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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위임받은 권세 (로마서 13장 1절~7절)

by 【고동엽】 2023.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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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받은 권세 (로마서 13장 1절~7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貢稅)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하는 전제로부터 우리의 신앙고백은 시작됩니다. 아시는대로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서 사도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고백의 제1조는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인이십니다. 만유(萬有)를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경륜하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시며 그 많은 혼란과 죄악 속에서도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의 계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귀한 뜻과 말씀과 경륜하시는 모든 섭리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구원론을 보며 종말론을 보며 교회론을 읽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노예된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고 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모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도 많았습니다. 성격도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나약성을 다 지닌, 한 범부(凡夫)를 하나님께서 불러 당신의 사람으로 삼으십니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겉으로 보아 모세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신정국(神政國),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무려 300여 년 동안은 왕도 정치 체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자유 하기를 원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면 정치․경제․문화…… 모든 것이 걱정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 임지셨습니다. 강대국 속에 낀 약소한 이스라엘 민족, 저들의 안보(安保)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 그 권능을 믿고 저들은 안심하고 평안히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필요한 사람을 그때마다 들어 쓰셨습니다. 그들을 사사(士師)라고 합니다. 필요한 때마다, 필요한 일마다 그들을 불러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나라를 구원하시고 원수를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평안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평안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였습니다.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 선지자를 보십시다. 알고 보면 그는 삼권을 한 손에 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세 기능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 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이 사무엘 한 사람에 의지하여 평안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 사무엘 사사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과 교통하십니다. 사무엘이 저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요,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과 함께 하면서 평안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참 오묘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무엘상 8장 5절을 보십시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달려와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무엘만 우리와 함께 있으면 안심할 수 있겠는데, 이제 그 사무엘 선지가 나이 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아들이라도 후계자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 아들들이 신통치 않습니다. 사무엘이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나 ---- 인본주의적이며 불신앙적인 생각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역사 하셨으면 또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역사 하실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미리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과의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왕을 세워 만세의 함성을 지르고 군사들이 행진을 하고…… 아마도 이러한 세속적인 영광을 누리는 열방이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세속적인 권세와 영광에 대한 매력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세워달라' ---- 이는 하나님으로 직접 저들의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왕되게 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 잠깐을 참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그들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소행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대답하십니다. 사무엘에게 이르십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자기들의 왕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대한 반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참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잡한 긴장관계 속에서 양보를 하십니다. 왕 세우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제도, 정치구조 같은 것을 만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그 제도를 가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다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뻐서 허락하신 일이 아닙니다. '정 그렇다면 너희들이 왕 세우는 것을 허락하마.' 이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 제도를 이용하십니다. 왕권과 정치적 구조를 스스로 고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나 권력은 때로 우리의 마음을 몹시 괴롭힙니다. 정치는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합니다. 없어서는 안되겠고 두자니 골치 아프고, 아주 복잡합니다. 권력은 대체로 타락하고 부패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합니다. 이상하게도 권력만 쥐면 타락하게 됩니다. 권좌에 앉기만 하면 사람이 못쓰게 됩니다. 좋던 사람도 나쁘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난하던 시절 좋던 사람이 돈푼이나 벌었다고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왜 이래야만 합니까?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며 하나님 말씀만이 법이며 모든 권세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 합니다. 우리는 그 권세만을 인정합니다. '엑수시아 ---- authority,'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과 베드로전서 2장 13절 이하, 디모데전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은 권력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돕는 교본적인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자세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첫째, 근본적으로 하나님만이 왕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정(神政)을 믿습니다. 데모크러시 (democracy)가 아니라 세오크러시(theocracy)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하다'는 헬라어로 '테타그메나이'이며 영어로 번역하면 'ordain'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시고 임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때로는 파하십니다. 보십시오.

사울이 겸손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지만 교만할 때에 패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필요한 때에 들어 쓰시고 필요치 않을 때에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동경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그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점령군 사령관이 피점령국가의 국민들로부터 그처럼 환영을 받은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나라가 패했지만 동경 시민들은 시내가 들썩일 정도로 그를 환영했습니다. 천황도 맥아더 장군에게 면회 신청을 합니다. 그때 맥아더 장군이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인간인데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일본의 황제와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신하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안 만나겠습니다. 정 만나야 하겠다면 먼저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방송을 통하여 분명히 밝히십시오." 부득불 일본 천황은 방송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는 더이상 신이 아닙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더이상' ---- 이 어찌된 말입니까? 본래부터 신이 아닌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오늘부터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정신나간 소리입니다. 망언입니다. 흔히 권력을 가진 자들은 '나는 신이다' 라고 스스로를 신격화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특별하다' '내 말이 곧 법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 위에는 더 큰 권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한 사진기자가 천황이 낚시질하는 모습을 찍어 신문에 냈습니다. 세계적으로 대인기였습니다. '천황이 낚시질한다'----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그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때는 내가 신인데 나 이외에 어느 신을 섬기느냐 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고 교회를 불지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을 신격화하고 신인 양 자처하는 권력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권력의 문제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세속적인 권력이란 왕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직책과 관련해서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소명론입니다.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평범한 죄인, 다시말해서 인간일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 직책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을 이러한 의미로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적인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위탁통치론을 말합니다. 'political mandate'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탁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신탁(神託) 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귀중한 사명을 띠고 있을 뿐입니다.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영국의 왕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 궁중에서 자고 있던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처녀가 갑자기 왕으로 간택이 됩니다.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는 64년 동안 재위하면서 대영제국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단지 왕이 죽던 날 밤 궁중에서 잠을 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간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평소 아끼고 사랑하던 성경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제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리게 하여주소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마침내 영국은 이 빅토리아 여왕 때에 최대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궁중에서 하룻밤 잠을 자 던 처녀가 하루아침에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보면 권력구조라는 것이 사람의 손으로 주장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탁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패할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디아코노스'라고 하는 이 헬라어는 '왕' 이라는 의미와 함께 '종' 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섬기는 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외국에서는 장관을 미니스터라고 합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장관(長官)이라고 합니다.

백성의 종이어야 하는데 장관으로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름을 낮추어 미니스터, 곧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을 섬기고 백성을 섬기고 진리를 섬기고 공의를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진실되이 섬기는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자,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순종해야 하는 사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선을 위하여 봉사하고 의를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6절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레이툴고이'라는 이 말은 심부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법을 그대로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집행하는 것, 그것이 권력자의 자기 위치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권력자의 기본자세가 겸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서 엄청난 능력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면서 단 한번도 보좌에 앉아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큰 돌을 하나 가져다놓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늘 높은 보좌가 문제입니다. 특권 의식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해야 합니다. 굴복한다는 말은 단순한 순종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하듯 양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과 억지로 대할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주를 대하고, 위에 있는 권세를 향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 충성입니다.

우리에게 3․1 절은 매우 소중한 역사입니다.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3․1절이 없는 8․15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는 거저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독립을 위하여 희생되었기에 8․15는 의미가 있습니다. 3․1절은 그래서 8․15를 영광되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3․1절이 있으므로 8․15가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도가 없었다면 3․1절이 우리 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의 실패의 역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3․1절은 교회로 인하여 주도되었습니다. 알고 보면 희생된 사람의 거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애국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순국과 순교를 하나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당시 찬송가 14장이 곧 애국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만세를 부르고 귀한 목숨을 내놓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순교였습니다. 이렇게 승화하면서 기독교가 비로소 우리 민족종교로 기초를 놓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신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쓰시고 이 민족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함께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위하여 복음화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은 오직 하나의 권세를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습니다. 그분만을 인정하고 그분에게만 순종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에게 우리는 복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쓰시는 하나님의 일꾼을 하나님께 향한 신앙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3․1정신은 양심의 발로라고 독립선언문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양심의 발로로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누가 시켰느냐?' '배후에 있는 자를 대라'할 때에 하나같이 대답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시키시었소'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습니다. 이상재(李商在) 선생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 새롭게 충성을 고백하면서 이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위임받은 권세 (로마서 13장 1절~7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貢稅)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하나님은 창조주'라고 하는 전제로부터 우리의 신앙고백은 시작됩니다. 아시는대로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서 사도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고백의 제1조는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인이십니다. 만유(萬有)를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경륜하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시며 그 많은 혼란과 죄악 속에서도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의 계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귀한 뜻과 말씀과 경륜하시는 모든 섭리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구원론을 보며 종말론을 보며 교회론을 읽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노예된 백성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고 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모세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도 많았습니다. 성격도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나약성을 다 지닌, 한 범부(凡夫)를 하나님께서 불러 당신의 사람으로 삼으십니다. 그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겉으로 보아 모세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신정국(神政國),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간 다음에도 무려 300여 년 동안은 왕도 정치 체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자유 하기를 원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면 정치․경제․문화…… 모든 것이 걱정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 임지셨습니다. 강대국 속에 낀 약소한 이스라엘 민족, 저들의 안보(安保)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 그 권능을 믿고 저들은 안심하고 평안히 살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필요한 사람을 그때마다 들어 쓰셨습니다. 그들을 사사(士師)라고 합니다. 필요한 때마다, 필요한 일마다 그들을 불러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나라를 구원하시고 원수를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평안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평안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였습니다.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 선지자를 보십시다. 알고 보면 그는 삼권을 한 손에 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세 기능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 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이 사무엘 한 사람에 의지하여 평안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 사무엘 사사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과 교통하십니다. 사무엘이 저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요,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무엘과 함께 하면서 평안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참 오묘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무엘상 8장 5절을 보십시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달려와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무엘만 우리와 함께 있으면 안심할 수 있겠는데, 이제 그 사무엘 선지가 나이 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걱정입니다. 아들이라도 후계자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 아들들이 신통치 않습니다. 사무엘이 세상을 떠나면 어떡하나 ---- 인본주의적이며 불신앙적인 생각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역사 하셨으면 또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역사 하실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미리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과의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왕을 세워 만세의 함성을 지르고 군사들이 행진을 하고…… 아마도 이러한 세속적인 영광을 누리는 열방이 부러웠던 모양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할까?'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세속적인 권세와 영광에 대한 매력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세워달라' ---- 이는 하나님으로 직접 저들의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왕되게 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 잠깐을 참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그들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소행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대답하십니다. 사무엘에게 이르십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를 자기들의 왕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대한 반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참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잡한 긴장관계 속에서 양보를 하십니다. 왕 세우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제도, 정치구조 같은 것을 만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그 제도를 가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렇다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기뻐서 허락하신 일이 아닙니다. '정 그렇다면 너희들이 왕 세우는 것을 허락하마.' 이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 제도를 이용하십니다. 왕권과 정치적 구조를 스스로 고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나 권력은 때로 우리의 마음을 몹시 괴롭힙니다. 정치는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합니다. 없어서는 안되겠고 두자니 골치 아프고, 아주 복잡합니다. 권력은 대체로 타락하고 부패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 합니다. 이상하게도 권력만 쥐면 타락하게 됩니다. 권좌에 앉기만 하면 사람이 못쓰게 됩니다. 좋던 사람도 나쁘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난하던 시절 좋던 사람이 돈푼이나 벌었다고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왜 이래야만 합니까?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며 하나님 말씀만이 법이며 모든 권세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 합니다. 우리는 그 권세만을 인정합니다. '엑수시아 ---- authority,'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과 베드로전서 2장 13절 이하, 디모데전서 2장 1절 이하의 말씀은 권력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돕는 교본적인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자세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첫째, 근본적으로 하나님만이 왕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정(神政)을 믿습니다. 데모크러시 (democracy)가 아니라 세오크러시(theocracy)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1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하다'는 헬라어로 '테타그메나이'이며 영어로 번역하면 'ordain'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시고 임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때로는 파하십니다. 보십시오.

사울이 겸손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지만 교만할 때에 패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필요한 때에 들어 쓰시고 필요치 않을 때에 잘라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동경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그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점령군 사령관이 피점령국가의 국민들로부터 그처럼 환영을 받은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나라가 패했지만 동경 시민들은 시내가 들썩일 정도로 그를 환영했습니다. 천황도 맥아더 장군에게 면회 신청을 합니다. 그때 맥아더 장군이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인간인데 스스로 신이라고 하는 일본의 황제와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신하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안 만나겠습니다. 정 만나야 하겠다면 먼저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방송을 통하여 분명히 밝히십시오." 부득불 일본 천황은 방송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는 더이상 신이 아닙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더이상' ---- 이 어찌된 말입니까? 본래부터 신이 아닌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오늘부터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정신나간 소리입니다. 망언입니다. 흔히 권력을 가진 자들은 '나는 신이다' 라고 스스로를 신격화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특별하다' '내 말이 곧 법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권력 위에는 더 큰 권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한 사진기자가 천황이 낚시질하는 모습을 찍어 신문에 냈습니다. 세계적으로 대인기였습니다. '천황이 낚시질한다'----생각해보면 이상하지만 그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때는 내가 신인데 나 이외에 어느 신을 섬기느냐 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고 교회를 불지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을 신격화하고 신인 양 자처하는 권력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권력의 문제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세속적인 권력이란 왕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직책과 관련해서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소명론입니다.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평범한 죄인, 다시말해서 인간일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 직책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을 이러한 의미로 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적인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위탁통치론을 말합니다. 'political mandate' 하나님께서 권한을 위탁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신탁(神託) 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귀중한 사명을 띠고 있을 뿐입니다.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영국의 왕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 궁중에서 자고 있던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처녀가 갑자기 왕으로 간택이 됩니다.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는 64년 동안 재위하면서 대영제국 황금시대를 이루었습니다. 단지 왕이 죽던 날 밤 궁중에서 잠을 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간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는 평소 아끼고 사랑하던 성경을 앞에 놓고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제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스리게 하여주소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마침내 영국은 이 빅토리아 여왕 때에 최대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궁중에서 하룻밤 잠을 자 던 처녀가 하루아침에 여왕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보면 권력구조라는 것이 사람의 손으로 주장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탁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패할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디아코노스'라고 하는 이 헬라어는 '왕' 이라는 의미와 함께 '종' 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섬기는 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외국에서는 장관을 미니스터라고 합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장관(長官)이라고 합니다.

백성의 종이어야 하는데 장관으로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름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름을 낮추어 미니스터, 곧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을 섬기고 백성을 섬기고 진리를 섬기고 공의를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진실되이 섬기는 사자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자,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순종해야 하는 사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선을 위하여 봉사하고 의를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 6절에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레이툴고이'라는 이 말은 심부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법을 그대로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집행하는 것, 그것이 권력자의 자기 위치입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살아서는 안됩니다.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권력자의 기본자세가 겸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서 엄청난 능력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면서 단 한번도 보좌에 앉아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큰 돌을 하나 가져다놓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늘 높은 보좌가 문제입니다. 특권 의식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해야 합니다. 굴복한다는 말은 단순한 순종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하듯 양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과 억지로 대할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주를 대하고, 위에 있는 권세를 향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 충성입니다.

우리에게 3․1 절은 매우 소중한 역사입니다.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3․1절이 없는 8․15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연합군의 승리로 우리는 거저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3․1운동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독립을 위하여 희생되었기에 8․15는 의미가 있습니다. 3․1절은 그래서 8․15를 영광되게 하는 기초가 됩니다. 3․1절이 있으므로 8․15가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도가 없었다면 3․1절이 우리 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의 실패의 역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3․1절은 교회로 인하여 주도되었습니다. 알고 보면 희생된 사람의 거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애국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순국과 순교를 하나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당시 찬송가 14장이 곧 애국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만세를 부르고 귀한 목숨을 내놓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순교였습니다. 이렇게 승화하면서 기독교가 비로소 우리 민족종교로 기초를 놓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사랑하신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쓰시고 이 민족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함께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위하여 복음화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은 오직 하나의 권세를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습니다. 그분만을 인정하고 그분에게만 순종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에게 우리는 복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쓰시는 하나님의 일꾼을 하나님께 향한 신앙으로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3․1정신은 양심의 발로라고 독립선언문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양심의 발로로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누가 시켰느냐?' '배후에 있는 자를 대라'할 때에 하나같이 대답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시키시었소'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습니다. 이상재(李商在) 선생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 새롭게 충성을 고백하면서 이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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