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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빈곤(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히 내라 회개하라 불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지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당하는 고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적인 그러한 고통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먹는다 입는다 산다 하는 문제는 동물적인 고통입니다. 역시 인간은 인간만의 인간적 차원에서의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자는 인격자대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인격과 자유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봅니다. 지성인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성인이 지성인다운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성인이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현대인, 소위 엘리트라면 엘리트다운 고통을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실망이라고 하는 고민입니다. 실망은 기대가 있고 믿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은 진실의 반대에서 생겨집니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용기가 없다면 이것은 너무 거듭되는 실망으로 인해서 실망이 체질화되면서 생겨진 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보다도 더 큰 용기는 없습니다. 용기의 부족은 거짓과 실망에 기인한 것입니다. 실망은 그 사건이 변했다던가 사람이 달라졌다던가 환경이 급변하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본래부터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거나 혹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을 있는 것으로 믿어 온 허위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제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마음 아파합니다. 없었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에 있는 줄로 속았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 중에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자기에 대한 실망입니다.
세계의 문제, 나라의 문제, 복잡한 사회 문제를 논합니다만 역시 실망의 근본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 큰 사업을 한다고 분주하게 다녔는데 이제 사업 진단을 해 보니 완전히 적자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것입니다. 번 줄 알았는데 손해였습니다.
무엇이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무엇을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았는데 이제 보니 이렇게 무능할 수 없고 초라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진작 이 자리에서 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딴에 진실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나 같은 위선자가 다시없더란 말입니다.
이 믿음이 무너질 때, 혹은 허위성이 노출될 때 또는 그 진실한 사실, 그 사실성, 그 실상이 나타날 때 여기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고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있었다고 믿어 온 그 허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망입니다. 믿음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실에 기인합니다. 이 실상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나는 부자다. 부한고로 부족한 것이 없다.
다 가졌다 자랑을 하고 있는데, 내막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난합니다.
초라합니다. 너무나도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 주시는 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허위적인 나와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나, 내가 보는 진실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를 보세요. 정신병자는 남 보기에 딱할 뿐이지 자기 자신은 세상에 편안합니다. 그 어리석음과 무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자기 실망도 없는 거짓된 부자, 그는 얼마나 속고 있고,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것조차도 모르니까 여전히 고개를 들고 다닙니다. 여전히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여전히 허구에 완전히 속아 삽니다. 모르면서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가진 줄로 압니다. 아무 것도 못할 주제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크게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그대로 불안하고 괴롭지만 어디로 말미암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한심한 형편입니다.
실망할 줄도 모르는 사람, 그는 썩었습니다. 그는 없습니다. 아니 없었습니다. 이 실상을 모르고 있는 동안 그는 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실망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이 실망하는 순간만이 실상을 아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성공은 가장 큰 실망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진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쓴 약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평생 앓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진실이라고 하는 쓴 약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히 실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내일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철저하게 실망해야 합니다. 오늘 철저하게 실망하는 사람은 내일 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벌거숭이 진실로 돌아가십시다. 더 이상 속이지도 속지도 맙시다.
진실로, 진실에로 의식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미지근한 상태, 미온적인 상태, 차지도 덥지도 않는 그런 모호성 속에는 어떤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허허실실 되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이러한 상태로써는 세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괴롭고 아프지만 철저하게 실망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용서가 없습니다. "너는 가난하다." 나는 부한 자라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심판하십니다. "너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형편없다." 이렇게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진실, 이 실상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도 없는 것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속히 인정하십시다.
어떤 분들은 나이 좀 들어 가지고 사업을 한 것, 그 동안 돈 버느라 애쓴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지금 알았나요? 본래 허무한 것인데 말입니다. 딴에는 굉장한 것을 발견한 것 같지만 원래 물질이라는 것이 그렇고,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속은 것이 잘못이지요.
자녀들을 키운다고 애써 수고하다가 출가시켜 놓고는 허무하다고 웁니다.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지 언제는 자기 것이었습니까? 뒤늦게 철든 것이 답답한 것뿐이지요. 그런 게 아닙니다. 본래가 가난한 것입니다. 본래 내가 없었어요. 있었던 게 아닙니다.
또 오늘 성경에는 장님이라 했습니다. 눈먼 것이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승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는데 자기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힐까 하는 생각에서 등불에다 불을 켜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가다가 어떤 사람하고 부딪혀서 이마가 상했는데, 이쪽 장님이 화가 나서 "이 사람아 나는 장님이니까 그렇지 자네는 눈뜬 사람이 왜 사람을 들이받는거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저쪽에서 하는 말이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였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장님이 불쌍한 것은 빛을 못 보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둠도 못 봅니다. 소망만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절망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상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절망할 줄도 모르는 것 이것이 장님입니다.
어서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장님 되고 있고, 얼마나 어두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속히 긍정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벌거벗은 수치를 모릅니다.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것은 도덕적 빈곤을 말합니다. 명예, 위신, 체면 등을 굉장히 위합니다만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위신이 다 없어진 지 언제입니까? 벌써 망신한 지 오랩니다. 새삼스레 이제 와서 붙들고 그럴 가치가 있느냐 말입니다.
저희 교우 가운데 어떤 가정의 며느리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데 시어머니는 교회에 안 나오십니다. 아무리 며느리를 말리며 교회에 나가지 말고 있다가 나 죽은 다음에 제사를 좀 지내라 얘기를 해도 말을 안 듣고 자꾸 교회에 나갑니다. 마지막에는 시어머니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나왔느냐고 하니까 그 대답이 아주 과학적입니다. "가만히 보아 하니 제사는 아주 안 드리게 생겼으니 이미 틀린 바에는 내가 자식 따라 가는 편이 낫겠소." 이 얼마나 지혜로운 생각입니까? 제가 받기는 틀렸어요. 새삼스럽게 붙들고 있다고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진 위신, 체면 등 뭐 남은 것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을 보면 벌써 다 치워 버려야 될 사업을 아무개 망했다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붙들고 있다나요. 계속 붙들고 있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왜 쓸데없는 위선을 부리고 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까? 부끄러움을 아십시다. 이미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미 벌거벗었는데 무엇을 더 가리우고 야단하는 것입니까? 좀더 진실해 보십시다. 자기의 수치를 긍정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여기에 있습니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원문대로 다시 번역을 고치면 "열심을 내어서 회개하라." 즉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실상, 그 본래의 사실, 그 진실 그대로가 나올 때까지 낮추고 또 한번 깨져서 자기의 본래성, 자기의 실상, 자기의 진실을 알라는 그 말입니다. 그리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장님 되고,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제 그대로 고백하라는 얘기입니다. 열심을 내서 회개하라.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위대한 사도가 그 명예를 다 떨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위대합니다.
여러분, 더 이상 위선과 허구에 매여 있지 맙시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명예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가 아니라 벌써 다 지나간 얘기입니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진실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철저하게 실망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나면 이제는 다시 실망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속는 일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속이는 일도 없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서 그 믿음으로 진실을 찾아라.
진실이라고 하는 부유함을 먼저 가지라, 믿음을 가지라, 흰옷을 사서 입어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라,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은 새로운 인격을 가지라, 안약을 사서 보세 하라,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 미래의 약속을 보며, 그 깊은 곳을 보며 하나님의 뜻과 그 오묘한 역사를 볼 줄 아는 신령한 시선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시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이웃을 볼 줄 아는 시력을 가져야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기도 :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비참한 존재이면서도 마치 영광을 받는 사람인 것처럼,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미 되어진 것처럼 또 될 수 있을 것처럼 오늘까지 속아 살아 온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의 실상을 알게 하시고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병들고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심을 내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벌거숭이 자기 모습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인격을 세우고 다시 신앙을 세워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유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자의 빈곤(요한계시록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히 내라 회개하라 불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지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당하는 고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적인 그러한 고통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먹는다 입는다 산다 하는 문제는 동물적인 고통입니다. 역시 인간은 인간만의 인간적 차원에서의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자는 인격자대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인격과 자유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봅니다. 지성인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성인이 지성인다운 고통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성인이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현대인, 소위 엘리트라면 엘리트다운 고통을 느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 지성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실망이라고 하는 고민입니다. 실망은 기대가 있고 믿는 바가 있었기에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망은 진실의 반대에서 생겨집니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용기가 없다면 이것은 너무 거듭되는 실망으로 인해서 실망이 체질화되면서 생겨진 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보다도 더 큰 용기는 없습니다. 용기의 부족은 거짓과 실망에 기인한 것입니다. 실망은 그 사건이 변했다던가 사람이 달라졌다던가 환경이 급변하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본래부터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거나 혹은 본래부터 없었던 것을 있는 것으로 믿어 온 허위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제야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마음 아파합니다. 없었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에 있는 줄로 속았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 중에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자기에 대한 실망입니다.
세계의 문제, 나라의 문제, 복잡한 사회 문제를 논합니다만 역시 실망의 근본은 나 자신에 대한 실망입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 큰 사업을 한다고 분주하게 다녔는데 이제 사업 진단을 해 보니 완전히 적자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것입니다. 번 줄 알았는데 손해였습니다.
무엇이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무엇을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았는데 이제 보니 이렇게 무능할 수 없고 초라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진작 이 자리에서 보니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딴에 진실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보니 세상에 나 같은 위선자가 다시없더란 말입니다.
이 믿음이 무너질 때, 혹은 허위성이 노출될 때 또는 그 진실한 사실, 그 사실성, 그 실상이 나타날 때 여기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고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있었다고 믿어 온 그 허위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망입니다. 믿음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실에 기인합니다. 이 실상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나는 부자다. 부한고로 부족한 것이 없다.
다 가졌다 자랑을 하고 있는데, 내막은 그렇지 못합니다. 가난합니다.
초라합니다. 너무나도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 주시는 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허위적인 나와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나, 내가 보는 진실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주는 내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를 보세요. 정신병자는 남 보기에 딱할 뿐이지 자기 자신은 세상에 편안합니다. 그 어리석음과 무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자기 실망도 없는 거짓된 부자, 그는 얼마나 속고 있고,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것조차도 모르니까 여전히 고개를 들고 다닙니다. 여전히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여전히 허구에 완전히 속아 삽니다. 모르면서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가진 줄로 압니다. 아무 것도 못할 주제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크게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는 그대로 불안하고 괴롭지만 어디로 말미암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한심한 형편입니다.
실망할 줄도 모르는 사람, 그는 썩었습니다. 그는 없습니다. 아니 없었습니다. 이 실상을 모르고 있는 동안 그는 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실망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이 실망하는 순간만이 실상을 아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성공은 가장 큰 실망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진실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쓴 약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평생 앓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진실이라고 하는 쓴 약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히 실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내일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 철저하게 실망해야 합니다. 오늘 철저하게 실망하는 사람은 내일 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벌거숭이 진실로 돌아가십시다. 더 이상 속이지도 속지도 맙시다.
진실로, 진실에로 의식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미지근한 상태, 미온적인 상태, 차지도 덥지도 않는 그런 모호성 속에는 어떤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허허실실 되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이러한 상태로써는 세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괴롭고 아프지만 철저하게 실망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용서가 없습니다. "너는 가난하다." 나는 부한 자라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심판하십니다. "너는 가난하고 가련하고 형편없다." 이렇게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진실, 이 실상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도 없는 것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속히 인정하십시다.
어떤 분들은 나이 좀 들어 가지고 사업을 한 것, 그 동안 돈 버느라 애쓴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얘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지금 알았나요? 본래 허무한 것인데 말입니다. 딴에는 굉장한 것을 발견한 것 같지만 원래 물질이라는 것이 그렇고,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속은 것이 잘못이지요.
자녀들을 키운다고 애써 수고하다가 출가시켜 놓고는 허무하다고 웁니다.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지 언제는 자기 것이었습니까? 뒤늦게 철든 것이 답답한 것뿐이지요. 그런 게 아닙니다. 본래가 가난한 것입니다. 본래 내가 없었어요. 있었던 게 아닙니다.
또 오늘 성경에는 장님이라 했습니다. 눈먼 것이 얼마나 비참하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승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는데 자기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힐까 하는 생각에서 등불에다 불을 켜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가다가 어떤 사람하고 부딪혀서 이마가 상했는데, 이쪽 장님이 화가 나서 "이 사람아 나는 장님이니까 그렇지 자네는 눈뜬 사람이 왜 사람을 들이받는거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저쪽에서 하는 말이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불이 꺼진 지 이미 오래였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장님이 불쌍한 것은 빛을 못 보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둠도 못 봅니다. 소망만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절망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희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상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절망할 줄도 모르는 것 이것이 장님입니다.
어서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장님 되고 있고, 얼마나 어두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속히 긍정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벌거벗은 수치를 모릅니다.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것은 도덕적 빈곤을 말합니다. 명예, 위신, 체면 등을 굉장히 위합니다만 쓸데없는 얘기입니다. 위신이 다 없어진 지 언제입니까? 벌써 망신한 지 오랩니다. 새삼스레 이제 와서 붙들고 그럴 가치가 있느냐 말입니다.
저희 교우 가운데 어떤 가정의 며느리는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데 시어머니는 교회에 안 나오십니다. 아무리 며느리를 말리며 교회에 나가지 말고 있다가 나 죽은 다음에 제사를 좀 지내라 얘기를 해도 말을 안 듣고 자꾸 교회에 나갑니다. 마지막에는 시어머니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나왔느냐고 하니까 그 대답이 아주 과학적입니다. "가만히 보아 하니 제사는 아주 안 드리게 생겼으니 이미 틀린 바에는 내가 자식 따라 가는 편이 낫겠소." 이 얼마나 지혜로운 생각입니까? 제가 받기는 틀렸어요. 새삼스럽게 붙들고 있다고 됩니까?
여러분, 우리가 가진 위신, 체면 등 뭐 남은 것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을 보면 벌써 다 치워 버려야 될 사업을 아무개 망했다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서 붙들고 있다나요. 계속 붙들고 있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왜 쓸데없는 위선을 부리고 왜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까? 부끄러움을 아십시다. 이미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미 벌거벗었는데 무엇을 더 가리우고 야단하는 것입니까? 좀더 진실해 보십시다. 자기의 수치를 긍정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여기에 있습니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원문대로 다시 번역을 고치면 "열심을 내어서 회개하라." 즉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실상, 그 본래의 사실, 그 진실 그대로가 나올 때까지 낮추고 또 한번 깨져서 자기의 본래성, 자기의 실상, 자기의 진실을 알라는 그 말입니다. 그리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장님 되고,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이제 그대로 고백하라는 얘기입니다. 열심을 내서 회개하라.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위대한 사도가 그 명예를 다 떨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대로 고백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위대합니다.
여러분, 더 이상 위선과 허구에 매여 있지 맙시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명예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가 아니라 벌써 다 지나간 얘기입니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진실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철저하게 실망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나면 이제는 다시 실망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속는 일도 없겠습니다. 따라서 속이는 일도 없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서 그 믿음으로 진실을 찾아라.
진실이라고 하는 부유함을 먼저 가지라, 믿음을 가지라, 흰옷을 사서 입어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라,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은 새로운 인격을 가지라, 안약을 사서 보세 하라,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저 미래의 약속을 보며, 그 깊은 곳을 보며 하나님의 뜻과 그 오묘한 역사를 볼 줄 아는 신령한 시선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시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이웃을 볼 줄 아는 시력을 가져야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기도 :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비참한 존재이면서도 마치 영광을 받는 사람인 것처럼,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미 되어진 것처럼 또 될 수 있을 것처럼 오늘까지 속아 살아 온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의 실상을 알게 하시고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병들고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심을 내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벌거숭이 자기 모습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인격을 세우고 다시 신앙을 세워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유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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