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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권세(마태복음 21:23-2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洗禮)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교회력(敎會曆)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저 앞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담대하게 나귀에 올라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이를 기념하는 주일이 종려주일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것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전통적인 이스라엘 풍습에 의하면 왕은 겸손해야 한다 해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왕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여주소서, 당신은 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따르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천년만년 사십시오'라고 '만세'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종려나무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호하는 수많은 군중 틈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서 그 길에 깝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로 지나가십니다. 큰 행사입니다.
그것은 정면도전입니다. 나팔소리 북소리 요란하게 무장한 군대의 행렬은 없지만 왕의 입성행렬임이 엄연합니다. 원수가 기다리는 성을 향하여 정면으로 입성하시고, 곧장 예루살렘 성전에 드셔서,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床)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질타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窟穴)을 만드는도다(마21:13)." 아무도 대꾸 한마디 못했습니다. 다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영적 권세가 행사되는 순간에 자기들의 권세가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사장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저들은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하면서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용납하고 불의와 타협했습니다. 그렇게 짐짓 죄 가운데 있는 터에 이제 '갈릴리청년'이 와서 질타를 하니 저들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앞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고 마는 것입니다. 저들이 유지해오던 권세가 땅에 떨어지고 실추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당하고 말아버릴 수만은 없다고 저들은 생각했습니다. 잃어버린 권세를 가까스로 나마 수습해보겠다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알량한 질문들을 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권세를 주었느뇨(마21:23)." 말로써 라도 '이 청년'을 꺾어서 본전을 찾아보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말은 자유와 법적 권리를 뜻합니다. 헬라어로 '엑수시아'라고 하는 이 말은 본래 '본질로부터 흘러나온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시아'는 '본질'입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권세'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권세는 법리적이요 합리적인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진짱이라고 하는 작가는 중국 고대의 우화를 정리하면서 「여우의 진리」라고 하는 재미있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우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진리란 이것이다'라고 설교를 합니다. 토끼를 만나서는 "너는 내게 복종하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이니라"하고, 닭을 보고는 "너는 나한테 잡혀 먹히고 내 음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리이니라"하고, 개한테는 "너는 내가 닭이나 토끼를 잡아먹을 때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진리이니라. 이 진리는 성경에 기록되었느니라" 합니다. 이 여우와 마찬가지로, 내 말이 곧 진리요, 내가 힘이 있으면 진리요, 돈이 있으면 진리라고 착각하거나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세상에는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내 권력이 그대로 권세와 통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허세를 참 권세로 착각합니다. 권세는 법안에 있습니다. 법을 떠나서는 어떤 권력도 용납되지 않고, 진리를 떠나서는 어떤 권세도 용납되지 않는 법입니다. 반드시 법리적 합리적이라야 합니다.
영국의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Canetti Elias)는 「군중과 권력」이라는 저서에서 권세를 이렇게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권세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권세와 같은 것이다.' 오케스트라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를 보십시오. 성가대 지휘자는 권세가 대단합니다. 성가대원들은 지휘자가 손을 들고 흔드는 대로 따라 합니다. 모두가 지휘자를 쳐다보면서, 그 손이 움직이는 대로 큰 소리 작은 소리를 내는가 하면 뚝 멈추기도 합니다.
지휘자의 권세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잊지 말 것입니다.
지휘자는 악보를 따릅니다. 지휘자도 악보를 보고 성가대원들도 악보를 봅니다. 지휘자가 악보를 따라갈 때에만 성가대원이 지휘자를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 지휘자가 악보를 좀더 잘 이해하고 잘 해석하고 작곡가의 의도를 잘 연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손을 쳐다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지휘자의 눈앞에 엄연히 텍스트(The Text)--악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법안에 권력이 있습니다. 법을 떠나서는 어떠한 권력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합리성이 있어야 함입니다.
두 번째로, 전통적 권력이 있습니다. 전통적 권세가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누구나 오래도록 지켜오는 전통적인 무엇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세는 그 같은 전통과 맥락이 닿아 있을 때에야 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카리스마적 권세가 있습니다. 신적(神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역사 하신다고 할 때에 거기에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는 권세는 권세일 수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세, 주님의 권세가 그것입니다. Lordship입니다. '퀴리오테스'입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 600여 회 나오는데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300회 이상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Ownership 즉 소유권을 말하기도 하고 노예와 주인과의 관계에서의 '주(主)'를 뜻하기도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창조주'를 뜻함입니다. 주로 「칠십인역」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퀴리오테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주'의 개념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높은 신학적 의미로 이해할 것이 '주'에 대한 개념입니다. 요컨대 주되심의 권세를 얼마나 인정하고 얼마나 수용하느냐 또는 거역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면서 왕 되신 권세를 나타내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시면서 심판 주되신 권세를 나타내십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나아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하고 항의할 때에 직설적으로 대답하시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두 아들 이야기(마 21:28-32)와 포도원 주인 이야기(마 21:33-40)를 들어 대답하십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권세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예수님께서 친히 분명하게 해석하여주십니다. 마태복음 21장 33절로 40절 말씀을 보십시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貰)를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實果)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기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遺業)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어오셨을 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극히 당연한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인을 인정하고 그 권세를 영접하면 그 권세로 인하여 은혜를 입고, 은총을 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이 권세를 불신하고 거역하는 날이면 그 권세는 멸망시키고 진멸하는 권세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개혁의 권세, 이러한 권세가 작용할 때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권세를 믿고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사람은 '아, 기분좋다'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큰 자유를 느낄 수 있지마는 이 권세에 역행하는 사람은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일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법대로 사는 자는 법의 혜택을 받습니다. 법으로 인하여 마땅한 혜택을 누리고 보호받습니다. 법을 어기는 자, 이 권세에 대항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디 권세는 창조적인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요, 구속이 아니라 자유이며, 복수가 아니라 화해이며, 타협이 아니라 개혁이고, 파괴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권세란 자유와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세를 바로 수용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왕권(王權)입니다.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고, 육신을 입으시면서 잠깐동안 이 권세는 감추어집니다. 감추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권을 우리에게 계시하여주십니다. 먼저, 교훈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교훈의 총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Kingdom of God--하나님의 왕국입니다. '바실레이아 투 데우' 라고 하면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함입니다. 이것을 영접하라고 줄기차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이적을 통하여 왕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병을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계시하십니다. 또한 당신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내시고 행적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것을 통하여 가르쳐주십니다. 심지어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도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확실하게 계시하여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잠시 그 권세가 감추어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하여 더욱 높은 의미의 사랑의 권세, 구속의 권세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통하여 '내게 얼마나 유익한 것일까'하고 계산을 할 것이 아닙니다. 권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내게 돌아오는 혜택이 무엇이냐 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적(事蹟)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누구시냐'입니다.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신 뜻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십자가를 통하여 참 권세가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창조주적 권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 때에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압니다. 그가 하나님 되심을 바로 인정할 때에 내가 피조물 됨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진정으로 권세를 영접하는 길이 있습니다.
두 번째 권세는 구속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의 권세를 역사 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순간에 이 권세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죄 사함 받은 감격과 자유로 평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권세가 나타나는 순간에도 "이 참람(僭濫)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믿지 않고 의심하고 돌아서는 자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알고 듣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사죄의 은총, 이 권세를 그리스도의 권세인 줄로 알고 그대로 믿고 수용하게 될 때에 비로소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죄 짐을 지고 허덕이며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사랑의 권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내 죄가 그토록 크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시고 구속하실 만큼으로 나에게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권세는 곧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심입니다. 그 권세를 계시하심입니다. 나의 사랑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계시하심입니다.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셨으니 그대로 가슴을 열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 없다 할 것이 아닙니다.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반깁니다. 이 때, 내가 아들된 자격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지난날에 죄를 많이 지었다느니 안 지었다느니, 앞으로는 이렇게 하겠다느니 저렇게 하겠다느니 하는 군소리는 다 쓸데없습니다.
젊은이들 결혼할 때에도 보면 가령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향하여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자가 "나도 사랑합니다"하고 받아들이면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자격이 없고 자신도 없어요"라고 한심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격이 따로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이미 그것으로 내 자격은 갖추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받을 자격까지 부여하시고 계십니다. 그 사랑의 권세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믿고 수용할 때에 엄청나게 새로운 가치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과 구원, 영생과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권능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권능을 믿는 자에게는 사망도 관계없습니다.
'겁쟁이는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한번만 죽음을 맛본다'라고 셰익스피어는 말했습니다. 겁쟁이는 여러 번이 아니라 매일 죽는 것입니다. 밤낮 죽는다는 소리를 하니까 여러 번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 죽으나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권세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권세를 행사하실 때에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오직 자기들의 무너지고 있는 권세를 수습할 양으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하고 따집니다. 저들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시면, '하나님께서 네게 권세를 준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목으로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또 '사람이 주었다'고 하시면, 정치적으로 반(反)로마요 반정치적이라고 몰아 죽일 속셈이었습니다. 그렇게 벼르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악한 자들에게 어떤 대답이 필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려고 하십니다. 다만 한 가지, 저들의 질문이 진실인가를 물으십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그리고 나서야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들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하늘로부터라 하면 왜 안 믿었느냐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사람들이 돌로 칠 것인데, 이거 어떡한다?' 저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궁리하다가 딴에는 이 궁지를 빠져나갈 묘수라 생각하여 대답한 것인즉슨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함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백안시하고 마십니다.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사람이 담장을 넘어 용케 도망을 쳤습니다.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운전기사가 묻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정신병자는 대답합니다. "말 안할래." 어떻게 가자는 것입니까? 향방을 일러주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가자는 것입니까?
마지막 진실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권세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십시오. 마음의 문을 닫은 까닭에 결국은 주후70년에 망하고 말 뿐더러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철저히 파괴되고 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엘빈 토플러의 저서 「권력 이동」에 보면 권력을 이렇게 규정짓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처음에는 완력이라는 권세가 있었다. 힘센 사람이 제일이었다. 다음 단계는 경제력이다. 돈이 많으면 양반이요, 돈이 곧 권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돈을 모으려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정신력이, 지식이 권력이다. 기술 있고 지식 많은 사람이 권력을 휘두른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 지식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바로 도덕성이라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도덕적 권세야말로 엄청난 권세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영적 권세가 있습니다. 영적 권세 앞에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권, 사랑의 권세는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절대충성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은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십니다. 순교적인 삶을 요구하시고 계십니다. 그 권세를 알고 전적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된 권세, 이기적인 권세를 완전히 포기하고 부정하고 부인해 버릴 때에 비로소 주의 권세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권세로 가슴을 열고 전적으로 영접하고,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게 되면 그 권세로 인하여 주어지는 모든 자유와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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