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꿔라
창세기 32장 22절~30절
사람들이 미국을 여행을 한다면 꼭 들려야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도박의 도시로 알려진 곳으로 라스베가스입니다. 그 곳은 사막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도시입니다. 그곳에는 의자가 없답니다. 그리고 시계가 없답니다. 또 창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유가 다 있습니다. 자 다리가 아프면 기계를 돌려라 이겁니다. 시간 가는지를 몰라야 하는 겁니다. 바깥은 어찌되든 지금은 여기만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도박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임하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교육을 받아야 한답니다. 땄을 때 일어나라. 그게 중요합니다. 조금 더 따려고 그러다가 있는 것을 다 날리고 마는 겁니다. 욕심을 부리다가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거기서 돈을 따기도 한 답니다. 잃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돈을 딴 사람은 꼭 다시 돌아온답니다. 더 벌려고. 그래 도박을 해서 돈을 번 사람이 얼마나 되던 가요? 전문 도박꾼들도 그거 배우지 말라고 그럽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힘듭니다. 무엇을 자극을 하는 가하면 인간의 욕심을 자극을 하는 겁니다. 자 도박의 두 번째 원칙은 다름이 아닌 잃었거든 만회를 하려고 들지를 마라. 대게 여기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얼마를 잃었거든 거기서 끝을 맺는 겁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러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실수로 끝을 냅시다.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거 안 되는 것을 다 압니다. 만회를 하려고 그러다가 소중한 미래가 끝이 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다가 이런 모습을 찾았습니다. 저 야곱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그가 안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그가 얍복강을 건너면서 이름이 달라지고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의 삶의 획기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는 열정의 사람입니다. 그는 한번 잡은 것은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그리로 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포기를 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요 목표에 집념을 가지고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을 합니다. 거기서도 그는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를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도 절대로 놓지를 못한 그가 얍복강에서도 놓지를 아니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를 하십니까?
십자가는 죽음을 말씀을 합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그것은 그런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죽음입니다. 과거의 죽음입니다. 화려한 그 시절의 죽음이요 아픈 과거의 죽음이요 그것을 말씀을 합니다.
갈라디아 5장 24절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밖았느니라”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것을 체험을 해야 합니다. 죽은 과거의 모습 말입니다. 얍복강에서 너의 손을 놓아라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때 까지는 야곱이 들고 있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의 세월이 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후손을 보면 유다도 레아의 소생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장면을 생각을 합시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에 같이 죽고 그가 사시는 순간에 나도 같이 살고 그런 겁니다.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를 다 아십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이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비폭력적인 사람이 되어서 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가 승리를 하게 되는 그 순간에 어찌하여 칼을 들지를 아니 합니다. 어찌하여 그러는 가를 물어봅니다.
그의 유명한 대답을 들어봅시다. “내가 십자가 앞에 섰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순간에 나의 손에서 검이 떠나는 것을 느꼈노라” 그 후로 그는 절대로 칼을 들지를 아니합니다. 얼마나 귀한 메시지를 듣는 겁니까? 십자가를 쳐다 볼 때 그는 주님이 죽으심이 믿어지는 그 순간에 그는 이제 미움도 없습니다. 절망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순간을 그는 체험을 하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야! 네 손에 있는 것을 놓아라. 네 마음을 비워라. 지금 너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네가 가진 것은 놓기가 아까운 것이 아닌가? 네가 지금 너의 형에게 이것을 보내고 저것을 보내고 그런 행동을 보내지만 너는 너의 형을 잘 아는 것이 아니냐? 너의 형은 장자의 축복을 물질의 손해로 보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너의 형의 마음을 돌리려는 그런 속셈을 나는 안다. 그것을 버려라.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면서 죽음이 두려우냐?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산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어느 것 보다도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냐?
여러분이 잘 아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러목사님의 일화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특별히 그는 신아의 가정에서 자란 분입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하면서 홀리 바이블 스터디라는 것을 조직을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고 묵상을 하면서 그리고 전도를 하면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부흥의 불길을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선교에 헌신을 하기로 서원을 합니다. 그리고 멀리 미국 조지아에 가서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가서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전혀 복음의 증거는 이루어지지만 열매가 없는 겁니다. 아무도 들은 척을 안 합니다. 너무나 처절한 실패를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배를 타고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큰 폭풍이 일어납니다.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아무런 말을 하지를 못하고 한 구석에서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대편에서는 소수의 무리가 모여서는 찬송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두려움에 그런 게 아닙니다. 기쁨의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다가가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당신들은 떨리지 아니 합니까? 그 분들이 물어봅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느냐고? 그래서 그가 자신 있게 나는 선교사라고, 그럼 당신은 중생을 하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봅니다. 다른 말로 거듭났소? 그것을 물어봅니다. 거기서 그의 말문이 막힙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는 그는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신도들입니다. 그들의 예배에 참석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를 체험을 합니다. 그가 많은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경험이 평생의 자기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자 야곱이 이런 것을 체험을 하는 겁니다. 많은 것이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니라 너의 속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미국 애리조나주(州)의 피닉스에 사는 한 청년이 실수로 그만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복역 중에 그는 이를 갈았습니다. '나를 체포한 형사놈들, 나가면 죽이고 말겠다.' 이윽고 감옥을 나왔습니다. 집으로 가보니 아내는 이미 도망을 갔고 어린 자식 둘만이 남아 울고 있습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제 사람을 죽이고 다시 감옥으로 가겠지만 이 아이들만은 믿음 안에서 깨끗하게 자라도록 하겠다." 아이 둘을 데리고 그는 교회로 갔습니다. 마침 교회에서는 톰슨 목사가 와서 부홍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그는 놀랍게도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 말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간증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밤 사람을 죽이려고 권총을 품고 나온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듣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렵니다.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의 간증에 모든 회중이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처럼 얼마동안이나 권총을 가지고 다닐 작정입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죽이렵니까? 이젠 옛사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환경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사랑 받지 못해서, 내가 가난해서, 내가 병들어서 라고 변명을 합니다. 세상이 달라져야 하고 환경이 달라져야 한다면서 또 한번 책임을 전가합니다마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환경이 몇 번씩 곤두박질해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로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간혹 여러분 가운데 '내 아들이 입시에 낙방해서 저렇게 되었지 학교만 들어가면 사람이 될 텐데'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생각처럼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만은 성경적 원리를 따릅니다. 경험으로 얻은 진리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환경 변화로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그 담을 허신, 율법을 완성하신,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신 그 엄청난 사랑, 이 수직적 사랑에 감복하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날 때에야 이웃사람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새로워집니다.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영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다스릴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영성이 새로워집니다. 이로써 인격과 생활과 세계관에 새로운 변화가 옵니다. 새사람,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한 사람을 새롭게 하는 살아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에 인간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을 때에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성령을 잃어버렸을 때에 사람은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화목케 하신 큰 역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기적이 있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읽다가 이런 말씀에 우리는 사로잡힙니다. 야곱이 한 밤중에 자기 홀로 남겨집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와서는 자기와 씨름을 합니다. 그는 원래가 씨름꾼입니다. 움켜잡는 것을 잘합니다. 그리고 남을 잘 넘어뜨립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나와서는 씨름을 합니다. 그는 곧장 맞받아칩니다. 그날의 싸움이 너무나 격렬합니다. 그의 뼈가 부러지도록 싸우지만 그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의 평생은 싸움입니다. 에서와의 장자의 싸움이 그랬고, 라헬을 얻으려고 삼촌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져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느 싸움과는 질이 틀립니다. 그는 아! 하나님이시구나 이분을 놓치면 나는 모든 것이 헛것이다. 그것을 압니다. 여기서 그는 돈도 필요가 없고 장자권도 필요가 없고 내 가족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가장 소중한 한 가지 하나님의 복이면 다 됩니다. 여기에 목숨을 드려도 후회는 없습니다. 그는 압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때에 압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당신을 위하여 내 가슴을 두들겨 주소서. 당신의 힘으로 나를 깨뜨리시고 날려버리시고 태우시어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나는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나는 당신의 적과 약혼한 상태입니다. 나를 파혼시켜주시고 그 인연을 끊어 버려주소서. 나를 위하여 나를 당신에게 데려가시고 나를 당신에게 가두어 주소서. 당신이 내 마음을 빼앗기 전에는 결코 자유함이 없으며 당신이 능욕하기까지는 정절을 지킬 수 없나이다. 나를 늘 세상에 사탄의 유혹에 거짓된 것과 약혼하고 결혼하며 살고 있사오니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때리시고 이 약혼을 다 파혼시켜 주소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열망이 있습니까? 자 세상의 욕심을 인하여 사는 나의 모든 것을 무찔러 주시고 하나님만으로 만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옵소서.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을 20년 전에 아버지 이삭이 물었던 겁니다. 그때 야곱은 이런 대답을 합니다. 나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에서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그 질문에 에서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야곱입니다. 나는 탈취를 일삼았고 사기를 치고 살았습니다. 나는 삼촌에게서 딸들을 데려오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아버지를 속이며 살았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너 나를 인해서 만족을 누리며 살래? 네 그럼 이제는 너의 이름을 바꾸자 너를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라. 너는 나와 겨루어 이긴 그 이름을 인하여 살자.
자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41:10절)"또한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14절에서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하십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지렁이가 무엇입니까? 땅 속에 있거나 땅 위를 기어다니다가 흔히 사람의 발에 짓밟히는 천한 것이 지렁이입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 그를 하나님께서 구속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짓밟히고 짓밟히던 민족을 이제 높여서 온 세계에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본디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간사한 사람이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그 지렁이 같은 야곱, 그 민족을 구원하여 이스라엘을 삼으십니다. 부끄러움에 처해졌던 저들, 그 민족을 높여서 오늘과 같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10절)" 개인적인 사랑을 약속하십니다. 구속과 보호와 승리와 함께 하심을 보장하십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난 가운데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6백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무참히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그 수용소를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어가면서 눈물로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종전이 된 후, 수용소를 청소하던 사람들은 벽에 씌어진 찬송가 가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하는 글귀가 또박또박 씌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아래로 이러한 글귀가 이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어떠한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보호하심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은 세계 어느 곳이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을 뿐더러 정착하여 살수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세계 도처에 퍼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요리집 곧 음식점이 생기고, 일본사람이 사는 곳에는 전자상점과 백화점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이 사는 곳에는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교회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나 교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이제는 한국 선교사를 요구합니다. 역수출하여 그곳에 와서 선교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단 두 명의 재학생만을 둔 브라질의 어느 신학대학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세워 학생을 모집하여도 선뜻 주의 일을 하겠다고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신학교는 어떠합니까? 신학교도 많거니와 신학생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모교인 총신대학만 해도 한 해의 입학경쟁률이 4:1이나 됩니다. 4년제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다시 입학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몇 년씩 제수를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모여드는 주의 종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아프리카 등지로 선교사를 파견해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백인 선교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 옛날, 백인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잊지 않고 지금에 와서도 선교사를 가리켜 'imperialistic agent' 라고 합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이유로 백인은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흑인도 안 된다고 합니다. 다만 그 중간인 황인종만이 알맞다고 문을 열어놓고 환영한다고 합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본 일이 없는 민족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 세계를 향하여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이럴진대 어찌 하나님의 쓰심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 이니라!"
우리는 6․25를 통하여 잃어버린 것이 많았습니다마는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파괴된 것이 많았습니다마는 건설은 더 컸습니다. 많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마는 높은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그 백성을 인도하시고 오늘도 살아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오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것입니다. 절대주권의 선택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면서 충성을 다짐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저 영원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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