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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는 것을 주노라(사도행전 3장 1절~10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미국 콜럼비아대학 총장을 지낸 니콜라스 머레이 박사는 세상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의 사람, 문제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다수의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소수의 사람, 다수의 사람, 대부분의 사람이라니, 여러분,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좋은 일은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미국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은 7백 명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7백 명만 있으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교육 할 것 없이 모든 방면에 걸쳐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 몇 명만 있으면 그들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몇 사람의 좋은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일을 잘못되게 만드는 것도 몇 사람 때문입니다.
'몇 사람의 정신병자 때문에 온 인류가 고생한다'고 어느 역사가가 말했습니다. 몇 사람의 독재자, 몇 사람의 아첨꾼, 몇 사람의 악마주의자 때문에 온 인류가 시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시달려온 공산주의도 그러합니다. 온 국민이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불과 5 내지 7퍼센트 정도의 공산당 때문에 국민 전체가 공산치하에서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역사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악한 사람 몇 명으로 해서 전체가 잘못되는 것입니까?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된 현실을 수수방관하는 다수의 사람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한몸 편하고 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외면을 합니다. 아주 눈감아버리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다수가 수수방관하는 틈을 타서 악한 몇 사람은 마치 세상이 내 것인 양 마음대로 하려 듭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자동차를 운전하실 것입니다. 복잡한 도로에서 운전하려면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차, 옆차, 뒷차에까지 신경을 써야만 안전운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참으로 보기 흉한 장면들을 봅니다. 피우다 만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휙 내던지는 것입니다. 도로 위로 떨어진 담배꽁초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차바퀴 밑에 깔려서 먼지가 되고 결국에는 우리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사회 전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내해서도 끝내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내 앞에 돌아올 이익만 생각합니다. 여당(與黨)이 어떤지 야당(野黨)이 어떤지, 누가 올라섰는지 누가 내려섰는지. 사회 정의가 어떤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늘 어지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관심 --- 무서운 적입니다. 무책임 ---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때로는 동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듯하나 종국에는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나로 인하여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립니다. 나아가 하나님까지 원망하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 요런 것을 모르십니까?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이야기합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제가 하나님 편에서 응답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보자하니 내 할 일만 가득하구나. 네가 할 일은 무엇이냐? 네가 할 일은 하나도 없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무관심하고, 무책임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퍽 아이러니칼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미문(美門)이라고 불리는 매우 아름다운 문이 있습니다. 바로 그 문 앞에 아주 추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거지가 앉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 장면입니까? 이 불쌍한 거지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 거지는 자기 혼자 여기에 나올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누군가가 메어다 갖다놓아야 하는 앉은뱅이입니다. 하루종일 앉아서 오가는 사람을 상대로 구걸을 합니다. 그는 성전 밖에 있습니다. 넓은 성전 뜰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정작 성전 안에 들어가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성전 안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몸은 성전 안에 있는데 마음은 밖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나가서 그것을 해야지' '오늘은 누구를 만나야지' --- 이런 생각만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성전 밖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시 미문 앞에 앉아 있는 거지에게로 돌아가 보십시다. 어떤 사람은 평생의 소원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돈을 열심히 모아 어렵게 어렵게 방문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평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고, 또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체험을 가지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이렇듯 많은 역사가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마는 문 밖에 앉아 있는 이 거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설사 성전 안에서 영원히 죽고 영원히 사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 거지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날그날 손안에 쥐어지는 몇 푼 돈이 관심의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그 돈을 모아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잘살아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집도 필요 없고 훌륭한 명예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굶지 않고 먹을 수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이 거지가 더욱 불쌍한 것은 생을 체념했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병들었다고 마음까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앉은뱅이라고 마음까지 앉은뱅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구걸하는 생활에 마음까지 익숙해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경제 적으로 가난하다고 마음까지 비굴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몸이 병들었다고 정신까지 병들어서는 안됩니다. 사업에 실패했다고 인격까지 실패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번 역설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몸이 불편한 대신 영혼이 건강하고, 세상일에는 실패했지만 신앙에는 성공이요, 세상 명예에는 실패했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해서 자신을 찾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돈 몇 푼 있고 명예 깨나 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환경이나 처지로 인하여 그 영혼까지, 그 내적 존재까지 종속되어 함몰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배 없이 삽니다. 찬송도 필요 없고, 제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한푼 주십쇼'로 족한 것입니다. 몸이 병들었다고 마음까지 병들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예수 믿으시오" 하면 "예수가 밥 먹여주나?" "당신이나 믿어!"라고 대거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런 관심 없이 체념으로 세상을 살기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그 거지를 보았습니다. 성전의 미문을 드나들면서 여러 차례 그 같은 거지를 보아왔습니다. 주머니에 돈이라도 있으면 한푼 던져주고 없으면 못 주는 정도였습니다마는 그날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그 거지를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사건이었지만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의 내적 존재가 변화하였기에 인간관계도 전혀 달라졌던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때로 우리는 나의 의지, 나의 수양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이제 그 노력을 포기하십시다.
찰스 다윈(Charles. R. Darwin)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익히 아실 것입니다. 그는 1833년, 진화론을 전개하면서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발표를 합니다. 최초의 단세포생물이 점차 진화하여 고등동물이 되었고 마침내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이론을 설정한 다윈에게는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고리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이론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간 고리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미개한 원주민이 사는 섬을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남양군도의 어느 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분명 사람으로 생겼으나 원숭이처럼 생활하는 집단을 만납니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고리쯤 되겠다' ---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일부러 그 섬에 가본 다윈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을에는 교회당이 서 있고, 깨끗하게 옷을 차려 입고 교회당에 나가 예배를 보고 찬송을 드리는 그들은 전의 그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습니다. 문명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존 패이턴(John Paton) 이라는 선교사의 노력으로 새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고 돌아간 다윈은 런던 선교협회에 거금을 헌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사람됨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소중하게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달라졌습니다. 옛날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3천 명 앞에서 설교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여 내가 보는 내가 다를 뿐더러 이웃관 또한 달라진 것입니다. 창조적인 마음, 창조적인 시각, 창조적인 행위 --- 모든 것을 창조적인 자세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그는 갈릴리 마을의 초라한 어부였습니다.
어부로 그러구러 살다가 죽어갈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생전에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본받고 예수께 듣고 배웠습니다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는 비겁하게도 세 번이나 부인하면서 예수를 떠났던 배신자였습니다. 의(義)가 없는 비겁한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는 자기 비하(卑下)의 인간이 됩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자를 잘못 두면 스승이 망신을 당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나봅니다.
사양하고 포기하겠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그는 이러한 생각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겸손한 것도 같습니다마는 이것은 철저하게 불 신앙입니다. 상당한 교만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난 다음, 드디어 나는 사라지고 예수가 베드로 안에 거(居)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 안에 살게 됩니다.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 붙들려버린 사람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나를 봐도 내가 아니요, 내가 남을 대할 때에도 내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聖)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그는 젊어서 매우 방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회개한 다음 「참회록(Confessions)」을 써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줍니다. 또한 「신국론(The City of God)」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깁니다. 그가 예수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된 다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술마시러 다니던 골목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왜 그 동안 안보였습니까? 잠깐 쉬었다 가세요" --- 술집 아가씨가 뛰어나와 반색을 하며 반가워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소."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여인이여, 네가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와 함께 사는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리고 지나갔답니다.
여러분, 전에 생각했던 나는 누구입니까? 전에 만나던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전에 있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나를 보고 또 이웃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생활에 중간자를 끼워 넣지 맙시다.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 발상이 아니요, 내 의지도, 내 노력도 아닙니다. 그가 나를 붙잡을 때에만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주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주도되는 인간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교회에 부흥 인도를 하러 갔을 때. 저는 참으로 마음 아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21세의 청년으로 남대문 근처의 창녀촌에서 포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추잡한 모습들만 보고 자라왔지만 그는 예수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정신까지 이상해질 정도였습니다. 그가 한번은 저를 찾아와 울면서 간절히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는 구제불능일까요?" 저는 그를 붙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을 포기하십시오. 내가 의로우리라는 생각, 내가 깨끗하려고 하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십시오. 판단도 하지 말고 스스로 세우려고 하지도 마세요. 자기주의를 포기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 있고, 그리스도의 능력에 붙들릴 때에만 내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주도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지배합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 뜨거운 마음, 그 강한 말씀이 나를 지배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마음이 내 안에 있어서 내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면 누구든지 경험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닌 주님의 마음, 신비로운 평안, 신비로운 기쁨,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 나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있어서 그가 사랑하던 자를 내가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내게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물질은 보이지 않고 예수만 보입니다. 내 지혜는 없어지고 그의 능력만이 내 마음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의 명령을, 그의 약속을 따릅니다. 베드로는 모름지기 그랬을 줄로 압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이 말씀을 믿었을 것입니다. 또한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7-8)." 이 말씀이 귓가에 쟁쟁했을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 주님을 마음에 생각하며 그 주님이 나를 지배하게 될 때에 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불쌍한 사람을 향하여 내가 내게 있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네게 준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주노니 일어나라' 이름은 곧 존재요, 속성이요,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예수가 나타났고, 예수의 능력이 나타났고, 예수의 속성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곧 능력 있게 사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체면 챙기느라 고생하지 마십시다. 깨끗이 지워버립시다.
여러분, 내 이름으로 살려들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십시다.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나의 이름을 희생하는 자를 순교자라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나의 이름을 완전히 죽였을 때, 주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의 능력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 --- 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베드로가 누군데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나를 보라. 중생(重生)한 나를 보라. 그리스도 안에 사는 나를 보라. 주님의 말씀에 붙들린 나를 보라. 주의 이름으로 사는 나를 보라. 내게 있는 이름을 네게도 예수의 이름이 나를 변화시킨 것처럼 그 이름이 너를 변화시킬 것이다' --- 바로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기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 때에 비로소 승리가 있고 기적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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