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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 두 길 /마태복음 7 : 13 - 14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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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 두 길

마태복음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5, 6, 7장에 기록된 산상보훈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의 맨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경고에 대한 말씀으로 마치 부록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의 그 귀한 말씀을 다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준 이 진리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살아가려고 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진리의 말씀은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의 끝에는 영생이 있으니 좁은 문을 통하여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가만히 보면 전부가 하나같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 말씀하신 하나 하나가 다 좁은 길이지 결코 편안한 넓은 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좁은 문, 좁은 길, 그리고 넓은 문, 넓은 길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산상 보훈(5, 6, 7)의 그 긴 말씀의 결론은 이것은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며 거기에 진리로 통하는 길이 있고 영생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여기 두 문, 두 길이 있다. 어느 문, 어느 길로 갈 것이냐?"며 이렇게 그 선택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결정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이 성경, 특별히 구약성경 속에서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말씀들을 몇 군데 찾아본다면 신명기 3015 - 20절에 기록된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모든 교훈의 결론으로 마지막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여호수아도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 : 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에도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람의 길을 두었노니"(2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두 길을 보여 주시고 두 문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의 일생 사는 그 전부가 두 길, 두 문의 선택 사이에서 오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여기에서 바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선택은 자유이겠으나 그 길에서 통하는 마지막 운명은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갔으면 이는 필연적으로 잘못된 종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문으로 들어섰으면 잘못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문에 들어서는 것과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심판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나고 있는 참으로 귀중한 진리인 양극의 상태, 소위 말하는 흑백의 논리가 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선이 있고 악이 있는가 하면 사실은 그 어느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모호한 중간 상태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요즈음의 흔한 말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요 반드시 그른 것도 아닌, 그래서 흑과 백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도 있으며 뿐만 아니라 빨강, 파랑, 노랑등 다양하고 다원적이며 그리고 상대적으로 평가하고 인식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소위 현대 지성이 말하는 윤리의 기준이요, 철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예수님께는 오직 두 문, 두 길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선이 아니면 악이요, 의가 아니면 불의라는 흑과 백 둘 중의 하나일 뿐임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에는 오직 두 길 외에 모호한 중립적 상태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모호성을 결코 용납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두 문, 두 길! 이제 죄인이냐? 구원받는 자이냐? 또한 생명이냐? 죽음이냐? 그리고 천국이냐? 지옥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마귀냐? 일 뿐 여기에 중간 상태의 존재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엄격하게 흑백 논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좇아 그 뒤를 따르는 데에는 다른 소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를 따라가든지, 아니면 아닌 것인 그 둘 중 어느 하나이지 따르는 것도 아니요, 안 따르는 것도 아닌 그런 애매 모호한 상태는 예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직 두 문 중의 하나요, 두 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지금 어느 편에 섰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더는 설명할 것도 없이 마귀의 자녀임이 분명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면 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여기에 중간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우기 조심할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다는 그것과 하나님과는 반대로 산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족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가기에는 참으로 부족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족할 따름이지 악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는 불완전하고 못된 자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귀의 자녀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두 가지의 문만을 놓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두 문을 놓고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그 선택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에 오늘 본문은 이를 위해 매우 귀중한 진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그 첫번째 기준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시점이 현재에 있느냐 미래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좁은 문은 지금도 좁고 불편한 길이지만 저 끝에는 영생이 있고, 넓은 문의 넓은 길은 현재는 넓고 편하여 좋으나 저 앞에는 사망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단순히 "좁다" "넓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먼저 현재지향적이냐? 아니면 미래지향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형태에 있어서도 두 가지의 현상을 보게 되는데 그 중 하나는 저 먼 미래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오늘을 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현재만을 생각하며 현재를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매우 핵심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을, 내 중심을 어디에다 두고 사느냐 하는 것은 나의 현주소임과 동시에 미래의 생과 사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또 자꾸만 과거에 집착해서는 "그 옛날에 좋았지!"라며 누렇게 퇴색된 옛날 사진만 뒤적거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결혼식 때이면 카메라를 몇 대씩 동원하여 야단스럽게 많이도 찍습니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몇 사람 돈만 벌게 해주는 것이지 별 의미가 있는 것 같지를 않습니다. 이제 한 10년쯤 지난 후에 그 사진을 보고 거울을 한번 보세요. 그저 처량할 뿐이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과거를 돌아보며 좋았다! 나빴다! 하는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요, 이것이 다 과거지향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목표가 언제나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앞에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항상 저 앞을 향하여 있어야 하고 좀더 나아가서는 다가올 미래의 것을 위하여 오늘의 어려움을 참을 때에 거기에 좁은 문의 좁은 길을 가는 영생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앞날이야 어떻게 되었든 현재가 좋으면 되었지 하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넓은 길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는 공부를 두고 생각을 하더라도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시간을 위하여 하는 것인데 아마도 90%는 억지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고3 학생들 공부하느라고 애를 쓰는 것도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며칠 후에는 정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부끄러움을 당해야 하고 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는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다가오는 앞날을 위해 수고하며 준비를 해야 하는 이것이 바로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답게 사는 일들이 다 그런 것이요, 이제는 더욱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하늘나라를 생각하며 이 고통을 참는 그것이 곧 좁은 길을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넓은 길을 찾는 사람은 미래야 어떻게 되든, 천당, 지옥이야 있거나 말거나 우선 현재가 좋으니 그것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술 마시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마신 다음에 그 뒷날 깨고 나서 "잘 마셨지"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속 쓰리고, 돈 없애고, 망신당하는 것은 마실 때의 기분 때문에 그 악순환을 거듭하며 살아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재에 매인 사람이요, 넓은 길에서 헤매다가 넘어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마음을 두고 현재의 고통을 참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 선택의 두번째 기준은 쉬운 길이냐? 어려운 길이냐? 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워도 뜻 있게 사는 길을 찾아 나갈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평안함을 찾으려는 것인가? 여러분! 대체로 의미라는 것은 고통 속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저 쉬운 일에는 쉬운 그만큼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 그러나 그 속에 진정한 의미가 있고 높은 가치가 있기에 우리는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반면에 쉬운 길은 넓으나 무의미한 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뜻을 위주로 사느냐? 안일을 위주로 사느냐? 하는 그것이 바로 좁은 문, 넓은 문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이 좁은 문, 좁은 길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의 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명확한 훈련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좁은 길에서 얻어지는 것이 실로 많습니다. 이제 앞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점점 더 강해지고 지혜로와지며 신령해집니다. 이에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뜻과 생각을 앞세우려는 사람이요, 넓은 길, 넓은 문으로 들어서려는 사람은 그저 육신의 평안만을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영생에 대한 댓가와 은혜에 대한 보답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얻으려면 그것이 아무리 은혜로 주어진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정도의 수고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당연시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반면에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언제나 그저 쉽고 편하기만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능한 대로 공짜를 즐기며 공짜 인생을 살고 싶은 거란 말입니다.

아무튼 이 여러 설명들의 결론은 생명을 위주로 사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요, 육신을 위주로 사는 사람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문, 두 길을 놓고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바로 사활(死活)의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 누가복음 132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향하여 어떤 이가 묻기를 "주여,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 듣다가 보니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있겠나 하는 생각에서 물어보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많다 적다, 혹은 몇 퍼센트다, 몇 명이다, 하시지 않고 오직 한 마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이라고 할 때에 분명하게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문도 자동식이 되어 들어서기만 하면 스르르 열려지는가 하면 또한 빙빙 돌아가는 문 등 여러 가지로 고급화되어 있습니다만, 옛날의 문은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가장 큰문인 성문을 생각해 보면, 이 성문은 고관대작들의 화려한 출입이나 개선 장군의 영웅적 영광과 그를 위한 환호성 속에 수많은 군대와 함께 드나들 수 있는 큰문이 있고 그 외에 반드시 성 뒤에나 성문 옆에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이것은 성문을 닫은 이후에 들어오는 사람만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성문을 열었다가 저녁이면 닫게 되는데 어쩌다 그만 늦게 들어오게 되면 이미 성문은 닫힌 터이라 부득불 나귀에서 내려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그래서 별명이 바늘구멍이라고도 하는 이 작은 문으로 몸을 구부려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작은 것이 좁은 문인데 저들에게 있어서는 이 넓고, 좁은 문에 대한 이야기는 매일같이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넓은 문이란 말을 탄 채 화려하게 자랑을 하며 모든 소유를 다 가지고 영광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면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이요, 좁은 문이란 미안함과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말을 탔으면 말에서 내려야 하고, 짐을 졌으면 짐도 다 내린 채 간신히 몸만 구부려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좀 더 나아가 뜻으로 말한다면 넓은 문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망과 자랑, 그리고 자기의 업적, 자기의 의를 가지고 들어가는 문이요, 좁은 문이란 자기를 부정하고 회개하며 생명 중심에서 오직 내 영혼, 내 생명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하는 자기 부정의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좁은 문에서는 이제 오래 살고 일찍 죽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영광을 누리거나 부끄러운 것도 상관이 없어요. 가난하고 부한 것도 개의치 않아요. 오직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만을 생각하며 몸을 굽히고 자기 부정과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좁은 문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외에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만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에 따른 길도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을 일시적인 것이라 한다면 ""은 계속적인 것입니다. 문은 한번 들어서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데 길은 계속해서 오래 오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계속 되어진다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순간적으로 순교를 당하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만 해서 그것으로 고통이 끝나고 땅위의 생명이 끝나버리면 되겠으나 그러치를 않고 그 고통이 계속 이어지게 되니 이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자 주 기철 목사님께서도 4년 반에 걸친 순교 전의 긴 옥고와 그 고통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 나의 생명을 거두워 주시옵소서, 이대로 오래가면 저는 순교하지 못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고통! 정말 이 좁은 길의 긴 여정은 힘이 듭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한 산을 향해 사흘 길을 가게 됩니다. 당장 바치라고 하셨으면 그래도 바쳐버리고 말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제 사흘 길을 그것도 바칠 제물인 아들 이삭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가는 길에는 이렇게 함께 가지만 이제 돌아올 때에는 혼자 올 것이란 말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사흘 길! 그 길이 얼마나 좁은 길이었겠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므로 이 좁은 길이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긴 순례의 길이요 넓은 길이란 자제 없는 방탕의 길, 자기 중심적인 길입니다. 따라서 좁은 길은 찾는 이가 적어 외로운 길이요, 넓은 길은 쉽고 찾는 이가 많아 동반자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좁다는 것일 뿐이지 좁은 길도 길은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좁은 길은 어려운 길이라는 이야기이지 막힌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좁고 어려울 뿐 분명한 문이요, 길이기에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과 어렵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지금은 고생이 되지만 가능한 것이요,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의미가 있으며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좁은 길의 최후는 영생이요, 넓은 길의 마지막은 멸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최종 목적에 있습니다. 저 앞에 있는 최종 목적!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괴로울 때마다 이 궁극적 마지막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마지막은 주님 앞에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파이널 고울(final goal)! 그것을 향해 가는 여정은 외로운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와 동행할 수 없으며 또한 나를 위로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이 최종 목적! 다가올 영생의 그날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뜻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고통은 저 미래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요, 분명 이 길대로 따라가면 영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내어야 하고, 기뻐해야 하며, 순교적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좁은 길은 절대화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 이 길뿐인 길! 이 길은 상대적인 길이 아님은 물론 선택의 여지가 달리 있는 길도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그렇게 가야만 하는 길! 좁은 길 그대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갈보리 언덕까지 따라 올라가야 할 뿐 다르게는 될 수가 없는 길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다(I am the way)"(14 : 6)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 원문의 표현과도 같은 것인데 여기에서 길이라고 할 때의 그 길은 어웨이(away)인 여럿 중의 어느 한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그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좁은 길이요, 다른 것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길이며, 진리의 길이요,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이렇게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갈보리 언덕을 향하여 몹시도 좁고 험한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이는 그 길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말씀을 드린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산상 보훈의 긴 말씀을 마치신 후 그 귀중한 결론으로 "이 길은 좁은 길이다. 그러나 영생의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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