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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경륜(골로새서 1:24-29)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네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똑같은 거리의 길을 걸어도 갈 때와 올 때가 다릅니다. 언제나 가는 길은 멀고 돌아오는 길은 가깝습니다. 가는 길은 다시 돌아와야 할 길을 가기 때문에 갈수록 멀어지는 가운데 점점 더 힘들게 혹은 멀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아는 길을 돌아오고 있기 때문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으로 압니다.
똑같은 일을 하지만 알고 하는 일은 쉽고 모르고 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살았으니 살아갑니다. 배고프니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하겠으니 움직이고, 피곤하니 쉬고, 졸리니 자고, 기진 하니 죽어 갑니다.
이것이 인생이겠습니까?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괴롭고 쓰리고 아프다 하더라도 우리는 나의 나 됨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도대체 왜 살아오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될 수 있는 대로 기피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나름의 이상과 너무 먼 거리의 생을 살아 왔기 때문이겠습니다. 이렇게 묻고 나면 후회스러운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는 묻지 않고 되는대로 사는 데까지 살아가려고 하는 방치된 생애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내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뜻이 무엇입니까? 희미한 대답을 그대로 두지 말고 다시 짚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깊이 물어 봅시다.
여기에 우리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또 심판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창조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으로 우리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역사 안에 하나님의 뜻하신 계획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의 목표가 있습니다. 뚜렷한 방향과 종착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모든 물은 굽이쳐 제멋대로 흐르는 것 같으나 다 같이 바다로 향합니다. 물이 예외없이 바다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부조리한 역사, 악하고 선하고 모순되는 것 같아도 이 모든 역사는 합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향으로, 그 목표로 분명히 향하고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궁극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고 있습니다.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끝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고 하는 과정도 그의 능력과 지혜 안에서 운행되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속에 신비함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예의도 없습니다. 흔히 자기 잘못을 핑계하면서 우연이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 하나님의 감추어진 뜻이 있어서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때로 신비스럽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신비롭게 보일 뿐이지 하나님께는 신비로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 눈에 때로는 부조리하게 보입니다. 불합리하게 보입니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듭니다만 그 합리란 척도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어머니의 젖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젖을 먹을 때 영양가를 따지고 먹은 것은 아닙니다. 먹고 자라서 이제 뒤늦게 그 젖이 어떠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그 오묘하고 놀라운 깊고 엄청난 역사를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립니까? 보아하니 신비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 천국에는, 또 그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역사를 당신의 자녀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우리는 가끔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충분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무한한 세계를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에 충분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이제 결정적인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오묘하신 뜻과 하나님의 공의가 역력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은 뜻을 압니다.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쳐다볼 때에 우리는 그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알 수 있습니다.
못 다 이룬 실패, 자기의 한 욕망, 여기에 틀을 박고 이것에 의해서 세상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바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부분에 의해서 전체를 보지 마십시오. 전체에 의하여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대한 세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이 엄청난 우주적 경륜을 보고 그 안에서 내게 향하신 경륜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적고 미미한 존재이지만 그 엄청난 경륜 속에 포함된 나를 향한, 내게 주신 경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이 경륜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했습니다. 경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요, 경륜의 대상은 교회요, 또한 경륜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약속을 이루셨고 그 구원을 성취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이루시는 이 경륜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 엄청난 구원의 경륜 속에 있는 자기 자신임을 알고 자기 생애를 다시 재해석하게 됩니다. 내가 왜 하필이면 이방 땅 길리기야 다소에서 태어났느냐고 물었습니다. 결국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고자 하는 오묘한 경륜이 있습니다. 내가 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됐느냐? 이것도 역시 많은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이런 수련을 일찍이 쌓게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것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평생 사도로 살고, 복음 전도자로 살아왔지만 역사가 말한 대로, 또 성경이 비추어주는 대로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력도 좋지 않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오는 병이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간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병을 가지고 나약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속에도 하나님의 경륜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뜻을 그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경륜입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팔십 세에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모세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갈대 상자에 실려서 나일강에 떠내려갈 때부터 벌써 거기에 경륜의 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궁전에 들어가서 아들이란 이름으로 사십년을 자라납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입니까? 이렇게 키워지고 나서야 이스라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애굽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했습니다마는 미디안 광야에 쫓겨나서 허탈감에 빠져 사십년 동안 이드로의 양을 치는 그 생활이 어찌 우연하고 단순한 일이겠습니까? 이 사건을 통해서 목자로서 양을 치면서 지도자의 소양을 기르게 됩니다. 그리고 팔십 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모세야, 이 백성을 건져라." 그러자 모세는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고 했습니다. 차마 "내가 애굽에서 살인한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못해서 이런 핑계를 대면서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가라면 가는 것이다. 내가 벌써 팔십 년을 준비시키지 않았느냐?" 모세는 미쳐 몰랐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 좀 잘못한 일도 있었습니다만 어쨌든 열일곱 살에 형님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가 종이 됩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것도 억울한데, 정결하게 사는 것도 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 죄수가 됩니다. 십삼년의 모진 고생을 통해서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 형님들이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요셉 앞에 무릎을 끓고 지난날의 죄를 자복하며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요셉이 그들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야말로 보기 좋게 복수할 수도 있고 크게 망신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님들을 위로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참 45:5). 하나님의 경륜을 알았기에 그는 원수를 사랑할 수도 있었고, 형님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경륜을 아는 자의 신앙입니다.
사건을 단순히 이해 관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장부에 의해서 처리합니다. 적자냐 흑자냐, 얼마를 벌었느냐, 이렇게 꼭 따지고만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기분, 자기 명예, 자기 행복, 어떤 때는 자기의 도덕적 기준에 의해서 교만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어쨌든 자기가 중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적과 업적을 내놓으려 하기도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면서 무엇을 남기자는 것입니까? 어쩌다 등산을 해 보면 높은 산의 바위에다 이름 석자를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남기면 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많은 자녀를 통해 무슨 업적을 내놓자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향한 평판에 대해 신경을 너무 많이 씁니다. 심지어는 가정도 사업도 망한 지 오래 되었는데 남들이 뭐라고 할까, 이것만 생각하느라고 버티어 나가면서 마지막에는 더 크게 망합니다. 생각하면 어이없는 얘기입니다. 그저 남들이 나에게 뭐라고 할까 그것만 생각하느라고 그만 내가 죽어 가는 것도 모릅니다. 이것 또한 미련한 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의의냐 불의냐, 죄냐 의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내게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 있느냐, 그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도 있고 악도 있었습니다. 옳은 일도 있었고, 옳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모순도 있었고 실패, 성공, 건강, 질병, 배신, 무엇이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음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으며, 왜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가진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 그 방향이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 뼈아픈 실패, 만신창이 된 인격, 그러나 잊지 마십시다. 실패란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내게 기준해서 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판정승과 판정패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얼마나 벌었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업적을 세웠느냐도 아니고, 누가 나를 얼마나 칭찬해 주느냐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 얼마나 만족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은 성공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낙담하는 동안 하나님은 당신의 경륜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하는 바로 이 사건이 하나님에게는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이것이 성공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인도하는 방향을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몰랐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는 결코 헛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투자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패할 수 없습니다. 결코 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역사는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 장님된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사람이 왜 장님이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보세요, 나면서부터 장님이 되어서 사십년 동안 얻어먹은 거지인 이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두 눈이 멀쩡한 사람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가졌다 못 가졌다, 안다 모른다, 할 수 없다 있다. 이런 말은 필요 없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향하신 경륜이 계십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5천 명이 광야에 모여서 배고파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음식을 주어 먹게 해야 하는 시간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떡 가진 것이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빌립이 떡을 가지고 나와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져 오라"하여 이것을 축사하시고 5천 명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제자들은 어째서 떡 다섯 덩이를 달라고 하시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어린애 손에 있는 떡 다섯 덩이가 꼭 필요합니다. 많다 적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대로 내놓으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그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속된 미래와 엄청난 경륜이 있습니다. 내게 향하신 경륜, 그것을 알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서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은혜를 주셨고, 은혜를 배반한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도 모르고, 그저 인간적인 생각에서 허무와 낙담에 싸여서 헤어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지난날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내게 향하신 경륜이 있었으며, 또 미래를 향한 경륜이 어디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보잘것없는 보리떡 다섯 덩이와 같은 인간이라도 주의 경륜에 따라서 그 경륜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주의 손에 바쳐서 주님의 엄청난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결코 이 경륜을 외면하는 생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그 뜻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헌신하고 수고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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