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건 목사님이 쓰신 이 책은 저에게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사랑의 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겪고 있는 이 중요한 문제를 이렇게 알기 쉽게 성경적 근거와 많은 예를 들어가며 쓴 책은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174쪽의 분량인 이 책 중 한국적 상황에 맞고 또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나 장들을 골라 번역하였습니다.
이 번역글을 읽는 분들의 마음에 이 주제에 관한 하나님 말씀의 빛이 비추기를 바랍니다.
서문
시대적 요구, 오늘날의 상황과 교회가 처한 입장을 생각해 볼 때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주제를 꼭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혼과 재혼은 이제 개인의 문제를 떠나 국가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세가지 관점에서 씁니다. 첫째, 파괴된 가정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씁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5살이었을 때 가정을 버렸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저는 혼자서 아이들을 기르는 어머니에게 부과된 고통과 압박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가 정신쇠약과 자살기도까지 갈 정도로 끔찍하게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는 이혼이 한 젊은이의 마음에 가하는 상처가 무엇인지 압니다. 제 남동생과 저는 나이가 들자 저의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증오했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이 이혼을 몹시 싫어하셨는지 확실히 이해합니다 (말라기 2:14-16). 왜냐하면 제가 바로 이혼이 가져오는 마음의 고통과 참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저는 멋진 결혼의 기쁨을 아는 한 사람으로 이 책을 씁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결혼한지 62년이 되는 때군요. 저는 하나님 사랑이 다스리는 결혼의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파트너, 평생 동행하고 축복과 도전을 함께 나눈 저의 사랑하는 아내가 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압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부부와 같이 인생과 결혼에서 오는 어려움을 직면하였었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결혼을 벗어나는 쉬운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세째, 저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지침과 권위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 위임받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사역자로서 이 책을 씁니다. 저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율법적인 믿음과 종교적인 생각의 결과로 이혼의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 고뇌, 그리고 비난을 보아왔습니다. 저는 또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한 사람들을 열등 크리스찬(second class Christians)들이라 비난하고 그들을 마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사람들인양 비난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은혜로 인간들을 보살폈던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저는 크리스챤이라 주장하지만 그들의 결혼을 마치 “쉽게 쉽게, 되는대로”라는 방식으로 결혼을 다뤄온 커플들을 보아왔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에 상당히 만연해 보이는 이런 방종과 헌신(consecration)의 부족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가르치는 각양 각색의 교회에서 자랐고 또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 어떤 사고를 해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냥 무조건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남부 침례교회에서 나고 자랐지만 1934년 병상에서 하나님의 병고침에 대한 은혜의 빛을 받았고 그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가 가르치지 않은 뭔가를 바로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이 가르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저는 스스로 공부함 없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따라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따랐다간 제가 거의 무덤에 갈 뻔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십대 소년으로서 죽을 병으로 병상에 누워있었을 때 제 목사님은 제게 희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과 병고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얘야, 그저 참아라, 몇 일만 지나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로서, 저는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저로서는 그것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많지 않았지요. 그러나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한 여러 가지 경우를 접하면서 제 안에 있는 뭔가에 방아쇠를 당겼고 그 주제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수많은 시간, 날, 달, 해를 들여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 왔습니다. 고린도 전서 7장을 예수님이 마태복음 19장에서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해석해 본다면 저는 분명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인정하지 않은 “예외”를 말함으로써 예수님과 모순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실제 삶의 여러가지 상황과 경우들을 본 이후에야 저는 이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 누가 옳은가? 사도 바울인가 예수님인가?
저는 순복음(Full Gospel) 혹은 다른 교단의 으뜸가는 성경 교사들을 뒤이어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하여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몇몇 지도자들에게 바울이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하면 그들은 제가 그랬던 것 처럼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그들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혹은 “저는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겠어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9장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 같은 주제로 말씀하신 것과은 상당히 모순이 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으니 둘 다 진리여야 합니다. 결론 먼저 이야기 하자면 둘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결혼, 이혼 그리고 재혼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명확히 해석하시는 것이었고 바울은 같은 주제로 교회(믿는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적용하는 것이었지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성령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시만 우리가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또한 많은 믿는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한 말을 그냥 쉽게 따릅니다. 심지어 목사님들도 성경에서 맥락에 상관없이 한 귀절을 끄집어 내어 결국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뭔가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사실 누구나 성경에서 한 두 귀절 취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증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 후서 2장 15절은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곤란에 빠집니다. 또한 바르게 분변해야 하다면 틀리게 분변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내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역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 내게 성경해석의 기초적인 방법을 말한 것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누구를 상대로 말씀하고 계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2절을 보면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는 세 종류의 청중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유대인,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민족, 둘째 교회, 하나님의 가족, 세째, 이방인, 교회도 유대인도 아닌 그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결혼과 이혼에 대한 모세율법을 주셨습니다. 모세율법은 유대인들 주변에 있던 나라나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이방인을 다스리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서 4절을 봅시다.
1절: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2절: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절: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4절: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렵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찌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찌니라”.
구약 시대에는 여자는 남편을 선택하는 데 있어 거의 의견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원하는 남자에게 팔았습니다. 만약에 그 여자가 그 남자를 기쁘게 한다면 그는 그녀를 계속 데리고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모세 율법하에서는 그가 그 여자를 산 가격을 치루면서 친정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법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이 모세 율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청중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는 것이었지요. 마태복음 19장 1절에서 3절을 봅시다.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에 이르시니
2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3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남자가 그의 아내와 어떤 이유로도 이혼을 하는 것이 합법적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 연고로도 이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예수님이 동의하시는지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모세가 말한 그 아내가 저지른 “수치되는 일(uncleanness)”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치되는 일”이 상당히 광범위한 것을 의미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적 음행만을 의미했습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19장 4절에서 9절의 말씀을 봅시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절: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절: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7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19장 9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변하셨습니다. 그는 모세가 음란, 성적인 죄를 의미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대조적으로 고린도 전서 7장 15절과 16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언급하시지 않은 예외를 가르칩니다. 바울은 만약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기로 결정하면 믿는 배우자는 결혼 서약에 속박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모순된 것 처럼 보여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모세율법을 해석하셨던 것이고 바울은 어떻게 사랑의 법이 교회에 적용되는 가를 보여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무엇이 율법적인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변하시는 것이고 고린도 전서 7장에서 바울은 사랑이 무엇을 하겠는가에 대해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모세율법보다 더 나은 법을 상기시키십니다. 마태복음 19장 6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구약의 시대에는 남자가 다수의 아내를 소유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맘속에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기까지는 어떤 인간도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죄의 본성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들은 마태복음의 19장 6절을 실현할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모세가 그들에게 이혼증서를 주었는가”를 물었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해서 그들에게 이혼을 허락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신자들의 마음은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아담이 죄를 직고 타락을 한 때 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계획하셨던 신성한 결혼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그들은 그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변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아래 살던 영이 죽은 사람들(natural men)이었고 짐승의 피로 죄를 가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 간음이 아닌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듭난 신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19장 10-11절을 읽어보면
10절: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 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제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눈여겨 보십시요. 11절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받을 수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12절: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이런 의미에서 고자는 거세된 남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태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에 의해서 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만약 어떤 남자가 바로 이런 이유들로 결혼하기가 불가능하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가 된 유대인들이 어떻게 더이상 모세의 율법아래 살지 않아도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7장 1-6절을 봅시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2절: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절: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자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무구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몰라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결혼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모세의 율법아래 두려고 해왔지만 그들은 그 아래 있지 않습니다. 교회역시 모세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새로운 언약(New Covenant)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유대인들 혹은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며 새언약, 사랑의 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거듭난 자들)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5장 5절).
구약은 예수님안에서 완성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모세율법이 유효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언약의 법으로 옮겨온 오늘날 유대인은 거듭나야 하지요. 오늘날 유대인도 이방인도 인간의 법외에는 결혼이나 이혼에 대한 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옛 모세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할지는 몰라도 그들은 할 수가 없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 10절). 기원전 72세기 이래로 유대인들에게는 대제사장도, 제단도, 희생된 속죄물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거듭나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결혼과 이혼에 대한 모세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고 그것을 완성하실 때까지만 시행되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아직도 그 법을 지키려고 노력할지라도 예수님은 모세율법에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법이 있냐고요? 있습니다. 개별 시민사회 정부에 의해 공식화된 인간의 법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아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하여는 원수들입니다. 로마서 8장 7절에서 9절을 읽어봅시다.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도의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도 원수들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2장 11절을 봅시다.
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그 글을 쓰고 있는 것인데 물론 이방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더이상 이방인이라 부르고 있지 않습니다.
12절: 그 때에 (너희가 육체로 이방인이었을 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마태복음 19장 6절의 말씀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란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짝지어 주시지 이 세상사람들을 짝지어 주시지 않습니다. 목사로서 제가 결코 하지 않을 한 가지 일은 바로 믿는사람을 믿지 않는 자와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사탄의 자식과 짝지우시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챤인 당신이 만약 사탄의 자식과 결혼을 했다면, 당신은 문제를 겪지않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챤이 사탄의 자식과 결혼을 하면 그 크리스챤은 그의 장인, 혹은 시아버지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세력권으로 넘어갑니다.
오늘날의 현대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어떤 결혼법을 준수합니까?하나님은 교인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상대하십니다. 교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 수해 동안 교인이었습니다. 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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