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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지 못한 믿음(사도행전 24:22~27)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수 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벨릭스 총독의 희미하고, 변질되고, 이질적이고, 잘못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 부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벨릭스는 바울을 자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 말씀한 바와 같이 벨릭스는 예수의 도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그렇다면 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고 또 "벨릭스가 두려워하여(25절)"-복음을 듣고 두려운 마음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 얻지 못했습니다. 구원을 얻을만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로 말하자면 교회도 나왔어요, 목사님도 만났어요, 그것도 동부인(同夫人)해서 부부가 같이 들었습니다. 예배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믿음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이요, 지극히 자기본위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맥락대로 보면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가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참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 얼마나 좋은 기회였습니까? 벨릭스는 사도 바울을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사도 바울을 하루에 열 번이라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이런 특별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벨릭스는 끝내 구원받지 못하고 맙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옥중서신인 빌립보서를 읽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 있을 때인데, 이 때와 상황이 비슷합니다.
그가 로마감옥에 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특별히 친위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생각해보면 벨릭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고관들입니다. 요샛말로 라면 그 명단을 공개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동기로 찾아왔건만 그렇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이 친위대 사람들과 감옥에서 만나 말씀을 전했고 결국은 그들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대로마제국이 마침내 뒤바뀌어 기독교를,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로마를 보세요.
2천 년 전의 그 많은 문화 유산이 철저하게 기독교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된 실마리가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믿은 것이었습니다. 또 고관들 외에는 바울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역사 전환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굉장합니다. 이와 비교해볼 때에 벨릭스는 참 유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를 갖지 않았습니까? 위대한 종 사도 바울이 오게 되어 자기가 모시고, 그를 통해 복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유감스러운 믿음이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참 안됐다, 아깝게도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싶어요.
자, 벨릭스에 대해서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다시 복습을 좀 하겠습니다. 무릇 공부 잘하려면 복습도 잘하고 예습도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벨릭스, 이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요, 성격이 아주 못 됐을 뿐더러 원래가 노예 출신이라고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기회가 좋고 운이 좋았어요. 이 복잡한 중동지역, 예루살렘이 중심인 이 지역은 로마로서는 아주 골치 아픈 곳이었습니다. 그래 "네가 가서 다스려봐라"하고 벨릭스를 등용한 것입니다. 노예였던 그가 이젠 총독이 된 것입니다. 그는 로마황제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얼마든지 죽였어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수천 명을 죽였다고 해요. 그것도 이스라엘사람들이 높이 존경하는 경건한 유대인들, 랍비들, 제사장들…… 이런 사람들을 마구 죽였어요.
견디다못한 유대사람들이 그만 진정(陳情)을 하게 됩니다. 유대 귀족들이 서명 날인한 진정서가 로마황제에게까지 이릅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이를 보고 문제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벨릭스를 소환하여 조사합니다. 그 결과, 아주 극형에 해당하는 죄를 선고합니다. 그런데 황제가 총애하던 사람 중에 벨릭스의 형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 형의 간청에 의하여 벨릭스는 간신히 사형은 면하고 해직되기만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 벨릭스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런 사람이 지금 사도 바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또 바울의 진술을 듣고 뭔가 마음에 켕기는 게 있어서 그를 감옥에다 넣어놓고, 그 다음에 조용히 자기 아내와 더불어 찾아왔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을 만난다는 엄청난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기회요, 새 사람이 되는 기회요, 영생을 얻는 기회요, 그리고 놀라운 역사로 바꿔놓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벨릭스의 사람됨을, 혹은 이 시간에 이루어진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회주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아주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에요. 뿐만 아니라 연기(延期)한 것을 볼 수 있어요. 여러분, 옳은 것은 분명히 옳은 것입니다. 또 옳은 일을 하겠다고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으로 미루는 것은 잘못이에요. 선한 일이라면 오늘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내일이라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까지는 푹 자고 내일부터 새벽기도를 나가지.' 내일부터-이렇게 30년이 지납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지금부터--그래야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내년부터, 다음부터……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연기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기회주의자들은 딴에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만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리 붙고 저리 붙습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은 꼭 기회를 놓칩니다. 이상하지요? 꼭 결정적인 기회를 놓칩니다. 똑똑한 양 기회주의적 처세를 하는 사람마다 가장 중요한 일에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것이 기회주의자의 운명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만나는 벨릭스의 자세에서 세 가지를 연기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나는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22절)"-지금 당장 들어야 되는데'다음에 듣지' 하고 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믿어야지요. 그러나 좀 천천히 믿겠습니다." 그 사람은 안 믿을 사람이에요. 차라리 "안 믿어요"하는 사람이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나 그렇듯 쉽게 얘기하고 '다음에 보자'하며 연기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특별히 벨릭스가 연기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더 자세히 아는 고로"-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벨릭스는 지금 바울이 설명한 것보다 더 자세히 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 총독으로 있기 이전에 사마리아 총독으로 있었어요. 여러 해 동안 사마리아와 유대 근방에서 총독 노릇을 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정치적인 상황과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안다고 해서 아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면 교인이 몇 명이요, 죽은 사람이 몇 명이요, 또 계급을 잃은 사람들이 누구요, 가난한 사람이 누구요, 부한 사람이 누구요, 문제의 주동자가 누구누구요…… 이런 것을 죄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본인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자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차차 듣기로 하자.' 꼭 선지자의 고향과 같은 마음입니다. 내가 이미 안다고 하는 것-여러분, 성경을 외었다고 성경을 아는 것입니까?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성경을 아는 것입니까? 우리는 형식적인 것만을 알고서 무엇을 알았다고 착각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더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더 알아야 될 것을 알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행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벨릭스는 '더 잘 아는 고로 천천히 듣자'-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오늘 들어야 하는데, 다음에 듣자고 사도 바울을 돌려보냅니다.
또 하나는 회개를 연기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두려워졌다면 이제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듣고 두려웠으면 이제는 돌이켜야지요. 복음을 듣고 마음이 찔렸으면 돌이켜야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두려워하고 그 다음에 취한 행동이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25절)" 합니다. 아마 몹시 마음이 괴로웠던가봅니다. '그만하고 가라. 내 마음이 지금 몹시 어지럽다. 다음에 또 듣지'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게 감화하여 주실 때에 즉석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즉석에서 고쳐야 합니다. 내일은 없어요. 내일 아침해가 뜨는 것을 내가 볼 수 있을지 누가 압니까? 오늘 회개할 일은 꼭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나와 앉았습니다만 다음 시간에 다시 여기 나올 수 있다고 누구도 보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게 감화하시고 내게 말씀하실 때에 뉘우쳐지는 것이 있고 찔리는 것이 있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거든, 잘못됐다고 깨달을 수 있거든 그 즉석에서 회개할 것입니다. '두려우니 그만 하라. 더 말하면 내가 아주 괴롭다. 가라. 다음에 또 부르마'-여기서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벨릭스는 즉석에서 회개해야 될 시간에 그러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세 번째로, 벨릭스가 실수하는 게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바울은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면 석방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만일 유대사람들이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법으로 보호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가두어두는 것입니까? 그것도 2년 동안이나. 벨릭스, 그는 참 속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가 이렇게 바울을 가두어놓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는 유대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유대사람들로부터 정치적인 인기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명 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양 구속해놓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울한테 뇌물을 받기 위함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예요. 바울이 무엇이 있다고 뇌물을 줍니까? 벨릭스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가지고 왔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 내심예루살렘에 가져온 구제금에서 구제하고 남은 것을 자기한테 좀 가져오지 않으려나 기대합니다. 못된 사람이지요. 그에게는 무슨 구제라든가, 구제헌금은 꼭 구제헌금으로 써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좌우간 돈은 돈입니다. '내가 바울을 잡아놓고 있으면 저를 석방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슨 운동이라도 할거야. 또 저에게 돈이 있으면 돈도 가져오겠지'-못된 사람입니다. 어쨌든 바울에게서 뇌물을 구하니 말이에요. 한심한 사람이지요. 그런가하면 사람들이 바울을 소중히 여기고 존경하는 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돈을 모아서라도 보석금을 마련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히 빌립보교회를 필두로 해서 많은 교회가 바울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돈만 갖다내면 감옥에 갇힌 바울이 나올 수 있다더라, 하면 돈낼 사람 많아요. 그것을 벨릭스가 알고있어요. 그래서 바울을 딱 붙잡아놓고 저를 미끼로 해서 한몫 잡겠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이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벨릭스가 바울로부터 뇌물을 받기 위하여, 또 주변사람들이 바울을 존경하고 저를 석방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을 알고는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기 위하여 2년 동안이나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참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석방을 연기한 거예요. 그 기간을 딱 정해놓은 것도 아니에요. 하루, 이틀, 한 달,두 달…… 이렇게 2년이 지나간 것입니다. 보십시오. 벨릭스 이 사람은 자기의 공의를 실행하지도 않았고, 진리를 따르지도 않았고, 자기의 처지와 권세를 이용해서 물질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이(利)를 챙기고자했을 뿐입니다. 그 한 가지 동기로 살아간 불쌍한 사람이에요.
어느 물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많은 연구를 하는 도중에 세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먼저 구원이라는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공부하고 아무리 과학에 몰두해도 그로 인하여 구원의 문제를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역시 구원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다, 결코 과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도덕적인 부흥이 있어야 한다"입니다. 도덕적 부흥을 통해서만 인간이 인간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지,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인해서 인간이 행복해지고 인간이 인간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도덕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명적 종교가 없이는 도덕적 부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합니다. 사실입니다. 아무리 진실하게,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바른 종교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른 믿음이 없이는 진실할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벨릭스만이 그렇게 별난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믿음이 없고, 참된 신앙이 없으면 다 벨릭스의 사촌뻘입니다. 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기회주의자요, 자기중심적이요, 자기 이득을 꾀합니다. 자기편의주의로 삽니다. 그리고 무슨 일에든 간에 자기 이득을 챙기고자 하는 생각이 중심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24절 말씀을 보세요. "벨릭스가 그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여기에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여자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여자"-로마 총독이 유대 여자를 데리고 삽니다. 이에 관한 역사가들의 기록이 있기에 몇 가지 소개합니다.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입니다. 그러니까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나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 정략 결혼을 했구나, 하고 쉽게 이해가 되겠습니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드루실라는 절세의 미인이었답니다. 그래서 겨우 15세의 나이에 팔레스타인 북방 하마드 지방의 미남 왕 아지투스의 아내가 됩니다. 얼마나 예뻤던지 이렇듯 일찍 정치적인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미모와 아름다움이 소문났어요.
그런데 로마총독인 벨릭스가 이 드루실라를 탐냈습니다. 어떤 기회에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여자를 꼭 내 여자로 만들어야겠다고'고 그는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음흉한 꾀를 내어 (유대인 마술사 한 사람을 돈주고 매수했습니다. 마술사는 드루실라에 관해 그녀의 남편에게 얘기합니다. "이 여자는 살면 재수가 없을 것이요." 갖은 마술적인 수단과 주술적 방법으로 남편과 이혼을 하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벨릭스가 드루실라와 결혼을 합니다. 그 때의 그의 나이 60세요, 드루실라는 18세였습니다. 제대로 된 결혼은 아니었지만 어떻든 이 둘은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대개 이렇게 결혼한 사람들이 아내에게 꼼짝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벨릭스가 바울을 보고 싶어했던 게 아니라 사실은 드루실라가 보고 싶어했던 것이라고요. 그래 남편에게 바울을 만나게 해달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내주장(內主張)이면 아내 말 안 듣는 남편 있나요? 벨릭스는 꼼짝못하고 "같이 갑시다"해서 둘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드루실라는 유대사람입니다. 메시야도 알고, 그리스도 얘기도 들어봤고, 바울이라는 사람 얘기도 많이 들어봤습니다. '바울을 만나보고 싶습니다'-여기에 종교적 동기가 있어요. 그러나 따라온 남편은 오직 '돈 좀 벌어야겠는데'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요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예수 믿게 하겠다고 교회에 데려다놓으면 내내 코만 골다가 가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입니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이 바울을 찾아왔는데 그 동기유발은 바로 이 드루실라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드루실라에게 아들이 있었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아그립바라고 하는 이 아들은 주후 79년 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어스 산 폭발 때에 드루 실라와 함께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드루실라와 그 아들은 비참하게 일생을 마쳤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어쨌든 벨릭스가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아내의 권면에 따른 것이라고 일단 생각됩니다. 젊은 아내 기분 맞춰주기 위해서 따라온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요새도 보면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을 마음은 없는데 아내가 하도 교회에 가자고 해서, 그러니까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야 집안이 무사하고 시끄럽지 않을 것 같아서 교회에 따라옵니다. 게다가 교회에 한번만 나가주면 자기한테 서비스 잘 하겠다니까 순전히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가만히 보면 아내를 교회에 바래다주고 저 주차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교회에는 안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아내에게 홀려서 한번 들어왔다가 예수 믿습니다. 그런 사람이 소망교회에 꽤 많아요. 여러분, 처음 동기가 그렇게 다 좋은 것은 아니예요. 젊은 사람들은 연애하러 나오기도 하고, 친구 만나러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빚 받으러 나왔다가 예수 믿는 사람도 있어요.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나온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First motivation, 첫번 동기라는 것이 그렇게 꼭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이 드루실라도 지금 호기심이 여간 아니예요. 유명한 사도 바울을 만나보고 싶은 종교적 호기심입니다. 또 갑자기 어딘가 모르게 양심이 너무 괴로워서, 그 위대한 사람과 얘기하다보면 어떻게 좀 마음이 편해질까 해서, 괴로운 양심을 좀 달래고 일말의 위로를 받고 싶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남편이라고 하는 이 벨릭스는 온전히 돈밖에 모릅니다. 그는 우선 자기 아내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아내 말을 들은 것이고, 또 돈을 바라고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나왔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들었어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찬스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이미 벨릭스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악한 사람인 것도 알고, 자기 아내와 불륜관계인 것도 알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되 그 주제가 조금 다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 않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25절)" -보세요. 얘기가 좀 다르지 않습니까? 어느 아프리카 추장이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추장을 만나는 것이 그리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라서 더더욱 선교사는 예수는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하며 열심히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추장은 가만히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부활한다구? 나도 예수 믿으면 부활할 수 있나?" "그럼요." "그러면 다른 사람도 부활하는가?" "부활하고 말고요." 그러자 추장은 갑자기 "그러면 안돼!"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손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은데 그들이 다 살아나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그것, 말되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벨릭스를 앞에 놓고 심판을 말씀합니다. 의를 말씀하고, 절제를 말씀하고, 의롭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 말씀합니다. 보세요. 의롭게 사는 사람의 생활은 절제하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놀고 싶은 대로 다 놀고, 남의 마누라도 뺏고…… 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있어야 됩니다. 간단하고도 아주 분명한 Issue가 아니겠습니까? '당신 절제해야 되겠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생각 좀 하시오. 권세 위에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 위에 로마황제가 있고 로마황제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당신의 소행은 심판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듯이 교만하지 마세요.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됩니다'하고 바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라는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아직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벨릭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그 말씀을 듣고 벨릭스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칼을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고, 전쟁을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고, 군사력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예요. 바울을 무서워합니다. 감옥에 갇힌 일개 죄수를 무서워합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자, 이 때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각입니다. 이 두려움이 어디로 가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두려움의 결과가 회개로 연결되면 그야말로 신령한 근심은 후회할 것 없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니 벨릭스는 여기서 멈춥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마음이 괴로우니까 '그만! 다음에 또 듣자. 시간이 있으면 또 들을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무엇이 더 바쁩니까? 어찌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끝나고 만단 말입니까? "틈이 있으면"-틈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입니까? 우리는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나오는 것이 Priority No.1이어야 합니다. 최우선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밥을 못 먹어도 성경은 읽어야 합니다. 다른 일 다 못해도 주일은 지켜야 합니다. 예배 시간은 떼먹지 마세요.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 매년 감사절 저녁예배 때에 성도들에게 간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날은 설교를 짧게 끝내고,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있으면 특별히 나와서 얘기하십시오"하면 권사님도 나오고 교인들도 나오고 합니다. 그런데 해마다 한 번씩 채 장로님이라고 하는 분이 꼭 나왔습니다. 이분이 옛날에 술을 많이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통행 금지에 걸려 붙잡혔더랍니다. 그래 트럭에 실려 가지고 인천경찰서에서 내리는데, 취중에도 가만히 보니 저쪽으로 내리면 경찰서고 이쪽으로 내리면 교회 더랍니다. 그래서 몰래 교회 쪽으로 내려 벌벌 기어서 교회로 갔습니다. 마침 새벽기도가 시작됐는지라, 거기에 앉아 가지고 술이 깼어요. 그 때부터 예수 믿었습니다. 다른 교회에는 가본 일도 없고 평생을 인천제일교회에 다녀서 장로까지 된 것입니다. 그분은 간증할 때마다 꼭 이런 얘기를 합니다. "금년에도 한 번도 안 빠진 것을 감사합니다.
한 번도 안 빠지려면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 말만 하고 들어갑니다. 그 이상 다른 말이 없어요. 그 속에 건강, 시간, 자유…… 다 포함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벨릭스의 믿음이 잘못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틈이 있으면 다시 부르리라, 하고 연기해버립니다. 이제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대로 끝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이나 바울을 내버려둡니다. 2년 후에 바울은 벨릭스가 아닌, 다음 총독에 의해서 로마로 가게 됩니다.
보세요. 벨릭스가 바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두려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름지기 참 믿음, 긴급한 믿음, 최우선적인 믿음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에 이르고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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