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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성경 교육 지침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

by 【고동엽】 2022. 3. 4.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

 

 

차 례

1.설교에 수사학을 사용하라?
2.수사학의 기본 개념을 알라
3.수사학이 설교에 주는 교훈들
4.청중 설득의 4가지 요소
5.논리를 개발하라
6.선한 의지를 자극하라
7.논리에 화법을 덧입히라
8.그림언어를 사용하라


저자 소개 박영재
침례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사우스웨스턴(Southwestem)침례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과정(M.Div)을 텍사스 주에 있는 타일러 한인 침례교회를 섬기면서 강해설교로 유명한 달라스신학교(Dallas Seminary)에서 신학석사과정(ST.M)을 마치고 켄터키 주 소개 서든침례신학교(Southwestem Baptist Seminary)에서 신학석사(Th.M)와 신학박사(Ph.D)과정을 마쳤다. 서든침례신학교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설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학교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담당 디렉터로 섬겼고 한인소망교회에서 사역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강사로 많은 설교학 워크숍, 세미나, 심포지움을 이끌면서 설교자의 자질과 심성, 설교를 위한 성경해석의 기본원리, 효과적이고 감동적인 전달을 위한 설교방법론을 참신하게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최근 실천신학에서 논의되는 다양한 설교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우리 심성, 우리 교회 형편에 맞게 소개하는 창의적인 형편에 맞게 소개하는 창의적인 젊은 신학자로 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서 문♠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흔히 설교를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성경을 해석하고, 해석된 결과를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것’ 으로 인식하지만 설교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설교자의 논리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이의 필요성을 직시하고 수사학에서 강조하는 연설의 논리를 우리 설교 사역에 적용하여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지금껏 출간된 많은 설교학 책들과는 달리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은 논리성 개발뿐만 아니라 수사학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연설을 위한 값진 이론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론들을 우리 설교자들이 바로 알고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설교사역이 더욱 알차게 되리라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은 그 독특성이나 필요성이 설교자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효과적인 학습과 학습의 편의를 위해서 설교자가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론과 그것을 적용한 예들을 제시했습니다.

설교 사역이 인간의 학문에만 기초하여 진행된다면 뼈아픈 실책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설교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대하면 분명 설교 논리 개발과 더불어 설교 발전에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1997. 8.
박 영 재



1. 설교에 수사학을 사용하라?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을 통해 설교자들과 지면으로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왜냐하면 설교하는 분들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연구해 온 설교학을 동역자들과 나누는 일이 하나님이 필자에게 주신 사명임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배운 바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효과적으로 도움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젊은 목사로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전병욱목사는 설교 사역을 목사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또 그 설교 사역은 영혼 구원은 물론 교회 확장에도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확신했다. 필자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설교 사역은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특권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 기관의 사역자가 지방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목사인 남편에 대한 사모들의 가장 큰불만은 ‘남편의 불성실한 설교 준비와 설교내용’이라고 입을 모았다는 것이다.
「확신에 이르게 하는 설교」에서 목회자들이 하는 일 중 가장 많은 일이 설교 사역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설교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며 기피하려는 사역 또한 설교라고 밝혔다. 아이러니하다. 이같은 모순을 탈피하려고 설교자들은 잘 만들어진 설교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훌륭한 설교를 하기 위해 배우려는 일환으로 모방하는 차원일 수 있다.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나 노력도 없이 잘 포장해 놓은 선물을 뜯어서 나누어주기만 하듯 남의 설교를 전달하기만 하면 언제 자기가 준비하여 만든 선물을 양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까?
모든 설교자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욕구는 있으나 훌륭한 설교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 부족하거나 그런 열심을 갖지 않는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설교를 잘 만드는 것이 끝도 없이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필자도 설교를 작성하는 데에 무기력 감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말씀을 선포해야 할 시간은 가까워오는데 설교가 만족스럽게 준비되지 않았을 때가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는 설교를 효과 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열정이 있다. 하나님이 양질의 설교를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설교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반성하는 차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요 반성을 넘어서 의미 있고 효과 있게 설교를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말씀을 능력 있게 전달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과 그 효과적인 방법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거쳐야 할 과정이 많다. 다가오는 주일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는 전해야 할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고,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문을 해석하고, 해석된 본문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교를 논리적으로 구성하여 마침내 능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설교자의 개성, 인격, 지적 수준 등이 반영되어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된다. 설교가 설교자의 영성과 지성과 인격이 어우러져 만들어진다 해도 어떤 구성법과 어떤 문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질과 효과에 차이가 있다. 양질의 설교를 만들어내는 데 설교 구성법과 문장 사용, 그리고 논리 개발에 집중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수사학의 영역이다. 결국 말의 힘을 키우는 곳이다. 한 편의 설교 속에 수사학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동시에 성령이 충만하면 그 설교는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되리라는 것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 교회의 강단은 지금까지 영성 있는 설교자들에 의해서 지켜왔다. 즉 설교자의 영성이 설교의 힘의 핵이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영성이 수사학의 이론을 통해서 표출될 수 있었다면 훨씬 바람직한 설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수사학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 견해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면 ‘설득을 위한 능력, (the faculty of discovering in the particular case what are the available means of persuasion)이다. 즉 연설가가 진리로 청중을 설득하는 방법, 연설, 혹은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공부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향해서 어떤 말을 해야 그들이 부모의 충고에 따를까?’ , 혹은 ‘낙태를 찬성하는 그룹들을 향해서 어떤 연설을 해야 그들이 자신들의 고집을 꺽고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이 되게 할까?’를 생각한다고 해보자. 연설가는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 독특한 구성법을 사용하고 말의 힘을 더하기 위해서 화법이나 논리 등을 연구해야 한다. 연설자의 의도대로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서론은 어떤 형태가 좋으며, 본론 전개는 어떤 방식이 효과적이며, 어떻게 끝을 맺어야 연설의 목적을 잘 드러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또 어떤 논리로 전개해야 전도자의 의도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하며, 어떤 화법을 써야 청중의 마음에 더 매력적으로 닿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수사학이다. 이러한 생각을 설교에 적용해 보면, 어떤 설교 전개 방식이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효과적일까,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나님나라 확장에 더 헌신적인 사람들이 되게 하며, 어떤 방법으로 설교해야 불신 청중이 주님을 믿게 하는 데 보다 설득적일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방법으로 설교해야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가 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사학은 당연히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제시한다. 2,500여 년 동안 수사학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왔다. 바울을 비롯한 초대 교부들이 이방 종교와의 논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있어서 수사학이 한몫 해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설교에는 항상 정확한 논리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고 이러한 논리는 설득적인 힘을 더 했던 것이다.
히틀러가 세계를 상대하는 전쟁을 일으킬 때 독일 국민들로부터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연설 속에서 주무기로 사용했던 수사적 구성과 논리와 화법의 사용 덕분이었다. 그의 수사적 연설은 항상 힘이 있었고 온 국민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독재를 뒷받침하는 데에 수사적인 연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설교자들은 설교를 위해서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고 해석된 본문을 청중의 삶에 적용시키며 설교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다 되는 것인 줄 생각해 왔다. 하지만 설교 전체의 짜임새나 구성에 있어서 효과적인 방법, 또 설교를 위한 선명한 논리나 청중의 감정을 다스리는 표현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이런 무지 속에서 열심히 설교를 하긴 하지만 왠지 설득적이지 못함을 설교자 자신도 느낀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말하려는데 청중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설교자도 자신이 여러 번 설교했던 내용을 언급하자니 자신도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것은 뻔한 내용을 뻔한 방법으로, 혹은 늘 같은 방법으로 설교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럴 때 수사학을 알고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사학은 이런 면을 효과적으로 돕는다. 수사학은 우리의 뜨거운 영성이 담긴 설교를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표현하도록 돕고 청중들의 심리에 뚜렷하게 호소하도록 돕는다. 또 청중들의 심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들이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 설교자들은 히틀러보다도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예를 들면, 히틀러는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어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설교자들에게는 설교자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즉 청중들은 “우리 목사님은 늘 좋은, 그리고 유익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무슨 말씀이든지 듣겠다.”하는 기본적인 턔도를 지니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연설자들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많은 자료들을 사용해야 한다. 특히 믿을 만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한다. 많은 연구와 논리에 기초를 둔 연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설교자들이 성경을 인용할 때 청중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성경 이야기를 하면 다들 수긍한다. 이 또한 다행스러운가? 연설자들만큼 자료를 많이 연구하지 않더라도, 즉 성경의 내용만 잘 쪼개서 전달하더라도 성도들은 듣는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 설교자들은 여느 연설자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런 유리한 위치에서 설교에 수사학의 이론을 가미하면, 분명 2배 3배, 그 이상의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2. 수사학의 기본 개념을 알라
자, 이제부터 수사학 이론과 실제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자.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지성과 영성, 그리고 인격 위에 수사적 감각을 옷 입혀보자. 이를 위해서 우선 수사학의 기본개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연설 상황(Rhetorical Situation)
수사학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사학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기초 상식을 살펴보자. 이 기초 상식 또한 설교자의 설교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수사학에서는 연설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연설은 청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필요로 할 때 행해져야 한다. 즉 청중들에게 어떤 도전이나 반응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을 때 연설이 필요하다. 그런 필요성이 느껴질 때 연설자는 청중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고 그들로부터 예상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략에 돌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략은 대개 서론에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때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갈라디아 성도들로부터 얻고자 하는 반응이 있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상한 다른 복음을 좇는 삶으로부터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감지된다. 이것을 설교에 적용해 보자. 설교자는 이번 주일날 설교할 때, 특히 설교의 주제를 정할 때 ‘왜 이러이러한 주제로 설교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가령 성도들이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고, 설교자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주제로 설교를 한다면 이는 그 설교의 동기나 의도가 매우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수사학은 설교의 목적이 선명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청중의 필요에 맞는 것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설교는 성경 강해가 아니다. 강해된 본문을 청중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강해한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설교하게 되면 이는 설익은 밥이나 먹기 힘든 밥을 사람에게 먹게 하려는 것과 같다. 천중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선한 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크래닥(Craddock)은 ‘성경 강해만 있는 설교는 완성되지 않은 설교’라고 강조한다. 고슬고슬 잘 익은 밥이 맛있는 것처럼, 구성이 가미된 설교를 할 때 청중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설교가 결론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설교를 듣던 청중이 감동을 받아 마음에 결단을 위해 꿈틀거리게 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날카로운 적용의 기회도 삽입되어야 함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찰스 스펄전(Charse Spurgeon)은 ‘설교에 적용이 시작될 때라야 진정한 설교가 시작된다.’ 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적용을 하긴 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꺽둑거리는 흐름으로 진행되는 설교는 그 설교 구성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한 편의 완성된 설교를 위해서는 많은 구성이 치밀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기본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특히 강해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설교의 적용이 없이 성경의 내용만, 마치 과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보고하는 식으로 설교를 하거나, 혹은 적용을 하기는 하는데 껄끄러운 진행으로 청중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설교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청중들이 동의하지 않는데도 설교자의 일방적인 선포로만 끝나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강해 설교의 진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사용하는 설교자의 불성실에서 나타난다. 또 설교의 목적이 선명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한 편의 설교 안에서 너무 많은 주제를 정해서 나열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의 유명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짧은 25분 설교 속에서 6가지 주제를 전하였다. 설교학자인 필자도 그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성도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교의 목적을 잃지 않는, 아니 설교의 목적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설교를 해야겠다. 설교가 효과적이지 못하면 성도의 신앙의 질을 높이거나 변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 본문을 선정하는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강해설교를 선택하는데, 재고해 보면 좋을 듯하다.(물론 주일 낮 설교 이외의 설교 시간에는 큰 문제는 없으리라 본다.)
둘째, 연설자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연설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헌신예배의 설교를 할 때, 청중들은 그 설교 속에서 기대하는 수준이 있다. 헌신예배이니 자신들의 헌신의 자세에 대해서 자극을 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그런데 기대치 이하로, 즉 헌신의 자세에 관한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했거나 미진했다면 그들은 설교가 시시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만양 기대치 이상으로 자극을 주었다면 청중들은 “굉장했어!” 하는 평가를 내린다. 결국 설교자는 청중이 원하는 수준과 기대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린아이들에게 설교할 때,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자극을 주어야 한다. 설교 속에서 그들이 소화해 내기 힘든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이해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신앙의 자극과 도전을 줄 때 적절한 설교가 이루어진다. 청중이 설교로부터 무엇을 듣기 원하는지 혹은 무엇에 자극 받기 원하는지를 설교자가 알아야 적절히 준비를할 수 있다.
셋째, 연설자는 제한성 혹은 강제성(Constraint)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전도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하자, 전통을 잘 지키려는 습관을 지닌 청중들에게, 일단은 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을 가급적이면 삼가면서 복음의 핵심을 선포해야 한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실을 강조하면 충분하게 제사 드리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전통을 버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는가? 처음부터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 얼마나 많은 초신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술부터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고자 하겠는가? 또 다른 예를 들면, 교회 분위기가 대체로 십일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이 모인 곳에서 설교자가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하면 그들이 시험에 들거나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이럴 때에 설교자는 청중들이 십일조에 관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혹은 성도들 대부분이 십일조를 하고 있으며 십일조를 하지 않는 몇몇 성도들이 자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설교자는 십일조에 대해서 언급해도 좋으리라, 설교자는 반드시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을 의식하며 설교의 주제나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장애물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연설의 문제들(Rhetorical Problems)
1.연설자와 청중과의 관계
한국에서 목회하는 설교자가 미국 이민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될 때, 혹은 도시 설교자가 농촌 교회에서 설교하게 될 때, 설교자들은 자신들과 판이하게 다른 청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청중이 설교자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점 때문이다. 생활 습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가치관도 다르다. 경험하는 바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청중의 관심사와 상관이 없는 주제에 관해서 설교할 수 있거나 설교자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동떨어진 것을 설교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청중이 설교를 거부하거나 외면하게 만든다. 그러면 설교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청중들은 메마른 자신들의 심령 속에 설교자가 말씀으로 충만히 채워주길 간절히 바란다. 사례비를 더 올려달라는 심정으로 설교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설교 시간에 흘리는데 현재의 사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청중들은 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역겨워한다. 이때 갈등이 증폭한다. 설교자가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데 청중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혹은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들을 예상할 때 설교자들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하고,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려 노력해야 한다. 또 영적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이 잘 들을 수 있도록 설교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2.설교를 위한 주변의 상황들
설교자가 청중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으면, 호소를 위한 설교를 할 것인가 논쟁적인 설교를 할 것인가를 선정해야 한다. 장례식에서 설교자는 사랑과 위로가 듬뿍 담긴 설교를 해야 하며 결혼식에서는 결혼식의 주인공들과 하객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즐겁고 희망찬 기분을 갖는 분위기를 만들도록 설교해야 한다. 새벽 예배에선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이 조용하게 설교해도 좋으며 철야집회에선 보다 뜨겁게 설교해도 무방할 것이다. 위의 예배들을 위해서 장소와 특징에 따라서 설교자 자신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청중과 설교자 사이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설교를 짧게 할 것인가 아니면 길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설교 장소가 예배당인가, 야외인가, 강당인가 등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어린아이를 위한 설교라면 일반적으로 짧은 설교여야 할 것이며 강당에서 설교를 한다면 주일예배처럼 엄숙하고 무게 있게 하기보다는 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설교해야 할 것이다. 주변 상황을 고려하며 설교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선결 과제이다.

3.설교의 주제들
설교자가 지나치게 복잡한 문제들을 끄집어내어 설교하면 청중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열심히 설교를 했는데 너무 많은 문제들을 언급한 나머지 설교가 끝날 때쯤에는 단 한 가지도 생각할 수 없게 한다면 이러한 주제 설정은 참으로 지혜롭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주제가 청중이 기대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빚나간 내용의 설교 역시 주제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생각하고 전도설교인가, 헌신을 위한 설교인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설교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문제를 파헤쳤으니 자신이 속한 교회의 특성과 상황을 고려해서 해결해 나아가길 바란다. 이제, 설교학과 수사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수사와 설교의 차이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사람의 인격을 통해 선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말씀을 받는 작업, 해석작업, 설교 구성 작업, 전달을 시도한다. 특히 설교 구성에 있어서 사실이나 진리 설명, 적용, 절정을 향한 점진적 전개 등이 시도된다. 연설자는 수사적 논리와 화법 등으로 연설문을 작성한다. 하지만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통한 권위로 성경을 풀어나가면서 설교한다. 또 수사학에서는 강연자의 의도대로 청중을 설득하지만 설교는 설교자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의도에, 하나님의 맘씀 앞에 굴복시키려 한다. 결국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콕스는(James Cox)는 설교의 4가지 기능이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설교는 선포(proclaiming), 가르침(teaching), 증언(witnessing), 예언(porphesying)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거나 믿음의 확신에 거하지 못한다면 설교 속에서 증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설교의 목적도 적절히 성취할 수 없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없다. 신앙 없는 설교자나 불신자는 절대로 설교할 수 없다. 연설은 연설자의 노력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훌륭한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와 하나님과의 영적 긴밀함이 우선 조건인 것이다.
수사의 종류
설교는 설교의 주제에 따라서 교리설교, 윤리설교, 헌신설교, 위로설교, 상담설교, 신앙성장설교 등으로 나눈다. 하지만 연설에는 주제에 따라서 변증연설, 선언연설, 그리고 충고연설 등으로 나눈다.
1.변증연설 : 법정에서 피고를 위한 변호를 말한다
2.선언 혹은 예식 연설 : 청중을 칭찬하거나 격려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연설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현재 청중들이 잘하고 있는 일, 혹은 훌륭한 믿음생활의 모습에 대해 칭찬한다.
3.충고연설 : 전쟁에 참가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느냐 현상을 유지해야 하느냐, 혹은 외국에 군대를 주둔해야 하느냐 철수해야 하느냐 등의 주제를 가지고 청중을 설득할 때 필요한 연설이다. 즉 청중이 연설자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혹은 그들을 설득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연설자는 이런 종류의 연설을 할 수 있다. 권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을 때데 충고의 연설을 한다.

3. 수사학이 설교에 주는 교훈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 맞게,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에게 맞게 접근했던 기독교 최고의 설교가 바울 사도. 설교의 대가 바울의 지혜와 수용자 분석론을 수사학에서도 확인한다.
설교 준비를 할 때 본문을 잘 설명하고 본문을 청중의 삶에 잘 적용하도록 했다고 해서 다 된 것은 아니다. 준비하고 선포한 설교가 과연 청중들이 쉽게, 그리고 적절하게 받아들일 만한 방법이었나를 생각해 보자. 이것을 위해서 설교자는 수사학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 제안을 살펴보자.
청중이 설교를 듣게 만들라
수사학에서는 청중을 설득하기 전에 청중의 마음을 열어놓을 것을 강조한다. 즉, 연설가에 대해서 신뢰감을 갖게 하고 연설을 듣도록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래야 연설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청중들이 설교자의 설교를 마음을 활짝 열고 듣게 할 것인가?
첫째, 성도와 설교자간의 간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가 성도로부터 신앙의 열매를 성급히 기대하다가 변화되지 않는 성도를 보면 화가 날 수 있고 이런 화(禍)가 설교에 나타날 수 있다. 설교자가 “신앙생활 5년 10년을 해도 교회에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이 봉사해 놓은 터전 위에서 즐기기만 하는 얌체 성도들이 있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 봉사 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다면 성도들의 마음을 움츠리게 하고 역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성도와 설교자간의 거리감을 만들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어도 교회를 위해서 아직 봉사를 하시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은 봉사하고 싶은데 늘 바빠서 안타까워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이해합니다. 또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어디서부터 봉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배우시길 바랍니다. 서서히 해도 늦지 않습니다.(박영재 설교)
이와 같은 접근 방법은 성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성도들이 “목사님이 날 이해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마음이 더 열려서 더 빨리 봉사에 참여하게 된다. 결국 설교는 설교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청중이 어느 설교자를 더 좋아하고 신뢰하게 될지는 자명해진다. 설교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청중을 존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해야한다. 이러한 설교자의 도는 청중들에게 긍정적으로 전달되며 결국 설교에 설득적인 힘이 더해지는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청중에게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개척교회에 한 기성 교인이 찾아왔다고 가정하자, 목사님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바싹 다가가서 “성도님이 오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오셔서 우리 개척교회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면 도망갈 성도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와줄 마음은 서로가 신뢰하게 될 때 생기는 법인데, 목사와 성도간에 신뢰를 쌓는 기간도 갖지 않은 채 교회에 와야 하는 필요성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부탁은 그 성도의 귀에 순수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간사해 보일 수 있다.
차라리 “성도님, 교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교회는 저의 오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를 통해서 이루실 뜻이 있어 세우셨습니다. 성도님도 하나님이 그 뜻을 이루려고 이곳에 보내신 분이 아닌지 한번 깊게 기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다면 목사의 권위가 서게 된다. 이런 말은 “목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목회 하는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게 만든 그 설교자를 신뢰하게 된다. 성도는 그 목사로부터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니, 이미 그 목사로부터 영적으로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신뢰는 ‘이 목사님은 다른 목사님과는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설교를 듣도록 마음을 열게 한다. 즉 설교에 식상한 성도라 할지라도 ‘이 목회자는 뭔가 다른 설교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결국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잘 듣는 성도로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는 목회자가 성도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신뢰를 받게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설교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서 훌륭한 목사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청중들이 설교들을 준비를 하게 된다. “우리 목사님은 기도 참 열심히 하셔, 참 진실하셔, 틀림없는 분이야!” 하는 말이 성도들 입으로부터 나오게 만든다면, 그것은 곧 목사님을 신뢰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신뢰의 관계 속에서 설교할 때 설교는 성공적일 수 있다.
“목사님과 얘길 나눌 때마다 저는 목사님으로부터 언제나 배울점을 발견합니다.”하고 고백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목사는 만나는 성도들마다 영향을 미치는 설교자임에 틀림없다. 그런 관계 속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청중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파고들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성도들로부터 신뢰의 관계를 쌓아서 그들의 마음을 열고 설교들을 준비를 갖추게 하라. 청중들이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작업은 더 힘들고, 더 오랜 시일이 걸린다. 이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훌륭한 인격을 지녀야 하며 성도를 신실히 보살피는 균형잡힌 목회적 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즉 목회적 감각을 높이기 위한 설교자의 감성 지수를 개발해야 한다.
동조(Adherence)개념을 활용하라
펄먼(Perelman)은 그의 저서 「신수사학」(The New Rhetoric)에서 청중들의 마음을 연설에 빠져들게 혹은 찰떡같이 달라붙게 (adherent)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과학자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단지 보고하는 식으로 설명하고 끝나는 것, 즉 청중들의 동의없이 보고만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진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천중들이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진리가 진리로 인식될 수 있으며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 그 결과를 성령의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사실이다. 하지만 설교자가 과학자의 보고서처럼, 청중들이 설교의 메시지에 동의를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단지 외치기만 한다고 그 메시지가 성공적일 수는 없다. 청중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동의를 하게 만드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선한 의도가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즉 청중들이 동의하게 만드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래야 효과적인 메시지로 청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불신자를 상대로 설교할 때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다.” 혹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하고 말하면 설교자와 불신자인 청중들 간에 거리감이 형성된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모순과 의심을 갖게 합니다.” 하고 시작한다면 청중과 설교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우리 설교자들은 때때로 너무 빨리 결론에 도달하는 말을 한다. 즉 청중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기회나 과정도 갖지 않고 결론에 도달하는 말을 하고 결단을 촉구한다. 결국 청중들은 감동 없이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 청중(Universal Audience) 개념을 활용하라
설교는 설교의 내용이 얼마만큼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주관적인 내용으로 일색된 설교는 매우 무가치하다. 수사학의 목적은 최대 다수(Universal Audience)의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의 목적 역시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객관성을 띄어야 한다. 물론 설교는 때때로 주관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예수만이 온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주관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객관성을 요구하는 설교에서 주관적일 때가 많다.
지엽적인 설교는 보편적인 청중들의 관점에서는 비진리로 인식된다. 이러한 경우 어느 특정한 그룹은 그 설교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다른 그룹은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객관성이 결여된 설교는 가치가 하락된다. “그 어떤 교회보다도 훌륭한 교회가 되게 해달라,” “이 동네에서 제일 가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 “한국에서 제일 가는 모범 교회 되게 해달라.”등의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이 아니다. 삼자가 거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이기적인 태도요 이전 인수격 신앙이다. 또 자아 도취에 빠진 태도이다. 모든 교회가 잘 되길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라.
분석된 청중의 삶을 유의하라
만약 설교자가 청중들을 잘 알고 있다면 설교자는 쉽게 그들의 정신적 접촉(mental contact)이 이뤄지게 된다. 청중 가운데 가족의 일부가 전쟁에 참여한 상황이라면 설교자는 자신의 가족의 상황을 “내 아들도 전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고 설명하면서 청중과 설교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정신적 접촉을 위해서 설교자는 청중의 직업, 삶의 정황, 그들의 긴박한 필요성, 개인의 경험, 신앙의 수준 정도 등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버크(Burke)의 ‘동일시론’(Identification)은 청중분석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동일시(Identification) 개념을 활용하라
효과적인 설교를 행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성도, 즉 청중과의 간격을 줄이고 청중들이 설교자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한다. 버크(Kenneth Burke)가 주장한 ‘동일시론(Identification)’은 한마디로 설교자가 성도와의 신뢰를 쌓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신뢰를 쌓는 방법이란 설교자와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을말한다. 즉 동일시하는 것이다. 동일시론은 ‘본질의 합체’(Consubstantiality)와 같은 개념인데 이는 본인의 정체성(Identity)을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설득의 기초가 마련된다고 보는 것이다.
A라는 사람이 B와 직업이 같다든지, 그와 친구가 된다든지, 활동 영역이나 믿음이 같거나 가치면에서 서로가 일치함을 느낄 때 사람은 쉽게 하나가 된다. 특히, 서로가 본질을 나누거나 깊이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나눌 때 곧 하나가 된다. 두 객체가 일반적인 개념이나 태도 혹은 자료들을 통해 연합이 이루어질 때 그들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설득하려면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해야 한다. 또 어린이가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할 때 어린이는 그러한 어른의 행동을 좋아하게 되고 결국 어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은 자기와 비슷하거나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때 하나가 된다.
동일시(Identification)하기 위한 3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도와 공통점을 찾는다.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청중들에게 자신이 낙태 반대자임을 밝히면서 연설하면 청중들은 마음을 열고 그의 연설을 경청한다. 국회의원후보 합동연설회에서 한 후보가 시골의 청중들에게 “나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하면 이러한 내용은 시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타후보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또 설교자는 신앙의 공동의 적인 마귀나 세상을 적대시함으로써 기독교 청중과 동일시될 수 있다.
둘째, 친구의 적을 적대시함으로써 친구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과 소련은 독일을 적대시함으로써 두 나라가 하나 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또 의견이 늘 달랐던 두 교수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학과를 없애려는 학교의 방침을 알고 그들이 학교 방침을 공동으로 대항할 때 그들은 하나가 된다. 또 설교자와 청중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청중의 의견에 동의함으로써 청중과 동일시될 수 있다. 관심거리나 의견이 청중과 설교자간에 일치할 때 청중과 설교자는 하나 되며 설교자는 청중 설득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단에 대해서 설교자가 분노를 발할 때 청중은 설교자와 하나됨을 느낀다. 행여 설교자가 청중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런 성도는 신자가 아닙니다.” 한다면 이런 설교를 듣고 설교자와 일체감을 느끼는 성도는 별로 없다. 공격적인 태도의 설교는 성도와 동일시될 수 없다. 동일시되지 않으면 설교를 통한 성도 설득은 더욱 어려워진다.
셋째, 가장 강력한 차원으로 청중이 무의식중에 설득 당하게 하는 것이다. 태평양화장품을 사는 여성은 자신도 모르게 태평양화장품을 광고하는 광고모델의 이미지와 같아지기를 원한다. 태평양화장품은 광고모델을 통해서 구매자들의 무의식 세계를 이미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로 시작하는 찬송을 부를 때, 그가 당한 처지와 이 찬송을 작곡한 의도를 알면 이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은 마틴 루터처럼 험난한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용감한 신앙인의 모습을 연상한다. 무의식 속에서 루터를 닮고자 하는 동일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동일시하는 태도가 목회 사역에서도 나타난다. 즉 훌륭한 설교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면서 성도들은 목회자와 동일시하려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긍정적인 차원으로 청중에서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청중이 잘 알고 있는 단어나 내용을 설교자가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청중이 설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예수님도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심지도 가꾸지도 아니함에도….” 청중들이 느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사용했다. 이것은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입장에서 자료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이다.
동일시론을 설교 쪽에 보다 무게를 두어 생각해 보자. 라스칼조(Craig Loscalzo)는 그의 저서 「동일시를 통한 효과적인 설교 방법론」(Preaching Sermons that Connect : Effective Communication through Identification)에서 설교자의 화술 속에서 청중이 ‘저 설교자는 우리와 친숙한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는 인상을 받는다면 청중들은 설교자의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친숙을 위해서 어떻게 동일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설교자의 관건이다. 라스칼조(Loscalzo)는 이를 위해서 3가지 원리를 제시했다.
첫째, ‘진행과정’(On Going Process)의 동일시론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개척에는 은사가 있는데 교회 성장에는 자신이 없거나 큰 부담으로 안고 있는 설교자가 있을 수 있다. 초신자를 위한 성경공부 인도에는 귀신인데 고급반 혹은 양질의 교사 배출을 위한 훈련에는 맹탈인 설교자가 있다. 이는 설교자가 초보 단계의 수준을 벗어나는 발상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초신자들이 “목사님 설교가 참 좋아요,” 하고 칭찬하지만 영적으로 성숙해지면서 “우리 목사님 설교는 더 이상들을 것이 없어.”하고 평가를 내린다면 이는 ‘진행과정’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가 영적 성장이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이나 기술에 있어서 진보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의 변화를 느끼며 변화된 모습, 생각, 신앙에 맞는 태도를 취해야 동일시함이 지속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설교자는 성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둘째, ‘상호 과정’(Mutual Process)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호간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즉 대화를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을 가져야 상호 연합이 된다. 애처로운 마음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민감한 설교자들은 동일시하려는 마음을 가지려 한다. 즉 청중들의 문제를 함께 느낌으로 그 성도와 하나가 된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상상력을 도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갔으니 그 마음이 오죽 아팠겠습니까? 저라도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힘드시겠지만 믿음으로 이깁시다.” 하고 목사가 위로한다면 이것은 아들을 잃은자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며, 이 위로를 들은 당사자는 목사가 자신을 이해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목사에 대해서 편한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청중들의 슬픔, 좌절, 고통, 불안, 두려움, 기대감, 성취감 등을 함께 느끼려는 설교자의 태도에서 청중은 설교자를 신뢰한다. 설교자가 신뢰를 받고 안 받고는 청중을 이해하는 깊이에 달려 있다.
셋째, ‘성장 과정’(Growing Process)을 통해서 설교자는 청중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버크의 동일시론을 잘 활용하면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잘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마음 자세는 청중들이 설교를 잘 들을 준비를 하게 하는 데 공헌하는 자세이어야 한다.
잠깐!…………………………………………………………
“칭찬하고자 할 때, 혹은 비난하고자 할 때 설교자는 음성을 작게 하라. 그리고 긍정적인 면에서 강조하고자 할 때는 큰 소리로 말하라”(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칭찬할 때 설교자가 큰 소리로 말하면 듣는 사람이 역겹게 혹은 허풍처럼 느낄 수 있다. 또 비난할 때 큰 소리로 혹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면 청중이 거부감을 느낄 수있다. 그러나 진리를 강조할 때는 큰 소리로 말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하고 말할 때는 큰 소리로 말해도 무방하다. 내용이 은혜롭기 때문이다.

4. 청중 설득의 4가지 요소

이성(논리)에 호소하라
“연설자의 논리로 청중의 이성에 호소하라.”는 말은 논리를 바르게 전개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고(思考)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청중은 설교가 논리적일 때 고개를 끄떡인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못 배움 사람이라 할지라도 설교가 논리적일 때 쉽게 이해하고 쉽게 순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논리는 청중의 지적 동의를 얻어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1.이분법을 사용하라
이분법은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단계를 가능한 전제로 내세운다. 둘째 단계는 결론을 맺는다. 예를 들면 “바울은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다.” 하고만 말하면 미완성의 문장이다. 청중들은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충 문장을 필요로 한다. “바울은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훌륭한 연설가이다.” 한다면 완전한 논리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주는 이미지는 ‘바울은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훌륭한 연설가이다.’ 한다면 완전한 논리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주는 이미지는 ‘바울이 훌륭한 연설가’라는 사실이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란 뜻보다도 청중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된다.
결국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뒷 문장인 ‘바울은 훌륭한 연설가’이다. 이 문장은 연역법적 형식의 이분법이다. 이유를 먼저 말하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훌륭한 연설가’라는 내용이 청중들의 귀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이제 귀납법적 이분법을 보자. 귀납법적 이분법은 이유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먼저 특별한 전제를 말하고 난 뒤에 그 전제에 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바울은 훌륭한 연설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바울이 훌륭한 연설가인 이유, 바울이 수사학을 배운 사람이란 이유가 더 머리 속에 남는다. 이유를 더 부각시키고 싶을 때 그 이유를 문장의 마지막에 둔다.(귀납법) 이와 반대로 이유보다도 결론을 강조하고 싶다면 결론을 맨 마지막으로 문장으로 사용하면 된다.(연역법)
위의 내용을 좀더 구체화해 보자. “난 여러분들에게 오늘 늦게까지 강의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면 이는 귀납법적인 이분법 방식이다. 강의를 연장해야 하는 이유가 더 선명하게 청중의 가슴에 남는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부분이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난 여러분들에게 오늘 늦게까지 강의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한다면 이는 ‘늦게까지 강의를 연장한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가슴에 남는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원인을 말하든가 아니면 원인을 말하고 결론에 이르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중에게 무엇을 강조하고 싶으냐 하는 목적에 따라 강조하고자 하는 문장의 위치가 결정될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뒤로 놓는 것이다.

“바울은 친구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도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귀납법)

“바울은 전도할 사명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연역법)

위의 두 문장은 강조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귀납법적 이분법을 보다 적절히 사용할 수 있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지켜본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와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무리들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제자들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한때 예수님을 미친놈이라며 정신병자 취급을 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지금 그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으로부터 능력 받고자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단 말입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부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것은 부활의 주님을 목격한 후 부터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순간 그들은 생각하는 방향, 사물을 보는 관점, 삶의 목적, 모든 것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큰 충격을 주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생애를 바꿀 만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박영재 설교)
이 장면은 크게 두 구도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무시하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기도 모임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두 가지 구도는 귀납법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 장면을 연역법적 이분법으로 해보자.
한때 예수님을 정신병자로 취급했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그들은 생각하는 방향도 삶의 목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들이나 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고자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생애를 바꿀 만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까?
이것은 연역법적 이분법이다. 자 어느 것이 더 좋은가? 어느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가? 장단점을 생각해 보라.
이분법을 더 살펴보자.
요즘 젊은이들한테서는 효 사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들 말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어느 학자는 나름대로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지식이 부모로부터 왔다. 삶의 지혜와 기술의 습득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러 받아야 살 수 있었다. 평생을 머슴살이해도 제 힘으로는 밭 몇 뙈기 사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와 신분도 부모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양반 자식은 양반으로, 상인 자식은 상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옛날에는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사회와 학교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얻기 때문에 옛날처럼 부모 덕 볼 일이 없고, 그래서 효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곽선희, 「참회의 은총」)
이 또한 귀납법적 이분법이라고 볼 수 있다. 질문을 던지는 형식 이면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자녀들이 효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란 내용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질문을 통해 답을 풀어나갈 때, 즉 원인을 파헤쳐나가는 노력 속에서 청중들에게 “왜냐하면”이란 전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청중들에게 논리적인 흥미를 유발시킨다.
필자는 설교에 귀납법적인 이분법을 즐겨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논리 전개에 있어서 더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납법적 이분법을 바꾸어서 전개하면 연역법적 이분법이 된다. 설교자의 취향에 따라서 연역법적 혹은 귀납법적 이분법을 사용할 수 있다.
2,삼분법을 사용하라
논리적 전개에는 이분법 외에 삼분법이 있다. 즉 논리가 3단계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 단계는 대전제이며, 둘째 단계는 소전제이고, 셋째 단계는 결론이다. 삼단 논법에서 결론의 주어가 되는 개념을 소개념(S)이라 하고, 결론의 술어가 되는 개념을 대개념(P)이라 한다. 대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전제를 대전제라 부르고, 소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전제를 소전제라 부른다. 두 전제에는 들어있으나 결론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매개념(M)이라 부른다. 삼단 논법은 크게 네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 형식을 아래 예를 통해 살펴보자.
1단계 (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2단계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3단계 (결 론) 모든 사람은 죽는다.
여기서 매개념이 1단계, 즉 대전제(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2단계, 즉 소전제(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의 주어로 되어 있다. 1단계와 2단계의 연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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