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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누가복음 19장 28절~40절)

by 【고동엽】 2024.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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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누가복음 19장 28절~40절)

 

부활절을 앞둔 일주일간을 교회에서는 고난주간(苦難週間)이라고 합니다. 저 베들레헴에서 골고다까지 예수님의 일생이 전부 고난이었습니다 마는 특별히 마지막 한 주일 동안은 고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론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고난의 결론이요 복음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 일주일 동안에 결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일주일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시달리셨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병고침 받으러 몰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많은 사람들로 해서 예수님은 쉬실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한 원수들의 음모에 찬 질문 공세도 예수님을 괴롭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려는 마음도 없이, 어떻게든 관에 넘겨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책을 잡는 악의에 찬 질문 공세가 예수님을 무척 괴롭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숱한 비방과 비난을 참기란 무척 힘드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청운의 꿈만 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나는 우편에 앉게 될까 좌편에 앉게 될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왕권만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우매(愚昧)함이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는 어떠하였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사람 몇 명을 앞에 놓고 가르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다. 그 가운데에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괴로울 것입니다. 하물며 선생님을 책잡으려 하고 선생님을 팔아 넘겨 죽이려 하는 사람까지 있어서 눈앞에 버티고 앉아 쳐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3장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가룟 유다에게 미상불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습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너희 중에 나를 팔아 넘길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만찬 예식을 집행하시면 서도 가룟 유다에게 신경이 쓰여서 괴로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전이라고 올라가 보니 예배드리는 그 곳이 시장바닥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소파는 사람들, 양을 파는 사람들, 비둘기 팔고 돈 바꾸고 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장사하는 데만 정신들이 팔려 있습니다. 이런 일도 예수님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窟穴)을 만드는도다(마 21:13)" 하고 크게 책망을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정치인들의 사악과 폭력과 불의도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시장하신 나머지 무화과 열매라도 잡수실까 하여 살펴보시니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아 섭섭해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끝내 체포되시고 매맞으시고 비난당하시고 저주받으시고, 그리고 '목마르다'하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의 말못할 고통과 수욕(羞辱)---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고난의 성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고난 주간이 영광에서 시작하여 영광으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의 외침에 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영광에서 시작하여 부활절 아침의 그 찬란한 영광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 나라의 왕이 대관식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는 것이 유대 나라의 풍속이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치면서 뒤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영광입니다. 이 영광에서 시작하여 부활절에 이르러, 왕 중의 왕, 만왕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는 영광에 이릅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의 왕권(王權)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서 예수가 왕이요, 예수가 구세주라고 하는 증거의 결정(結晶)이 부활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라거나 예수님의 말씀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부활 때문인 것입니다. 철학을 많이 연구한 어는 무신론자가 여러 가지 종교를 연구하다가 엉뚱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점을 쳐 주는 일을 맡아보다가 한번은 왕에게 말했답니다. "임금님이시여, 저도 언젠가는 종교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렇다면 좋다. 내가 자네를 죽여 줄 테니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게. 그러면 종교를 이룰 수 있고 교주가 될 수 있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된 결정적 증거는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 위대한 생애도, 헌신적 생애도, 그 병 고치는 놀라운 능력도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부활입니다. 생명,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누가복음 2장 14절 말씀----"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시는 이 천사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고 오늘 본문 38절에 다시 나타납니다. 계속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승리에서 승리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시작도 영광이요, 깊은 내면에 흐르는 맥락이 영광이요 권능이며, 마침내 부활로서 결정적으로 구체화합니다. 그 사이에 이 고난이라고 하는 터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을 잠깐 지나가는 것으로 보시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 16:16)."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보시는 것입니다. 잠깐으로 지나가면 된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벌써 저 부활의 아침에 가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고난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꽤 연세가 많았는데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낳기 전이었는데, 하도 고생을 하니까 의사가 제왕절개 수술을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낳으렵니다. 이 아기가 얼마나 귀한 아긴데 배를 째고 낳겠습니까?" 이래서 거의 생사를 겨루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훌륭한 집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를 낳으려면 그렇게 엄숙한 마음으로 낳아야지요. 진통이 오 기 이전부터 벌써 배를 가르고 낳겠다는 마음부터 먹는대서야 어머니 될 자격이 없습니다. 얼마나 귀한 생명인데 그리 쉽게 얻을까 보냐 하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당할 만큼 당하고 겪을 만큼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명도 더욱 소중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가벼이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고난을 사서 겪으시고 마침내 맞이하시는 저 부활의 아침이 얼마나 찬연하고 영광에 찬 것입니까? 약속과 성취의 맥락이 어우러져서 엄연한 진리로 구체화되어 가는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을 한번 통틀어 관찰하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결코 우연이나 우발적인 것이 없습니다. 전쟁도 전염병도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재난도 사건도 우연인 것이 없습니다. 오직 경륜적이요 섭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륜하시고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옵니다. 그것도 느부갓네살의 마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를 막대기로 썼느니라"----느부갓네살을 막대기로 써서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상황적이고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은 언제나 예언적(豫言的)이고 계시적(啓示的)이고 결정적인 것들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현실적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사(人間事)는 대체로 종속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좀 해 보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 몰라서, 혹은 인간 관계가 잘못되어서 안 됩니다. 나 혼자서는, 내 마음만 가지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 내가 낳은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누구를 내 마음대로 합니까? 아니,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못하는데 누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미흡하고 미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생각이나 의지가 보잘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릇 인간사가 종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불가항력에 의하여 부득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행위나 죄악에 끌려 다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주도적(主導的)이요 창조적입니다. 이것이 성격의 진리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과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역사성(歷史性)을 깨닫고 바른 역사 의식을 가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장엄한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칩니다.

'호산나'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여 '만세!'와 비슷한말입니다. 수천의 사람이 그렇게 외치며 따라 옵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의 전야제(前夜祭)입니다. 저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전주곡(前奏曲)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시는 부활절을 바라보면서 벌어지는 상징적인 전야의 행사입니다. 좀더 깊게는, 역사 끝에 주님께서 재림주로 심판하러 오시는 그 역사에 대한 상징적이요 계시적인 예표적(豫表的) 사건입니다. 이같은 환상을 확실하게 믿음으로 보고, 이 믿음에 조명해서 나를 보고 그리스도를 보면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 영광의 행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주도하시고 앞장서 이끄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모여들어 솔선해서 추대하고 "타십시오. 가십시다" 하여 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앞서서 가시더라" 하는 말씀이 있고, 누가복음 9장 51절에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한 원수들이 예수님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무서운 예루살렘 도성을 향하여, 골고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자진하여 담대하게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왕권적인 영적 권세를 행사하고 계십니다.

30절 이하에 보면, 제자 둘을 부르셔서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하십니다. 덮어놓고 남의 것을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다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불문곡직 끌어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왕권 곧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벌이시는 행사는 엄청나게 위험한 행사입니다.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입니다. 로마 총독이라는 자의 가장 큰 임무는 유대 사람들의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삐걱 소리만 나도 큰일이 납니다. 이런 판국에 대관식 절차에 속하는 행사를 벌입니다. 나귀를 타고 만세 소리에 싸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왕이여!" 하고 함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굉장한 일이 됩니다. 소요로 변할 수도 있고 정치적인 반란으로 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문제가 염려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가야바가 말했습니다.

"한 사람 죽어서 온 백성이 무사할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을 없애 버리자" 하고요. 그러므로 그런 행사는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시간 담대하게 역사를 이루십니다. 조금도 주저하심이 없습니다.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무슨 오해를 살 것이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인지 돌아보시지 않았습니다. 시쳇말로 해서 그대로 밀어붙이셨습니다. 엄청난 행사를 엄연하게 집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39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겁을 내어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때가 어느 때인데 호산나를 부르는 것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이토록 담대하고 호쾌할 수가 없습니다. 굉장한 능력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계시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굴해서, 힘이 없어서 십자가 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체포되십니다. 그 때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빌라도 때문에 지는 십자가도 아니요 가야바 때문에 지는 십자가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우시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3~54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니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고 말씀하십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그것을 예언해 주신 선지자들의 예언을 생각하며, 그 예언에 응하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귀한 일을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저 밀림의 성자(聖者)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이는 이 일을 가리켜 '고난의 신비(神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 까닭을 퍽 익살스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행동은 마치 "나를 잡아서 죽여라" 하신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 아니냐고 하는 설명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적어도 60만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명절을 지내는 그 많은 사람들 속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이니 될성부른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죽음을 자청하신 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불 경건하게도 묘한 소리를 하는 젊은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고 왈가왈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분명히 타살입니다 마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올라가신 것은 자살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습니까? 사실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죽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를 않고 죽어갔으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셈이 되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죽는 사람들, 얼마든지 죽음을 피할 수 있어요. 그러나 죽음보다 더 귀한 일, 더 큰 일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쳤어요.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손해보지 않으려고 애써 거짓말하고 타협하고 권모술수 쓰다가 끝내 별수 없이 덜커덕 걸려서 감옥에 갑니다. 요사이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이른바 사회 유명 인사들이 너무나 비겁하고 비굴해요. 담대하지 못하고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공명정대하지 못합니다. 좀 떳떳했으면 신뢰가 가겠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나서시면 죽으십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담대하게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머뭇거림이 없이 행하십니다. 더욱 귀중한 것은 이것이 고독한 행사라는 점입니다. 수천 명이 행사에 참여하지만 이 행사의 참뜻을 아는 이는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예수님 당신만이 아시는 이 행사를 치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고독은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보아하면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너무 남들을 의식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남들 눈치보느라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고난을 덜 받으려고 살살

꾀를 부리다가 호되게 당하는 꼴들을 많이 봅니다. 눈뜨고 못 볼 부끄러움을 당하고도 웬 변명은 또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오해를 한 몸에 받으시면 서도 마음속에 품으신 뜻 하나를 꿋꿋이 실천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터널을 담대하게 뚫고 나가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하고 기도하십니다. 이 굉장한 담력과 영권(靈權)과 왕권의 행사가 오늘의 본문에서 계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맙게도 여기에, 얼마나 예수님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조금은 이해한 것 같은 사람이 한 사람 있는 것 같습니다. 난데없이 웬 사람 둘이 와서는 다짜고짜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 가려고 합니다. 도둑치고도 대낮 도둑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남의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어 볼 수밖에요. 그러나, 주께서 쓰신다고 하는 대답을 듣자 두 말 없이 끌어가게 합니다. 이 사람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군소리 한마디 없습니다. 주께서 쓰신다고 하는 그 한마디에 '예스'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주님의 뜻입니까? 뜻대로 하소서!"---살든지 죽든지, 이러쿵저러쿵 묻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입니까? 드리겠습니다" 하고 아무 소리 없이 헌신하는 이 한 사람의 믿음은 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 본 바 능한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와 기뻐하며 찬양하며 충성을 고백하며 호산나! 호산나! 만세를 부릅니다.

참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떤 여객선이 부두에 닿아서 손님들이 내리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바다에 풍덩 빠졌습니다. 아가씨는 텀벙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원들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가씨를 구조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승객들이 선원들을 나무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나 없나? 빨리 들어가 건져내지 않고 뭘하고 있어?" 그래도 선원들은 잠자코 있습니다. 아가씨는 물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떠오르고 다시 들어갔다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세 번째로 떠올랐을 때에야 선원 하나가 풍덩 뛰어들어가더니 건져냈습니다. 물에 빠졌을 때에 바로 건져내지 않고 어째서 실컷 물을 먹은 다음에야 건져내느냐고 사람들이 질문을 하자 그 선원이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살겠다고 악을 쓰며 있는 힘을 다해 허우적거립니다. 이 때에는 그 힘이 장사와 같아서 누구도 못 당합니다.

급하다고 들어갔다가는 나도 같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힘이 다 빠져서 손을 들고 완전히 자기를 내게 맡겨 버릴 때쯤 되어서 건져내야 됩니다."

가만히 보면,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로, 교만이나 자랑을 다 가진 채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해 봐야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내 생명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위탁할 때, 다시 말하면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위탁하는 거기에 진정한 충성이 있고, 그렇게 부르는 찬송이 참 찬송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호산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이 승리의 의미-----나귀 새끼를 타고 오르시는 의미를 바로

알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뜻을 모르고 부르는 호산나는 예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고난을 영광으로 수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으로 이어지는 이 고난을 깊이 알고, 그리고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호산나! 호산나!----주님께서는 이 찬양을 들으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1-44)."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그 깊은 뜻을 이해하여 승리에서 승리로, 약속된 승리를 향하여 가는 축제적인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지고 나아갈 때에 분명히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찬양합시다.

내일은 감사함으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누가복음 19장 28절~40절)

 

부활절을 앞둔 일주일간을 교회에서는 고난주간(苦難週間)이라고 합니다. 저 베들레헴에서 골고다까지 예수님의 일생이 전부 고난이었습니다 마는 특별히 마지막 한 주일 동안은 고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론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고난의 결론이요 복음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 일주일 동안에 결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일주일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시달리셨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병고침 받으러 몰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많은 사람들로 해서 예수님은 쉬실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한 원수들의 음모에 찬 질문 공세도 예수님을 괴롭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려는 마음도 없이, 어떻게든 관에 넘겨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책을 잡는 악의에 찬 질문 공세가 예수님을 무척 괴롭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숱한 비방과 비난을 참기란 무척 힘드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청운의 꿈만 꾸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나는 우편에 앉게 될까 좌편에 앉게 될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왕권만을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 같은 우매(愚昧)함이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해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는 어떠하였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사람 몇 명을 앞에 놓고 가르치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다. 그 가운데에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괴로울 것입니다. 하물며 선생님을 책잡으려 하고 선생님을 팔아 넘겨 죽이려 하는 사람까지 있어서 눈앞에 버티고 앉아 쳐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3장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가룟 유다에게 미상불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습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 13:10)"---'너희 중에 나를 팔아 넘길 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만찬 예식을 집행하시면 서도 가룟 유다에게 신경이 쓰여서 괴로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전이라고 올라가 보니 예배드리는 그 곳이 시장바닥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소파는 사람들, 양을 파는 사람들, 비둘기 팔고 돈 바꾸고 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장사하는 데만 정신들이 팔려 있습니다. 이런 일도 예수님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窟穴)을 만드는도다(마 21:13)" 하고 크게 책망을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정치인들의 사악과 폭력과 불의도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시장하신 나머지 무화과 열매라도 잡수실까 하여 살펴보시니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아 섭섭해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끝내 체포되시고 매맞으시고 비난당하시고 저주받으시고, 그리고 '목마르다'하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의 말못할 고통과 수욕(羞辱)---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고난의 성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고난 주간이 영광에서 시작하여 영광으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의 외침에 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그 영광에서 시작하여 부활절 아침의 그 찬란한 영광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 나라의 왕이 대관식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는 것이 유대 나라의 풍속이었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치면서 뒤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영광입니다. 이 영광에서 시작하여 부활절에 이르러, 왕 중의 왕, 만왕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는 영광에 이릅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의 왕권(王權)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서 예수가 왕이요, 예수가 구세주라고 하는 증거의 결정(結晶)이 부활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기 때문이라거나 예수님의 말씀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부활 때문인 것입니다. 철학을 많이 연구한 어는 무신론자가 여러 가지 종교를 연구하다가 엉뚱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게 점을 쳐 주는 일을 맡아보다가 한번은 왕에게 말했답니다. "임금님이시여, 저도 언젠가는 종교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렇다면 좋다. 내가 자네를 죽여 줄 테니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게. 그러면 종교를 이룰 수 있고 교주가 될 수 있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된 결정적 증거는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 위대한 생애도, 헌신적 생애도, 그 병 고치는 놀라운 능력도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부활입니다. 생명, 그것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누가복음 2장 14절 말씀----"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시는 이 천사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고 오늘 본문 38절에 다시 나타납니다. 계속 영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승리에서 승리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시작도 영광이요, 깊은 내면에 흐르는 맥락이 영광이요 권능이며, 마침내 부활로서 결정적으로 구체화합니다. 그 사이에 이 고난이라고 하는 터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을 잠깐 지나가는 것으로 보시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 16:16)."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보시는 것입니다. 잠깐으로 지나가면 된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벌써 저 부활의 아침에 가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고난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꽤 연세가 많았는데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낳기 전이었는데, 하도 고생을 하니까 의사가 제왕절개 수술을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낳으렵니다. 이 아기가 얼마나 귀한 아긴데 배를 째고 낳겠습니까?" 이래서 거의 생사를 겨루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훌륭한 집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를 낳으려면 그렇게 엄숙한 마음으로 낳아야지요. 진통이 오 기 이전부터 벌써 배를 가르고 낳겠다는 마음부터 먹는대서야 어머니 될 자격이 없습니다. 얼마나 귀한 생명인데 그리 쉽게 얻을까 보냐 하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당할 만큼 당하고 겪을 만큼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명도 더욱 소중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가벼이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고난을 사서 겪으시고 마침내 맞이하시는 저 부활의 아침이 얼마나 찬연하고 영광에 찬 것입니까? 약속과 성취의 맥락이 어우러져서 엄연한 진리로 구체화되어 가는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을 한번 통틀어 관찰하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결코 우연이나 우발적인 것이 없습니다. 전쟁도 전염병도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재난도 사건도 우연인 것이 없습니다. 오직 경륜적이요 섭리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륜하시고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옵니다. 그것도 느부갓네살의 마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를 막대기로 썼느니라"----느부갓네살을 막대기로 써서 이스라엘을 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상황적이고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은 언제나 예언적(豫言的)이고 계시적(啓示的)이고 결정적인 것들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현실적으로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사(人間事)는 대체로 종속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좀 해 보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걸리는 것이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 몰라서, 혹은 인간 관계가 잘못되어서 안 됩니다. 나 혼자서는, 내 마음만 가지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 내가 낳은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누구를 내 마음대로 합니까? 아니,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못하는데 누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미흡하고 미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생각이나 의지가 보잘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릇 인간사가 종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불가항력에 의하여 부득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행위나 죄악에 끌려 다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주도적(主導的)이요 창조적입니다. 이것이 성격의 진리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능력과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역사성(歷史性)을 깨닫고 바른 역사 의식을 가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장엄한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칩니다.

'호산나'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여 '만세!'와 비슷한말입니다. 수천의 사람이 그렇게 외치며 따라 옵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의 전야제(前夜祭)입니다. 저 앞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전주곡(前奏曲)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시는 부활절을 바라보면서 벌어지는 상징적인 전야의 행사입니다. 좀더 깊게는, 역사 끝에 주님께서 재림주로 심판하러 오시는 그 역사에 대한 상징적이요 계시적인 예표적(豫表的) 사건입니다. 이같은 환상을 확실하게 믿음으로 보고, 이 믿음에 조명해서 나를 보고 그리스도를 보면서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 영광의 행사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주도하시고 앞장서 이끄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모여들어 솔선해서 추대하고 "타십시오. 가십시다" 하여 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앞서서 가시더라" 하는 말씀이 있고, 누가복음 9장 51절에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한 원수들이 예수님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무서운 예루살렘 도성을 향하여, 골고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자진하여 담대하게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왕권적인 영적 권세를 행사하고 계십니다.

30절 이하에 보면, 제자 둘을 부르셔서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하십니다. 덮어놓고 남의 것을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다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불문곡직 끌어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왕권 곧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벌이시는 행사는 엄청나게 위험한 행사입니다.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입니다. 로마 총독이라는 자의 가장 큰 임무는 유대 사람들의 혁명이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삐걱 소리만 나도 큰일이 납니다. 이런 판국에 대관식 절차에 속하는 행사를 벌입니다. 나귀를 타고 만세 소리에 싸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왕이여!" 하고 함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굉장한 일이 됩니다. 소요로 변할 수도 있고 정치적인 반란으로 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문제가 염려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가야바가 말했습니다.

"한 사람 죽어서 온 백성이 무사할 수 있다면 그 한 사람을 없애 버리자" 하고요. 그러므로 그런 행사는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시간 담대하게 역사를 이루십니다. 조금도 주저하심이 없습니다.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무슨 오해를 살 것이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인지 돌아보시지 않았습니다. 시쳇말로 해서 그대로 밀어붙이셨습니다. 엄청난 행사를 엄연하게 집행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39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겁을 내어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때가 어느 때인데 호산나를 부르는 것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이토록 담대하고 호쾌할 수가 없습니다. 굉장한 능력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계시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굴해서, 힘이 없어서 십자가 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체포되십니다. 그 때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빌라도 때문에 지는 십자가도 아니요 가야바 때문에 지는 십자가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우시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3~54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니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고 말씀하십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그것을 예언해 주신 선지자들의 예언을 생각하며, 그 예언에 응하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 하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귀한 일을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저 밀림의 성자(聖者)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이는 이 일을 가리켜 '고난의 신비(神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 까닭을 퍽 익살스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행동은 마치 "나를 잡아서 죽여라" 하신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 아니냐고 하는 설명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에 적어도 60만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명절을 지내는 그 많은 사람들 속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것이니 될성부른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죽음을 자청하신 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불 경건하게도 묘한 소리를 하는 젊은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고 왈가왈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분명히 타살입니다 마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올라가신 것은 자살이 아니냐 하는 생각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습니까? 사실 위대한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죽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를 않고 죽어갔으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셈이 되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죽는 사람들, 얼마든지 죽음을 피할 수 있어요. 그러나 죽음보다 더 귀한 일, 더 큰 일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목숨을 바쳤어요.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손해보지 않으려고 애써 거짓말하고 타협하고 권모술수 쓰다가 끝내 별수 없이 덜커덕 걸려서 감옥에 갑니다. 요사이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이른바 사회 유명 인사들이 너무나 비겁하고 비굴해요. 담대하지 못하고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공명정대하지 못합니다. 좀 떳떳했으면 신뢰가 가겠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나서시면 죽으십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담대하게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머뭇거림이 없이 행하십니다. 더욱 귀중한 것은 이것이 고독한 행사라는 점입니다. 수천 명이 행사에 참여하지만 이 행사의 참뜻을 아는 이는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시고 예수님 당신만이 아시는 이 행사를 치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고독은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보아하면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너무 남들을 의식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남들 눈치보느라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고난을 덜 받으려고 살살

꾀를 부리다가 호되게 당하는 꼴들을 많이 봅니다. 눈뜨고 못 볼 부끄러움을 당하고도 웬 변명은 또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오해를 한 몸에 받으시면 서도 마음속에 품으신 뜻 하나를 꿋꿋이 실천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터널을 담대하게 뚫고 나가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 하고 기도하십니다. 이 굉장한 담력과 영권(靈權)과 왕권의 행사가 오늘의 본문에서 계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맙게도 여기에, 얼마나 예수님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조금은 이해한 것 같은 사람이 한 사람 있는 것 같습니다. 난데없이 웬 사람 둘이 와서는 다짜고짜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 가려고 합니다. 도둑치고도 대낮 도둑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남의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어 볼 수밖에요. 그러나, 주께서 쓰신다고 하는 대답을 듣자 두 말 없이 끌어가게 합니다. 이 사람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군소리 한마디 없습니다. 주께서 쓰신다고 하는 그 한마디에 '예스'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주님의 뜻입니까? 뜻대로 하소서!"---살든지 죽든지, 이러쿵저러쿵 묻지 마십시오. "주님의 뜻입니까? 드리겠습니다" 하고 아무 소리 없이 헌신하는 이 한 사람의 믿음은 참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그 본 바 능한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와 기뻐하며 찬양하며 충성을 고백하며 호산나! 호산나! 만세를 부릅니다.

참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떤 여객선이 부두에 닿아서 손님들이 내리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바다에 풍덩 빠졌습니다. 아가씨는 텀벙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원들은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가씨를 구조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승객들이 선원들을 나무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나 없나? 빨리 들어가 건져내지 않고 뭘하고 있어?" 그래도 선원들은 잠자코 있습니다. 아가씨는 물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떠오르고 다시 들어갔다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세 번째로 떠올랐을 때에야 선원 하나가 풍덩 뛰어들어가더니 건져냈습니다. 물에 빠졌을 때에 바로 건져내지 않고 어째서 실컷 물을 먹은 다음에야 건져내느냐고 사람들이 질문을 하자 그 선원이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살겠다고 악을 쓰며 있는 힘을 다해 허우적거립니다. 이 때에는 그 힘이 장사와 같아서 누구도 못 당합니다.

급하다고 들어갔다가는 나도 같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힘이 다 빠져서 손을 들고 완전히 자기를 내게 맡겨 버릴 때쯤 되어서 건져내야 됩니다."

가만히 보면,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로, 교만이나 자랑을 다 가진 채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해 봐야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내 생명을 완전히 그리스도께 위탁할 때, 다시 말하면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위탁하는 거기에 진정한 충성이 있고, 그렇게 부르는 찬송이 참 찬송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호산나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이 승리의 의미-----나귀 새끼를 타고 오르시는 의미를 바로

알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뜻을 모르고 부르는 호산나는 예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고난을 영광으로 수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으로 이어지는 이 고난을 깊이 알고, 그리고 감사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호산나! 호산나!----주님께서는 이 찬양을 들으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1-44)."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그 깊은 뜻을 이해하여 승리에서 승리로, 약속된 승리를 향하여 가는 축제적인 십자가의 고난을 함께 지고 나아갈 때에 분명히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찬양합시다.

내일은 감사함으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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