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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권세 있는 생활(마가복음 1:21-28)

by 【고동엽】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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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 있는 생활(마가복음 121-28)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믿음'이란 말을 '위탁'이란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구원'이란 말은 '자유'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말은 곧 구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속박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째는 육체적인 속박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질병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난에 매여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풍요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굴해지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심하면 양심을 거역하거나 팔아가면서까지 먹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또한 몸에 병이 생겼을 때도 자유롭지 못하며 어떤 때는 수치까지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컴플렉스(complex)는 이러한 갈등의 이유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구속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컴플렉스를 느끼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부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가 쉽습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속박입니다. 이것 역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큰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우선은 무지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말이 있습니다.

모른다는 것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지를 받은 학생이 쉽게 답을 써 내려갈 때 그는 통쾌함을 맛보겠지만 반대로 전혀 아는 것이 없어서 쓰지 못할 때 그는 답답함과 더 나아가서는 가슴 아픈 고통까지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여간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고집'이라는 것 역시 우리를 속박하는 요소입니다. 일단 검은 것을 희다고 고집하기 시작하면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자기 고집 속으로 끌려들어가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 고집의 노예 상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어리석음 그 때문에 오는 부자유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이것 또한 헤어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노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육체적인 속박 상태는 스스로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속박을 받는 사람은 전혀 불편이나 비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신병자나 정신박약아들은 주위에서 불쌍하다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전혀 불쌍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나라에서 상영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어느 죄수가 탈옥하기 위해 정신병자 흉내를 냄으로써 계획대로 정신병원으로 후송되어 옵니다. 비정상적인 인간들인 정신병자들 틈에 정상적인 인간 한 사람이 끼어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그들을 상대로 대화하려 해도 전혀 통하지 않고 그의 모든 행동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어 비웃음과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진짜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대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한 번 맑은 정신으로 바른 양심을 예민하게 발동시켜 보십시오. 아마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사슬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입니다. 바른 정신을 갖고는 살 수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속박하는 요인들을 간단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예수님은 육체적인 병자와 정신병자, 귀신들린 자와 범죄한 죄인을 동일시한 점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 세 가지를 서로 바꿔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적인 병자에게 "이제 네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말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고민하고 속박된 상태나 병이 들거나 귀신들려 괴로워하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면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귀신들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인가를 알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리어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우리 마음속에 나 아닌 다른 사령부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 인격과 나의 놀라운 지성과 냉철한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 한 또다른 사령부의 명령으로 어디론가 깊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꼭 가야 되는 길인 듯이 갑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한다"라고 탄식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꾸 끌려가다가 어느 한 순간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들은 두려워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며, 의식 전부가 공포에 매이게 됩니다.

바로 귀신들린 자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 떤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행여나 사업에 실패할까. 대학 입시에 떨어질까, 혹은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에 걸릴까 두려워하고 무서워 떠는 것이 현대인이 아닙니까? 이럴 때는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다시는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절망과 고민을 합니다. 그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사단에게 매인 것 아닙니까?

또한 귀신들린 자는 남을 의심하며, 절대로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혹시 속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불신 시대'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는 믿을 만해서 믿었습니까? 전에도 믿었으니 지금도 믿을 뿐입니다.

귀신들린 자의 또 다른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다면 독백은 가능할지 몰라도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용 없는 말은 많이 합니다. 내용 있는 말이나 자기 진심을 고백하는 대화는 못 합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우리 나라 속담과 같이 현대인들은 대화(communication)가 끊긴 세대입니다. 마음속의 고민과 괴로움을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벙어리 귀신'이 들렸다고나 할까요?

귀신들린 자의 네 번째 특징은 사람 만나기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으로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빛보다는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대낮인데도 환한 곳보다는 어두침침한 다방을 더 좋아해서 그 곳으로 몰려갑니다. 특히 요즈음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태는 확실히 헤어날 수 없는 사슬에 묶여 있는 현대인들의 갖가지 모습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병자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치료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기가 정신병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에 사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 스스로 정신병자며 귀신들린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현대인들을 위한 신령한 정신병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이 환자인 줄 알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완치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귀신은 옛날 귀신과 달라 매우 고차원적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귀신이 대면하는데 귀신이 사람보다 영특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르는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의 능력까지 알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귀신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자기가 소멸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귀신의 '자아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만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은 필연코 죽어야 함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긍정하면서도 교회에 나오기를 꺼리며, 그가 구주됨을 고백하며 그 안에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거부 이유는 교회에 나가면 버려야 할 것과 손해 보아야 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공통적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주모자가 바로 현대의 귀신입니다. 그 귀신은 아주 교묘하게 사람들을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또 어떤 교인은 종종 저에게 "목사님, 전 예수 믿어서 손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재벌은 못 되더라도 갑부는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이 귀신의 지혜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만, 귀신은 그와는 반대로 예수를 믿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방해를 하며 기도를 못하게 하고 말씀도 못 듣게 하는 거침돌의 역할을 합니다. 어느 부흥사의 말대로 '졸음 마귀'란 말도 상당한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는 장면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어느 때나 예수님은 귀신을 만나면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타이르거나 가르치려거나 혹은 타협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귀신들린 현대인들은 높은 지식 수준으로 인하여 이론과 논리에 해박합니다. 그들을 가르치거나, 그들과 타협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다만 명령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지성인이라고 한다면 구구한 이론을 내세우지 말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종해야만 합니다. 학교에서는 비판과 토론을 중요시하지만, 일단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혹은 내가 귀신들렸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귀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조건의 순종, 이것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입니다.

정신병자에게 아무리 가르쳐 보고 토론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귀신과는 타협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인에게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지금까지 배우고 깨닫고 안 것들과 지혜롭다고 하던 것들을 다 백지화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 "말씀"에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역설적인 말입니다. 이론은 끝이 없습니다. 또한 반론(反論) 없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론을 다 부정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오로지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도 하나님이 명령할 때 즉각 순종하여 바치지 않았습니까? 모리아 산에서 그를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이 명령은 인간의 지혜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순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아무런 반론이나 변명 없이 ""하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무한한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획득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가운데서 이 세상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세 있는 삶입니다. 이 사람이 가는 길에는 어두움도 귀신도 물러갑니다.

권세 있는 생활로 사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가버나움이나 갈릴리나 그리고 예루살렘이거나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죄인들은 회개하였고 병자는 나았으며 귀신은 내쫓기었고 어두움은 밝아졌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권세 있는 생활을 아니겠습니까?

아무 말씀이 없어도 엄청난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죄를 지으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어떤 때는 불의와 타협하고 귀신과 흥정하는 것은 웬일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의 힘을 힘입어 그의 빛을 반사함으로써 이 악령이 들끓는 세상에서 권세 있는 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도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죄악이 들끓고 악령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벌써 귀신을 내쫓고 정신병자를 정상인으로, 사단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던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지금 저희가 흠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 가운데 있는 어두움을 제거해 주옵시고 깨끗하고 티없는 주님을 알고 주님께 복종하는 권세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이 어두운 세대를 밝히며 이 악령의 세대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은혜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권세 있는 생활(마가복음 121-28)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믿음'이란 말을 '위탁'이란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구원'이란 말은 '자유'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말은 곧 구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속박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째는 육체적인 속박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질병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난에 매여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풍요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굴해지는 자신을 깨닫게 되고 심하면 양심을 거역하거나 팔아가면서까지 먹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또한 몸에 병이 생겼을 때도 자유롭지 못하며 어떤 때는 수치까지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컴플렉스(complex)는 이러한 갈등의 이유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구속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컴플렉스를 느끼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부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기가 쉽습니다.

둘째는 정신적인 속박입니다. 이것 역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큰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우선은 무지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말이 있습니다.

모른다는 것처럼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험지를 받은 학생이 쉽게 답을 써 내려갈 때 그는 통쾌함을 맛보겠지만 반대로 전혀 아는 것이 없어서 쓰지 못할 때 그는 답답함과 더 나아가서는 가슴 아픈 고통까지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여간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고집'이라는 것 역시 우리를 속박하는 요소입니다. 일단 검은 것을 희다고 고집하기 시작하면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자기 고집 속으로 끌려들어가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자기 고집의 노예 상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어리석음 그 때문에 오는 부자유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그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면 이것 또한 헤어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노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이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실입니다. 육체적인 속박 상태는 스스로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속박을 받는 사람은 전혀 불편이나 비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신병자나 정신박약아들은 주위에서 불쌍하다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전혀 불쌍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 나라에서 상영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어느 죄수가 탈옥하기 위해 정신병자 흉내를 냄으로써 계획대로 정신병원으로 후송되어 옵니다. 비정상적인 인간들인 정신병자들 틈에 정상적인 인간 한 사람이 끼어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그들을 상대로 대화하려 해도 전혀 통하지 않고 그의 모든 행동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어 비웃음과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진짜 정신병자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대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한 번 맑은 정신으로 바른 양심을 예민하게 발동시켜 보십시오. 아마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사슬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입니다. 바른 정신을 갖고는 살 수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속박하는 요인들을 간단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예수님은 육체적인 병자와 정신병자, 귀신들린 자와 범죄한 죄인을 동일시한 점입니다. 그는 언제나 이 세 가지를 서로 바꿔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적인 병자에게 "이제 네 죄가 사하여졌다"라고 말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고민하고 속박된 상태나 병이 들거나 귀신들려 괴로워하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면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귀신들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인가를 알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리어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우리 마음속에 나 아닌 다른 사령부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내 인격과 나의 놀라운 지성과 냉철한 이성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 한 또다른 사령부의 명령으로 어디론가 깊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마치 꼭 가야 되는 길인 듯이 갑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한다"라고 탄식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자꾸 끌려가다가 어느 한 순간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들은 두려워하고 절망에 빠지게 되며, 의식 전부가 공포에 매이게 됩니다.

바로 귀신들린 자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 떤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행여나 사업에 실패할까. 대학 입시에 떨어질까, 혹은 암이나 기타 불치의 병에 걸릴까 두려워하고 무서워 떠는 것이 현대인이 아닙니까? 이럴 때는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것처럼 다시는 소망이 없는 것 같은 절망과 고민을 합니다. 그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사단에게 매인 것 아닙니까?

또한 귀신들린 자는 남을 의심하며, 절대로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혹시 속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불신 시대'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는 믿을 만해서 믿었습니까? 전에도 믿었으니 지금도 믿을 뿐입니다.

귀신들린 자의 또 다른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다면 독백은 가능할지 몰라도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용 없는 말은 많이 합니다. 내용 있는 말이나 자기 진심을 고백하는 대화는 못 합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우리 나라 속담과 같이 현대인들은 대화(communication)가 끊긴 세대입니다. 마음속의 고민과 괴로움을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벙어리 귀신'이 들렸다고나 할까요?

귀신들린 자의 네 번째 특징은 사람 만나기를 꺼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으로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빛보다는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대낮인데도 환한 곳보다는 어두침침한 다방을 더 좋아해서 그 곳으로 몰려갑니다. 특히 요즈음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상태는 확실히 헤어날 수 없는 사슬에 묶여 있는 현대인들의 갖가지 모습입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병자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치료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기가 정신병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현대에 사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 스스로 정신병자며 귀신들린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현대인들을 위한 신령한 정신병원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이 환자인 줄 알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완치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귀신은 옛날 귀신과 달라 매우 고차원적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귀신이 대면하는데 귀신이 사람보다 영특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르는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의 능력까지 알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귀신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자기가 소멸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귀신의 '자아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만 만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은 필연코 죽어야 함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긍정하면서도 교회에 나오기를 꺼리며, 그가 구주됨을 고백하며 그 안에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거부 이유는 교회에 나가면 버려야 할 것과 손해 보아야 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공통적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주모자가 바로 현대의 귀신입니다. 그 귀신은 아주 교묘하게 사람들을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또 어떤 교인은 종종 저에게 "목사님, 전 예수 믿어서 손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재벌은 못 되더라도 갑부는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것이 귀신의 지혜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만, 귀신은 그와는 반대로 예수를 믿으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없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방해를 하며 기도를 못하게 하고 말씀도 못 듣게 하는 거침돌의 역할을 합니다. 어느 부흥사의 말대로 '졸음 마귀'란 말도 상당한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는 장면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어느 때나 예수님은 귀신을 만나면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타이르거나 가르치려거나 혹은 타협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령하고 있을 뿐입니다. 귀신들린 현대인들은 높은 지식 수준으로 인하여 이론과 논리에 해박합니다. 그들을 가르치거나, 그들과 타협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다만 명령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지성인이라고 한다면 구구한 이론을 내세우지 말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종해야만 합니다. 학교에서는 비판과 토론을 중요시하지만, 일단 신앙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혹은 내가 귀신들렸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귀신의 지혜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조건의 순종, 이것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입니다.

정신병자에게 아무리 가르쳐 보고 토론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귀신과는 타협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인에게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지금까지 배우고 깨닫고 안 것들과 지혜롭다고 하던 것들을 다 백지화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 "말씀"에 복종하는 것뿐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역설적인 말입니다. 이론은 끝이 없습니다. 또한 반론(反論) 없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이론을 다 부정하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오로지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도 하나님이 명령할 때 즉각 순종하여 바치지 않았습니까? 모리아 산에서 그를 죽여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이 명령은 인간의 지혜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순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아무런 반론이나 변명 없이 ""하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무한한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획득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유로운 가운데서 이 세상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세 있는 삶입니다. 이 사람이 가는 길에는 어두움도 귀신도 물러갑니다.

권세 있는 생활로 사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가버나움이나 갈릴리나 그리고 예루살렘이거나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죄인들은 회개하였고 병자는 나았으며 귀신은 내쫓기었고 어두움은 밝아졌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권세 있는 생활을 아니겠습니까?

아무 말씀이 없어도 엄청난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죄를 지으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어떤 때는 불의와 타협하고 귀신과 흥정하는 것은 웬일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의 힘을 힘입어 그의 빛을 반사함으로써 이 악령이 들끓는 세상에서 권세 있는 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도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죄악이 들끓고 악령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벌써 귀신을 내쫓고 정신병자를 정상인으로, 사단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던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지금 저희가 흠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 가운데 있는 어두움을 제거해 주옵시고 깨끗하고 티없는 주님을 알고 주님께 복종하는 권세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이 어두운 세대를 밝히며 이 악령의 세대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은혜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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