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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야고보서 3:7-12)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야고보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은 깊이 생각한 다음에 신중히 할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는 아무리 깊은 생각이 깔려 있어도 부족합니다. 말이 이렇게도 중요합니다. 말(馬)을 순종케 하려고 입에 재갈을 먹여 그 온 몸을 어거하듯이 우리는 스스로 말한 것에 책임을 지고 끌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이 큰 짐승이로되 일단 그 입에 재갈을 먹여놓으면 어린아이가 고삐를 당겨도 그 큰 덩치가 속절없이 끌려갑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토록 큰 힘을 가졌습니다. 야고보는 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여 배의 키와 같다고도 비유했습니다. 나에게 인격도 있고 재산도 있고 명예도 있다 합시다. 그러나 제아무리 훌륭한 것을 가졌다 해도 어쩌다 말 한마디 잘못하고나면 그 훌륭한 것들이 다 소용없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바친 오랜 세월과 각고의 노력이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비일비재로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야고보는 말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말은 불과도 같다, 불이 한번 붙으면 걷잡을수없이 번져나가는 것과 같이 말 한마디의 여파는 엄청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말을 내뱉는 것은 불을 지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말이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깊이 생각한 다음에 말을 할 것이요, 말을 했으면 그로해서 파급되는 영향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이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의 요지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말'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이 들어가 공부하게 됩니다.
사람이 말을 바로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그 출처를 잃어버립니다.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책임을 지지 않는 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무책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말에 책임을 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하여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주제가 됩니다. 야고보는 먼저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사람들이 짐승을 길들여 부립니다. 말이나 소, 개, …… 우리가 다 길들여 씁니다. 비둘기도 길들이고 돌고래도 길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립니다.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도 길들여 사용할 줄 압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지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에게 그런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디는 모든 동물이 사람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에게 봉사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동시에 사람은 그 모든 동물을 사랑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다스리는 능력, 다스림의 특권, 다스림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실 평화롭게 다스리고 보면 이 동물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을 줍니까? 또, 동물이 얼마나 말을 잘 듣습니까? 천진(天眞) 그대로인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본디와 같이 바른 관계에 설 때에는 참으로 원만한 사이가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람이 타락하고 죄를 처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동물과 인간의 관계도 불편한 관계로 바뀌고, 때로는 원수 같은 관계로까지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더라도 동물을 사랑으로 잘만 길들이면 얼마든지 사람의 뜻대로 부릴 수 있고 쓸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람이 짐승은 길들일 줄 안다. 길들임으로 짐승더러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게 할 수 있다. 앉힐 수도 있고 서게 할 수도 있다. 심부름을 시키고 재롱도 피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작은 입 속에 있는 세치 혀 하나를 길들이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혀 하나 길들이지 못해서 안해야 될 말을 불쑥 내뱉어놓고는 아차하지만 때는 늦어서 급기야는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남에게까지 화를 불러들입니다. 혀가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까? 야고보가 '길들인다'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한 내용이 바로 무의식중에 하는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의식중에 하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불식간에 불쑥 내뱉습니다.
즉 제어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내가 내 말을 내 마음대로 못한다-이것입니다. 생각도 해보기 전에, 어느 결에 말이 나와버렸어요. 대답이 나와버렸어요.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동물은 반사적으로 살고, 사람은 응답적으로 삽니다. 동물은 리액션(reaction)으로 살고 사람은 리스판스(response)로 삽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이를테면 여러분이 개를 잘 키웁니다. 잘 키워왔는데도 어쩌다 그만 나도 모르게 개의 꼬리를 밟았다고 합시다. 개는 반사적으로 '깽' 짖으면서 덤빕니다. "내가 널 얼마나 오래 보살펴왔냐? 그런데 그거 한 번 밟았다고 이렇게 나오느냐?" 개를 나무랄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개니까요. 개니까 개같이 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동물은 이렇게 반사적으로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버스를 타거나 전철을 탔을 때에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광경입니다. 누가 내 발을 밝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아픕니다. 이럴 때에 내가 반사적으로 팩하고 그 사람을 한대 먹였다고 하면 나는 개 같은 존재밖에 못됩니다. 밝혀서 아프지만 슬쩍 쳐다보니 예쁜 아가씨였습니다. '내가 아프다고 짜증내면 이 아가씨가 무안해하고 괴로워하겠지.' 그래서 꾹 참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한번 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 편에서 "어머, 미안합니다" 하고 얼굴을 붉히기라도 하면 "아, 괜찮아요" 하고 짐짓 좋은 낯을 보이게 됩니다. 사실은 아픈데도, 기분이 나쁜데도 그런 반응을 보입니다. 이런 것이 응답적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더욱이 믿는 사람이면, 응답에 있어서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깊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도를 해봅니다. 확신이 들 때까지 며칠이고 참을성 있게 기도를 해봅니다. 그래도 미진하면 금식을 하고 철야도 합니다. 그래도 깊이깊이 기도해보고 나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하에 천천히 응답을 합니다. 그래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거늘 보십시오. 무슨 일 좀 당했다고 해서 당장에 죽느니 사느니 촐랑거리지를 않나, 성깔이 뻗쳐서 팩하고 한대 먹이지를 않나, 욕지거리 상소리로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나, 영락없는 동물 근성을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제 목을 제가 죄는 것이요, 필요 없는 실수를 사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사전에 생각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말하려는 것이 사실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남에게서 들은 소리 가지고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말에는 나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둘째로, 내가 하는 말이 덕이 되는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 말이 덕이 된다면 할 것입니다. 그 말이 저 사람에게 이익이 되면 할 것입니다. 그 말이 교회에 유익하면 할 것입니다. 그 말이 사회에 유익한 것이면 할 것입니다.
셋째로, 그 말로 파급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A한테 말합니다. A는 B에게 말합니다. B는 C에게, C는 D에게 …… 내가 한 말이 이렇게 퍼져나갈 때에는 어떻게 될까?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즈음의 신문을 보면 '제발 기사를 이렇게 쓰지들 말았으면 좋겠는데' 싶을 때가 많습니다. 끔찍한 사건 하나를 놓고 그에 관한 기사가 몇 페이지에 걸쳐 이 구석 저 구석에, 이를테면 사회면은 말할 것도 없고, 논설에 단평란에까지 온통 철갑이 되어 실려 있습니다. 이런 신문 한번 훑어 읽고 나면 그날은 하루종일 정신이 멍합니다. 뭘 어쩌자는 것입니까? 우리 사람들의 도덕성이 어떻다 저떻다는 등 이런 끔찍한 일은 앞으로 없도록 해야 되겠다는 둥, 사회의 책임이라는 등 범인의 가정이 어떻다는 둥, 꾸며댈 수 있는 소리는 나오는 대로 다 실어놓고 있어요. 길가는 시민들의 반응까지 취재해서 싣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 그래서 범죄가 줄어들고 있습니까? 범죄의 세세한 부분까지 시시콜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기사들을 보고, 그런 공자 같은 소리하는 것을 보고 못된 사람들이 '아, 이런 짓 하지 말아야 되겠구나' 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점점 더 많이 생기면 생겼지 뿌리뽑히지 않습니다. 파급되는 영향을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넷째로, 이 말은 과연 내가 할 말인가 아니면 남이 할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맡길 일인가 내가 할 일인가, 저 사람이 할 일인가 내가 할 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사람들을 보면 가끔 목격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누가 남의 흉을 봅니다. 아무개가 어떻고 저떻고 합니다. 이렇게 남 얘기하는 것을 곁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가로막습니다. "It's not your job!"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남의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It's not your job!"-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남의 일이다. 네가 왜 왈가왈부하느냐? 이렇게 중지를 시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처신입니다. 그런 너절스런 이야기 한바탕 들어주고 나면 나 자신이 더러워지고 말거든요. 꿈자리도 사나워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난히도 남의 일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 안달합니다. 정보 탐지에 흥미가 많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니, 응? 나만 알고 있을께 말해봐." "이건 너한테만 하는 얘기니 너만 알고 있어야 돼." 이런 소리 주고받으면서 자기와는 상관도 없는 동네방네 남의 안방 이야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귀를 곤두세우는 짝자꿍이 또 있습니다. 이런 버릇이 타성이 되면 정신상태가 형편없이 황폐해집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내가 할 말, 남이 할 말을 잘 분간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할 일, 남이 할 일을 현명하게 가려서 할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두고 내가 주제넘게 나서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내가 하는 말에 내가 책임을 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내 말에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은 거의가 할말이 아니라 안하는 게 좋은 말입니다. 그저 즐거운 이야기, 흐뭇한 이야기, 남에게 좋은 이야기나 할까, 할만한 말이 별로 없는 법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말씀 드립니다마는 사람이 식사 때에는 심각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교회 이야기라든가 정치 이야기 같은 것도 식탁에 올려놓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어떤 때에 보면 "목사님, 식사 대접 하고 싶습니다" 하고 초대해놓고는 식탁에 앉으면 교회의 무엇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며 밥맛 달아나는 소리를 꺼냅니다. 식사 때에는 분위기가 여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음악도 좋고 옷차림도 중요합니다마는 지각 있는 서양사람들 가운데는 식사시간에 할 말까지 준비합니다. 유머를 준비합니다. 적어도 세 가지의 유머는 준비해 가지고 손님을 청합니다. 음식이 맛있고 없고는 입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귀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귀가 즐겁고 기분이 좋아야 음식이 맛있어집니다. 기분 좋은 이야기로 화제를 삼아서 웃고 먹어야 소화도 잘됩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접을 받고 나면 '아, 참 잘먹었다' 하고 흔쾌한 기분이 되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저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천하없는 박사라 해도 이런 헤아림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식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은 길들이면서 혓바닥은 길들이지 못한다-사람은 지성과 의지를 통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지성으로는 합리성을, 의지로는 도덕성을 생각해야 됩니다. 지성과 의지로 이렇게 스크리닝(screening)한 다음에 혀를 움직여야 합니다. 지(知), 정(情), 의(意)의 세 요소가 함께 개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요소가 따로따로 놀면 안됩니다. 함께 작용해야만 인격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하거늘 이 세 가지 기능이 함께는 커녕 생각도 판단도 해볼 겨를이 없이 느끼는 대로 감정이 북받는 대로 기분대로 말을 해버렸습니다. 길들이지 못한 혀가 아닙니까? 감정 주도적인 사람이 있고, 지성 주도적인 사람이 있고, 의지 주도적인 사람이 있다고들 합니다. 사람의 성격에 그렇듯 세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지적이라서 만사를 꼬치꼬치 따지고 덤빕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우직하게 의지형이라서 이를테면 한번 결심한 것이면 일생토록 변치 않아요. 변할 줄을 몰라요. 그런거 하면 어떤 사람은 철저하게도 감정 주도적이라서 기분대로 살 줄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변덕이 심한 유형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형을 문화인류학적으로 한번 고찰해볼까요? 주로 야만인들이 감정 주도적입니다. 한번 기분이 틀어져서 부족간에 싸움이라도 붙었다 하면 두 부족이 다 죽습니다. 다 죽는 줄도 모르고 끝장까지 싸웁니다. 기분 때문에 너 죽고 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손해인 것을 지성인은 압니다.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유학을 가 있을 때에 저는 기숙사에서 서양사람들과 함께 숙식을 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가끔 머리가 아프면 지하실로 내려가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 텔레비전은 어느 교인의 집에서 가져다 놓은 것인데 거의 다 깨진 것이었습니다. 채널도 집게로 돌려야 했습니다. 화면을 보고 있느라면 드라마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남자가 밖에 나갔다가 차를 몰고 집에 들어오면서 보니 마당에 남의 자동차 한 대가 와 있어요. 차창으로 내다보자니까 집의 창문에 언뜻 비치는데 집안에 웬 낯선 남자가 내 아내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람, 기분이 상했겠지요.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 으레 '아이쿠, 또 싸움났구나, 살인날라, 저 일을 어쩌지?' 하고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나란히 앉아 같은 장면을 보고 있는 다른 서양사람들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의 장면과 같은 경우에 그 사람들은 대체로 성급히 굴지 않습니다. 아내가 외간남자와 함께 있다. 무슨 일일까 하고 느긋이 기다릴 줄 압니다. 그 차 뒤에 자기 차를 세우지만 내리지 않은 채 삼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기다려줍니다.
그래서 그들이 볼일 다 보고, 그 외간남자가 떠나고 나면 또 한참동안 더 기다렸다가 비로소 차를 내려와 현관 도어를 열고 집안에 들어섭니다.
무슨 이야기겠습니까?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본 그 순간에 이 남자가 울컥하고 바로 뛰어내려 집안으로 들이닥쳤다면 감정주도적인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든 손해면 손해지 이로울 건 하나도 없습니다. 감정 때문에, 기분 때문에 다 망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지성적인 사람은 일단 행동 개시를 하지 않은 채 침묵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지'하고 기다려줍니다. 우선 내 아내를 믿으니까 기다립니다. 굳이 뛰어들어가 아내를 당황하게 만들 것은 없다고 생각할 줄 압니다. 지성주도적인 사람은 이처럼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압니다.
공부를 제아무리 많이 한 사람이라 해도 혀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는 야만인이요 미개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혀를 잘 길들여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혀가 감정 주도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정․의의 세 요소가 함께 작용해서 깊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도덕적으로 판단한 다음에 차근차근 말이 나온다면 혀가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무의식적 언어의 진실성을 인정하라는 내용입니다.「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하며,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말은 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죽이지만 말은 먼데 있는 사람도 죽이기 때문이다'-말이 손보다 더 무섭습니다. 말은 쏜 화살보다도, 휘두르는 칼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화살이나 칼은 방패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이 쏘아대는 살상력은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을 함에는 지․정․의에 신앙까지를 다 동원해도 모자랍니다.
그리고 본문 9-10절을 보십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찬송도 축복도 말로써요, 저주도 말로써 합니다. 둘 다 말입니다. 이를 특별히 히브리사람들의 말로 좀 바꾸어 말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히브리말로 '축복'은 '바라크'입니다. 이 '바라크'는 '좋은 뜻의 말을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라크'라고 하면 찬양한다는 말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크한다'라고 하면 축복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운데는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말이 안되는 번역입니다. 제대로라면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축복하면 이것이 곧 찬양이요, 사람을 축복하면 이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좋은 말이기는 다같은 좋은 말인데,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좋은 말을 하면 이것이 찬송이요 사람을 향해서 좋은 말을 하면 이것이 축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복을 빌면 복이 됩니다.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면 은혜로워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람의 이름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 이름이 선희(善熙) 아닙니까? 이렇게 이름을 지어놓고 자꾸 부르는데, 선하다 선하다 함이 아닙니까? 그러니 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한경직 목사님의 이름 '경직'을 가리켜 이야기하기를, 자꾸 '경직' '경직' 하니까 거룩한 직분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보다 자꾸 불리는 가운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과 운명이 과연 관련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러한 의미에서는 일리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좋은 말을 자꾸 하면 별수 없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말을 자꾸 하면 별수 없이 저주가 됩니다. 사람끼리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하면 복을 주시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를 저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남을 중상하면 세 사람이 해를 입습니다. 말하는 사람에게 해롭고 듣는 사람이 더러워지고 중상 당하는 그 삼자가 상처를 입습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입으로 사람을 저주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말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한 입으로 하나님께 바라크하고 돌아서면 사람에게 바라크해야 되겠는데, 하나님께는 좋은 말을 하면서 사람에게는 나쁜 말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사람 앞에 복을 빌고-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관계입니다. 예배 잘 보고 돌아서서 가다가더라도 무슨 일을 만났을 때 불식간에 나쁜 소리가 입밖에 튀어나온다면 제대로 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릴 일입니다.
제가 어려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릴 적에도 저는 어머니의 권고로 어린이예배는 물론 성인예배에까지 참석했었습니다. 지금은 성인예배에 어린이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참 유감입니다. 하기야 중등부 이상이라면 굳이 저녁예배에 나온다고 말릴 사람 없겠는데 아마도 "너는 집에서 공부나 해라"하고 묶어두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성인예배라 할지라도 어린이가, 적어도 중등부 이상이라면 함께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새벽기도에 함께 나와서 기도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어려서도 성인예배에 참여했었습니다. 한번은 부흥회가 있었는데 인도하는 목사님의 말씀인즉 어른들이 교회에서 들은 말씀을 밖에 나가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골자였습니다. 그 부흥회의 마지막날이었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부인이 느닷없이 이부자리를 머리에 이고 예배당으로 들어오더랍니다. 모두들 깜짝 놀라서 "이불은 왜 가지고 나왔느냐?"고 한마디씩 했답니다. 그랬더니 이 부인 하는 말이 아예 이제부터는 교회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은 예배당에서는 천사 같습니다. 그런데 집에만 들어오면 못돼집니다. 부흥회 마치고난 이 좋은 기분으로 오늘부터는 예배당에서 살랍니다." 남편 되는 그 장로님, 톡톡히 망신을 당한 셈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찬송했습니다. 이제 집에 들어가시거든 혹 좀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큰소리를 내거나 아이들보고 까닭 없이 짜증을 내거나 하지 마십시다. 아이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에 나가시지 말든지 잔소리를 하시지 말든지 할 것이지……" 하고 투덜거린답니다. 교회 나가는 부모라면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말이지요. 설령 매를 들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한번 봐주겠다"해보십시오. '교회 나가는 날은 괜찮은 날이구나.' 아이들이 이 정도로는 생각할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만은 효과가 있어야지요. 예배당 다녀오자마자 퍼부어 대니 '예배당은 가나마나한 곳이다'라고 생각할 밖에요. 말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말씀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찬송한 그 입으로 어찌 남을 저주한단 말이냐-간단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은혜가 충만했는데, 그 은혜로 어떻게 남을 헐뜯는 소리, 남에게 해로운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도하고 나면 그 다음은 당연히 축복이지 어떻게 저주일 수 있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는 나가 전도할 때에 어느 집을 가든지 부지런히 복을 빌라, 무조건 복을 빌라, 복을 받을 집이건 못 받을 집이건 가리지 말고 무조건 복을 빌라, 복을 빌 것이지 비판도 저주도 말라, 설사 욕을 당해도 네 입으로 욕하지는 말라'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혹 맞아죽는 한 이 있더라도, 저주하는 일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순교를 하더라도 말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나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을 비는 모습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 누구도 남을 저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요 은혜자가 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찬양하고 복빌고 찬양하고 축복할 뿐이다. 그 밖의 다른 일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다른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마땅치 아니하니라-이 말씀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셈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한 나무에서는 한 가지 열매만 맺고, 한 샘에서는 한 가지 물만 나오는 법, 그럴진대 어쩌다가 내 입에서 저주가 나왔다면 그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냐, 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 내 속에 악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무의식 중에라도 불쑥 좋지 않은 말이 나왔거든 그 원인이 내게 있음을 알고 진실을 찾아 회개하라 하심입니다. 그 진실을 인정하라 하심입니다. 내 안에 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미 로마서 7장에서 인정한 바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19-21절)." 원하는 선과 원치 않는 악이 함께 있다는 말씀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이 함께 있습니다. 둘이 싸웁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둘이 함께 있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고, 죄가 아무리 많다 해도, 아니, 죄 많은 곳에 더 많은 것에 대하여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모름지기 내 안에 있는 악을 인정할 것입니다. 절대로 기피하지 말고 변명하지 말 것입니다. 가끔, 좋지 않는 말을 해놓고는 "나는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그만 실수를 했다"라고 변명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속에 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인정하고, 다시 진실로 돌아가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한 샘에서 단물만 나올 수 있는 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 가지 말만 하라, 하나님을 찬양했으면 축복을 할 것이요, 은혜 안에 사는 것이면 은혜를 베풀 것이요,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감사하다는 말만 해야 하느니라-깊은 뜻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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