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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권세(요 7:37~5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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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권세(7:3753)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이 본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명절 끝날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7:37)고 신령한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읽고 있는 요한복음 7장은 1절부터 끝까지 장막절을 중심으로 해서 되어진 이야기입니다. 장막절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보다 좀 지체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일로 시작해서 그 곳에서 가르치신 일 등을 차례차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요한 세 절기 가운데 하나로서 일 주일간을 행사로 지내는 큰 명절입니다. 전해지는 바로는 예루살렘으로 수십만 명이 모여서 큰 행사로 지켰다고 합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월력으로 해서 일곱째 달의 15일부터 시작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으로 계산하면 대략 1015일경 정도라고 합니다. 장막절을 지내는 데는 역사적인 것과 계절적인 것의 중요한 두 가지 의의가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인 의의로써는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생활할 때 천막을 치고 살았으므로, 천막을 치고 살던 생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 두 살 이상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 천막을 치고 일 주일간을 생활하는 것입니다. 집이나 여관에 들어가서는 안 되며 모두가 천막이나 또는 오두막을 지어서 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20마일경 내에는 광야든 사막이든 어디나 천막을 치고 심지어는 길거리나 성전 부근까지도 천막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 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들으면서 조상들의 방황하던 생활을 다시 회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규례는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은혜에 대한 건망은 불행한 일입니다. 지난 날에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잘 기억할 수 있으면 오늘에 와서 부딪치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힘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장로님의 피난할 때 메고 나왔던 배낭을 아직도 안방에 매달아 놓고 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 하나 메고 3 8선을 넘어오며 죽을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 어떤 힘든 일도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무 걱정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광야 생활은 아주 힘들었지만 기적 중의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를 먹여 주셨고, 반석을 쳐서 물을 주셨으며 메추라기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계속 경험한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장막절에는 이 계속적인 은혜를 되새기며 동시에 조상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야기들도 후손에게 들려주고 또 들려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너무 많이 들려주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이름과 생일은 잊어버려도 율법은 잊지 않는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이렇게 장막절의 의도는 조상들의 광야 생활의 경험을 회생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잊지 않게 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의도는 계절적인 것으로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때가 곡식을 다 거두어 들이는 계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감사절이 두 번 있는데 오순절은 첫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맥추감사절이고, 장막절에는 가을에 모든 곡식을 다 거두어 들이는 추수감사절로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장막절의 맨 마지막 날에는 아주 특별한 종교행사가 있는데 그것은 물을 길어서 성전으로 가져가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수십만 명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10리 밖에 있는 실로암으로 행렬을 지어 갑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순금 항아리에 실로암의 물을 떠서 조심스럽게 들고 다시 긴 행렬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올라오는 동안 제사장들은 이사야서 12:3에 있는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는 주제의 찬송을 부르며, 또한 온 백성들은 시편 113편과 118편 두 편을 찬송가로 부릅니다. 이렇게 두 편으로 나뉘어서 찬송을 부르며 물 항아리를 가지고 오는 행렬이 성전으로 들어오면, 그 물을 제단에다가 붓는 예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는 광야에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반석을 치게 하신 놀라운 역사를 다시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드리는 것은 금년에도 비를 주셔서 풍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추수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종교행사였습니다.

본문에서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는 제사장들이 금항아리에 물을 들고 올라오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곳에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오늘 물을 긷는 이 행사도 중요하고, 하늘에서 비를 주시어 우리가 곡식을 먹을 수 있다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한 번만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물을 사모하고 생각하라는 내용으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의 물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4 : 14이하). 너희가 마시고 또 너희 조상들이 마신 물은, 먹어도 다시 갈하게 되지만 내가 주는 물은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보면 신령한 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집을 보면 영원한 집을 생각하고 옷을 입으면 의의 옷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눈으로 보는 대로 손으로 만지는 대로 그 사건 속에서 한 차원 높여 신령한 진리를 생각하는 지혜가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물항아리의 행렬을 보시고 신령한 물을 말씀하시며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의도와 방법과 관찰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7 : 3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관을 좀 생각해야 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몸과 정신 세계로 관련지어서 생각할 때 대체적으로 "감정"이다 하면 가슴을 생각하고 "지적"이다 하면 머리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슴은 더워야 하고 머리는 차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는 "영혼"이라 하면 발바닥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영혼이 발바닥에 있다고 생각해서,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와 발바닥이 붙어 있어야 하므로 신을 신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감정적인 요소의 근본은 가슴이라 생각하고 지적인 것은 머리를 생각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의 근거는 심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사색하고, 혹은 지적으로 역사 하는 정신적 기능을 심장에 있다고 보고, 감정의 요소는 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배에서 솟아난다는 말은 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쁨을 말하는 것으로 감정적(emotional) 요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정적이요 느끼는 것으로, 37절의 생수란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음 본문 39절에 보면 괄호를 하고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는 난해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아니 창세 때부터 성령은 역사 하셨고, 출애굽 때도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잉태하실 때도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세례 받으실 때, 또 회당에서 복음 전하실 때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쫓을 때도 성령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할 때 그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이 네게 알게 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셨다는 지적인 요소입니다. 알게 되는 것이 우리들은 머리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심장으로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심장에서 아직 배까지는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이 본문에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사고로 설명하면, 알기는 아는데 가슴이 싸늘해서 기쁨도 용기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바로 그 때나, 또는 부활하신 다음에도 그의 가슴은 냉랭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고 알았지만, 다시 갈릴리로 고기잡이하러 나갑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여 지적으로는 깨달음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만 아직 마음속의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쁨과 벅찬 감격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드디어 오순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처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아주 잘 조화 있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 없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성령이 그 기능을 달리해서 역사 하시는 것을 새롭게 받았다고 표현했기 때문에 이해하기는 다소 어렵습니다만, 그러나 내용은 분명합니다. 다시 설명하면, 공관복음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고 요한복음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듣고 깨닫도록 하는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으로 보면 심장까지 와서 깨달음이 있었지만 감격을 주지 못했고 의지적 결단을 주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고백적인 역사로써 지적인 것이며,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은 권능과 증거와 그리고 감격적인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에 와서는 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 의지적인 것이 합쳐서 종합적으로 나타나 복음을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은 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아주 감격하여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아니하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때가 온다는 뜻으로 한 요한의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는 요한의 해설로써, 영광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영광이 헤롯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함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광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합니다. 영광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고 또는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갈보리 산이 없는 오순절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갈보리 산을 넘어서야 오순절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기적, 십자가 없는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기 때문에 허황해지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이 사건을 넘어서고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사건이 있은 후에라야 성령이 있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이 문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가 올 것이다. 내가 가는 것이 유익하다. 성령을 보내겠다"라고 하셨는데 내가 간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 내가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은 다음에 성령이 오겠다는 것이며 그 때에 임하는 성령은 바로 배에서 솟아나는 성령의 역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론적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십자가 중심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성령을,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안에 현존해 계시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성령의 별명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인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했다가 다시 영으로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오셔서 인격적 관계를 맺어 함께 하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예수의 구속사역의 연장으로써 성령을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구속사역의 효과가 열매맺도록 역사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의 기능입니다.

다음은 본문의 둘째 내용으로, 제사장들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사건입니다.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7 : 45-47). 아주 묘한 대답과 질문을 주고받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절대적 지위와 최대의 권세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폭군의 권세, 금력의 권세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강하고 위엄 있는 권세를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이 본문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속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다가 조용하면서도 능력 있는 그 말씀에 감동이 되어 감화를 받고 돌아온 것입니다. 무기를 들고 범인을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그 사람에게 매료되어 빈손으로 왔으니 정말 놀라운 권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았을까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첫째, 예수는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선입관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든 자도 고치시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하고, 바라보면 그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위엄 있게, 권위 있게 들렸으리라 여겨집니다. 둘째는 하속들이 보기에 예수는 자기들의 상관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는 같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사장들이 설교할 때는 언제나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이야기만 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이 다 그렇습니다만 "내가 이르노니, 또는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권위가 없습니다. 항상 성경의 권위를 빌려서 "성경이 말하기를" 하며 빌려온 권위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말하노라"고 직접 말씀하시니 얼마나 권세가 있게 보였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로 역사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그 반응이 달랐음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설득력입니다.

설득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회의에 참석해 보면 금방 느끼게 됩니다.

시끄럽고 어지럽게 굴던 회의장이라 하더라도 권위 있는 한 사람이 일어서서 발언하게 되면 모두가 조용하게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런 권위가 바로 설득력입니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 설명을 하고 나면 불투명하던 일들이 확실해지고 반대자도 동의하는 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설득력 있게 구체적인 진리 자체를 말씀하셨기에 누구도 반론을 펴지 못하고 조용히 감동하여 체포하러 온 사람들까지도 경청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담력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바로 앞에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있는 것을 다 아셨고, 또한 십자가도 아시면서 담대하게 말씀하시는 그 용기와 위력 앞에 아마 모두가 굴복하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체포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감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49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저들은 율법을 모르는 무리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율법을 잘 안다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잘 아는 그들의 율법적인 지식으로 예수님을 못박게까지 한 그들입니다. 사실, 율법을 바로 알았으면 하나님도 알았고 예수님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지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 나름대로 가진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예수님을 못박는 데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자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그 자체는 변하지만 성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알면 되지만 말씀에 대한 자기 고집을 가지고 이해하면, 여기서 굳어져 고정화되고 고치지 못하는 교리가 되며 이 잘못된 교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 가게 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인위적이요 전승적이며 스스로 만든 그 교리로써 율법을 더 잘 안다고 교만하여 예수님을 율법 없는 자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의 교훈에 보면 율법 없는 자에 대해서는 6가지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나열해 보면 증거를 받지 말고, 증거를 하지도 말며, 믿지도 말고, 고아를 맡기지 말며(구걸하지 말라는 뜻), 구제하지도 말고, 그리고 함께 여행하지도 말라는 것들입니다. , 율법 없는 자들에게 가서는 말하지도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말고 아무리 어려워도 구걸하지 말고, 구제하지도 말고, 그리고 함께 다니지도 말라는 금기 사항입니다. 하속들이 다녀와서 그렇게 훌륭하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감탄하니 바리새인들은 율법 없는 자들을 그렇게 평가했다고 지금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에 니고데모가 한 마디 합니다. 이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 나타난 니고데모로서, 그는 아무도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 중생의 교리를 묻던 사람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7:50-51). 니고데모의 말은 판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3:1에 보면 "허망한 풍설을 따라 전파하지 말라", 또는 신명기 1:16에 보면,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하라"는 말씀들이 있는데 적어도 간접적인 증거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우리의 판단을 바로 해야 된다는 뜻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때 니고데모에게 그들이 대답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 너도 갈릴리 사람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별명이 갈릴리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RP서 약간 변호하려는 니고데모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감스러운 일은, 지금 니고데모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옹호하고 보호하고 싶고 변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으로 그의 머리로써는 이 위험을, 또는 충돌을 원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한 번쯤 말해보고 마는 것입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감히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지적인 신앙입니다. 그저 생각으로는 알지만 뜨거운 것이 없어 목숨을 걸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 같은 생각은 있었습니다만 가슴이 아직도 싸늘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희생도 지불하지 못하고 위험을 모면하려는 극히 지적인 신앙인 이었습니다. 지성적인 신앙은 언제나 나약합니다. 지적인 것과 정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이 합쳐져서 충만해지면 목숨을 걸 수도 있고, 십자가를 지기도 하며 끝까지 증거 하는 신앙인 이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이 점잖은 말은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됩니다. 우리는 좀더 확실하게 믿고 온 생을 위탁하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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