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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인의 비유(갈라디아서 4:21-23)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 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그렇지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그저 피상적으로 읽어서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난해한 만큼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기독교,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할 때 그에 대한해답이 율법과 은혜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 결과 그가 쓴 수많은 저서, 그 중 우리의 손에 쉽게 나도는 50여권의 저서 모두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하여도 조금도 잘못된 견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면 이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입장에서 모두들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신앙 양상들을 놓고 나는 율법주의자인가 아니면 은혜주의자인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저녁 수요 예배에 나오면서도 "이렇게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예수를 몰라서 못 나가는 사람도 많고, 건강이 좋지 못해서 못 나가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며 기쁘게 나왔다면 이는 은혜주의자인 것이며 반면에 "벌써 또 수요일 저녁인가! 참 빨리도 돌아오네, 꼭 이래야만 뭐 천당가나? 예수 믿기 참 힘드네"라며 누가 억지로 나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런 불평을 하면서 나온다면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러니까 나가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만 같고 나가자니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무엇엔가 끌려서 나가듯이 억지로 나오다 보니 대개는 그런 사람들이 지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봉사를 하거나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에 남을 돕는 일을 놓고도 이런 기회를 나에게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마치 도둑이라도 맞는 심정으로 아까워하며 되도록 주지 않거나 적게 주려고 애를 쓰는 이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모두 은혜주의자와 율법주의자의 모습을 말해 주고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정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가 어느 미국인의 가정을 방문했을 때인데, 그 부부가 농담 삼아 각각 자기의 입장을 말하기를 남편은 결혼생활 20년 동안 자기가 이 집의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마음대로 어디도 가지도 못하고 아내를 여왕처럼 모시면서 돈을 벌어다 바치는 신세로 살고 있다고 하자, 그 말을 듣고 난 아내는 나는 이 집의 월급도 못 받는 식모라며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들 참 불쌍하군요. 이 집에는 머슴과 식모가삽니다."하고서는 가정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천국이지만 잠깐이라도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게되면 그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모든 일, 모든 관계가 은혜의 관계로 접어들면 고맙고 즐겁고 영광된 일이 되지만 한 발자국만 잘못 해석을 하여 율법주의자가 되면, 무겁고 괴로운 멍에 매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경 66권을 창세기 1장부터 그런 눈으로 꿰어 본다면, 우리는 분명 율법주의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고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이는 곧 기독교의 교리를 대체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러한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를 역사적인 인물을 실례로 들어 가히 천재적인 설명을 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많은 연구들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2천년 전에 태어난 사도 바울의 논증에 미치기에는 어림없는 상태이고 보면, 실로 사도 바울은 놀라운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진리에 대한 도통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비유의 소재를 잘못 선택하게 되면 그 진리마저 흔들리고 무너지게 됨으로, 결코 비유는 함부로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전제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내 사라와 하갈을 예로 들어 그 관계를 설명해 나가고 있는 명쾌한 논조를 보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든 비유는 결코 꾸며낸 설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히 실존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상징화하여 그 속에 있는 계시적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 바울이 소재로 삼고 있는 아브라함의 가정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일흔 다섯 살 때에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그 외의 식솔들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무 자녀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그들로 인해 네 이름이 창대케 되고 또한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이미 나이 많은 아브라함이고 보면 열 달 후에 주시든지 아니면 일 이년 이내에 주시거나 그렇지는 못하다하더라도 최소한 십 년 이내에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더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적어도 아내 사라가 생리적인 단산을 하기 전에 주셔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말씀을 하시고도 무려 25년이 지나 갔으며, 사라는 이미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생활은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이와 같이 힘들 때이면 서양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농담을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저들의 글을 소개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사정을 잘 모르실 것입니다."라며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니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천년이 하루 같으신 분이 이 고통의 10년이 얼마나 길고 힘들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겠느냐며 농담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아브라함이 약속해 주신 그 아들을 얻기 위하여 25년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 마음이 오죽이나 하였겠습니까? 게다가 성경에 나타난 바는 없습니다 만은 그러한 기다림의 고통이 계속되어 오는 중 이제는 사라다 생리적으로 단산을 하여 그 일이 불가능한 몸이 되자 그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됩니다. 물론 사라의 생리적 단산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사라의 그러한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 이해를 돕는데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되자 아브라함은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아들을 낳으라는 것인가 보다 하고서는 아내 사라의 동의하에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취하므로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만은 이치를 따진다면 어쨌든 아브라함의 아들이 첩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본처의 이름으로 호적을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는 정당한 아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은 엄연히 살아 있음에도 그 명령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왜곡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적당히 만들어서 받아들인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니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만은 하나님께서 "아니라"시며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너의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하시면서 그 이름까지를 말씀해 주십니다(창 17:18-19). 그리하여 마침내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이 있은 지 25년이 되어서야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2)며 부활 신앙적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아브라함의 마음은 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런 줄 알았으면 끝내 기다려서 저 이스마엘을 서자로 만들지 않는 것인데 하는 아쉬움은 물론 두 여자를 데리고 살자니 그 고충이 또한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러한 가정 문제로 인하여 무척이나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가족 관계를 상징적 계시의 사건으로 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우연한 사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를 설명해 주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주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엄연한 하나의 비유로 등장시켜 율법과 은혜의 관계로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여기에는 육적인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 공통점이란 사라와 하갈 두 여인은 엄연히 육적으로는 다 같이 아브라함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둘다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은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보면, 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적자와 서자로 구분되듯이 다같이 아브라함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으나, 양자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라는 자유인이요, 하갈은 종입니다.
그리고 종인 하갈이 먼저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요, 자유인인 사라가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이스마엘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인간적이요, 육체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서야 여자를 취하면 언제든지 자식을 낳게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이고 자연 현상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여 태어난 자녀를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이삭은 밖으로 볼 때는 사라를 통해서 태어난 아브라함의 똑같은 아들이지만 이는 약소의 아들입니다. 그는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하여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하여 사라가 생리적인 단상을 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 낳아야 만이 하나님의 계시와 능력과 초자연적인 역사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일이 사라가 스물 대 여섯 살 때 아이를 낳음으로 되어졌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보아서 좀더 비약을 하게되면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사건도 그렇습니다. 옛날 초기의 신학에서는 예수님께서 동정녀로부터 나심으로 죄가 없다고 하는 무원죄회태설을 이야기합니다 만은 그것은 타당한 이야기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한 사람 마리아로부터 낳았으니 죄가 없고 두 사람이 합쳐서 낳으면 죄가 있는 것이라면 비록 한 사람으로부터 낳았다하더라도 적어도 50퍼어센트의 죄는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다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다는 것은 처음부터 엄청난 기적의 사건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방법도 자연적인 것이 아닌 초자연적인 방법을 취하여 그 일의 기적됨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이삭의 태어남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기적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따라서 이 아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약속을 이루시는 그 상징입니다. 때문에 태어나는 과정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생리적인 단산을 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가운데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불 신앙의 부산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좀더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이러한 부산물이 생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라가 임신한 다음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크게 후회했을 것입니다. 진정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무엇 때문에 가정에 화근을 만들어 고통을 자초하였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 신앙적인 생각의 결과로 이스마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삭은 철저한 신앙의 결과로 낳은 아들입니다. 저는 그러한 믿음을 행동적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당시의 장면을 놓고 한번 상상을 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이라는 이름까지를 지어 주시면서 정녕 낳으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를 믿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낳을 수가 없고, 내 경험, 내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마음뿐인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흔히들 하는 대로 "주여 믿습니다"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믿음이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십 수년 전에 단산해 버린 아내 사라를 그간은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은 믿음으로 그 아내를 만나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되지도 않을 일"하고 말았다면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얻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오늘 다시 그 아내를 만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적 믿음입니다. 이 행동적 믿음에 의해서 그는 자식을 얻게됩니다. 여기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이요, 행동이며 실적이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단순한 감정적 폭발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지극히 의지적이요, 행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열네살 위라고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삭이 서너살되었을 때에는 이스마엘은 벌써 스무 살이 가까웠을 무렵이 됩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자연히 이스마엘이 이삭을 쥐어박기도 하고 겁을 주는 등 그야말로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연히 이쪽은 후사요, 저쪽은 서자임에도 서자가 나이 많음으로 후사를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나이를 보자면, 이스마엘이 14년 먼저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되어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으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하나님의 약속을 놓고 보면 이삭이 훨씬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착안한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를 말함에 있어서 율법이 있은 다음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은혜가 먼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율법이나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모세와 율법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돌리고,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 그 보다도 모세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아브라함이 있었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신학에서는 모세와 율법에 앞서 아브라함이 있고 은혜가 있었으며, 따라서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원천적으로 먼저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율법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분명 율법은 율법대로 이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득불 모세와 아브라함을 대조하여 그 의미의 당위성을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요, 아브라함은 은혜의 대표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유대주의자들은 모세의 후예라고 볼수가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반면에 아브라함은 자유인을 만듭니다. 또한 모세와의 관계는 육체를 따라서 난 것이므로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의 관계, 곧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따라서 난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24절 말씀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타락성 때문에 생긴 법입니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더듬어 올라가 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식일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이미 16장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의문(依文)의 법이 있기 전에 기록되지 아니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법이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십계명이라는 것으로 기록이 되었느냐고 할때 그것은 인간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귀중한 율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흐려지고 지워지며 왜곡되어 버린 그 마음의 율법을 다시 깨끗하게 정서를 하시고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타락성 때문에, 다르게는 육체적 욕망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열 가지의 계명을 놓고 보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와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의 반복이었을까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유치한 상태에 있을 때에 하는 말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몽학 선생이라는 유명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몽학 선생이란 옛날 양반들이 아들을 바로 교육하기 위하여 요즈음의 가정교사에 해당하는 어른 선생을 둔 것을 말합니다. 이 선생이 어린아이를 놓고 특별히 예법을 가르치며 여러 가지 교육을 하게 될 때, 대체로 하지 말라는 주의의 말을 많이 하기 마련인데, 이는 그들이 그만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준이 높아져 스스로를 제어할 능력이 생기게 되면, 어거스틴이 유명한 말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 이것이 진짜 율법인 것입니다. 본래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지 말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라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묻는 율법사를 향하여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며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며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율법이 생겼느냐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아브라함이요,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언약이요, 믿음이며,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출발된 것에 근원을 둔 하나님 주도적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9절 말씀에 보면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율법주의자가 은혜주의자를 핍박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은혜를 따라 살고자 할 때에도 율법주의가 옆에서 나를 괴롭히며 핍박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보면, 은혜주의자와 율법주의자가 있을 경우 밖으로 보기에는 누가 더 잘 믿든 것으로 보여지며 인정을 받느냐 할 때 단연 율법주의자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율법주의자가 형식적으로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것은 없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모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알려지지도 않거니와 인정도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이 은혜를 핍박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이삭을 핍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비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성령을 따라 난자"라는 것은 핏줄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삭을 반드시 사라가 낳았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들은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족보를 이어가는 것은 무조건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우리와는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 여자와 이스라엘 남자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는 이방 사람인 한국 사람이 되는가 하면, 반대로 이스라엘 여자와 한국 남자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핏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계보를 중요하게 생각함인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자녀보다 많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자녀를 낳는다면 몇 명까지 낳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부지런히 낳아도 15명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부지런히 전도를 해서 영적인 자녀를 낳는다면 어디 15명만 낳고 말겠습니까? 수십, 수 백 명의 영적인 자녀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는 말씀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으로 주신 말씀을 보면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율법주의를 내어 쫓으라! 내 마음속으로부터 율법주의를 내어쫓지 않고는 깨끗한 자유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를 내어쫓아야만 이 은혜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율법주의적 요소를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이 율법적 요소가 제거될 때만이 은혜에 충만할 수가 있고, 은혜가 충만할 때만이 생명적이고도 창조적인 생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기업은 바로 이삭의 계보에 있습니다. 이삭의 계보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이어진 계입니다. 이 은혜의 끝에 영생이 있고 율법의 끝에는 사망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율법주의적 요소를 깨끗이 제거하고 은혜 중심적인 세계관, 은혜 중심적인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업을 누기에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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