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듣는 것과 행하는 것(야고보서 1 : 22-24)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이렇게 시작한 오늘의 본문말씀은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자기가 들은 것을 행함이 없이 곧 잊어버리는, 그런 안이한 믿음에 일침을 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라고 못박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더욱 실제적이고 중요한 교훈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받아 새기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으로 큰 향상이 있을 줄 압니다.
지난 시간에는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 하라" 라고 말씀하여, 듣는 것은 많이 듣고 속히 듣되 말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보고 천천히, 그리고 하나라도 수를 줄여서 적게 말하라, 다시 말하여 열 마디 할 말이면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이 좋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운 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이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얼마나 큰 덕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에 이어서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 은 중요한 일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들어야만 합니다. 많이, 깊이, 빨리 들어야 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듣는 자세가 어떠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제가 목회 30년에 배운 것이 그것입니다. 목회자인 저의 입장에서 교인들의 신앙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을 잡고 볼 때에는 그 사람의 안팎 생활이라든가 시험을 이겨내는 모습이라든가 임종의 모습 같은 것을 보면서 그 신앙의 성장도(成長度)를 가늠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긴 시간을 잡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신앙이 어느 정도로 자랐는지, 그리고 자라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바로, 말씀 듣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듣는 자세가 어떠하냐로 판단하면 충분하다고 저는 장담합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지만 저 사람은 듣지 않고 있다, 저 사람은 애당초들을 마음이 없다, 저 사람의 마음은 딴 데로 가 있다-이런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을 바라보고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학생들의 강의 듣는 자세를 보면 굳이 시험을 보이지 않아도 실력 정도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 학생은 우등생이다' '저 녀석은 낙제하겠구나'-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요새 보면 과외를 시킨다 어쩐다 하고 난리들이지마는 모름지기 교실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정신차리고 듣는 학생이라면 굳이 그런 요란을 떨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이치인데도 세상이 그꼴로 돌아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과외수업' 이야기가 나오는 정도라면 그 학생은 이미 시원치 않은 학생이지요. 학교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정신차려 받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도 같은 이치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말씀을 집중적으로 들어보십시오. 한마디도 놓치지 말고, 말씀이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하며 몰두해 들어보십시오. 역사(役事)는 여기서부터 나타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다보니 이 시간이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사도행전 14장에 나오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의 설교말씀을 넋빠진 듯 듣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 머무는 며칠 동안을 주야로 '부흥회'를 인도합니다. 그곳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이러한 바울의 말씀에 사로잡혀 곁눈도 파는 일없이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 그 자세를 바울이 눈여겨보았습니다. 지금처럼 녹음이 되는 때도 아니요 책을 옮겨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만큼 '이 귀한 기회를 한시라도 놓칠소냐' 하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밝혀 귀를 세워 바울의 입을 쳐다보는 앉은뱅이의 모습은 말씀을 듣는다기보다도 받아먹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을 걸신들린 듯이 받아먹으면서 연시 "아멘" "아멘"을 외치는 그 모습이 바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행 14 : 10)!"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일어나라 하니 무심결에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앉은뱅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자기 존재도 망각할 만큼으로 '말씀'에 취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일어날 기적이었습니다. 반드시 일어날 기적이었습니다. 소위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 이 생각 저 생각 다 하고 있어 말씀이 왔으되 귓가에 겉돌고 돌아가 게 만드는 '제정신'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무심결에 벌떡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보시오, 바울 선생! 지금 누굴 보고 일어나라 하시는 게요? 내가 예사 앉은뱅인 줄 아시오? 누구는 뭐, 일어날 줄 몰라서 앉아 뭉개고 있는 줄 아시오? 나는 말이요,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요. 그런 나를 보고 일어나라니, 농담하는 거요, 약을 올리는 거요?" 이렇게 '제정신' 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멘!" "옳소이다!" 정신없이 말씀을 들었고, 정신없는 가운데라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말씀은 그런 자세로 들어야 하고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 말씀의 역사는 거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 : 17)"라고 성경은 밝히 말씀합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듣되 '청력' 가지고 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혼신(渾身)으로 들어야 합니다. 받아먹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 나를 통째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내가 하나로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 '설교를 잘하나 못하나 보자'-이런 유의 호기심 가지고 듣는다면 참으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런 자세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신학생들이나 젊은 목사님들이 제게 하소연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입니다. 땀이 나도록 기도하여 준비한 다음에 강단에 서는데, 교인들은 내려다보니 저만치 서 장로님이 심사위원이나 시험관처럼 팔짱을 턱 끼고 앉아 있는 게 보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로 저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가 빙긋이 웃었다가 하고 있습니다. '서른(살) 안팎의 젊은이인데 설교를 제대로 해낼까?' '저 청년(목사)은 유치해 보이는걸' '아, 저 청년은 유망해'-이런 식으로 목사를 채점하고 있을 뿐, 설교를 귀담아듣는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설교가 그래서 힘들다고들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부부간의 사랑에 대해서라도 이야기했다 하면 "젊은 목사가 경험도 별로 없으면서 사랑이 어떻다 부부가 어떻다, 아는 것도 많으네." "별걸 다 알고 있네." 이런 소리를 하는 교인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은 "저도 빨리 늙어 버려야지 정말 못해먹겠어요" 하고 우스개 탄식까지 합니다.
여러분, 젊은 목사님들의 말씀이라고 허투루 들어서는 안됩니다. 똑똑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많이 겪지 않았다고 해서 유치하다고 넘겨 짚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약관 서른에 목회를 시작하시고 서른 셋에 마치셨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냐 무슨 학교를 졸업했느냐, 이런 것은 알 바 아닙니다. 젊었건 늙었건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깊이 듣지 아니하고 피상적으로 'try to hear' 곧 들어보는 정도로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듣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듣는 것이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흥회꾼' 이라 불릴 만큼 열심히 부흥회에 좇아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 부흥회가 있다하면 놓치지 않습니다. 보따리 싸들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갔다와서 으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재미있었노라고 합니다. '재미있었다'-그분들에게는 다른 것 말고 이것이 은혜였던 것입니다. 객담입니다 마는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에는 여러 가지 뉘앙스가 있더군요. 지난주에도 어떤 분이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제게 인사합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히트 쳤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것이 은혜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무튼 '마음에 와서 부딪쳤다'고 하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표현은 그렇다 치고 마음만은 화끈했었다는 이야기겠습니다. 이렇게, 듣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른바 '재미있는 설교'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며칠이라도 좋습니다. 듣는 것 자체가 좋아서 듣는, 다분히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흥분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재미로 설교를 듣는다면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들은 그 때 뿐이요 생명의 열매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으로 듣는 자세입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장님들 가운데도 그 회사 직원들로부터 "우리 사장님, 교회 나가시고 부터 유식해졌어"라는 평판을 듣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설교들은 것으로 직원들에게 훈화(訓話)를 하니까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이렇고 저렇고, 말이 많아지거든요. 설교를 하나의 지식으로, 상식으로 듣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받는다는 것' 에 역점을 두지 않고, 설교를 자꾸 들으면 교양이 넓어지고 세상 지식이 늘어나니 내 위신이 올라가고 내 인생의 격이 높아진다-이런 정도로 생각하는 자세이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쓰럽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또 하나 위험한 자세는, 보기에 꽤 진지한 모습이지마는 어디까지나 지적 호기심 내지 탐구욕으로 듣는 자세입니다. 탐구욕을 채우는 데 그치고 마는 그런 자세가 위험한 자세입니다. 끝없이 학문적으로만 탐구하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상 공부 타령입니다. 성경공부 한다며 '벧엘' 공부하고, '크로스웨이' 공부하고, 또 '주제별' 공부다 뭐다 하고 끝도 없이 덤비는 것입니다.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소위 아카데믹(academic)한, 말하자면 비실제적이요 현학적이요 학구적이라 할 이런 자세는 믿음 생활에 바람직한 현상이 못됩니다. 한없이 듣기만 하고 한없이 탐구나 할 뿐, 아무런 결론도 없고 아무런 열매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자세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것' 이겠습니까? 전적인 수락, 전적인 순종, 전적인 위탁의 자세이어야 합니다. '내 주여 말씀하소서. 그래도 하겠습니다. 가라시면 가고 오라시면 올뿐입니다. 죽으라시면 죽고, 살라시면 살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전 생명을, 나의 세계관을 다 위탁하옵고 오직 말씀대로만 하겠습니다. 저 가버나움의 백부장과도 같이,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이러한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인간적인 상식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씀' 을 따지고 덤빌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마는, 집에서 교회로 떠날 때부터 기도를 해야합니다. 기도하고 교회 와서 기도의 응답으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자세입니다. '하나님, 오늘 설교 중에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소서. 오래도록 안고 궁글어온 문제, 오늘 설교 듣는 가운데 응답해주소서. 들리는 말씀대로 받겠습니다'-이렇게 준비하고 와서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들을 것입니다. 여기서 헤어지라면 헤어지는 것이고, 만나라면 만나는 것이고, 가라면 가는 것이고, 버리라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듣는 자세입니다. 그럴 때에야 말씀의 능력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듣기만 하는 자' 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듣기만 하는 자-이런 사람은 듣는 것 자체를 예배로 알고 있습니다. 듣는 예배 그 자체를 종교 예식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공로로 여깁니다. 자꾸 듣고 그 듣는 시간에 부지런히 참석만 하면 이것이 쌓여서 공로로 축적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 시간도 안 빠졌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듣고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안 빠졌다는 사실만 있습니다. 내가 그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만 있습니다. 그러나 들은 것, 깨달은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자세입니다. 특별히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이런 의식(儀式)이 좀 있습니다. 우리네 고래의 종교 문화적 전통 속에 그런 의식(意識)이 배어 있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종교 의식이 있으면 멀찍이 앉아서 보아주는 것으로 끝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의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함도 없습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서 무당 춤추는 것이나 구경하는 태도입니다. 그냥 앉아만 있으면 떡이 나오니 그것이나 얻어먹고 나면 그만입니다. 그 종교 의식에 참예(參詣)한 셈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네는 이러한 관습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 저런 종교, 이른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있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고 엄숙히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하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서양사람들 사이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Sunday christian'이니 'Everyday christian'이니 하는 말입니다. Sunday christian 은 이른바 '주일교인'입니다. 주일날만 나오고마는 교인입니다. 심지어는 X-mas christian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는 크리스마스에만 교회에 나오는 교인을 빗대어 일컫는 말입니다. 아무튼 예배 의식에 참예하는 것, 듣는 것만으로 할일 다한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함께 성경을 읽는 것에도 마땅찮은 자세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는 많이 읽습니다. 몇 장 읽었다, 몇 번 읽었다고 하고 글자만 읽은 것으로 끝나는 자세가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 읽기라고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 분 있습니다. 수년 전 일입니다. 안양교도소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한다기에 상품을 좀 준비해 가지고 갔는데,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분이 신약성경을 고스란히 다 암송하고 시편․잠언까지 암송하는 것입니다. 제가 심사를 보았는데 꼭 스무 번을 체크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 누가복음 3장 7절, 요한복음 5장 9절, 그리고 시편 130편 6절…… 부르는 대로 척척 암송합니다. 컴퓨터라고 해도 버튼을 눌러야만 답이 나오는데 이분은 뭘 누를 것도 없이 바로 나옵니다. 그 놀라운 기억력 앞에 두손들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전과 7범으로 복역하고 있는 죄수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잘 외는 것하고 그 사람의 생활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글자만 읽은 것이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제가 성경읽기대회 같은 것을 잘 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못하게 하는 편입니다. 옛날에는 더러 해보았습니다마는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So what? 많이 읽었으니 어떻다는 것입니까? 많이 읽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많이 읽었는데, 가만히 보니 문제가 있더라 그 말입니다. 의외로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을 남달리 많이 읽는 사람인데도 가정생활이 믿는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아요. 사회생활이 성경 읽는 것과는 별개인 것입니다. 성경 많이 읽는 것으로는 당당 우등생인데 시어머니노릇 하는 것 보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성경 읽는 것이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저는 그런 유의 대회 같은 것을 삼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읽는 것에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행함 없이 읽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요즈음은 듣고 화답을 잘하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말끝마다 아멘, 아멘 하는데, 아멘만 해놓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야고보가 살아 있다면 이런 현상을 보고도 한마디했을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대답만 하는 사람이 있도다" 하고 말입니다. 아멘 하는 것이 그사람의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 또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아멘 소리는 또 유난히 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목사님들도 꼼짝없이 속고 마는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속에 받는 은혜가 있는 법인데, 소리만 컸지 아무 것도 된 것이 없거늘, 그 소리에 그만 '어이쿠, 뭔가 이루어지는구나'하고 목사님들도 속 게 된다는 말입니다. 감동이 된 것도 아니요, 결심이 선 것도 아니요,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낌새도 없이 "아멘!" 소리지른 것뿐이라면 딱한 노릇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로 보면, 한 아버지가 두 아들 가운데 먼저 맏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이 맏아들, 대답은 참으로 잘하였습니다마는 결국은 가지 않았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교인 중에도 그 맏아들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 멘' 해놓고는 가지 않습니다. 이 태도가 참으로 문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으로는 '듣는다' 라는 말에 '순종한다' 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몸으로 듣고 몸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행동으로 듣는 것이지요. 우리의 개념으로도 그렇습니다. 부모님 말씀 잘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앉아서 귀로 듣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듣는다, 곧 그래도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시켜 생각하는 것이 동양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헬라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듣되 참마음, 참뜻, 참정성, 참사랑, 참존경, 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온 인격을 바쳐서 듣고 수용할 때, 또한 이것이 앞설 때에 나의 의견, 나의 고집, 나의 교만 같은 것들이 다 부정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다 멀어지고 맙니다.
사도 야고보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합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라는 말씀도 됩니다. 자신을 속이다, 곧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속인다-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자기를 고의적으로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았더니 어느 사이엔가 아예 체질화하여버린 것이지요. 아는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실상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능력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중생한 줄 알았는데 오늘 시험을 당하고 보니 중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다 스스로 속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들었으면 말씀의 능력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아무 것도 없더라는 말입니다. 관념적인, 다분히 추상적인 지식만이 머리에 들어 있을 뿐이지 그의 감성이나 행위에는 전혀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행함이 없을 때에 참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참 능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비한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기만 한다고 해보십시다. 알 수가 없습니다.
나가서 실천해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를테면 "원수를 사랑하라"하시니 우리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이 좋을까 나쁠까,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들었거든 가서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당장 해보십시오. 그래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로구나" 깨달을 때에 엄청난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겸손하라, 봉사하라-행동으로 해야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나와서
행동하는 자만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러분, 말씀 듣고 봉사하지 않으면 은혜 되지 못합니다. 은혜의 그 깊은 뜻을 모릅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옛날 미국의 어느 곳에 한 여인이 일찍이 홀로되어 아이 여럿을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주일날이면 교회에 나와 어김없이 꼭꼭 5센트씩 헌금을 합니다. 이 5센트가 그 여인에게는 큰돈입니다. 이윽고 그 교회의 장로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주일마다 1불씩 헌금을 합니다. 여인의 20배나 되는 헌금입니다. 하루는 장로님이 이 딱한 사정을 목사님께 말씀드리고 그 여인을 부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집사님, 주일마다 5센트씩 헌금하기가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이제부터는 제가 대신하여 내드릴 테니 앞으로는 헌금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이 말을 듣고 그 여집사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5센트씩 하나님 앞에 바치면서 경험하는 그 은혜를 왜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렵게 바쳐본 사람만이 압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 생활비의 전부가 아닙니까? 이것을 바쳐본 사람만이 그 신비한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이적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와 청하면서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못해 청을 받아들이시고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십니다. 하인들은 물을 길어다 붓고 또 붓고 하여 아구까지 채웁니다.
이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그 포도주가 어디서 왔는지, 좋은 포도주를 나중까지 두었다느니 하며 이상타 하였습니다. 물을 직접 길어다 부은 사람만은 그 특별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는 말씀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말씀을 뜻을 모릅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말씀이 얼마나 신비로운 능력을 가졌는지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을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추리하고 나서는 "옳은 말씀이야" 하고 끝난 것뿐입니다. 안 것 같으나 몰랐습니다. 기억을 했다고 해도 아무 것도 모릅니다. 스스로 속은 것이지요.
여러분, 들었습니까? 그러면 그래도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말씀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행함과 순종에서 말씀의 말씀됨을 깨닫는 것이 바른 과정입니다.
이어 본문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3, 24)"-옛날의 거울은 지금 것과 같이 밝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돌이나 구리를 반들반들하게 잘 갈아서 거기에 비춰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의 거울이라고 해봐야 이 정도였습니다.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그런 거울입니다. 이 거울을 잘 닦아서 비춰보면 얼굴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희미하게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에 무엇인가가 묻었습니다. 다시 보니 안보입니다. 그래서 깜빡 잊어버리고 닦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거울은 있으나마나한 것입니다. 본문은 당시의 그 풍속을 잘 나타내준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거울이 내게 말해주는 것을 진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울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얼굴이 좀 시원찮게 생긴 사람은 거울보기를 싫어합니다. 거울이 내게 말해주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거울은 진실합니다. 거울이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울을 깨버린다고 내 얼굴이 달라집니까? 거울은 진실합니다. 우리는 거울이 말해주는 나 자신을 무조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절대로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거울 속의 저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한다고 정말 내가 아닐 수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결혼한 지 채 일 년이 안된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남편이 나뭇짐을 지고 장터에 나가 팔아서 돈을 좀 마련했습니다. 그 돈으로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은 마음에 장터 이곳저곳을 돌아봅니다. 그러다가 생전처음 보는 예쁘게 생긴 손거울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사 가지고 집으로 옵니다. 마침 아내가 집에 없어 방에 들어가 바람벽에 거울을 걸어 놓고 일을 하러 나갑니다. 잠시 후 아내가 방에 들어와 보니 처음 보는 것이 있습니다. 들여다보니 웬걸 예쁘장한 여자가 있습니다. "옳거니, 일 년도 못되어 바람이 났구나. 벌써 딴 여자를 데려다 놓다니, 아이고 분해!" 시어머니한테 가서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 시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들여다봅니다. "예쁘기는 뭣이 예뻐? 어디서 할망구를 데려다놓았구나." 거울이 흔치않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생전처음 보는 거울이니 자기 얼굴을 알 턱이 있습니까? 언제 자기 얼굴을 본 적이 있어야지요. 자기 얼굴은 자기도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거울에 투사된 모습이 고작인 것입니다. 거울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거울과 같습니다. 성경을 보느라면 거기에 내 모습이 보입니다. 분명하게 보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합니다. 나의 존재, 나의 가치, 나의 사명을 성경이 다 보여줍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는 내 모습이 거울을 보듯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무엇입니까?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는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게 가책이 있든 없든 들리는 대로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듣기 싫다고 해서 거부를 합니다.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본문에서는 곧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뭐가 묻었구나, 씻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은 했는데 돌아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건망증이 대단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성경을 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합니다.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 저것을 버려야 되겠다-결심도 하고 때로 맹세도 합니다. 그런데 문밖만 나서면 깨끗이 잊어버립니다.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말끔히 잊어버립니다. 거울을 보고 나서 금방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망각은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듣고 행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참 깨달음이 있고 말씀의 능력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열심히 들으십시오.
그러면 행하게 되고 또 행하는 가운데에 깊이 깨달을 것입니다. 행하는 가운데서 깨달은 진리, 말씀만이 나의 행위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제는 말씀을 깨달음에 따라서 살고, 말씀이 나를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됩니다.
곧 말씀의 열매로 살아가는 능력 있는, 권세 있는 생활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뉴턴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성전에서만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만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곧 가정에서, 직장에서, 시장에서 하나님과 가지는 바른 관계-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말씀의 능력대로, 말씀이 지시해주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내 의견은 여기에 개재될 여지가 없습니다. 더는 고집을 부릴 것도 없습니다. 묵묵히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베드로가 그 말씀을 따릅니다.
사실 베드로의 내심에는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종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5절)." 억지 순종을 합니다. 그렇게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만일에 베드로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면서 그물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제자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내게로부터 듣고 보는 것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깊은 데에 던지라면 깊은 데에 던지고 아침에 던지라면 아침에 던지는 것이다, 경험에 있느니 없느니 상식에 어긋나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는 하는 것이 아니다-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것이 제자도, discipleship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함으로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듣고 행함으로 지혜 있는 사람, 능력의 사람, 권세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아들 비유(마태복음 21:28-32) (0) | 2024.03.18 |
---|---|
두 빚진 자(누가복음 7:41-50) (0) | 2024.03.18 |
돌아서게 하는 자(야고보서 5:19, 20) (0) | 2024.03.18 |
두 여인의 비유(갈라디아서 4:21-23) (0) | 2024.03.18 |
두 문, 두 길 /마태복음 7 : 13 - 14 (0) | 2024.03.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