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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지지 않는 변명(요 10:29~42)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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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지지 않는 변명(10:2942)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아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 본문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까다로운 내용이지만, 깊이 음미하면 뜻이 깊은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숨은 보화를 캐어내듯 숨은 진리를 잘 캐어내면 쉽게 깨달은 진리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가령, 치아가 아주 좋은 사람이면, 연한 음식보다 다소 굳은 음식이 씹을수록 맛이 좋은 것처럼, 조금 어려운 진리가 알고 보면 더 진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내용 모두가 선한 목자가 주제가 되어, 목자와 양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시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의 모습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모습을 한 마디로 대변하면 양을 극진히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 사랑은 서로 응답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짝사랑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필자 생각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짝사랑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방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감동시킬 수가 없었다면 아마 사랑하는 편에서 자기 사랑에 잘못이 있지 않나 한 번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방적인 사랑이란 없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반드시 상대방으로부터 응답이 있습니다. 좋은 예로, 예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 순교해야 할 때에 기꺼이 순교함을 기독교 역사에서 많이 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제자들의 순교는 합쳐져서 아가페라는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을 할 때에 왜 저쪽에서 응답이 없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그 사랑에는 반성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필자에게 자녀들의 문제, 남편의 문제로 상담해 오는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자기는 참 사랑을 했는데 저쪽에서 그 사랑을 몰라 주고 잘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사랑했습니까?"라고 다시 물어봅니다. 이 사랑에는 나를 중심한 사랑이 있었거나 무엇인가 잘못된 사랑이 있었기에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사랑할 때, 양은 목자를 믿고, 믿음으로 따라감을 앞에서 공부했습니다. 양이 목자를 믿고 따라갈 때, 그 목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능력과 지혜가 동반되어야 함도 앞에서 생각했습니다. 능력과 지혜가 없는 사랑은 눈물뿐입니다. 사랑은 간절하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앞장에서 본대로 예수님은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목자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 양인 이상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참으로 우리를 든든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맹수가 나타나 양을 몰고 가는데, 목자가 그것을 보고 그냥 울고 있다면 목자가 무슨 소용입니까? 달려가서 빼앗아야 선한 목자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나약한 것이 아니고 능력과 지혜가 있어서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목자가 보호하고 있는 양은 빼앗아 갈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로 재설명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보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그리스도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10:29). 저희를 내게 주신 아버지 목자, 즉 목자장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양들을 내게 주셨으므로, 이제 너희들의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 37에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다"라던 말씀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 부흥을 위해 열심히 심방도 해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전도도, 권면도 해야 하지만, 열심히 열심히 하다가 너무 지나쳐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너무 지나친 것도 불 신앙이 아닌가 하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데까지 하고 나서, 그 다음은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친절을 베푼다고, 내가 말을 잘한다고, 내가 근면하다고 안 될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는 일은 내가 할 일이지만 자라고 안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됩니다. 햇빛이 비치고 비가 오게 하는 것은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학술적인 말로 표현하면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란, 믿는 사람을 말하는데 나의 믿음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남의 믿음까지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하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 그 어느 것이라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나를 선택하셨고 부르셨고 나를 의롭다 하시어 영화롭게 하셨으며, 오늘 이 순간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인도하신 자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구원의 역사입니다.

다음,"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지 손에 있는 것이 예수님 손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 손에 있는 것이 아버지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내게(예수님) 주신 양은 내가 지키는데,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보증해 주시는 것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는 많은 유혹자가 나타나서 택한 자라도 유혹할 수만 있다면 유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유혹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또는 유혹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택한 자라도 유혹할 수만 있다면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붙드신 자는 절대로 유혹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택한 자라는 것을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셨다 할 때에는 틀림없다는 뜻에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그를 정죄하겠느냐, 즉 누가 그를 빼앗겠느냐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옳다 하시면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결국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목적으로도 하나요, 뜻으로도 하나요, 일하시는 것으로도 하나로서 하나님의 역사는 곧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사랑은 완전히 하나입니다. 또한 사랑은 순종을 이룹니다. 사랑을 쉽게 말하면, 내 뜻보다 그 분의 뜻이 옳게 느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다 옳고 저쪽이 틀린다는 생각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즐거운 순종이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나보다 그 분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질 때에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순종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 순종함으로 하나가 됩니다. 요한복음 15,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가 된 것같이 우리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뜻으로만 하나란 말은 아닙니다. 좀더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의미에서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입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된 증거는 그가 사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했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죽은 다음에 너희 기억 속에 내가 있으리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 됨을 설명하는 강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말씀으로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으므로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라고 했더니,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10 : 31).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왜 돌을 던지려는 것입니까? 믿음을 준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32절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변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10 : 32). 예수님의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다시 말하기를 선한 일로 인하여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참람해서 그런다고 대답합니다. 선한 일이란 묘한 반사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악한 자를 더 악하게 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을 비방하는 악까지 행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선으로 보는 자는 선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악한 자는 반드시 선을 시기하므로 선을 볼 때 더욱 악해지는 것입니다. 악은 선한 자를 보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참람해서 돌을 던지려고 한다는 것은, 레위기 24:16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이 말씀에 의거해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죽어 마땅하나, 만일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죽인 자는 벌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스데반도 바로 이것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예수님의 선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은 단순히 선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일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계시적 의미가 사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장님이 눈을 떴다, 오천 명이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장님이 눈을 떴거나 빵을 그냥 얻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속 사업의 상징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시적 의미로 받아들일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적인 사건으로 보지 못할 때는 참람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사건 하나하나를 계시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의 참람하다는 말을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시편 82:6을 인용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않았느냐"(10:34). 여기서 제사장이나 선지자들, 즉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는 사람들을 신성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에서는 ""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번역이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신성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부드럽고 보다 나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신성한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받은 자를 신성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가지고 예수님은 지금 변증을 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 그러면 믿는 길은 무엇인가, 즉 어떻게 해야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많이 양보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10:37-38).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됨의 존재(who) 문제와, 아들 되심으로서 하신 사역(what)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와, 예수가 무엇을 행하셨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먼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고 그 다음에 병 고친 사건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병 고침 받은 것이라도 우선 믿고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쳤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은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먼저 객관적 진리를 믿고 다음에 주관적 진리를 믿어야 하는데, 이것이 잘 안 되면 주관적 진리에 의해서 객관적 진리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다시 되풀이하면,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심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만, 안되면 차라리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내 체험으로 믿어지는 것, 즉 기도해서 병이 나았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믿음은 사실 유치한 믿음입니다. 이런 주관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면 지금 내가 당하는 조그마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면 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긍정하는 수준으로 도달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도 비록 시작은 나의 어떤 개인적인 욕망이나 병 고침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 욕망이 채워진 후에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그 사랑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병에 걸려서 죽어도 감사할 수 있는 신앙에 들어가야 합니다. 행함을 통해서 믿고, 사건을 통해서 믿고, 사건 속에 있는 계시를 믿어서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나의 개인적인 욕망은 다 버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에 도달하는 축복이 있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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