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참된 증거(요 21:24-25)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 본문은 요한복음의 부록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복음의 결론은 이미 공부한 바 있는 요한복음 20:30-31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형식상으로 본다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습하는 뜻에서 20:30-31을 다시 한번 상기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어디까지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려는 것이고, 그래서 영생을 얻게 하려는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목적에 합당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적이 많지만, 그 중 몇 가지만을 선택해서 기록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2절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에 중요한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이 기록은 제자가 하였다고 요한은 끝까지 자기 이름을 숨기고 있습니다. 둘째, 이 기록은 소설을 썼거나 단순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사명이 있어서 증거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째로, 이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주 참되고 진실한 것이며, 네째는, 인간의 제한성을 말합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는 기록의 제한과 전달하는 제한, 그리고 이해의 제한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말 잘하는 사람도 자기가 하는 말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에, 17%만 전달할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말을 했다 해도 완전하게 이해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결코 내가 가진 생각을 다 말할 수 없으며, 상대방도 내 말을 다 알아듣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마지막 결론은, 예수 사건은 기록 이상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록하느라고 해보았지만 아쉽기만 한 것이 요한의 마음입니다. 더 귀한 말씀, 더 중요한 일들, 더 하고 싶은 말씀들이 무궁무진한데, 그 신비한 것을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이 책을 끝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이 설명한 이 내용들보다 몇 천 배, 만 배나 더 굉장하고 신비로운 것이 예수님의 사건임을 말하고 끝맺음을 합니다.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 하고 끝맺음을 하니, 마지막이 왜 이런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이 끝맺음은 굉장한 간증이요 찬양입니다.
이제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21:24) 이 일을 증거하고 기록한 자는 목격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들은 바로 옆에서 눈으로 보고 듣고서 그 사실들을 그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잘 기록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단으로 변장해도 소용이 없으며 실제적인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진만 보면 자기 실물보다 사진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은 기계이므로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니, 우리들의 추한 속모습은 보이지 않고 멀쩡한 겉모습만 나타나므로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추한 마음까지도 사진에 나타난다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정말, 사진이 잘 나오고 안 나오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실물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입니다. 사실이 모여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이란 좋은 말이나 논리적인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설명을 잘못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실이 사실 되려면 우선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만 진실에 이릅니다. 아무리 사실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으면 사건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는 사실이라도 내가 믿지 않으면, 적어도 내게는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진실이 진실될 수 있으니까요. 사도 요한은 이 원리를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요한일서 1장에서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사람이 가진 오관을 다 동원해서 확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주목해서 보았고, 그것이 모자라 만져도 보았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상 더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그런데, 요한이 여기서 말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확인한 그 사실을 믿고 그 사건에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마도, 교만해질까 두려워서 빼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 속에서나, 또는 그의 생에 속에서 그는 믿었고 이 사건들이 사건화되어서 생명을 이루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도 모두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것처럼 더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이 분명하니 생명을 바쳤고, 기적이 분명하니 뛰어들었으며, 진리가 분명하니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authority)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 마디로 다시 정리하면, 이 복음은 요한의 생애 가운데서 확실하게 경험한 바를 말하는 것으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 일을 증거하고"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이 말은, 증거해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려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믿어야 사실되지만, 아직 보지 못했고 믿지 못한 사람은 사실이 사실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를 증거해서 저 사람이 믿게 되면, 이 사건이 저 사람에게도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실화되는 순간에는 오래된 사건도 현재화됩니다. 가령, 6․25동란은 35년 전 사건으로, 그때 경험했던 어른들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들려줍니다. 이때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그럴리가 있나요?" 하고 믿지 않으면 6․25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증거하는 것을 믿으면 믿는 그 순간에 6․25는 오늘 나도 겪게 되는 것으로, 사실화 또는 현실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공산이라는 글자만 나와도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공산당들의 그 잔인성을 아무리 들려 주어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설마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나요?" 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받아서 믿는 자는 그 사건에 접하게 되어 그 사건이 내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우리는 자주 사람이 죽는 것을 봅니다. 이 죽음을 보면서도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죽는다는 것을 믿으면 죽음은 바로 나의 사건이 되어.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됩니다. 그러므로,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증거 됨을 믿으면 3천 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의 이야기가 되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건은 계속 반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건은 반복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증거입니다.
증거란 헬라어로는 '말트리아'이며, 영어로는 위트네쓰(witness)로 번역하는데, 마르트리아를 그대로 영어로 만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터(Martyr)로서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증거란 말이 영어에 있어서 순교로 표현되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 있어야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증거하는 사건에 내 생명을 맡기고 내 운명을 걸어야 하는 것이므로 순교자적인 정신이 아니고서는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목격자라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할 때, 검사가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오직 "들었느냐, 보았느냐?" 하고 경험을 묻습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없는 자는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증인이 될 때도 이처럼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경험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어떤 논리적인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았고 들었다는 목격자적인 경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 사건에 경험자라야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증거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사랑해야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보았고 들었어도 증거 하려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증인이 되고자 하는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귀찮게 보았고 들었다고 증거 하겠느냐고 그 증거를 묵살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위해서 증거 하는 그 분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문제입니다. 내가 증거 함으로 인하여 어떠한 피해가 온다고 해도 다 받을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현장에 나타나 증거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근한 예로, 탁명환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이단 종교임은 확실한데, 증인들이 창피하다고 법정에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증인의 육성을 녹음까지 하고 책에도 이미 발표했는데도, 법정에 나올 것을 거부하며, 녹음된 을 지워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사실인데도 증언을 하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탁 교수는 위증한 것이 되어 벌금을 내고 사과문도 내야만 했습니다. 증거가 사실이라도 이렇게 되면, 그 증거는 묵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 되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용기가 있어야 증인이 됩니다. 위하여 증거 하는 사람과 함께 공동 운명에 들어갈 만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순교적인 정신으로 증거하고, 증거 함으로 증거를 받는 사람들이 그 사건을 경험하면, 내 사건화되면서 영생의 역사에 연합하는 놀라운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하고, 증인이 되어 달라고 주님께서는 부탁하는 것입니다. 본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며, 믿는다고 다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핍박 속에서 증인으로 순교했고, 사도 요한은 증인으로서 이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제자 중에서 이 세상에 제일 오래 남아 증거하는 자로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통하여 증거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내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증거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가 하나님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안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를 받는 사람들이 바로 현장에서 사건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에서부터 시작하여, 병 고친 이야기, 주님의 생애에 대해서, 또는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증거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증거하고, 요한일서 4장 끝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사랑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병 고치는 것이나, 각종 기적, 말씀 등 모두를 통틀어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 안에 내가 있고, 그 사랑을 알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것을 믿을 때에 구원에 이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누구이다" 하는 말씀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대단히 자세히 듣고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로, 사도 요한은 정말 열심히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상 열거한 "나는 누구이다" 하는 것을 모두 합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마지막에 가서 "내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더라"라고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많습니다만, 요한은 몇 가지만 골라서 기록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2:6-11), 왕의 신하의 아들 병 고친 이야기(4:43이하), 베데스다 못가에서 병 고친 이야기(5:1-18), 5천명 먹이신 이야기(6:1-15), 바다 위를 걸으신 이야기(6:16-21),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고친 이야기(9:1-41),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11:1-44) 등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이 요한의 눈에는 이적이라기 보다는 표적으로 보았고, 사건으로 나타난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향으로 증거해 놓고도, 요한이 끝까지 더하고 싶은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실하니라, 내가 본 것이요, 내가 경험한 것이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이란 말을 제발 믿어 달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아니다 하지 말고, 2천년 전의 이야기니 모르겠다고도 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건들이 곧 오늘 나의 사건이 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 부탁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어 달라는 말처럼 답답한 말은 없습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 이 진리가 참인 것을 제발 믿어 달라고 끝까지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전체의 마지막 말씀으로써 인간의 제한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 많은 일들을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둘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한 줄 아노라."(요 21:25) 이해의 한계, 증거의 한계, 전달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여기 기록된 것보다는 훨씬 더 어마어마한 그 이상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가령,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가 되어 있지만, 사실 그 정도였겠습니까?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몇 마디로 간단하게 적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사로가 정말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 나올 때, 아마도 여러 사람이 기절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건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기록 이상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찌므라 간조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하렵니다. 어느 날 물고기들이 모여서 물 밖의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답니다. 물 속에서만 사는 물고기들은 물 밖의 세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숭어같이 잠깐씩 물위를 뛸 수 있는 것들은 물 밖에 희한한 밝은 세상이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물고기들이 숭어에게 미친놈이라고 그런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달려들었습니다. 숭어는 자기들이 잠깐씩 본 세상을 아무리 설명해도 다른 물고기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이때, 뭍에서도 살고 물에서도 사는 게가 나타나 설명을 합니다. 나는 양쪽을 다 왔다갔다하며 살고 있으니 바깥 세상이 있음은 틀림없다고 설명했지만, 그래도 믿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해초를 보며, 이것보다 더 크고 어마어마한 것이 밖에는 있다고 설명하고, 또한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보다 더 밝고 환한 곳이 있다고 설명했지만, 물고기들은 게를 미친놈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난 게는 "그래 내가 미쳤다"하고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경험한 자의 이야기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요한도 자기가 보고 경험한 것을 설명하려고 이토록 열심히 썼는데, 다 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 쓸 수도 없으며, 썼다고 해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으니, 어쨌든 여기에 기록된 이상이라는 것만은 알라는 것입니다. 무진장 신비롭고 엄청난 역사였으니 믿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일입니까? "내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설교자료 18,185편 ◑ >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사와 사닥다리(요한복음 1 : 43 - 51) (0) | 2024.03.19 |
---|---|
충성된 종의 비유(마태복음 24 : 45-51) (0) | 2024.03.19 |
크고 비밀한 사건(예레미야 33장 1절~9절) (0) | 2024.03.19 |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태복음 25장 31절~40절) (0) | 2024.03.19 |
치유하는 교회(야고보서 5:13-15)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