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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쓴 글씨(요 8:1~1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 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간음하다 붙들려 온, 한 여인에게 예수께서 지혜롭게 자비를 베푸신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미 공부한대로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편할 수만 있다면 죽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큰 소리를 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의도하고 있음도 보았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하속들을 보내어 체포령까지 내렸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권위에 굴복된 사실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하나의 계략을 꾸민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악한 지혜가 때로는 선한 지혜보다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지혜를 내는 것보다 악한 일을 위해서 지혜를 내는 편이 훨씬 더 지혜롭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혜는 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는 악에서 배우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부지런함을 보더라도 선한 일을 위해서 밤새우는 일은 드물지만 도둑질을 위해서는 쉽게 밤을 새웁니다. 이렇게 죄짓기 위해서 밤을 새우는 일은 허다하며, 특히 도박하는 사람들은 며칠씩 계속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죄짓는 지혜는 사탄의 것이므로 초인적인 힘과 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나쁜 방향으로 지혜가 발달되는 것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아주 묘한 사건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의 나쁜 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문제는, 간음하다 붙들린 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하고, 예수님을 지금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의 의도는 예수님을 올무에 매어 함정에 빠뜨리려는 나쁜 마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 교훈에는 세 가지의 큰 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우상 숭배 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들로서 우상 숭배하는 것은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구약에서도 보면 우상 숭배가 가장 큰 죄로 취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든 면에서 종합적인 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 숭배로 인해 따르는 모든 행위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살인죄입니다. 상식적으로도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큰 죄입니다. 세째는 간음하는 죄로써, 간음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보았을 경우이고, 또 하나는 몸을 파는 창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창녀는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는 것이 그들의 법이었습니다. 이상 세 가지 죄목은 증거가 확실하고 증인이 두 명 이상이면, 그들의 법대로 처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위의 세 가지의 죄는 절대로 없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의 정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레위기 20:10이하에도 보면, 간음하는 여자는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몇 천년 내려오는 전승과 함께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해 놓은「미쉬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죄명에 대해 구체적인 조항이 있고, 각 조항에 대한 벌칙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 하는 죄명이 있고, 그리고 세부 조항으로 이러이러한 것이 간음이다 라고 간음의 범위를 규정하고 그 간음의 종류에 따라 구체적으로 벌을 명시해 놓았습니다. 간음죄는 가장 더러운 죄라 하여 아주 더럽게 죽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간음한 여자는 인분통에다가 집어넣어 목에다 수건을 매서 표를 삼고 양쪽에서 끈으로 끌어당기며 이리 저리로 죽을 때까지 끌고 다녀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쉬나의 법입니다. 또 한가지 성경에 기록된 간음한 죄에 대한 벌은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밖에 나가서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돌무더기 속에 집어넣는 참혹한 극형으로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동네 사람 전체가 참가하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마을에서는 다시 그와 같은 죄가 없도록, 즉 악을 완전히 제거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 형벌들이 피비린내가 나는 무서운 내용들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간음하던 여자가 현장에서 붙잡혀 예수님 앞까지 끌려왔습니다. 상상하기로는 아마도 옷은 거의 찢겼을 것이고, 머리채가 잡힌 채로 질질 끌려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여자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세워놓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어찌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인 것 같으나, 사실은 상당히 골치 아픈 난제였습니다.
그들의 법이 돌로 치라 했으면 돌로 치면 되는 일을 예수님께 가지고 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처음에 밝혔듯이 이 일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그들의 저의가 숨어 있는 문제였습니다. 가령,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 하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득을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별명이 죄인의 친구입니다. 저들은 비웃는 뜻으로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죄인의 친구란 존경이 가는 별명입니다. 왜냐하면,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분으로서 죄인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신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랑의 주요, 용서의 주로서 병든 자를 고쳐 주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며,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세리와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폭이 넓은 분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도하고 손을 터는 교만한 사람보다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랑 많은 사람이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깊은 면에서 지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음을 바리새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인기가 날이 갈수록 예수님께로 쏠리고 있음을 두려워하여 그 이름을 떨어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답하시면, 자비의 주님도 별 수가 없다고 소문을 내어 이간을 붙이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돌로 치라 하면, 당장 로마 총독에게 가서 고발을 할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속국으로서 로마의 정부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에 거의 모든 법을 그들 자유에 맡겨 스스로 이스라엘의 법대로 처리하게 했습니다만 사형 집행만은 반드시 로마법에 준하도록 규제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도 사형 집행은 빌라도에게 넘겨서 재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형 집행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법을 만들었으므로 돌로 쳐죽이면 로마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돌로 쳐죽이라고 해서 우리는 죽였으나, 예수가 로마법을 어겼다고 로마 정부에 고발을 해서 예수를 체포하려는 계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대답하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거역하는 자, 즉 반율법주의자라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 함정이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유사한 시험을 여러번 당하셨습니다. 한번은 세금 문제를 가지고 와서,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아니냐를 묻기도 했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라 하면 비애국자라고 비난할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겼다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의도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난제를 만든 사람은 틀림없는 마귀의 후손으로 나쁜 지혜의 괴수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말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더 높은 지혜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6 하반절) 더 높은 지혜란, 일단 땅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글을 쓰셨다는 기록은 성경 전체에서 이것뿐입니다. 정말 책이라도 한 권 남기셨으면, 아니 몇 자라도 쓰신 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예수님이 글로 남기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이 사건에서 땅에 쓰셨다고 한 번 기록되어 있는데, 그나마 무슨 글을 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여기서 분명한 것은 글을 쓰므로써 시간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정의 격할 때 열까지만이라도 헤아리면 다소 진정이 됩니다. 아무리 억울한 말을 듣더라도 말대답을 하기 직전에 침이라도 한번 삼키고 대답하면 조금은 여유를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흔히 억울하다는 것에만 집착하여 상대방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먼저 자기 말만 하게 되니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잠언에서도 남의 말을 다 듣기 전에 대답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이 하는 이야기는 다 듣고 열까지는 세지 못하더라도 일단 숨을 크게 쉬고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먼저 기도하고 말하면, 즉흥적으로 대답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는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려운 상황에서 먼저 땅에다가 글을 쓰시므로 시간을 벌고 계십니다. 모세가 젊은 시절에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는 실수도 1분만 더 생각했었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를 죽였다고 나라가 독립이 되는 것도 아닌데, 결국 살인하고 모세 자신의 처지만 어렵게 만든 것뿐입니다. 죽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없이 앞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순간적인 격함으로 나타난 행동인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실수를 여러번 저질렀습니다. 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올 때도 하나님이 직접 써 주신 돌비석을 그대로 집어던지는 혈기를 부렸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우상 섬기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비석은 내려놓고 다른 돌을 던지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화가 불같이 일 때는 낙서라도 해서 시간을 벌고 보면 흥분과 혈기는 다소 누그러질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아주 중대한 일을 결정해야 할 때, 흥분되어 있으면 바쁘더라도 내일로 결정을 미루고 기도하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 합치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이 순간 생명에 관한 중요한 문제이므로 우선 시간을 버는 의미에서 땅에 글을 쓰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살기 등등한 군중들이 보기 싫어서 글을 썼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리들은 흥분되어 눈에 핏기가 서려 있었고, 간음한 여자는 끌려오느라고 만신창이가 되어 서 있었으니, 정말 그 모습들은 보기 싫은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재판에 대해 올가미를 씌우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으니, 그들을 마주 대하는 예수님의 입장은 민망했을 것입니다. 악한 사람을 마주보고 일대 일로 대항하면 내가 더 악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피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오늘 이 무서운 무리들을 잠깐 피하시는 의미에서 글을 쓰셨다고 봅니다. 한 가지 더 글을 쓰신 의미를 찾아보면, 맨 투 맨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군중 심리란 무섭습니다. 북한에서 인민재판이 그랬고, 8․15 해방 때, 6․25 전쟁 때 우리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저 죽여라 하면, 이유 없이 그대로 돌진하는 것이 군중이지만, 사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전혀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시자 무엇을 썼나 하고 호기심에 들여다보게 됩니다. 둘러서서 들여다보면, 한꺼번에 몇 사람 정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까? 아무리 머리를 디밀고 봐도 대여섯 명이면 더 이상은 둘러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몇 사람이 보고 물러서면, 또 몇 사람이 보고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군중으로부터 흩어지는 것은 이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군중 심리에서 벗어나서 내 양심과 나, 하나님과 내가 만나게 되고 생각을 가다듬게 되는 것입니다. 사색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죽을 때는 하나님 앞에 나 혼자 서는 것임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 그 당시에는 글 읽는 사람은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글을 쓰시면 글을 읽는 사람부터 먼저 와서 보고 또 다음 사람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뜻으로, 말씀을 개인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글을 쓰셨는데, 그 내용이 무엇일까 하고 무척 궁금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는 내용을 쓰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합니다만, 전통적으로 해석해 오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글을 썼다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카테그라펜'으로, 대항해서 썼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 낙서하듯이 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대항해서 쓴 것을 카테그라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이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적 해석을 보면, 예수님이 쓰신 글은 죄의 제목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 증거 등 죄명을 계속 써내려 갔다고 전승해 오고 있습니다. 저들을 대항해서 썼기 때문에 그렇게 상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목을 계속 써 내려가는 동안 재촉했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글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글을 보고도 재촉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자"의 원문의 뜻은 죄가 없다는 말만이 아니라 "죄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동한 죄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간음을 행동으로 옮겼지만, 너희들의 마음속에는 간음하는 마음이 없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문의 뜻대로 적어 보면 "죄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는 돌로 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나는 비록 이 여자와 같이 간음을 하지 않았어도 거짓말을 했고, 남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고, 마음속으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 여인과 똑같은 죄는 아니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죄인이므로 누구든지 돌을 던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 없는 자"라고 하신 뜻은 "간음하지 않은 자"라는 말이 아니고, 무슨 죄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남을 비난할 때 비난하는 그것과 똑같은 사건이 내게 없다 하는 것 때문에 정죄하고 있습니다. 즉, 그와 같은 죄만을 생각하고 그 죄가 나에게 없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같지는 않지만 어느 의미에서나 죄인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당시나 지금이나 누구도 돌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한, 또 하나의 깊은 뜻은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돌을 던지기 전에 내 죄를 먼저 살피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내 앞에 가던 차가 고장난 것을 보면, 내 차를 점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을 보았으면, 나는 어떠한가 하고 당연히 살펴야 합니다. 대개 남의 허물을 많이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자기 반성에 게으른 사람입니다. 자기 반성을 많이 하고 나면 사실은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누구도 정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나보다 낫고, 내가 제일 큰 죄인이니까요.
성 프란시스의 제자가 어느 날 환상에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높은 보좌가 있어서 누구의 의자냐고 물었더니 성 프란시스의 자리라고 했답니다. 제자는 이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질투가 났습니다.
그는 꿈을 깨고 난 후에 자기 스승에게 가서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지"라고 대답을 하자 제자는 항의를 했습니다."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당신은 성자인데, 악하다고 하시면 살인자, 거짓을 증거 하는 자들은 어찌합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웃으며 아주 편안하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걸세, 만약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받았으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걸세, 내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사는지 자네는 잘 모르네." 여기에 겸손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판단해야 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사랑해야 할 자와 불쌍히 여겨야 할 자가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판단하지 말라, 심판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말씀은, 돌을 던지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라는 뜻이 있으며, 또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비판하고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 정신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고 사람들에게 집행권을 주셨는데, 집행권을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돌을 던져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는 심판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므로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은 범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돌을 던지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이와 같은 귀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돌을 던지기 바로 전에 나를 돌아볼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흩어집니다. 그리고, 남루하고 비참한 여인만이 홀로 서서 울고 있습니다. 참 성공적인 결과였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0-12)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하셨으니, 사실 예수님은 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도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도 자신을 죄인으로 동일시 한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면서 죄인으로 인정하셨음은, 쉽게 말해서 이 여자의 죄인 됨과 예수님 스스로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나는 의롭다고 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 하셨으므로 스스로 죄인의 위치에 앉으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같이 낮아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나도 죄인과 동일시되어야 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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