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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교회(야고보서 5:13-15)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 강해 스물일곱 번째인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분과 함께 '치유하는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요, 세우신 교회도 세상을 구원할 사명으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구원의 역사는 전인적인 것이요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구원의 의미를 놓고 '개인구원'이라느니 '사회구원'이라느니 하고 구별해서 말하는 경향도 있습니다마는, 개인구원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구원'의 의미를 우리는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근본적인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여 자유 하게 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에는 이렇듯 존재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혼의 구원과 동시에 마음과 생각을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인격과 존재가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함은 그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함으로 자기 존재를 느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동안 소중하지 않았던 나의 존재가 구원을 통하여 비로소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나는 쓸데없는 사람이다. 아무 가치 없는 존재다'라고 자기 생애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치유하셔서 그 인격과 존재의 가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통하여 우리의 신분을 새롭게 하십니다.
억눌린 자는 그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자유함을 느끼고, 이 자유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감옥에 있다 해도 나는 속박 당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억울한 피해를 당해도 나는 절대로 억울하지 않습니다. 인권상, 신분상 천한 사람일지라도 결코 스스로를 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넷째, 우리는 구원을 통하여 육체의 병을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마음이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10 : 9)." 오늘의 본문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15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 말씀에 나오는 '구원'은 천당 간다는 의미도 아니요,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것은 병고침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의 '구원'은 천당 가는 티켓을 내주는 것이 아니요, 천국의 열쇠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병을 치유하여 건강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이 치유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 예는 오늘의 본문말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다섯째, 구원을 통하여 화해와 정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화된 관계가 화해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사회정의가 구현된다는 폭넓은 의미의 구원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영과 정신과 육체, 그리고 인간관계, 사회문제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전인적 구원을 말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은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 친히 우리 가운데로 오셨으며, 또한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십자가를 지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루신 예수님의 역사는 proclamation-복음을 전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병고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보이는 대로 다 고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농담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장례식을 치르신 일이 없다. 왜냐하면 장례식에 참석하셔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그의 이름을 왜 부르셨겠는가? 만일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공동묘지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보시는 대로 모두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참모습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이렇듯 병으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임무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눌린 자를 해방시키시고 가난한 자를 돌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손수 돈을 주시거나 빵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물론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을 보시고 빵을 사주신 적은 없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업적이 없습니다. 병고친 일은 있지만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만들어주신 일은 없습니다. 배급을 주신 일도, 먹을 것을 주신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고난 당하는 자의 배고픔과 아픔에 동참하셨을 뿐입니다. 그들 속에 함께 하심으로 그들의 위로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어도 너희들이 돈을 벌어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바른 생각과 바른 인격을 세우고 바른 건강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받아 그의 말씀대로 전파했고, 치유했고, 유무상통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 귀한 역사를 그대로 이어받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본문말씀을 통하여 야고보는 우리에게 세 부류의 교인들에 대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13절)"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13절)" "병든 자가 있느냐(14절)"-고난 당하는 것, 병든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즐거워하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고난만이 문제인 줄 알고 여기에만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즐거워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일이 잘되고 편할 때에 큰 잘못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놓고 본문에서는 명령하듯 말씀합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이렇게 하라, 즐거워하는 자는 이렇게 하라, 병든 자는 이렇게 하라 하는 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13절)"-'기도하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없는 세상을 약속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문제와 함께 살면서 문제 속에서 얻는 행복과 문제 속에서 지켜나가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할 때에 기도를 합니다. 그리하면 고난의 뜻이 무엇인지, 왜 고난을 당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당할 때에 비로소 나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깊이 살피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스스로 속고 있다가 고난 당할 때에 비로소 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고난 당하는 가운데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나를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인도하려 하시는지, 하나님의 그 깊은 뜻과 경륜을 기도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고난 당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부정하게 되고 분명한 약속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젊고 건강해서 마음대로 활동할 때에는 천국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늘 이런 젊음을 유지한 채 죽지 않을 것만 같거든요. 하지만 일단 고난 당하고 실패하고 병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으레 이 세상이 아닌 약속의 땅, 오는 세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3-10)"-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국에 두고 계십니다. 이렇듯 소중한 천국의 문제이지만 사람이란 이상하게도 평안할 때에는 이것을 등한히 여깁니다. 하다못해 감기라도 들어야만 죽는가보다고 생각하게 되고, 어려운 일이나 고난을 당할 때에라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약속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듯 어려움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기도 가운데서 모든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닫지 됩니다. 이 때문에 고난 당하는 자는 반드시 기도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절)"-'찬양하는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함입니다. 직분상 저는 주례를 많이 삽니다. 주례를 서준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제게 인사를 하러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들어서는 신부가 영 낯설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식 때 드레스를 입고 짙게 화장한 얼굴과 신혼여행 다녀 와서의 얼굴이 너무나도 다를 때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 얼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드레스를 벗었을 때가 진짜겠지요. 어쨌든 신랑 신부가 이렇게 와서 인사를 할 때 선물을 하나씩 사 가지고 옵니다. 약소한 선물이라면서 내놓습니다. 그때마다 감사하게 받으면서 이렇게 묻곤 합니다.
"그렇게 황홀하고 정신없는 신혼여행 중에 내 생각이 나던가요?" 정신없이 즐거운 시간에 이 주례목사를 생각해주었다는 것, 그것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 역시 서울에서 샀다면 소용없지만 제주도에서 산 것이므로 중요합니다. 그 현장에서 선물을 사는 시간에만은 저를 생각했을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즐겁고 기쁠 때에 잊어버리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장 즐거운 시간에, 가장 기쁜 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즐거운 시간에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저는 가끔 신혼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농담 같은 진담을 합니다. "신혼여행이라는 것, 사흘인지 나흘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거든 제발 나이트클럽에는 가지 마라,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인데 좀 조용하고 무게 있게 지내야지 그렇게 몽롱하게 지내서야 되겠느냐." 가장 즐겁고 기쁜 시간은 찬송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쁠 때에 찬송을 하면 기쁨은 배가(倍加)합니다. 기쁠 때에 잘못하면 기쁨이 둔갑하여 슬픔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즐거운 때에 많은 사람들이 향락과 교만에 빠지고, 하나님의 뜻과 교회에 등한히 하는 불 신앙으로 가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활동을 하는 초창기에 이에 대하여 통계를 내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활동과 신앙생활에 열심이던 젊은이들이 이상하게도 결혼만 하면 1년 내지 1년 반쯤은 교회활동에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일학교활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 그 기간에는 안 하려고 합니다. 성가대활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도 그 기간 동안에는 안 하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기쁠 때에 찬송할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고난 당하는 가운데 찬송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모두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기쁘고 형통할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7장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한 것은 바로 백향목 궁전에 앉아서 즐거움을 누릴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큰복을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궁전을 새로 크게 지어서 입당식을 하고 들어가 앉아보니 너무나 좋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법궤가 천막 속에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복을 주신 것은 이처럼 가장 즐거운 시간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 당할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답답한 일이 있고, 집에 입시를 앞둔 자식이 있어서 새벽같이 나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보통으로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이 무사하고 평안할 때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더 귀한 일입니다.
어떤 유대사람이 장마가 나서 물이 불은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가려면 거기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것이 휘청거리며 흔들립니다. 참고 중간쯤까지 와서는 그만 다리 밑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물살은 급히 흐르고, 외나무다리 역시 흔들립니다. 덩달아 자신의 다리도 떨립니다. 꼭 강에 빠져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 어려움 속에서 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목숨만 구해주시면 저의 전재산을 바치겠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서 힘이 났는지 다리도 떨리지 않고 무서움도 덜합니다. 앞으로 가다보니 그 다리도 조금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건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 재산을 하나님께 모두 바치고 나면 앞으로 살길이 막막합니다. "하나님, 반만 바치겠습니다"라고 다시 기도합니다. 다시 몇 발짝 더 가고 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이와 더불어 자신이 바칠 재산이 아깝게 생각됩니다. 결국 "하나님, 4분의 1만 바치겠습니다"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강물에 풍덩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고 하나님, 농담도 못합니까?" 하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합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감하자고 합니다.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못된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병든 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병든 자의 자유에 대한 세 가지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믿음, 죄가 그것입니다. 본문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를 생각하고 믿음을 생각하고 죄 문제를 생각하라"라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병들었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보아도 신학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간혹 하나님께서는 전체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전체를 정신차리게 하기 위하여, 전체로 하여금 바른 신앙에 서게 하기 위하여 대표로 한 사람을 병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한 사람만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한 사람의 문제를 공동체적 관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플 때에 이것을 전체의 아픔으로 느끼고 소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한 사람만이 특별히 되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교인 중의 누구 하나가 아프다고 할 때에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아픈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가정의 사랑하는 식구 하나가 아플 때에는 온가족이 다 아파합니다. 마음으로는 모두 아파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픈 당사자보다도 주위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아플 수가 있습니다. 자식이 아플 때에 부모님의 마음은 더 아픈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할 정도로 얼마나 마음이 괴롭고 아픈지 여러분도 겪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 사람의 아픔을 모든 교인들의 아픔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된 의미가 있습니다.
간혹 구역의 한 사람이 아플 때에 그분을 위해서 그 구역에 있는 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교회의 기도실에 몇 사람이 함께 들어와서 기도하는 모습도 가끔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어느 교인이 수술을 받고 있는데, 그 시간 동안 함께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하나님, 그분들의 아름다운 믿음에 복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구역의 한 사람이 아플 때에 온구역의 교인이 모두 아픈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은 귀한 일이며,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 교회적인 자세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14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병든 자가 의사가 아닌 장로, 즉 교회의 지도자에게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든 자가 병원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갑니다. 여기서 병들었다는 것은 육체적인 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교회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은 병든 자는 먼저 교회의 장로에게 가서 함께 걱정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모습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가기 전에 먼저 목사님이나 교역자들이나 권사님들에게 부탁을 해서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먼저 가야 할 곳은 병원이 아니고 교회입니다. 물론 병원에서 먼저 치료를 하고 뒤늦게 알려오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병원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간다면 어떤 병원에 가야 할지,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할지, 여기서부터 교회와 의논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요새는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모든 교인들의 일을 세세히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아무튼 이런 일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의 하나입니다. 먼저 교회에 알릴 것입니다. 영성적 문제, 교회로 향한 마음, 하나님과의 관계가 몸을 치료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신앙적 치유법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소화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병의 문제가 아니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병에는 말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영적으로 들려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분명히 내게 들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사건을 통하여 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병을 만났을 때는 그 병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둘째, 믿음을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15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식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의식이 바른 사람을 놓고는 언제나 확실한 믿음을 요구하셨으며, 심지어는 많은 시련을 통하여 믿음을 키워주시고는 네 믿음이 위대하다고 칭찬하시면서 병 고쳐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기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례적인 의미와 의학적인 의미가 그것으로,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기름'은 헬라어로 '엘라이오'라고 하며, 이것은 올리브 기름을 의미합니다. 올리브 기름에는 식용과 치유용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기름은 치유용을 말합니다.
'바르며'는 헬라어로 '아레이포'입니다. 이것은 '문지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기름을 바르며'는 '문지르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헬라어에 '크리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기름을 붓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식적인 것이요 의식적인 것입니다. 예식을 행할 때에 붓는 기름을 부음받았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 '크리오'입니다.
그러나 기름을 바르고 치유적으로 문지르는 것은 '아레이포'입니다. 이것은 치유적인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의식적(儀式的)으로 바르는 것이 아니고, 약을 바르듯이 바르는 것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하는 본문말씀에서 세 가지의 오해가 비롯됩니다.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주로 종유성사의 근거로 삼습니다. 여기에 근거를 두고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기름을 붓는 예식을 치릅니다. '기름을 바르며'라고 한 말씀을 기름을 붓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오해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기름'을 성령으로만, 영적으로만 해석하고 있을 뿐, 실제적인 기름에 대해서는 부정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기름의 실제성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오해는 '기름'을 마술적 의미로 생각하고는 어디든지 반드시 기름을 발라야만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이 '기름'에는 물론 성례적인 의미도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의학적인 뜻으로 기름을 바르고 치유하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약을 먹으면서 기도하라, 상처가 났으면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네째,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15,16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기를 깊이 성찰하면서 회개할 것입니다.
다섯째, 합심기도를 말합니다.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절)"-한 사람을 위해서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쿨만(Catherin Cullman)이라는 분이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장면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천 명의 사람이 모인 가운데 환자를 모두 앞에 세워놓습니다. 환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거기 모인 사람들과 다함께 기도합니다. 이렇게 환자를 치료합니다. 그는 언제나 환자들의 병이 나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자신이 치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도했기 때문에 치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골방에다 환자를 놓고 일대일로 기도해서 내가 안수하고 내가 고쳤다고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비로소 강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적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구원하리니' '일으키시리라' '사하심'의 세 중요한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말은 헬라어로 각각 '쏘세이' '에게레이' '아페세스타이'라고 합니다. '구원하리니'라는 것은 육(肉)을 치유해준다는 말입니다. '일으키시리라'는 영(靈)을 일으키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하심'은 전인적 치유를 말합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항상 이러한 치유의 은혜를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과 육을 아울러 인간의 관계까지도 전인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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