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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귓속으로 듣는 것(마태복음 10장 27절~33절)

by 【고동엽】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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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속으로 듣는 것(마태복음 102733)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 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10:27)."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앞의 26절을 공부했습니다.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오늘의 말씀에 비하면 좀 소극적인 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할 때, 오해를 사거나 핍박을 받거나 억울함을 당하거나 해도 섭섭해하거나 억울해하거나 두려워할 것 없다, 굳이 나를 드러내어 변명 발명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수고는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소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7절의 말씀은 한결 적극적입니다. 좀더 직선적이고 좀더 분명하게 지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결국 선교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말씀입니다 마는 우선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는 심판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와 밝은 데, 귓속말과 지붕 위에서 전파하는 이야기 --확실히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이치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는 '모든 것은 드러난다, 어두운 곳에서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대명천지(大明天地)에 다 나타날 것이며, 귓속말로 수군거리지만 그것도 마치 지붕 위에서 소리지르는 것처럼 크게 들릴 날이 있을 것이다'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알고 살아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어두운 데서 이루어진다고 어둠과 함께 묻히고 마는 법이 없습니다. 끼리끼리 수군수군한다고 끼리끼리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문에 안 났다고 영원한 비밀이 되지 않습니다. 쉬쉬한다고 자기단속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다 알게 되어있습니다. 차라리 내놓고 말하는 것은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비밀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에는 날개가 달립니다. 조심할 것입니다. 비밀스러워야 한다면 숫제 말을 하지 말 것입니다. "이건 중요한 말인데, 비밀인데, 우리끼리만 알고 있습시다." 이렇게 강조해놓으면 이 비밀은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합니다. 제삼자에게 다시 "이건 비밀인데……" 하고 건너갈 것이요, 4자에게도 그런 식으로 또 건너갑니다. 자꾸 재미가 납니다. "이건 비밀인데……"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이렇듯 못된 것이 있습니다.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주를 달아놓으면 더 신나게 퍼집니다.

로마서 1312절에 보면 소위 사도 바울의 역사관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워옵니다. 당장 어둡습니다. 이는 앞에 빛이 오고 있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새벽길을 나서면 아직 어둡습니다. 어둡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처럼 아무렇게나 입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곧 밝아질 것이므로 부지런히 세수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을 제대로 입고 나갈 것이 아닙니까? 당장 어둡다고 해서 대충 채비하고 나간다면 이내 망신할 것은 뻔합니다. 이와 같이, 앞에 있는 빛을 아는 사람은 어두운 데서 이미 빛에 대하여 완벽한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라 조금 감추어진 것 같고 숨겨진 것 같은 일, 이제 그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결코 어두운 데서라고 어두운 짓 할 것이 아니라는 것, 상식에 속하는 일이므로 더욱 깊이 명심할 것입니다.

우리가 툭하면 귓속말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단둘이 말하면서도 짐짓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는 말이 많습니다. 개인적이요 사적인 말이라서 그렇습니까? 귓속말로 하는 것, 단둘이만 알게 하는 말이 지붕 위에서 전파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이 속속들이 다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TV에서 방영하는 기획 프로그램 중에 첨단 기기를 써서 인체 내부를 추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사람의 속이 참 징그럽더군요. 별것이 다 들어 있어 꾸물꾸물해요.

하물며 세상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노출시켜 놓는다면 참 가관일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믿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어두운 가운데에 있으나 광명한 것처럼, 귓속말로 되어지는 것도 지붕 위에서 나타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이 일반적인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입니다. 현재는 현재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미래로 지향하게 마련입니다. 미래가 다가옵니다. 현재는 미래로 움직입니다.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소문도 내용도 진리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자꾸자꾸 전해지게 되어 있고,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호한 것일지라도 조금 기다려보면 이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지금은 비밀스러워도 곧 공개됩니다. 항상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는 개인적인 것으로 우리끼리만 알고 있다지만 언젠가는 온 세상이 다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가 현재대로 종지(終止)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드시 달라집니다. 점점 밝아집니다. 희미하던 것도 확실하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미래에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젊은 사람은 나이 많을 때를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남의 자녀이지만 머지않아 남의 부모가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에 보면 다는 아니지만 옆 학생하고 수군수군 이야기 잘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도 그렇지만, 딴전부리고 수군거리는 것은 질색입니다. 여기 아무리 교인이 많이 오셔도 어린아이들 데리고는 못 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면에서는 욕을 먹으면서까지 신경질적입니다. 그런데 강의 중에 학생이 자꾸 잡담을 하거든요. 이런 경우에 저는 늘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며칠 후면, 불과 몇 년 후면, 자네가 여기 서서 강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자네 강의를 듣는 학생이 앞에 앉아 자꾸 잡담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머지않아 될 일입니다. 오늘은 내가 우리 집 자녀이지만 내일은 내가 아버지, 할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따로 있습니까? 아이가 크면 어른인 것입니다. 아이가 커서 노인이 됩니다. 언제나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선행이다 선교다 하는 문제들도 다분히 미미하게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때문입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비밀스러운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조그마하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 겨자씨 비유 아닙니까? 겨자씨와 같이 조그마하게 시작하지마는 앞으로 커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어쩌다가 한 사람이 전해들었는데 이것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라를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전에 하얼빈에서 오셨던 선생님 한 분은 '82년엔가 어쩌다가 남한에서 오는 방송을 들었더니 '곽목사님 설교'가 나오더랍니다. 들어보니 재미가 있기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할 때였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 결에 3년이 지났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 나 혼자만 알고 말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자꾸만 아는 사람에게 전하고 전하고 해서 지금은 350여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교회가 장로도 없고 집사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 중에 한국에를 나왔는데, 우리 집에 와서 하는 소리가 아주 당당해요. "저는 곽목사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집에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학습하러 왔습니다"해요. 학습하러 왔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가 마련해놓은 곳에서 몇 달 동안 머물다 갔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별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당당한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대접받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태도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옳읍디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나가셔야 되는 분이기 때문에 여기서 알려지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누가 인사도 안 할 것이고, 소개도 안 할 테니까, 여기저기 참석이나 하고 새벽기도나 하고 가지, 내가 누구요 하고 누구한테 말하고 다니면 당신 본국에 못 들어갑니다" 해서 조용히 있다가 가셨습니다. , 어떻습니까? 한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아침방송을 들었습니다. 조용하게 이루어졌는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너무 크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미미하게, 조용하게,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시작이 되지마는 장차는 큰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지붕 위에서 떠드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그 모든 말씀이 마치 연못의 파문처럼, 조그마하게 일어나 온 세계에 퍼져나갈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가장 큰 비밀이면서 적게 시작합니다.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한 사람이 죽음으로 위대한 역사는 비롯됩니다. 부활이라고 하지만 몇 사람 만나본 것일 뿐이요 조용하게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야말로 비밀스럽게 어두운 가운데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밝게, 이렇게 크게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사명적인 선교적 차원에서 본문을 보면 더욱 중요한 두 가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듣는 것이고, 하나는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어두운 데서"듣는 것이요, 하나는 "귓속말로"듣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이렇게 두 가지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두운 데서도 듣고 귓속말도 듣습니다. 일단은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hearing heart'가 중요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듣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했습니다. hearing heart understanding mind를 달라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듣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밭을 네 가지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덩굴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이 있는데, 듣는 마음은 옥토와 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자세로, 겸손하게, 진실하게 들을 줄 모르면 어떠한 역사도 이루어지는 게 없습니다. 그 귀한 생명도 무산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먼저 들어야 됩니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들어야 됩니다.

듣는데, 어두운 데서 듣고 귓속말로 듣는다고 했습니다. 자꾸 읽어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정말 귓속말로 들립니다. 주님의 음성은 귓속말로 들리고 어두운 데서 들립니다. 어둡다는 말은 비밀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주신 말씀의 3분의 2가 열두 제자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말씀을 하신 것 같아도, 많은 사람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5000명이 디베랴 광야에 있었다는데, 예수님께서 마이크도 없이 서서 말씀하셨으니 몇 사람이나 들었겠습니까? 자동차소리야 물론 안 들렸겠고, 이렇다할 소음공해는 없었다지만 들에 나가서 들어보면 웬만한 거리에서는 제대로 말소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정말 어두운 데서 듣는다는 것이요 몇 사람만이 듣는 것입니다. 열두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것이 3분의 2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야말로 어두운 데서 들은 것입니다. 데리고 다니시면서 낮에도 저녁에도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운 데'란 밀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깊은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듣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소란한 곳에서 들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운 데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어두운 데'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낮에라야 멀리 봅니까, 밤에라야 멀리 봅니까? '그거야 낮에 멀리 보지' 하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밤에라야 멀리 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 별빛을 보지 않습니까? 제일 멀리 있는 별빛을 말입니다. 삼라만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야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낮에도 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별빛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두운 데서, 캄캄한 데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때에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화려한 욕망도 없고 세속적인 욕구도 없습니다. 시기, 질투, 이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독대(獨對)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듣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귓속말'로 듣는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귓속말의 관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조용조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헬라사람들도 한국사람들처럼 귓속말을 잘했다고 합니다.

선생이 제자를 가르칠 때에는 귓속말로 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말씀일수록 조용조용히, 위대한 스승일수록 조용조용히 귓속말로 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다 싶어요. 그래야 제자들이 가만히 듣지요. 큰소리로 하는 말은 졸면서도 들을 수 있고 얘기하면서도 들을 수 있으나 귓속말로 하듯 조용히 하는 말은 마음과 정성과 신경을 다 기울여서 들어야만 들립니다. 여성들이 얘기할 때 보면 소위 교양 있다는 여자는 조용히 말하는 것을 봅니다. 듣는 사람이 마음을 갖다대고 가만히 들어야 들리도록 말합니다. 수탉같이 떠들어대는 여자라면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음성은 작아야 됩니다. 작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을 하는 것, 그게 말을 잘하는 것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유명한 스승일수록 들릴 듯 말듯 조용히 말합니다. 듣는 사람은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지금 말씀을 하시나보다 하고 잘 들어서 마음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랍비가 귓속말로 조용히 말하면 제자는 큰소리로 복창을 했다고 합니다. 스승은 조용히 말하고 제자는 들어서 그것을 복창한다 -이렇게 해서 한 말씀 한 말씀 깊이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아주 강한 바람이 지나갔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고, 지진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고, 불이 지나갔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없더니, 이런 것들이 아 지나간 다음에야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더라고 했습니다. '미세한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 마음은 더 고요해야 됩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경청해야 됩니다. 정성을 모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설치되어 있는 마이크,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교적 잘 들리는 것 같은데도 어떤 사람들은 작다고 합니다. 조금 크게 해달라고, 크게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만 원래 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오디오 시스템에 3대 원칙이 있는데 그 하나는 같은 음색, 같은 방향, 같은 음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성하고 똑같은 음량이어야지 육성보다 크게 들리면 그것은 정상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시설할 때에 많이 연구를 하고 책도 좀 보고 해서 기계로 전부 쟀었습니다. 구석구석 가서 앉아보아서 어디에 앉았건 간에 똑같은 양을 듣는데, 크게 들리면 안되고 육성과 똑같은 정도로만 들려야 됩니다.

모름지기 조용하게 들리는 것을 마음을 쏟아 귀를 기울여 들어야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큰 소리가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만 들뜨려놓았지 마음 속 깊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귓속말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집중하고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일대 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야 들을 수 있도록, 깊은 생각을 가지고야 들을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내가 지금 그렇게 조용조용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장차는 지금을 위하여 소리를 지를 것이다, 소리를 질러라, 나는 귓속말로 하지만 너희는 집 위에서 소리를 질러라, 전파하라, 선포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집은 지붕이 원래 평평했었습니다. 거기 올라가서 떠들어라, 그런 말씀입니다.

소리를 질러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들은 말씀, 성경 읽으면서 명상 가운데서 깨달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히 들었습니다. 비밀로. 그러나 듣고 나서는 나가서 나발을 부는 것입니다. 크게 떠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바라는 제자의 참모습입니다.

전파하고 말하라 --어두운 데서 들은 것 밝은 데서 말하라, 광명한 데서 말하라, 그리고 귓속말로 들은 것 집 위에서 전파하라, 소리만 크게 지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그리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모든 사람이 듣게 확실하게 말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28). 하나님 외에 두려워할 자는 아무도 없다, 담대하게 크게 외쳐라 하십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죽지도 아니하고 매맞지도 아니할 것이다, 죽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알 것이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 하나님의 경륜과 뜻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안심하고 소리질러라, 그런 말씀입니다. 안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요, 죽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30, 31절에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있으되 불행은 없습니다. 아픔은 있으되 슬픔은 없습니다. 이래야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오늘의 잠언을 다시 한번 소리내어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귓속으로 듣는 것(마태복음 102733)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 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10:27)."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앞의 26절을 공부했습니다.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오늘의 말씀에 비하면 좀 소극적인 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할 때, 오해를 사거나 핍박을 받거나 억울함을 당하거나 해도 섭섭해하거나 억울해하거나 두려워할 것 없다, 굳이 나를 드러내어 변명 발명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수고는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다,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소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7절의 말씀은 한결 적극적입니다. 좀더 직선적이고 좀더 분명하게 지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결국 선교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말씀입니다 마는 우선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는 심판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와 밝은 데, 귓속말과 지붕 위에서 전파하는 이야기 --확실히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이치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는 '모든 것은 드러난다, 어두운 곳에서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대명천지(大明天地)에 다 나타날 것이며, 귓속말로 수군거리지만 그것도 마치 지붕 위에서 소리지르는 것처럼 크게 들릴 날이 있을 것이다'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알고 살아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어두운 데서 이루어진다고 어둠과 함께 묻히고 마는 법이 없습니다. 끼리끼리 수군수군한다고 끼리끼리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문에 안 났다고 영원한 비밀이 되지 않습니다. 쉬쉬한다고 자기단속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다 알게 되어있습니다. 차라리 내놓고 말하는 것은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비밀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에는 날개가 달립니다. 조심할 것입니다. 비밀스러워야 한다면 숫제 말을 하지 말 것입니다. "이건 중요한 말인데, 비밀인데, 우리끼리만 알고 있습시다." 이렇게 강조해놓으면 이 비밀은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합니다. 제삼자에게 다시 "이건 비밀인데……" 하고 건너갈 것이요, 4자에게도 그런 식으로 또 건너갑니다. 자꾸 재미가 납니다. "이건 비밀인데……"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이렇듯 못된 것이 있습니다. 그런 성향이 있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주를 달아놓으면 더 신나게 퍼집니다.

로마서 1312절에 보면 소위 사도 바울의 역사관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워옵니다. 당장 어둡습니다. 이는 앞에 빛이 오고 있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새벽길을 나서면 아직 어둡습니다. 어둡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처럼 아무렇게나 입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곧 밝아질 것이므로 부지런히 세수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을 제대로 입고 나갈 것이 아닙니까? 당장 어둡다고 해서 대충 채비하고 나간다면 이내 망신할 것은 뻔합니다. 이와 같이, 앞에 있는 빛을 아는 사람은 어두운 데서 이미 빛에 대하여 완벽한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라 조금 감추어진 것 같고 숨겨진 것 같은 일, 이제 그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결코 어두운 데서라고 어두운 짓 할 것이 아니라는 것, 상식에 속하는 일이므로 더욱 깊이 명심할 것입니다.

우리가 툭하면 귓속말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단둘이 말하면서도 짐짓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는 말이 많습니다. 개인적이요 사적인 말이라서 그렇습니까? 귓속말로 하는 것, 단둘이만 알게 하는 말이 지붕 위에서 전파됩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이 속속들이 다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TV에서 방영하는 기획 프로그램 중에 첨단 기기를 써서 인체 내부를 추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사람의 속이 참 징그럽더군요. 별것이 다 들어 있어 꾸물꾸물해요.

하물며 세상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노출시켜 놓는다면 참 가관일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믿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어두운 가운데에 있으나 광명한 것처럼, 귓속말로 되어지는 것도 지붕 위에서 나타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이 일반적인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입니다. 현재는 현재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미래로 지향하게 마련입니다. 미래가 다가옵니다. 현재는 미래로 움직입니다.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소문도 내용도 진리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자꾸자꾸 전해지게 되어 있고,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호한 것일지라도 조금 기다려보면 이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지금은 비밀스러워도 곧 공개됩니다. 항상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는 개인적인 것으로 우리끼리만 알고 있다지만 언젠가는 온 세상이 다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가 현재대로 종지(終止)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드시 달라집니다. 점점 밝아집니다. 희미하던 것도 확실하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미래에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젊은 사람은 나이 많을 때를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남의 자녀이지만 머지않아 남의 부모가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학대학에서 강의할 때에 보면 다는 아니지만 옆 학생하고 수군수군 이야기 잘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도 그렇지만, 딴전부리고 수군거리는 것은 질색입니다. 여기 아무리 교인이 많이 오셔도 어린아이들 데리고는 못 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면에서는 욕을 먹으면서까지 신경질적입니다. 그런데 강의 중에 학생이 자꾸 잡담을 하거든요. 이런 경우에 저는 늘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며칠 후면, 불과 몇 년 후면, 자네가 여기 서서 강의를 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자네 강의를 듣는 학생이 앞에 앉아 자꾸 잡담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머지않아 될 일입니다. 오늘은 내가 우리 집 자녀이지만 내일은 내가 아버지, 할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따로 있습니까? 아이가 크면 어른인 것입니다. 아이가 커서 노인이 됩니다. 언제나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선행이다 선교다 하는 문제들도 다분히 미미하게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때문입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비밀스러운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조그마하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 겨자씨 비유 아닙니까? 겨자씨와 같이 조그마하게 시작하지마는 앞으로 커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어쩌다가 한 사람이 전해들었는데 이것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라를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전에 하얼빈에서 오셨던 선생님 한 분은 '82년엔가 어쩌다가 남한에서 오는 방송을 들었더니 '곽목사님 설교'가 나오더랍니다. 들어보니 재미가 있기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할 때였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 결에 3년이 지났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래, 나 혼자만 알고 말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자꾸만 아는 사람에게 전하고 전하고 해서 지금은 350여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교회가 장로도 없고 집사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 중에 한국에를 나왔는데, 우리 집에 와서 하는 소리가 아주 당당해요. "저는 곽목사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집에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학습하러 왔습니다"해요. 학습하러 왔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가 마련해놓은 곳에서 몇 달 동안 머물다 갔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별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당당한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대접받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태도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옳읍디다. 그러나 그분은 다시 나가셔야 되는 분이기 때문에 여기서 알려지면 안되거든요. 그래서 "누가 인사도 안 할 것이고, 소개도 안 할 테니까, 여기저기 참석이나 하고 새벽기도나 하고 가지, 내가 누구요 하고 누구한테 말하고 다니면 당신 본국에 못 들어갑니다" 해서 조용히 있다가 가셨습니다. , 어떻습니까? 한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아침방송을 들었습니다. 조용하게 이루어졌는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너무 크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미미하게, 조용하게,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시작이 되지마는 장차는 큰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지붕 위에서 떠드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그 모든 말씀이 마치 연못의 파문처럼, 조그마하게 일어나 온 세계에 퍼져나갈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가장 큰 비밀이면서 적게 시작합니다.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한 사람이 죽음으로 위대한 역사는 비롯됩니다. 부활이라고 하지만 몇 사람 만나본 것일 뿐이요 조용하게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야말로 비밀스럽게 어두운 가운데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밝게, 이렇게 크게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사명적인 선교적 차원에서 본문을 보면 더욱 중요한 두 가지의 말씀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듣는 것이고, 하나는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어두운 데서"듣는 것이요, 하나는 "귓속말로"듣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이렇게 두 가지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두운 데서도 듣고 귓속말도 듣습니다. 일단은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hearing heart'가 중요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듣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했습니다. hearing heart understanding mind를 달라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듣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밭을 네 가지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덩굴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이 있는데, 듣는 마음은 옥토와 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자세로, 겸손하게, 진실하게 들을 줄 모르면 어떠한 역사도 이루어지는 게 없습니다. 그 귀한 생명도 무산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먼저 들어야 됩니다. 말하기에 앞서 먼저 들어야 됩니다.

듣는데, 어두운 데서 듣고 귓속말로 듣는다고 했습니다. 자꾸 읽어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정말 귓속말로 들립니다. 주님의 음성은 귓속말로 들리고 어두운 데서 들립니다. 어둡다는 말은 비밀한 곳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주신 말씀의 3분의 2가 열두 제자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말씀을 하신 것 같아도, 많은 사람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5000명이 디베랴 광야에 있었다는데, 예수님께서 마이크도 없이 서서 말씀하셨으니 몇 사람이나 들었겠습니까? 자동차소리야 물론 안 들렸겠고, 이렇다할 소음공해는 없었다지만 들에 나가서 들어보면 웬만한 거리에서는 제대로 말소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정말 어두운 데서 듣는다는 것이요 몇 사람만이 듣는 것입니다. 열두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것이 3분의 2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야말로 어두운 데서 들은 것입니다. 데리고 다니시면서 낮에도 저녁에도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운 데'란 밀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깊은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듣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소란한 곳에서 들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운 데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들리지 않습니다. '어두운 데'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낮에라야 멀리 봅니까, 밤에라야 멀리 봅니까? '그거야 낮에 멀리 보지' 하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밤에라야 멀리 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 별빛을 보지 않습니까? 제일 멀리 있는 별빛을 말입니다. 삼라만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야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있습니다. 낮에도 별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별빛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두운 데서, 캄캄한 데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때에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화려한 욕망도 없고 세속적인 욕구도 없습니다. 시기, 질투, 이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독대(獨對)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듣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귓속말'로 듣는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귓속말의 관계입니다. 개인적으로 조용조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헬라사람들도 한국사람들처럼 귓속말을 잘했다고 합니다.

선생이 제자를 가르칠 때에는 귓속말로 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말씀일수록 조용조용히, 위대한 스승일수록 조용조용히 귓속말로 했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다 싶어요. 그래야 제자들이 가만히 듣지요. 큰소리로 하는 말은 졸면서도 들을 수 있고 얘기하면서도 들을 수 있으나 귓속말로 하듯 조용히 하는 말은 마음과 정성과 신경을 다 기울여서 들어야만 들립니다. 여성들이 얘기할 때 보면 소위 교양 있다는 여자는 조용히 말하는 것을 봅니다. 듣는 사람이 마음을 갖다대고 가만히 들어야 들리도록 말합니다. 수탉같이 떠들어대는 여자라면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음성은 작아야 됩니다. 작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을 하는 것, 그게 말을 잘하는 것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유명한 스승일수록 들릴 듯 말듯 조용히 말합니다. 듣는 사람은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지금 말씀을 하시나보다 하고 잘 들어서 마음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랍비가 귓속말로 조용히 말하면 제자는 큰소리로 복창을 했다고 합니다. 스승은 조용히 말하고 제자는 들어서 그것을 복창한다 -이렇게 해서 한 말씀 한 말씀 깊이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아주 강한 바람이 지나갔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고, 지진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고, 불이 지나갔지만 하나님의 음성이 없더니, 이런 것들이 아 지나간 다음에야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더라고 했습니다. '미세한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 마음은 더 고요해야 됩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경청해야 됩니다. 정성을 모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설치되어 있는 마이크,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교적 잘 들리는 것 같은데도 어떤 사람들은 작다고 합니다. 조금 크게 해달라고, 크게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만 원래 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오디오 시스템에 3대 원칙이 있는데 그 하나는 같은 음색, 같은 방향, 같은 음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성하고 똑같은 음량이어야지 육성보다 크게 들리면 그것은 정상적인 소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시설할 때에 많이 연구를 하고 책도 좀 보고 해서 기계로 전부 쟀었습니다. 구석구석 가서 앉아보아서 어디에 앉았건 간에 똑같은 양을 듣는데, 크게 들리면 안되고 육성과 똑같은 정도로만 들려야 됩니다.

모름지기 조용하게 들리는 것을 마음을 쏟아 귀를 기울여 들어야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큰 소리가 은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만 들뜨려놓았지 마음 속 깊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귓속말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집중하고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일대 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야 들을 수 있도록, 깊은 생각을 가지고야 들을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내가 지금 그렇게 조용조용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장차는 지금을 위하여 소리를 지를 것이다, 소리를 질러라, 나는 귓속말로 하지만 너희는 집 위에서 소리를 질러라, 전파하라, 선포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집은 지붕이 원래 평평했었습니다. 거기 올라가서 떠들어라, 그런 말씀입니다.

소리를 질러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들은 말씀, 성경 읽으면서 명상 가운데서 깨달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용히 들었습니다. 비밀로. 그러나 듣고 나서는 나가서 나발을 부는 것입니다. 크게 떠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바라는 제자의 참모습입니다.

전파하고 말하라 --어두운 데서 들은 것 밝은 데서 말하라, 광명한 데서 말하라, 그리고 귓속말로 들은 것 집 위에서 전파하라, 소리만 크게 지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그리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모든 사람이 듣게 확실하게 말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28). 하나님 외에 두려워할 자는 아무도 없다, 담대하게 크게 외쳐라 하십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죽지도 아니하고 매맞지도 아니할 것이다, 죽어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줄 알 것이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 하나님의 경륜과 뜻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안심하고 소리질러라, 그런 말씀입니다. 안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요, 죽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30, 31절에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있으되 불행은 없습니다. 아픔은 있으되 슬픔은 없습니다. 이래야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오늘의 잠언을 다시 한번 소리내어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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