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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을만한 믿음(사도행전 14:8~10)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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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을만한 믿음(사도행전 14:810)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루스드라 선교에서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가 강조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가, 말씀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말씀에 대한 믿음, 즉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능력의 성격과, 말씀이 우리에게 와서 능력을 나타내게 될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은,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맨처음 강조되고 있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사람이 앉은뱅이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발을 쓰지 못한다 합니다. 둘째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다 합니다. 셋째로, 그런고로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고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찍이 이런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말씀하는 이 자리에 나왔지마는, 결코 자기가 걷게 되리라고 하는 기대감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특징은 말씀의 능력입니다. 능력은 말씀과 함께 역사합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앉은뱅이인 그가 이제 바울의 말씀을 듣더라 말씀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9)"--'듣는다'라는 말은 헬라 원문으로 '아쿠오'라고 합니다.

이 뜻은 '누구의 말을 듣는다' 혹은 '알아듣는다'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을 다해서 듣고, 열심히 듣고,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한 마디만 들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들어나갔다는 얘기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이 앉은뱅이인 자신을 향해서 "일어서라(10)"할 때에 그 말씀만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이전에 사도 바울이 설교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열심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에 나타난 사건은 말씀과 함께 역사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설교요 설교가 말씀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여기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말씀에 역사가 먼저 있고, 그 말씀 속에서 영적인 생명이 구원을 받습니다. 영적인 생명이 구원을 받으면서 그 말씀의 능력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생각을 고쳐놓고,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사로잡고, 마침내는 그의 몸까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는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바로 그러한 능력이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러한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들으면서 영혼이 건강해지고, 그 생각이 건강해지고, 그리고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 말씀의 능력이 몸까지 작용을 하면서 이 엄청난 기적을 보이게 되었다--그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이 사람을 주목해 보았다 합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삶 중에서 이 사람을 더 집중적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보다 더 열심히 사도 바울을 쳐다보니까 그렇습니다. 이 강단에 서서 보면, 저 뒤에 앉은 사람까지 다 보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열심히 듣는 사람도 보이나 안 듣는 사람이 자꾸 보여서 걱정입니다. 졸고 있다든지, 자꾸 부스럭거린다던가, 여기저기를 긁고 있다든지, 무엇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줍는다든다…… 이런 사람들이 자꾸 보이면 그만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심기가 편하지 않아요. 그래서 설교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할 때에 사람들이 다 열심히 듣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100퍼센트 다 우등생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의 하나가, 제일 열심히 듣는 사람을 보고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 말되는 얘기입니다. 제일 열심히 듣고,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고, 어떤 말씀에 대해서는 끄덕끄덕하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듣고, 웃을 일이 있을 때에는 웃고, 울이 일이 있을 때에는 울고…… 이런 사람을 쳐다보면서 설교해야 말할 재미도 있고, 힘도 나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졸고 있는 사람, 그것도 입벌리고 조는 사람을 보면 그만 말할 재미가 없어집니다. 아주 힘이 떨어집니다.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서 좋은 점을 보고,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면을 보고 살아야지요. 간혹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사람 몸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손가락 하나가 뭐 어떻다 하고 그것을 단점으로 얘기합니다. 무릇 다른 많은 좋은 점, 그쪽만을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어쨌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사도 바울이 지금 설교를 하는데 많은 사람 중에서 유독 이 사람이 눈에 띄었습니다. 열심히 쳐다봅니다. 열심히 듣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듣는 모습을 보니, 참 열심히 듣는구나 생각됩니다. 그실 그 사람은 열심히 듣는 것이 아니라 받아먹는 것입니다. 입을 벌리고 받아먹는 그런 자세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보는 순간,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특수한 믿음입니다. 저 사람의 영혼이 구혼을 받았구나, 저 사람이 말씀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있구나, 속 사람이 중생하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사이에 확신이 옵니다. 저 정도라면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그래서 일어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설교자의 마음에 생겼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너의 입을 넓게 열라, 하나님이 채우시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 말씀의 원문을 찾아보았더니, 그 의미가 무엇과 같은고 하니, 마치 날짐승이나 새의 어미가 먹이를 가지고 와서 제 새끼에게 먹이려고 할 때에 새끼가 입을 딱 벌리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자세히 보았습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어미가 메뚜기 한 마리를 물어 가지고 와서 먹이려고 할 때, 그 새끼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눈도 못 떴는데 어미가 먹이를 가지고 온 줄 알고,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는 것입니다. 어미는 새끼들이 저마다 다 입을 벌리는데도 차례차례 먹여나갑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이 이런 심증을 가집니다. 이런 확신을 가집니다. 이런 영적 지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 사람의 심령 속에 영혼이 지금 구원받고 있다, 저 사람 속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 말씀의 능력이 여기에 역사하고 있다,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을 향하여 "일어서라(10)"고 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는 자와 말을 하는 자,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이러한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얼마나 높이 평가해야 될 사건이니까? 그래,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구원 받을만한 믿음,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원 받을만한 믿음--구원은 반드시 들음에서 온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확실한 성서적 철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들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듣지 못한 복음을 어떻게 믿으리요,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전하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전하리요--꼭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전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저 북녘 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전에 제가 그곳의 어떤 청년을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성경이 무슨 책인지 압니까?" 그랬더니 성경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답니다. 본 것은 고사하고 성경이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답니다. "온 세계가 제일로 많이 읽는 책인데 모릅니까?" 그래도 모른다고 합니다. 진짜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입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복음은 들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더욱 귀중한 것은, 이 듣는다는 사건 그것부터가 벌써 은혜입니다. 듣도록 기회를 주셔야지요. 전하는 자가 있으니 듣지요. 보냄 받았으니 전하지요. 또 성령이 우리 마음을 열어주시니 듣는 것입니다.

사실은 듣는다는 것 자체가, 들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큰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큰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이 '듣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얼마나 귀한 축복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가끔 미주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일이 있습니다. 가서 보면,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주로 여기 한국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제 설교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주었습니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우편으로 보내준 것입니다. 그래, 저보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분명히 소망교회 교인입니다. 테이프 교인입니다." 테이프 교인, 분명히 소망교회 교인입니다. 왜요? 분명히 목사님 설교를 다 듣고 있거든요. 주일날 낮과 수요일 저녁, 일주일에 이 두 번 설교하는 것을 1, 210년을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이 이 지방에 오셨다고 해서, 그래서 얼굴 뵈러왔습니다"합니다. 그러니 많이 모일 수밖에요. 더구나 여기서는 우리가 들을 기회가 많지만, 저 멀리 가 있을 때에는 직접 들을 기회가 없거든요. 그런고로 듣는다는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듣는다는 것--구원은 분명히 들음에서 옵니다. 들어도 바로 들어야 합니다. 편견 없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은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를 보세요. 길가와 같은 마음도 있고, 돌짝 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넝쿨과 같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것 참 불행입니다. 종자는 틀림없는데 마음 밭이 못되었습니다.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야 씨가 떨어져 싹이 나고, 꽃이 피고, 3060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자가 좋아도 아무리 말씀이 귀해도, 듣는 자에게 믿음이 없으면, 듣는 자가 바로 듣지 못하면, 생명의 역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말씀을 듣는 믿음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듣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외에도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많은 시간 동안 복음을 전했지마는, 그 많은 사람이 듣고 있는데도 그 자리에는 특별히 이 사람에게만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듣는 자세를 보고, 열심히 집중적으로 듣는 것을 보고,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 재미있다, 처음 듣는 소리다, 그것 참 시원하게 말하는구나 하고 듣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호기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지적인 관심으로 듣는 것도 아닙니다. 가끔 제가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주로 어떤 회사나 단체 같은 데를 가보면, 여기서 설교 듣고 적어 가지고 갔다가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훈시할 때에 써먹는다고 합니다. 내가 듣고 남에게 전하는 것,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철학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사는 지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듣는 게 귀한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바울이 키가 작았답니다. 눈도 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습니다.

키가 작으나 크나 상관없습니다. 심지어는 무슨 얘기를 했느냐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순간부터 그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분을 만나 뵙고, 조금 섭섭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나가시는 분인데,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 설교가 시원치 않습니다." 그 말도 마음에 걸렸습니다마는, 그 다음에는 좀 나아질까 해서 제가 책을 사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책을 안보더라구요. 일부러 사다준 책도 안 보다니, 당장에 충고하고 싶었지만 그실 마음 자세가 아예 멀어진 사람입디다. 저는 그분을 생각할 때 참 불쌍히 여겨집니다. 그 많은 날 교회에 나갔건만, 예수 안 믿은지 오래구나, 성령 떠난 지도 오래구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듣기 시작하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그렇게 들리기 시작하면 어느 시간에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것 참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적 신앙으로 말하자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방언을 합니다. 그 방언이라는 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앉은뱅이를 보십시오, 낯선 사도 바울이 설교하는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안 합니다. 열심히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뵙고,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밝아지고,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고, 그래서 지금 영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세, 그것은 아주 다릅니다. 그건 사람의 얘기로 듣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앉은뱅이인 그가 이런 자세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얻을만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제 완전히 Total acceptance, 전적으로 수락하는 것입니다. 가감이 없어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지금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음식을 먹는다고 합시다. 그 음식을 놓고, 이것을 먹어서 좋을까 나쁠까, 여기에 혹 독약은 없나 하고 의심하면서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내 집에서 먹든 남의 집에서 먹든, 이 음식은 다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먹어야지요. 제가 우리 받은, 아주 무서운 교훈 하나가 있습니다. '밥상에 올려놓은 것은 다 먹어라'라는 것입니다. 밥투정했다가는 큰일납니다. 절대 안됩니다. 정말이지 이 음식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믿고 먹어야 합니다.

제가 은수저를 선물로 받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사실 은수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안 좋아하느냐, 공개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사실, 은수저는 도열이 잘 되기 때문에 뜨거운 음식에는 빨리 뜨거워지고, 손까지 뜨거워지고 잘못하면 입도 데입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은수저가 생긴 유래입니다. 옛날에, 왕을 독살하려고 왕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탄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혹 음식에 독약을 넣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수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은수저 색깔이 시커멓게되면 독약이 들었다 해서 안 먹었답니다. 독약이 들었나 안 들었나 살펴보느라고 은수저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영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인지 난 믿음으로 먹는다, 은수저가 시커멓게 되든 그대로든 상관 안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좌우간 음식은 다 유익한 것으로 알고, 고루고루 다 먹는 것이 좋습니다. 편식하는 것은 안 좋습니다. 입에 들어갔던 것은 다 먹고, 밥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다 먹는, 그런 자세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건강해야 입맛이 생기지요. 병들면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어도 못 먹습니다.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마는 간장이 나빠지면 입맛이 떨어진대요. 음식이 입에 쓰다고 합니다. 일전에 제가 간장 나쁜 분과 함께 식사를 했었습니다. 그분이 식사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입맛이 좋았는데 이제는 영 아닙니다. 먹어야만 된다니까 먹는 것이지……" 지금 먹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맛이 없을 수가 없답니다. 간장이 나쁘면 전혀 입맛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건강해서 간장이 튼튼하면 모든 음식 냄새도 좋고 입맛도 좋은데, 건강치 못하면 냄새도 싫어지면서 속에서 올라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먹을래야 먹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꼭 의지적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에 입맛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려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말씀은 이렇게 의심이 생기고, 저 말씀은 저렇게 의심이 생기고, 그래서 낙서나 하고 앉았고……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참으로 불행한, 이미 병든 지 오래된 심령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깨끗하게 들려져야 되는데 들려지지 않습니다. 잡음이 생기고, 잡생각이 생기고, 의심이 생기고, 거부감이 생기고, 비평이 생기고…… 그러니까 아예 냄새부터 싫은 것입니다. 그 음식을 맛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간절하게, 전적으로 수락하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은 정말로 건강한, 이미 영적으로 구원 얻은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말씀에 계속적으로 순종하면서 들은 것 같습니다.

이 말씀 할 때에 아멘, 저 말씀에도 아멘, 이렇게 나가다가 일어나라 그러니까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한마디로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순종하는 중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근심도 걱정도, 내일 먹을 것, 모레 살 것,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고, 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걸어본 적이 없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무시하고 있나…… 싹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가끔씩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보면, 부부간에 같이 나와 있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옆의 사람을 쿡 찌릅니다. '잘 들어 둬.'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쪽에서도 한번 쿡 찌릅니다. '너나 잘 들어라.'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래, 교회에 와서 부부간에 앉아 있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통하고 있거든요. 전혀 안 통해야 합니다. 적어도 말씀 듣는 순간에는 옆에 사람이 있는지 나무가 있는지 몰라야 합니다. 여기에 남자가 있든 여자가 있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자리가 좁아 빽빽이 앉았습니다마는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직선적으로 말씀과 나, 이렇게 종말론적 관계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누가 앉아 있고, 이 사람이 들어야 할 말인데, 저 사람이 들어야 할 말인데…… 이런 것들이 다 좋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내 과거가 어떻고, 현재가 어떻고, 미래가 어떻고,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고, 다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처지, 자기 경험, 자기 지식, 다 망각해버렸습니다. 자기 존재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순수하게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그럼요,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그렇고 말고요, 당신은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하겠습니다--물론이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차례차례 그대로 들어나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라도 거부의 태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판단력까지 다 반납해버렸습니다. 마음에서부터 깊이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순종, 순종, 순종해나갑니다. 그런 중에 딱 주목하고,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적어도 그 순간만은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만일에 어떤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거기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바울 선생님을 쳐다보면서 꼭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웃기는군, 내가 보통 앉은뱅이인 줄 아나? 누군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못 일어나는 줄 알어?" 그밖에도 뭐 할말이 많지요.

그러나 그는 자기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이렇듯 참 귀한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제각기 돌 하나씩 가지고 올라가자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왜 이런 말을 하실까 하고 의아해합니다. 베드로는 순종형입니다.

'가지고 가라면 가지고 가는 것이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하며 그냥 큼직한 돌을 둘러메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도마는 '그것 가지고 무얼 하려고 그러시나, 집을 지으려면 여기에다 지어야지, 꼭대기에다 지을 것이 뭐람, 그것 참 이상하다' 합니다. 하지만 가지고 가라는데 안갖고 갈 수도 없고 해서 조그마한 돌을 하나 골라서 주머니에다 넣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빌립과 가룟 유다는 또 생각이 좀 다릅니다.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니, 여기서부터 가지고 갈 것이 뭐 있나, 위에 올라가면 거기도 돌이 많은데, 거기 가서 돌 주우면 되지 여기서부터 힘들게 가지고 올라갈 필요 없잖아? 정말 거기서 필요하다면, 늦게라고 주우면 될 것 아니겠어?' 이렇게 제 마음대로 해석해버리고 빈손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간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올라오느라고 수고했다. 땀도 흘리고 피곤하고 배도 고플 텐데 어서들 앉아라."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손에 있는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 하소서." 당연히 베드로의 돌이 가장 큰 떡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을 때에 이렇게 저렇게 따지지 마십시오. 꽉 믿으세요. 전적으로 믿어버리세요. 이것이 바로 구원 얻을만한 믿음입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마음 속에 이같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영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보며, 그렇다면 육적으로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이란? 영혼 구원이 먼저입니다. 중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구원은 또다른 차원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바로 병고침받는 것입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이 말씀은 그의 육체를 말씀함입니다. 육체의 구원, 그것은 곧 질병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을 말하고, 건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의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을 전하면서 본 것은 이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들어갔고, 이미 영혼을 구원받았습니다. 육체가 구원받을만한 것,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 믿음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 영혼이 구원받는 믿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또한, 이적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별도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병에 걸렸는데, 이럴 때에 어떤 사람은 '나는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하면 나을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기도하면 이 병이 나을 것이다'합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생겨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지 않는데 지옥 거부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온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믿는, 이렇게 초자연적인 권능을 믿는 믿음은 또 하나의 특수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은사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믿음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함께 이 사람을 보세요. 순종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으로만 아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서라"할 때에 행동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가십니다. 거기에 38년 된 환자가 있습니다.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리고 두 번째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십니다. 38년을 누워 있었는데 다 낫게 하셨습니다. , 보세요. 병이 나으리라는 말씀이 있은 다음에 툭툭 털고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라 할 때에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나은 것입니다. 만일 일어나라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이 '내 지금 몇 년이나 누워 있는지나 알고 하시는 말씀이오? 자그마치 38년이고. 그런 날더러 일어나라 나라가 웬말이오?" 이렇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결국은, 나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일어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순간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또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을 향해서 바울이 말씀합니다. "일어서라."--그럴 때에 그는 자기가 앉은뱅이라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일어납니다. 힘을 씁니다. 그 순간 능력이 작동을 했습니다. 행동적 순종에 하나님의 능력이 작동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능성만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학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언제나 가능성 있다 없다 말해서는 안됩니다. 지식으로 생각하는 믿음,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믿음, 나아가서는 행동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적은 곧 설교입니다. 설교 속에는 이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진리가 잇습니다. 설교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많이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많이 전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믿음대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정도의 믿음이 있어서 이런 구원을 받고, 저런 사람은 저런 큰 믿음이 있어서 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서 영혼 구원을 받으나 생활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었던 이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구원을 받는 큰 능력을 몸으로 체험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구원 얻을만한 믿음입니다. 이 사람이 바울더러 '나를 고쳐주세요'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쳤다는 말씀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 마음 속이 구원 얻을만하게 된 순간에 이와 같은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그 은혜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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