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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의 침묵(마태복음 21 : 23-32)

by 【고동엽】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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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의 침묵(마태복음 21 : 23-3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오늘은 종려주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머무시며 역사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33년 중 최후 마지막 1주일이 전 역사의 결론이요, 온 생애를 함축시킨 그런 중요한 의미의 기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간을 가리켜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며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성경의 기록도 여기에 역점을 두었기에 복음서의 3분의 1 이상이 바로 이 고난주간인 1주일 동안의 사건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 고난주간의 시작에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가 기다리며 원수들이 기다리는 그 무서운 도성, 죽음의 도성을 향해서 과감하고, 용기 있게, 도전적인 자세로 당당하게 입성하셨습니다. 그나마 그저 조용히 가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된 모습대로, 왕의 대관식에서 이루어지는 행사 그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나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이것은 분명 왕의 대관식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앞서가고 뒤로 따르며 옹위하는 가운데 "호산나" 하고 외치며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승리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호산나"라는 말은 "오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으면 만세 만세 하면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앞뒤에서 무리를 지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입성을 하시고, 그리고 외롭게 고난을 당하신 다음,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절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지만 호산나주일이라 하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여기에 기독교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승리하시고 고난을 당하셨다는 데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승리에서 고난으로, 고난에서 승리

승리에서 승리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종려주일과 부활절 사이에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역사관이요,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결코 부득이 당한다던가, 억지로 죽지 못해 당하는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먼저 승리하시고, 그리고 고난을 향해 도전하시는, 도전적 의미에서의 고난이며, 그 결과 또한 부활의 영광이요, 최종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고난이 종려주일과 부활절 사이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고난을 당했고, 그리고 그 고난에 도전하여 최종 승리를 하였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자원적으로 스스로 고난을 당하셨다는 그 계시적 의미에 착안하여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만 "이시다" 하는 말과 "되셨다"하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영어로 말씀드리면 투비(to be)와 비컴(become)의 차이인데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면 이것은 투 비의 문제요, "주는 사람이 되셨다"하면 이는 비컴의 문제입니다. 그는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시요, 말씀이시며 능력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셨고 게다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영광의 뜻을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어려운 말로 표현하여 소위 비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낮추셔서, 능력이 있는 자 이지만 없는 자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의인이지만, 죄인으로 나타나셔서, 그 뜻을 이루셨다 하여 이것을 비하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의 하나님 되심과 사람되심, 그리고 고난 당하심의 이 관점을 바로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그런고로 바른 이해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어서 그의 고난은 하나님이 당하시는 수난이며, 곧 나를 위해 수난 당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하여 죄인 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하여 저주받으시는 그리스도가 되시는 이 근본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그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점을 먼저 알고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이 사람으로 되심을 이해하여야만 그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많은 고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은 거기에 최종 승리의 부활이 있게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오늘 이 종려주일의 의미는 결코 고난 당하실 분이 아닌데 고난을 당하시고, 영원히 죽으실 분이 아닌데 죽으신 여기에 권세의 침묵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 고난 당하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 의미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권세라는 말은 헬라말로 '수시아'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시아 라는 말은 무엇 무엇으로부터라는 '엑크' 와 본질이라는 뜻의 '우시아'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수시아", 곧 본질됨으로부터 유출되는 사건을 우리는 권세라고 합니다. 이 권세가 숨겨졌습니다. 마굿간에 숨겨졌고, 한 목수의 아들에게 숨겨졌으며 갈릴리 순교자에게 숨겨졌습니다. 그런 중에 때때로 조금씩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 권세로 나타난 것이 병을 고치신 일이요, 말씀을 전하신 일이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친히 부활하신 사건 등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는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더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권세 있는 자! 그 권세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누구를 소개하거나 대신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노라"하는 거기에 권세의 의미와 권세 됨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권세에는 모든 능력과 영광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정승이 60세에 첫아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너무도 귀여워서 정승의 체통도 생각지 않고 엎드려 기면서 말 등이 되어 주기도 하고 상투를 잡아도 그냥 귀엽다고만 하면서 버릇없이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는 아버지가 말인 줄로만 알고 심지어 아버지의 상투도 장난감 만지듯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느 날 정승의 가까운 친구 한 사람이 왔기에 겸상을 받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아들이 뛰어 들어오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어깨를 딛고 서서는 아버지의 상투를 잡고는 마구 흔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엽기로서니 친구 앞에서 정승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득이 한 마디 했답니다. "이놈 그러면 못 쓴다"고 그랬더니 이 아들이 하는 말이 "! 이 놈이 어제와 다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말타기야 어디서든지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귀하고 지체 높으신 양반이 나를 사랑하셔서 무릎을 꿇고 낮추셔서 내 말이 되어 주셨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이 분이 누구라는 것은 알고 보아야지요.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이냔 말입니다.

그 때문에 "누구냐?" 하는 문제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바로 보고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누구이며, 그리고 내게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와는 반대로 내게 무엇을 해주었느냐는 것부터 먼저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이제 그가 누구냐? 하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순서가 바뀐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선물을 준 그가 누구이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대단히 지체 높으신 분이 내게 준 것이라면 손수건 하나라도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많은 신세를 입은 사람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별것 아니요,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이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기억합니다. 아예 겉옷을 벗으신 후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다가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기십니다. 그 먼지투성이의 억센 발을 하나하나 씻기시고 닦아주십니다. 여러분! 발을 씻고, 또한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가 발을 씻겼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신 다음에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발을 누가 씻겼다는 것을 잊지 말라. 주인으로서 종의 발을 씻겼고, 스승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오늘 모르겠다면 장차라도 생각해 보아라.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는 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이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도 중요합니다. 그가 만왕의 왕이시요, 그리스도시며,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내 더러운 발을 씻겼다는 사실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주가 고난을 당하시고, 주가 저주를 받으시며, 주가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여기에 엄청난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권세가 계시된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종려주일을 가까이하여 일어난 사건들 중에 권세가 세 가지로 나타난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왕의 대관식이요, 따라서 왕 되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길가에 서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만 주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그 순간, 뿌리에서부터 나무가 말라버리고 맙니다. 이는 심판주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보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타협하고 묵인하므로 성전 안에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소와 양을 비롯한 각종 제물들을 사고 팔며, 돈을 바꾸는 등 더러운 시장바닥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 모든 것과 매매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쫓으시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소굴로 만드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사장 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권세의 행사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 제사장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제사장 자신들이 먼저 막았어야 했고, 처리했어야 할 일을 타협 속에 묵인해 오다가 이제 와서 갈릴리의 한 젊은 청년 선지자에 의해 이렇게 되고 보니 저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무엇이라 할 말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 마디 안 할 수도 없겠기에 부득불 나서서 없어진 위신과 양심을 챙기느라 억지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며 묻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러면 나도 하나 물어보겠는데 너희가 이 물음에 대답을 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해 주겠다 하시고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자 저희들끼리 의논을 하게 되는데 만일에 하늘로부터라 하면 왜 저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또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돌을 던질 것이다. 그러니 모른다고 할 수밖에 다른 좋은 방책이 없지 않는가? 하고는 예수님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합니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말하지 아니하면 나도 말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마음 문을 닫았으니 나도 닫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권세의 침묵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겠습니까? 듣지 않는 자, 들을 수 없는 자에게는 언제나 말씀은 침묵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세계가 바로 눈앞에서 전개된다 하더라도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자에게는 말씀이 말씀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누구든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목사 된지 25년이 됩니다. 그 동안에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한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참으로 여러 모양의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저는 부자는 못되어 보았지만 부자와 만나 이야기는 해보았습니다. 더러는 가까이 사귀어 보기도 했습니다. 성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보아 비교적 성공했다고 하는 분들을 가까이 에서 보면, 그 성공이 명예이든지 재산이든지 간에 공통적으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어린아이와 같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까이 지내면서 느끼는 것이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고 또한 명예를 얻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 어디엔가 어수룩하고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곳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며 역시 어린아이와 같아야 복을 받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제사장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체면과 위신! 다 무너진 그 체통만 지키느라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보고도 모르며, 듣고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과 대면한 이 귀한 시간! 그러나 저들은 주님의 주님 되심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불신 때문입니다. 여기에 침묵이 있고, 이 침묵의 원인은 제사장들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침묵은 배교의 침묵이요, 배신의 침묵입니다. 양심을 배신하고, 회개를 회피하며,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진실을 포기한 자에게 내리시는 결정적인 심판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침묵은 무식이 아닙니다. 무능도 아닙니다. 다만 신앙을 버린 자에게 내리는 포기입니다. 따라서 가장 큰 포기입니다. 진실을 버린 자를 심판하십니다.

믿음을 떠난 자를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침묵하고 마십니다.

말씀이 침묵하고 권세가 침묵합니다. 세상은 조용한 것 같고 침묵은 흐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아니하시고 계속하여 간곡한 부탁의 말씀으로 두 아들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가서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였더니 그 아들은 ",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았다. 또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자 "싫습니다" 하더니 뒤에 뉘우치고 갔다. 그렇다면 이 둘 중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지금 너희들이 내 앞에서 모른다고 했고, 아니라고 하였으나 뒤에라도 뉘우치고 가다오 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뒤에라도 마음 문을 열고 이 권세를 받아들여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씀입니다.

이 권세는 침묵합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9절에 보면 주님의 재림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 그 침묵은 곧 사랑이십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저렇게 못된 인간, 소돔 고모라 같은 세상에 유황불이라도 내리실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길이 길이 참으십니다. 뒤에라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인내가 있으며 또한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마구간에 누운 아기를 보면서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아야 하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보면서 만왕의 왕 되심을 보며 따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죄인의 친구로 오신 주님을 보면서 나를 위하여 죄인 되심을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참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죽을 대신에 그가 죽으시고, 내가 저주받을 대신에 그가 저주받으시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그가 지셨다고 하는 이 엄청난 사실을 바로 보게 될 때 그 속에 내 삶의 존재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분 속에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십시다.

침묵하시는 권세! 침묵하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왕 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음으로 그 고난의 의미와 권세가 침묵하는 뜻을 바로 알아, 그와 함께 승리의 영광을 누리며, 또한 오늘 우리의 승리가 그 속에서 확증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고난 당하셨건만 저희들은 그 고난의 이유를 나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아직도 주님과 그 상황에서 찾으려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는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이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그 깊은 뜻을 알게 하사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이미 주님의 고난 속에 바로 계시되어 있음을 알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능력과 그 의미에 힘입어 오늘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간구하오니 미련한 조인들의 고난이오나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에 연합되게 하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하시며, 승리에서 승리로 향하는, 승리의 고난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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