사람은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처럼 성전에서 봉사하는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이 사건은 아주 결정적이요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크게 부끄러워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본문 말씀 1절로 4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성전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가두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왜 체포된 것입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 사건의 정치적 파급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섰다는 사건은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에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에는 그 파급효과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고, 그 지지를 이용하여 다른 정치적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저들은 지레 겁먹은 것입니다.

제사장,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은 한마디로 다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부활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전함을 싫어하여(2)……"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전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전할밖에요.

그런데 이 부활의 도로 말미암아 제사장 및 사두개인에게 큰 손해가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저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은 믿으나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으나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이렇게 대립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서로 다른 직책이지만, 그보다는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 차이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이에 반하여 제사장은 진보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정치와 타협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딴에는 좀더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사두개인)은 로마의 권력과 타협을 함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켜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는 교리적인 믿음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부활을 부정하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서로가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는 하나 되고 연합을 했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렇듯 만나면 싸우는 사이였습니다. 대립 관계에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만, 내심 부활의 전파는 좋아합니다. 자기편이니까요.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에게 '봐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지금껏 주장한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부활은 있다. 천사도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때문에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저렇듯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기들의 반대당이 득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의 도()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제사장과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레위 족속 사두개인은 귀족입니다. 부자입니다. 로마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귀족의 신분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가며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기존 질서가 변혁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여당이 아닙니까? 언제나 귀족은 여당편입니다. 정치가 흐릿하고 경제가 어둡고 해도 돈 많은 사람들은 기존질서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에 저금해놓은 그 많은 돈, 정치가 흔들리면 다 휴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어쩌고저쩌고 해도 여당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야당편입니다. 옛날의 선거구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사실 무책임한 소리입니다. 위험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들은 심지어 공산당도 OK입니다. '공산당이 들어선다고 해서 이보다 더 못살라고'합니다. 그래서 까짓 것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족은 그 개혁을 거부합니다. 안정을 원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변혁을 원치 않습니다. 변화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나타나서 저렇듯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다닙니다. 이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기존의 질서를 흔듭니다. 사두개인들은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귀족적 지위와 부를 지켜나가는 데에 베드로와 요한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놓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누가 시켰느냐 함입니다. 가만히 보니 그런 일을 할 만큼 대단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고 틀림없이 배후가 있을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전을 깨끗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정숙해야 할 성전이 더러워지고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제사장들은 이것을 과감히 치우지를 못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들로 말미암아 날로 침해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몰 수가 없었습니다. 이권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더러움이 극에 다다랐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13)." 서슬 푸른 이 질타에 그 누구도 대항하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셨으니까요. 이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터라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다 쫓겨났습니다. 성전이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바로 그 시각, 제사장의 꼴이 아주 우습게 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으니까요. 잘못을 알면서도 하루하루 타협하고 지내느라 더러워진 성전을, 자기가 개혁해야 했는데 못함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예수라는 청년이 나타나서 개혁하는 것이고 보니 자기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어다놓고 질문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3)." 이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질문과 같습니다. 사실 저들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피해서 묻는 것입니다. 묻고 싶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저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뉘 이름으로 하느냐, 배후가 누구냐 하고 질문함으로 이 일을 반사회적 반정치인적인 거사인 양 끌어가려 합니다. 소란죄로 몰아서 정치적으로 처리하려 합니다. 종교문제를 정치문제로 돌리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수법이 핍박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순교사를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주겠다 할 때에 그 양자택일의 길에서 죽음을 택함으로 순교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전부 종교적이요 신앙적입니다마는, 그 형식이나 모양새는 전부 정치적이었습니다. 소란죄, 반정부 반정치적인 죄로 몰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은 문제로 돌려서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왕을 배신했다…… 이런 식으로 옭아매어 죽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 로마에 반역하여 일어난 정치적 운동으로 각색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 33)"라고 묻습니다. 굳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굴레 씌우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꾸며 예수님을 쉽게 제하자는 음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신다면 왕은 로마황제 한 사람밖에 없다는 그들의 정치에 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적 종교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돌려서 핍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은 다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8)"라고 말씀합니다. 그 시각, 성령이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충만'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에는 중생과 성화(聖化)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중생 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특수한 것이요 사명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은사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진다'라는 것은 가득 찬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착각하듯이 엑스터시(ecstasy)를 경험한다는, 절정을 경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시를 받는 순간도, 환상을 보는 순간도 아닙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 아주 맑은 정신입니다. 똑똑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을 정신이 몽롱해지고 헛소리가 좀 나와야 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영적인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고난이 있다 해도 저어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굴욕도 참을 수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핍박과 환난과 고통에 전혀 개의치 않는, 복음 전하는 자된 신령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신령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1017절로 20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셨고……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 공회에 끌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나, 그 때에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현장에 서는 그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내가 가르쳐주마 하십니다. 그 때에 네가 하는 말은 네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입을 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곧 신령한 지혜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를 감동시키시어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말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요 신령한 지식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똑바로 정확히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확실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적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신령한 지혜입니다. 실제로 경건하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보면 말이 적고 순해서 바보스러워까지 보입니다마는, 핍박을 받게 되면 아주 말을 잘합니다. 신앙적으로 핍박을 받게 되면 아주 똑바로 말을 잘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핍박을 가한 쪽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말은 잘하네'하고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맙니다.

일전에 북한에 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공산당원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신론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신앙이 어떻고 하면서 종교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합디다.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기 위하여 나 나름으로 설명을 해주었더니 한참을 듣고 나서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보다 말을 더 잘하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 때에 제가 말을 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으로 우리에게 신령한 지혜를 주십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시험지 답안 쓸 때에도 성령이 충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핍박과 환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고용하시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참 파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이것이 복음의 골자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 앉아 있습니다. 가야바가 지금 베드로 앞에 있습니다. 다른 제사장들과 문도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소.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셨소. 그분은 절대로 죽을 분이 아니오. 죽어서는 안된 분이오. 죽여서도 안될 분이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당신들이 죽였소' - 얼마나 무서운 선언입니까? 대제사장을 정면으로 정죄 하는 순간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세우시고, 메시야로 정하시고, 당신의 아들로 계시하신 바로 그분을 당신들이 죽였소'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에 담긴 심판적 요소를 읽을 수 잇습니다. 대제사장을 향하여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은 죽을죄를 지었소'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니 정면으로 나서서 정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베드로는 그 사건을 설명하는 데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일밖에 없소. 그런데 그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이 능력을 나타내시어 이 사람이 당신을 앞에서 걷게 된 것이오'하고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제는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그랬듯이 베드로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이렇듯 무서운 심판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나는 예수님의 이름에 고용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여기에 역사 하시고 계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하는 본문 11절 말씀도 똑같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이 사람이 이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메시야가 되시고, 재림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정죄함입니다. 이어 12절에 가서 결론을 내립니다. 12절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복음에 대한 절대성을 말씀함입니다.

다시 한번 북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평양에 갔을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사방에 써붙인 구호입니다. 어디를 가나 눈만 뜨면 보아야 합니다. 네온사인으로 해놓아서 밤에도 환하게 잘 보입니다.

거기 '절대화, 신조화, 무조건화'라는 구호가 있어요. 사실 power라고 하는 것은 절대화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에는 힘이 없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데 이것이 좀더 나은 것 같다 - 이런 정도로는 안됩니다.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권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이 종교도 좋고 저 종교도 좋고……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마는 옛날 계룡산에 여러 신()을 모셔놓은 산장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한번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의 안내를 받아 어느 다락방으로 들어가 보니 한 벽면에 둥그런 그림 몇 개가 죽 걸려 있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가리키며 야소(예수), 공자, 맹자, 석가의 사진이라고 설명합디다. 그렇게 사진을 모셔놓고 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다원종교에는 결코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무서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선적인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님만이 복음이니까요. 예수님의 이름 외의 다른 것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는 기독교인처럼 고집센 사람들이 없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진리에 관한 한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 자만을 구원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이 절대화할 때에 힘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대화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다'라고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름은 오직 하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아닌 다른 이름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절대적 복음입니다.  

 

구원하시는 이름(사도행전 4:112)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 천이나 되었더라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病人)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이 사람은 사십 년이 지나도록 앉은뱅이로만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나름의 문화를 토대로 한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자나 환자에 대하여 가지는 나쁜 교리도 그것입니다. 사람이 병드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환자나 병자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풍조는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라든지, 불교를 보면 그렇습니다. 부모가 숱한 고생을 한다고 합시다. 자식은 그 고생을 전생에 죄를 지어 받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업보로 당하고 있는 것이기에 내가 구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도움을 주는 마음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고 보니 누가 고생을 한다거나 병에 걸렸다거나 해도 당연히 업보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니 세상에 구제할 일도 없고 불쌍히 여길 일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이렇듯 무섭습니다. 그런데 오직 기독교만이 환자를 모든 사람과 똑같이 대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대합니다. 나아가 불쌍히 여기고 구제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세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께 처음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이 병자나 환자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시각입니다. 우리도 장애자나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끔 보면 소경을 만나거나 할 때면 '재수 없다'라고 말하거나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문제입니다. 우리 의식의 뿌리에는, 맨 밑바닥에는 이런 좋지 못한 종교적 편견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마는 부모도 형제도 다 그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성전 미문에 메어다놓으면 하루종일 거기에 앉아서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서다가 그를 보게 됩니다. 그전 같으면 그냥 보고 지나갔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성령이 임하시어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섭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베드로를 칭송하고, 앉은뱅이에게 축하의 말을 해줄 법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지를 못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 사건을 놓고 시비가 벌어집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9)"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한 일'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공개적 치유입니다. 공개적으로 나타난 능력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시비가 벌어집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했으면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칭찬만 들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 어떤 선한 일에도 비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잊은 채 '내가 좋은 일 했는데 왜 말이 많으냐?' 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행한 착한 일에도 시비가 따랐는데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이 하는 일에 시비가 없겠습니까? 그 어떤 아름답고 선한 일에도 시비와 비난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한편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대립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영광이 돌아가는 일이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이 앉은뱅이가 몇 년 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이 사람을 도울 길이 없습니다. 그저 돈 한푼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별다른 구제의 방법이 없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도 많은 날 동안 들며나며 그 앉은뱅이를 보아왔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적선을 했는지는 모르나 그 역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른 구제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찮은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권위 있게 '일어나라'하는 한마디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그 제사장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성전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높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긴 옷을 입고 영광스럽게 제사 일을 행하면서 높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일은 베드로가 행했습니다. 베드로가 높임을 받는 순간입니다.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각, 제사장의 체면은 말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사는 순간입니다. 명예가 훼손되고 인격과 권세가 격하하고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때로 보면 이 사람에게 칭찬이 돌아갈 때에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돌아가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동생을 칭찬하게 되면 형이 부끄러워지고, 형을 칭찬하면 동생이 부끄러워집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한번 '누구네 집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또 일등을 했다는구나'라고 말해보십시오. 아마도 그 아이는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 공부 못한다고 나무라는 소리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치가 너무 빨라서 걱정입니다. 이 사람을 칭찬하는 순간 저 사람은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처럼 성전에서 봉사하는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이 사건은 아주 결정적이요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크게 부끄러워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본문 말씀 1절로 4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성전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가두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왜 체포된 것입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 사건의 정치적 파급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섰다는 사건은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에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에는 그 파급효과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고, 그 지지를 이용하여 다른 정치적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저들은 지레 겁먹은 것입니다.

제사장,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은 한마디로 다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부활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전함을 싫어하여(2)……"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전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전할밖에요.

그런데 이 부활의 도로 말미암아 제사장 및 사두개인에게 큰 손해가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저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은 믿으나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으나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이렇게 대립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서로 다른 직책이지만, 그보다는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 차이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이에 반하여 제사장은 진보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정치와 타협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딴에는 좀더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사두개인)은 로마의 권력과 타협을 함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켜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는 교리적인 믿음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부활을 부정하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서로가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는 하나 되고 연합을 했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렇듯 만나면 싸우는 사이였습니다. 대립 관계에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만, 내심 부활의 전파는 좋아합니다. 자기편이니까요.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에게 '봐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지금껏 주장한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부활은 있다. 천사도 있다'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때문에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저렇듯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기들의 반대당이 득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의 도()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제사장과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레위 족속 사두개인은 귀족입니다. 부자입니다. 로마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귀족의 신분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가며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기존 질서가 변혁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여당이 아닙니까? 언제나 귀족은 여당편입니다. 정치가 흐릿하고 경제가 어둡고 해도 돈 많은 사람들은 기존질서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에 저금해놓은 그 많은 돈, 정치가 흔들리면 다 휴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어쩌고저쩌고 해도 여당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야당편입니다. 옛날의 선거구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사실 무책임한 소리입니다. 위험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들은 심지어 공산당도 OK입니다. '공산당이 들어선다고 해서 이보다 더 못살라고'합니다. 그래서 까짓 것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족은 그 개혁을 거부합니다. 안정을 원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변혁을 원치 않습니다. 변화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나타나서 저렇듯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다닙니다. 이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기존의 질서를 흔듭니다. 사두개인들은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귀족적 지위와 부를 지켜나가는 데에 베드로와 요한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놓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누가 시켰느냐 함입니다. 가만히 보니 그런 일을 할 만큼 대단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고 틀림없이 배후가 있을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전을 깨끗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정숙해야 할 성전이 더러워지고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제사장들은 이것을 과감히 치우지를 못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들로 말미암아 날로 침해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몰 수가 없었습니다. 이권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더러움이 극에 다다랐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13)." 서슬 푸른 이 질타에 그 누구도 대항하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셨으니까요. 이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터라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다 쫓겨났습니다. 성전이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바로 그 시각, 제사장의 꼴이 아주 우습게 됩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으니까요. 잘못을 알면서도 하루하루 타협하고 지내느라 더러워진 성전을, 자기가 개혁해야 했는데 못함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예수라는 청년이 나타나서 개혁하는 것이고 보니 자기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어다놓고 질문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3)." 이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질문과 같습니다. 사실 저들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피해서 묻는 것입니다. 묻고 싶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저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뉘 이름으로 하느냐, 배후가 누구냐 하고 질문함으로 이 일을 반사회적 반정치인적인 거사인 양 끌어가려 합니다. 소란죄로 몰아서 정치적으로 처리하려 합니다. 종교문제를 정치문제로 돌리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수법이 핍박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순교사를 한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주겠다 할 때에 그 양자택일의 길에서 죽음을 택함으로 순교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전부 종교적이요 신앙적입니다마는, 그 형식이나 모양새는 전부 정치적이었습니다. 소란죄, 반정부 반정치적인 죄로 몰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은 문제로 돌려서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왕을 배신했다…… 이런 식으로 옭아매어 죽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 로마에 반역하여 일어난 정치적 운동으로 각색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 33)"라고 묻습니다. 굳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굴레 씌우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꾸며 예수님을 쉽게 제하자는 음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신다면 왕은 로마황제 한 사람밖에 없다는 그들의 정치에 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적 종교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돌려서 핍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은 다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8)"라고 말씀합니다. 그 시각, 성령이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충만'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에는 중생과 성화(聖化)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중생 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특수한 것이요 사명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은사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진다'라는 것은 가득 찬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착각하듯이 엑스터시(ecstasy)를 경험한다는, 절정을 경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시를 받는 순간도, 환상을 보는 순간도 아닙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 아주 맑은 정신입니다. 똑똑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을 정신이 몽롱해지고 헛소리가 좀 나와야 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영적인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고난이 있다 해도 저어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굴욕도 참을 수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핍박과 환난과 고통에 전혀 개의치 않는, 복음 전하는 자된 신령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신령한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1017절로 20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셨고……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 공회에 끌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나, 그 때에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현장에 서는 그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내가 가르쳐주마 하십니다. 그 때에 네가 하는 말은 네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입을 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곧 신령한 지혜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를 감동시키시어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말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요 신령한 지식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똑바로 정확히 알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확실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적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신령한 지혜입니다. 실제로 경건하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보면 말이 적고 순해서 바보스러워까지 보입니다마는, 핍박을 받게 되면 아주 말을 잘합니다. 신앙적으로 핍박을 받게 되면 아주 똑바로 말을 잘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핍박을 가한 쪽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말은 잘하네'하고는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맙니다.

일전에 북한에 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공산당원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신론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신앙이 어떻고 하면서 종교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합디다.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기 위하여 나 나름으로 설명을 해주었더니 한참을 듣고 나서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보다 말을 더 잘하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 때에 제가 말을 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시간에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으로 우리에게 신령한 지혜를 주십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합디다. 시험지 답안 쓸 때에도 성령이 충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핍박과 환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고용하시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참 파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 이것이 복음의 골자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 앉아 있습니다. 가야바가 지금 베드로 앞에 있습니다. 다른 제사장들과 문도들도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소.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셨소. 그분은 절대로 죽을 분이 아니오. 죽어서는 안된 분이오. 죽여서도 안될 분이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당신들이 죽였소' - 얼마나 무서운 선언입니까? 대제사장을 정면으로 정죄 하는 순간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세우시고, 메시야로 정하시고, 당신의 아들로 계시하신 바로 그분을 당신들이 죽였소'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에 담긴 심판적 요소를 읽을 수 잇습니다. 대제사장을 향하여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은 죽을죄를 지었소'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니 정면으로 나서서 정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베드로는 그 사건을 설명하는 데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일밖에 없소. 그런데 그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이 능력을 나타내시어 이 사람이 당신을 앞에서 걷게 된 것이오'하고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제는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그랬듯이 베드로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이렇듯 무서운 심판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나는 예수님의 이름에 고용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여기에 역사 하시고 계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하는 본문 11절 말씀도 똑같습니다. 당신들이 죽인 이 사람이 이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메시야가 되시고, 재림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정죄함입니다. 이어 12절에 가서 결론을 내립니다. 12절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복음에 대한 절대성을 말씀함입니다.

다시 한번 북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평양에 갔을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사방에 써붙인 구호입니다. 어디를 가나 눈만 뜨면 보아야 합니다. 네온사인으로 해놓아서 밤에도 환하게 잘 보입니다.

거기 '절대화, 신조화, 무조건화'라는 구호가 있어요. 사실 power라고 하는 것은 절대화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에는 힘이 없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데 이것이 좀더 나은 것 같다 - 이런 정도로는 안됩니다.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강권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이 종교도 좋고 저 종교도 좋고…… 이것은 말이 안됩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마는 옛날 계룡산에 여러 신()을 모셔놓은 산장이 있다고 해서 일부러 한번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의 안내를 받아 어느 다락방으로 들어가 보니 한 벽면에 둥그런 그림 몇 개가 죽 걸려 있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가리키며 야소(예수), 공자, 맹자, 석가의 사진이라고 설명합디다. 그렇게 사진을 모셔놓고 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다원종교에는 결코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무서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선적인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님만이 복음이니까요. 예수님의 이름 외의 다른 것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사람들이 볼 때에는 기독교인처럼 고집센 사람들이 없겠지요.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진리에 관한 한 결코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오는 자만을 구원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이 절대화할 때에 힘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대화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다'라고도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름은 오직 하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아닌 다른 이름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절대적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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