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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참지혜와 거짓지혜(야고보서 3:13-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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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혜와 거짓지혜(야고보서 3:13-18)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생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야고보는 히브리적인 지혜관(知慧觀)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요, 미래지향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올바로 판단하고, 올바로 시행할 수 있는 용기를 겸한 능력입니다. 이러한 것을 흔히들 지혜라고 합니다마는 히브리적인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철학적 차원에서 말하는 지혜가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말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영어로는 철학(哲學)'필로소피(philosophy)'라고 합니다. '필로소피'는 본디 헬라어인 'sophia''philo'가 결합하여 생성된 말입니다. 'sophia''philo'는 각각 '지혜''사랑한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로소피''지혜를 사랑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능력, 그런 마음이 곧 '지혜'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다분히 헬라적인 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지혜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철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지혜'라고 할 때, 이 말은 항상 히브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교적 의미에서의 '지혜'임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를 일반의 철학적인 관점에서 읽는다면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에게 지혜 그것은 히브리적이요 성경적이요 종교적인 문제입니다. 경건과 밀착된 관계를 가진 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혜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바른 이해가 되겠습니다.

지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경험하면 지식이 높아집니다. 한마디로 많이 듣고 보면 지식이 늡니다.

이는 마치 우리 학생들이 공부하여 얻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애를 쓰면 지식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는 은사(恩賜)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많이 못했는데도 지혜가 출중합니다.

신변의 예로서, 우리네 주부들이 가정에서 음식 만드는 것을 보아도 지식 있는 여자가 있고 지혜로운 여자가 있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은 말이 무성합니다. 말이 일품요리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고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되고…… 어디다 뭘 치면 어떻게 되고 이것과 저것을 어떻게 섞으면 어떻게 되고-열심히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정작 만들어놓은 음식은 신통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옛 우리네 할머니들, 책을 본다 요리학원에 다닌다 하고 요란을 떨지 않았습니다. 지지콜콜 아는 것은 없어도 '손맛'이라는 것으로 다 통했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저 손맛이었습니다. 어떤 며느리가 음식을 만듭니다. '뭐 몇 그램, 뭐 몇 술' 하고 그 나름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불에 얹어놓고 책을 봅니다. "밥 가져오너라." 어른이 재촉하니까 "아직 3분 남았어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우리네 옛할머니들은 이와 같은 지식으로 음식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몇 그램, 몇 술'은 몰라도 그 손만 가면 불가사의하게도 맛깔이 살아났습니다. 음식을 지혜로 만들었지 지식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 해도 지혜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는 없는 사람, 지식은 없는데 지혜가 많은 사람-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 두 유형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데 말하는 것을 보나 행동거지를 보면 도무지 지혜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은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인데 사는 것을 보면 지혜가 눈부신 사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에이브러햄 링컨을 들 수 있습니다. 학교라고는 국민학교를 다녀본 게 고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 뭐라 해도 이 링컨이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해서 인류역사상 가장 진솔하게 우러름을 받는 으뜸의 정치가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지식은 둘째치고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은사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좋은 본()을 만나야 됩니다. 맨 처음에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합니다. 먼저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그리고 좋은 스승을 만나야 됩니다. 지혜는 여기서부터 계발(啓發)됩니다. 슬기와 재능이 널리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당면하는 현실이 문제가 됩니다. 부요하게만 살면 지혜가 열리지 않습니다. 냉장고만 열면 먹을 것이 있고, 장만하느라 수고할 것 없이 돈만 주면 인스턴트 식품을 사먹을 수 있습니다. 이러니 음식 만들기는 언제 배울 것이며 음식맛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모든 면에서 넓게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부()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고 존귀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 경험해야만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너무 어렵게만 살고 구박받고만 사는 사람은 아무래도 지혜롭지 못합니다. 불만과 고통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가하면 너무 평안한 가운데서만 산 사람도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게도 살아보고 부하게도 살아보아야 합니다. 존귀하게 대접도 받아보고, 욕도 먹어보고, 때로는 감옥에도 가보고, 상도 받아보고…… 그런 가운데서 지혜가 자랍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늘상 일등만 해 가지고는 지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일등도 해보지만 낙방을 하는 것도 지혜를 얻는 데는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 자수성가한 어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독학으로 미국 유학도 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덕분에 그의 아들은 가정교사까지 두고 너무도 평안하게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자꾸 말썽을 부립니다. 보다못해 아버지는 아들을 앞에 앉히고 꾸짖습니다. '이놈아, 나는 옛날에 이러 저렇게 고생고생해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너는 여차여차하구나' 하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나무랍니다. 아버지가 자꾸 그러니까 이 아들놈이 한번은 볼멘소리를 합니다. "그만해두세요, 아버지. 그런 얘기 한번만 더 하시면 나는 가출해버릴 거예요.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셨으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집을 못나가고 있는 것은 효도를 하기 위해서예요. 아버지의 그런 소리 듣기 싫은 양으로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가서 살든 죽든 한번 부딪쳐보고 싶지마는, 차마 그럴 수야 없지 않습니까? 내가 고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대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미상불 말이 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생이라는 것을 일부러 사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깊이 이해할 일입니다. 아들을 군에 보내기 싫어하는 부모님들을 보면 저는 보내라고 충고합니다. 아들이 사랑스럽고 귀할수록 고생을 알게 해야 합니다. 고된 훈련도 받아봐야 되고 매도 맞아봐야 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지혜로워지려면 인생을 폭넓게 경험해야 되는 데, 이러한 경험도 결국은 은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스승도 잘 만났고, 경험도 얻을 만큼 얻었는데, 그 마음가짐이 틀려먹었다면 헛것입니다. 지혜를 배우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가짐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은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말합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사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높이 존경을 받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얻은 사람도 존경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플러스 알파'일 뿐입니다. 지식에다가 하늘로부터 받는 지혜가 있어야만 지혜자입니다. 계시의 영()이 있어서, 지혜의 영이 있어서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히브리사람들은 '랍비'라고 합니다. 지식만으로는 랍비가 되지 못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랍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베풉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와도 ', 그러냐? 그것은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러한 이치다' 하고 그 마음을 읽고 그의 길을 인도합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는 랍비가 곧 지혜자의 대표입니다. 지혜의 대변인입니다. 그런만큼 이스라엘사람들의 글을 보면 유명한 랍비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참으로 읽을만합니다. 탈무드같은 것도 결국 랍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랍비들이 베푼 이야기들입니다. 지식을 주입해주는 단순한 스승이 아이라 지혜의 마음을 베풀어주기 때문에 랍비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아가 배웁니다. 그러므로 랍비가 어쩌다 동네에 나타났다 하면 유대의 어머니들은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아 이끌고 와서는 '랍비여, 이 아이의 머리에 손을 한번 얹어주십시오. 이 아이의 손을 한번 잡아주십시오'하고 청하는가 하면 아이를 보고는 '잘 보아라. 저분이 랍비시다' 합니다. 저분이 바로 지혜로운 분이다, 저분의 얼굴을 잘 보아두어라, 너도 저런 사람을 닮아라-이것이 바로 그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도 어느 마을에 나타나실 때마다 이분이 랍비신 줄 알고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세요' 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 이만하면 랍비라는 것은 참으로 한번 되어 볼만한 것이 아닙니까? 마음으로부터의 그토록 높은 존경을 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존경을 말입니다.

그러나, 귀한 일에는 으레 가짜가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랍비 중에도 가짜 랍비가 있었습니다. 가짜 랍비의 지혜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재주를, 간계를, 꾀를 가졌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거짓된 지혜를 가진 자들이 있어서 오늘의 본문에 거짓지혜를 가진 자를 식별하게 하며 거짓 지혜자를 심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서 단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증거를 대라 함입니다. '참 지혜라면 이렇게 될 것이고, 거짓지혜의 결과는 이렇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 참 지혜와 거짓지혜를 식별하라, 참스승과 거짓스승을 식별하라, 참 지혜의 랍비와 거짓지혜의 랍비를 식별하라' 함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그런 식별이 가능합니다.

무릇 사람이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을 한 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일생에 그런 분을 한 번만 만나도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잘못 만난다면 운명이 결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거짓 지혜자와 참 랍비를 식별하고 스스로 거짓지혜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본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흔히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많이 안다는 것을 자처해서 그렇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모르는 것이 많음을 부끄러워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자는 교만하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냐 겸손하냐를 보면 참 지혜자인지 거짓 지혜자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지혜와 거짓지혜는 그 사람됨을 보면 분명히 나타난다고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거짓지혜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삶의 자세에서 나타납니다. 참 지혜자와 거짓 지혜자는 그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또한 '경건'으로도 참과 거짓이 표출됩니다. 이와 같이 참은 참대로 나타나고, 거짓은 거짓대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것이 본문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을 종합해보겠습니다. 참 지혜는 선행으로 표출됩니다. 참 지혜를 더하게 되면 그 지혜를 따라서 언제나 선행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어떻게 기회를 내어서든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참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거짓지혜는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는 좋은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거짓지혜가 있는 곳에는 으레 시기와 다툼이 따라나오고 악한 일들이 생겨난다는 말씀입니다.

거짓지혜는 거짓말하는 지혜요, 죄짓는 지혜입니다. 죄짓는 꾀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참지혜는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이 온유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세가 겸손함으로 드러납니다. 아무 때에 보아도 지혜롭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곧 겸손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데 거짓지혜는 어떤가 하면 지혜 있다고 하면서 점점 자기자랑에 빠짐니다.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갈수록 그 교만은 더 심해집니다.

예로부터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돈을 주어보라는 것입니다. 돈을 주어서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그것을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칭찬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칭찬 받고 기고 만장하는 사람이라면 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사람, 더욱 겸손해지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그런 말입니다. 한 대학교수가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총각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탔습니다. 사공이 한참 노를 젓고 있는데 대학교수가 묻습니다. "자네 장가갔나?" "못 갔습니다." 사공이 대답하자 대학교수가 다시 묻습니다. "철학을 아나?" ", 제가 철학이 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자넨 인생의 4분의 1을 잃어버렸구만. 그럼 지리학은 아나?" "모릅니다." "자넨 인생의 2분의 1을 잃어버렸구만. 천문학은 아나?" "모릅니다." "인생의 4분의 3을 잃어버렸구만." 그때였습니다. 강풍이 휘몰아치더니 어느결에 그만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둘 다 물에 빠졌습니다. 대학교수가 반정신을 잃은 채 허우적거립니다. 그 꼴을 보던 총각사공이 묻습니다.

"헤엄칠 줄 아십니까?" 대학교수는 대답합니다. "모른다네." 총각사공이 한마디 던집니다.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그렇습니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은 볼 것 없는 사람입니다. 뭐 좀 배웠다고 교만한 것은 거짓지혜입니다. '내 아이큐가 얼만데' 하고 자만하는 사람을 흔히 봅니다. 아이큐 높은 것, 하나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오래전리더스 다이제스트지를 보았는데 거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명가나 대학교수의 아이큐가 90110이라고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아이큐 90이면 '바보'를 겨우 면한 정도의 재주라고들 합니다. 대체로 보면, 아이큐 좋다는 사람들, 재능 있다는 사람들이 끈기가 없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이런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집니다. 거기서 좀더 발전하면 사기꾼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 지혜는 더할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거짓지혜는 더할수록 목이 뻣뻣해집니다. 남을 멸시합니다. 스스로 교만하고 남을 우습게 알기 때문에 그 자신부터 괴로운 생을 살게 됩니다.

참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명상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애쓰는 경건생활에서 주어지는 지혜가 참지혜입니다.

그런가하면 거짓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거짓지혜입니다. 날이 갈수록 누범자(累氾者)가 늘어나는 것도 세상으로부터 오는 거짓지혜가 더하기 때문입니다. 옛적에는 한번 감옥 갔다온 사람이 다시 범죄를 하는 전과자가 전체 범죄자의 25퍼센트 정도였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45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자꾸 늘어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감옥에 들어가 앉으면 거기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요렇게 하다가 잡혔으니 앞으로는 조렇게 해서 잡히지 말아야지.' 이른바 선배들이라는 게 있어서 감옥 안에서 갖가지의 꾀를, 세상지혜를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감옥을 나오면 배운 대로 또 한탕 하다가 걸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감옥 안에서 배우는 것, 나쁜 짓을 어떻게 감쪽같이 해내는가 하는 것을 이모저모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것이 마귀의 짓입니다. 감옥에서 배워 나와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거늘 오히려 한술 더 뜬 범죄 수법을 배워서 나온다니, 딱한 노릇입니다. 날이 갈수록 범죄가 더욱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완전범죄를 위하여 증거를 말살하는 수법도 더욱 간교해지고,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짓들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구제불능(mission impossible)입니다.

참지혜는 성결(聖潔)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죄를 안 짓고 깨끗하게 살고자 애씁니다. 성결을 찾는 지혜가 참지혜입니다. 참지혜는 정욕적이지 않습니다. 소유만을 생각지 않습니다. 끝없는 욕심에 매이지 않습니다. 돈벌면 그만이요, 출세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할 줄 모릅니다.

커닝을 해서라도 합격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출세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 지혜는 마귀적이요 세상적인 지혜와는 다른 지혜입니다. 참 지혜는 화평을 도모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지혜요, 화평을 생각하는 지혜입니다. 참지혜는, 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 줄 압니다. 저 사람과 나는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저 사람이 기쁘고야 내가 기쁩니다. 언제나 화평을 생각합니다. 남을 아프게 하고는 내가 기쁠 수 없습니다. 화평을 깨뜨리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거짓지혜는 남과의 관계를 경쟁적으로 봅니다.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망해야 내가 흥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생존경쟁을 바탕으로 합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는 거짓지혜입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가 가르쳐준 지혜가 거짓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지혜가 참 지혜임을 잊지 말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부자가 죽어야 노동자가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거짓지혜입니다. 경영주가 살아야 노동자도 삽니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야 부자가 삽니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자세는 화평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지혜입니다. 어느 쪽 한쪽이 죽어야 한쪽이 산다고 하는 이 투쟁적 세계관은 바로 마귀가 주는 지혜입니다. 지혜에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본문 17절에는 다시 주님이 주시는 지혜는 '관용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듯 참 지혜는 너그럽게 생각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거짓지혜는 언제나 비판적입니다. 질투와 시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참 지혜는 양순하고 거짓지혜는 요란합니다. 참 지혜는 긍휼이 있고 수직적 사랑이 있습니다. 하향적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지혜는 멸시가 있습니다. 참지혜는 선한 열매를 맺으나 거짓지혜는 이상하게도 악한 일만 계속 만들어냅니다. 참지혜는 진실과 함께 있으나, 거짓지혜는 거짓말만 합니다. 참 지혜는 화평이요, 거짓지혜는 편벽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입장에서는 거짓지혜를 마귀적인 것이라고 결단을 내립니다.

아예 뿌리부터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말씀함입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하와를 꾀어서 죄를 아름답게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매력을 느끼도록 유혹했습니다. 이 마귀적인 지혜로 하와는 스스로도 금단의 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갖다주었습니다. 함께 범죄토록 했습니다. 이것도 또 다른 마귀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책임을 묻게 되었을 때에는 서로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이런 지혜도 마귀에게서 난 것입니다. 그 결국은 사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본문 16절은 말씀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들이 있음이니라." 보십시오. 거룩한 지혜가 없고, 세상적인 지식과 세상적인 지혜는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것을 보십시오. 끝없는 다툼만이 있을 뿐입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네 아이큐가 높으냐 내 아이큐가 높으냐, 네가 잘났느냐 내가 잘났느냐, 팽팽하게 맞서 삽니다. 이러한 삶은 동숙자의 삶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화목을 모르는 세상적인 거짓지혜의 산물입니다.

참지혜는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것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욥기 2828절 말씀입니다. ,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참언 1416절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화평케 하는 데서 참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참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고, 어디 있는지를 알며, 마침내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사람, 경건한 지혜의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교훈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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