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하는 자의 기도
1. 하나님을 좇는 자의 기도
기도란 무엇입니까? 설교는 인간을 움직이지만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설교는 시간을 움직이지만 기도는 영원을 움직입니다. 누군가가 강단에서 또는 저녁 식사 중에 기도를 화제로 꺼내면 많은 사람이 지겹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를 지루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별 성과도 없이 은밀히 행하는 고된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유창한 달변과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기도 ‘공연’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전문가적인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그분은 열정적인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갈급한 죄인들과 열정적인 성도들의 기도는 듣고 응답하시지만, 과시하는 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화려한 기도는 무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예배와 기도회, 그리고 개인기도 시간을 채우고 있는 기도는 어떠합니까? 당신의 뜨거운 갈망에 하나님의 마음이 끌리고 계십니까? 과연 당신의 첫사랑을 향한 애타는 갈증에 하나님이 이끌리고 계십니까?
종종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하고 쟁취할 때보다, 그저 그분께 갈급하고 갈망할 때 더 우리를 잘 만나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전투의 강력한 무기로서 기도를 사용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이 죽음과 고통과 슬픔으로 우리를 공격할 때 기도는 악한 세력의 가장 약한 곳을 진멸시키는 기본 무기입니다. 지금 기도의 방아쇠를 당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이 총알이 되어 악한 세력을 쓰러뜨리실 겁니다.
2. 갈급한 기도
지금 십자가가 우리의 눈앞에 높이 달려 있습니다. 그 위에는 마지막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어지는 아픔을 참아내며 죄 아래서 죽음을 기다리는 모든 피조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갈망하는 한마디의 기도를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오래 전 하나님과 깊이 만나게 해 준 것은 목사로서의 내 유창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세련된 표현력은 하나님과 내 마음을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어눌하고 뜨겁던 갈급한 간구와 좌절의 눈물 속에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저는 3대째 사역자 집안의 거듭난 설교자였으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하여 제 영혼이 더욱 거룩한 갈망을 요구하게 되자 종교적인 전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 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
제사장 엘리는 성막 근처에서 울먹이며 말없이 입술을 달싹이는 한나의 갈망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겪어 보지 못했던 그 갈망을 술기운에서 나오는 격한 감정, 엉뚱한 곳에서 부리는 지나친 객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보셨습니다. 그것은 갈망하는 기도의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도로 역사상 이스라엘을 가장 강력하게 영도했던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기도는 위기와 고난의 인생 속에서 잉태되어 격정과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갈망이 굶주림, 두려움, 연약함, 영적 갈증, 절망의 형태로 당신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갈급한 기도에 담아 당신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께 토할 때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소망, 당신의 노래, 당신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한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세대는 분명 부흥을 원합니다. 그러나 부흥은 우리로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를 입은 열정의 사람들만이 감히 하나님의 불길을 운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노숙지에서, 사람들이 버린 오물과 찌꺼기가 쌓여 있는 곳에서 예수님께 기도한 소경의 갈급한 외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봐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3. 회개기도
온 국민에게 존경을 받던 영적지도자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찬양자이던 다윗은 살인자요 간부(姦夫)였습니다. 그런 다윗이 어떻게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그가 위대해진 비결은 인간적인 완벽함이나 리더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은혜 앞에 나아갈 줄 알았고 열정적인 회개기도를 드릴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회개 기도의 위력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연약하며 자주 넘어집니다.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잡초를 키우기가 더 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소소한 충돌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분노하고 마음을 더럽힙니다.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패트릭 밀러의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며, 죄와 부정을 저질렀을 때 더 빨리 무릎 꿇어야 함을 알게 해줍니다.
형제나 자매에게 범한 죄를 주님께 범한 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그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웃과 십계명이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에게 한 일은 곧 하나님께 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뜨겁게 갈망하십니까? 그분의 임재에 거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활과 대인관계에서 순결하고 거룩하십시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은 이 수준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으셨습니까? 회개기도를 드리십시오. 예수님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적인 회개기도를 듣길 원하십니다.
4. 굶주린 마음의 기도
여러분은 굶주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굶주림이 채워지면 얼마 후에 더 큰 굶주림이 찾아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은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굶주림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항상 성경 속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 하나를 꽂고 다녔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주는 우리에게 쉴 수 없는 마음을 주셨고 결코 다 채울 수 없는 것을 뜨겁게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벤 패터슨은 굶주린 마음이 능력 있는 기도의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기도교사는 성령이시므로 기도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성령께 의지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분량은 결국 갈망의 분량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하는 굶주림의 분량이 클수록 기도의 분량이 크게 됩니다.
모세의 삶과 사역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세상을 지배했던 최고의 강대국을 겸손케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백성을 구원해 새로운 땅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모세가 누린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전무후무한 영적 권위를 누리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 이상의 굶주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이 구약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새 언약 아래에 있을지라도 이 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굶주렸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풍요나 개인적인 명성은 절대로 구하지 않았습니다. 은사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최고의 찬송이자 선물인 것입니다.
5. 지혜와 인도를 구하는 기도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은 암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수적으로 열세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막 기억에 남을 최고의 예배를 드리고 나자, 암몬과 모압이 다시 쳐들어오고 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정복에 굶주린 군대가 두 진으로 나뉘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때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대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왕은 절박한 환난 때에 부르짖으면 듣겠다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기에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당신도 얼마든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여호사밧 왕의 기도도 놀랍지만 그 응답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서 너희가 싸울 것은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가만히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지켜만 보라.”라고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적 사탄은 매순간 찾아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욕하게 만듭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하늘 아버지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직접 보시도록 맡겨 드려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기도하여 가로되….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 우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 리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간절한 도움을 갈망하는 기도를 듣고 “내가 들었노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군대가 화살 하나 조차 쏘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사막의 모래와 같이 그 수가 많았던 앗수르 군사 18만 5천 명이 그날 밤 모두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18만 5천명이 즐비하게 누워있는 공동묘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그분의 도우심으로 전무후무한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문제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문제 처리 방식이 지난 번과 같겠거니 하며 혼자서 단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유는 좀처럼 하나님을 단정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매번 그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위기 때 그분이 도우실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에 가장 값진 통찰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생존 자체를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6. 중보기도
여러분은 여러분을 죽이려고 모해하고 괴롭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재는 믿음의 조상들이 기도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사명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자주 중보를 행했으며 사십 주야를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엎드려서 대신 기도했습니다. 욥은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의 사죄를 위해 그분께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앞날을 위해서 21일간 부단 없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손수 애정 어린 편지를 보내서 격려했습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진정 부흥의 비결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은 자신을 위한 사사로운 간구와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 땅을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 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7.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
하나님이 인간의 불행 속으로 들어오신 일과 구원을 완성하신 위대한 업적은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미래와 소문, 예정된 결혼생활을 포기했을 때 그분의 거룩하신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그의 나라를 위해서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드리던 날, 그분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마음과 뜻, 몸과 삶을 전적으로 드리는 자녀들을 통해 그분의 뜻을 펼치십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는 세대와 장소, 남녀를 초월해서 그분의 뜻을 펼치시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일은 언제나 값비싼 대가를 요구합니다. 우주의 전부이신 그분에게 가까이 가려면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던 날, 이사야의 삶과 사역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분의 신령한 권위로 대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발사하신 천국의 미사일이 되었습니다. 26세의 웨일즈 청년 이반 로버츠는 3개월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고 변화되어, 십만 명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비전에 불타올랐습니다. 그 비전은 결국 성취되었고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마침내 전 세계 모든 대륙에 크나큰 영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복은 물론 우리 삶까지도 되돌려 주십니다. 그런데 지혜와 인도를 구하는 기도에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 큰 도전으로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펼치시게 되는 것입니다.
8. 믿음과 선포의 기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메마르고 생명체가 거의 살고 있지 않는 광야의 한복판, 사람의 인적이 전혀 없는 고독한 장소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우리가 추측해 보건대, 에스겔의 귀에는 황량하고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렸으며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거친 바위산과 뜨거운 모래 언덕이 있었을 겁니다. 에스겔은 편안하고 따뜻한 방에 있질 않았을 겁니다. 아름다운 찬양과 주악이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와 같은 현실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면 정녕 우리 앞에는 그분의 임재만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
기적이 이루어진 것은 에스겔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포하자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뜨겁게 갈망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신탁자, 하나님 뜻의 대변자로써 말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보고는 이렇게 선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 거지에게 손을 내밀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는 그 앉은뱅이 거지를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우리는 그분의 뜻과 목적과 하나가 됩니다. 종국적으로 열정적인 갈망은 우리 마음에 그분이 주신 씨앗을 품고 자라나서, 우리 삶에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날 베드로와 요한에게 회의나 의심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그 뜻이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9. 고뇌의 기도
고뇌의 기도는 끈질긴 믿음을 요구합니다. 고뇌의 기도는 남들이 포기하고 집에 돌아간 지 오랜 후에도 차디찬 바위에 무릎 꿇고 집요하게 강청하는 끈질긴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고난 중에 기도한 고뇌의 기도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현대인의 바쁜 생활 속에서 때로 느린 응답이나 장기간 침륜에 빠지는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삼키는 불치병 앞에서, 또는 사랑하는 자녀가 범죄의 유혹에 빠져있을 때, 빈곤한 경제생활로 미래가 어둡고 힘겨울 때, 믿음으로 고뇌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바제도병으로 고생했던 19세기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기도를 담아봅니다.
고뇌의 기도
노동에 지치고 쾌락에 지치고
꺾인 희망에 지치고 자아에 지친
연약한 인간들을 굽어보시는
지친 세상의 큰 바위 그림자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희가 주께 기도하오니
주의 풍성한 긍휼과
체험을 통한 깊은 이해와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저희를 주의 안식으로 이끄소서
10. 흠모의 기도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더 선호하시는 기도가 있을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분은 모든 종류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특별히 선호하시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희귀한 기도일 겁니다. ‘흠모’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깊은 차원의 친밀함을 묘사하는 가장 강력한 단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흠모’라는 단어의 의미는 ‘신격이나 신성한 것으로 예배하고 높이다, 헌신적 사랑과 찬미로 대하다, 극도로 좋아하다, 경외하다’는 뜻입니다. ‘흠모’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고 찬미하고 송축하려는 마음의 자발적인 열망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기도에 대한 단서가 나와 있을까요? 성경 속의 가장 열정적인 기도의 일부가 시편에 나오는데 그것들은 하나같이 흠모의 기도, 즉 ‘무조건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편,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언어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애정, 신랑을 향한 신부의 애정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애정을 부부관계로 들어 묘사를 했습니다. 이 모든 증거는 흠모의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기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우리의 일상 세계에서 흠모는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에서 흠모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진 단어 같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지만 아버지께 나아갈 때 꼭 손을 벌리고 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단순하게 15분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해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 흠모의 기도란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잡혀주시는 전 과정을 담은 한 장의 가족사진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흠모의 기도를 하십시오. 일단 여러분의 눈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고정되면 나머지 과정은 그분이 직접 이끌고 주도하셔서 여러분을 그분의 가장 은밀하고 경건한 내실로 인도하실 겁니다.
11. 비우는 기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채워지기 위해 먼저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있는 것들을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그러나 동양 종교에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비움의 행위와는 그 목표가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완전에 이르는 길은, 인간 영혼에서 온갖 잡념, 애착, 애정, 열정, 생각, 감정을 비워 열반-완전한 공(空)과 우주와의 합일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상태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는 빈 공간이 아닙니다. 두 개의 라이벌(그러나 대등할 수 없는) 나라가 우주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둘 중 우세한 하나님 나라는 인간 영혼의 빈 상태를 악용하지 않으며, 그 왕이나 왕의 뜻을 인간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세의 어둠의 나라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무엇이든지 닿는 것마다 이용하고 악용하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곳의 군주는 영원히 분을 품은 어두운 반항자이며 만족한 줄 모르는 굶주린 암세포와 같습니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파고들어가 인간을 어떻게든 미혹합니다. 한때 하나님의 화려한 천사장이었다가 적장이 된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비워진 인간 영혼은 바알세붑의 노천시장에 걸려있는 신선한 고깃덩이 같아서 지옥의 온갖 파리들이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영혼의 비워진 공간을 채울 가치가 있는 단 하나뿐인 진리와 구세주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 대한 기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구원만 받았으면 토요일은 마귀처럼 살고 주일은 성도처럼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월요일에 천국 가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가장 위대한 비움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매일 매순간 진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의 꾸준한 주제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비움과 채움의 완벽한 조화와 균형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비움의 진정한 중요성은 하나님의 채우심에 있습니다. 그냥 비우는 것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에 대한 새로운 계시로 우리를 채우려 하십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우리가 그분의 자리를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죽은 ‘옛사람’의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물과 재산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는 기도의 중심은 바울과 같이 완전한 회개와 철저한 영적 중생(거듭남)의 순간에 시작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12. 헌신기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참된 헌신기도를 드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만이 우주의 유일하신 불변의 능력이 되십니다. 끊임없이 진리의 생명이 시들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을 지키시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서 계속 역사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경솔히 헌신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매우 진지하게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나 집회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이 한 약속을 잊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의 사소한 말까지 다 기억하시고 계십니다.
저자의 부친이 어떤 집회에서 목격하신 아주 유별난 대화기도 한편이 있습니다. 열의에 찬 청년이 제단에서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를 채워주소서!” 그때 한 할머니가 청년 옆에서 똑같이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안됩니다. 주님, 저 사람은 줄줄 샙니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은 뜨거운 부흥회나 기도회 중에 열심히 간구하며 헌신했다가 다음 월요일이면 모두 까맣게 잊는 버릇으로 유명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을 미끼로 하나님을 유도하거나 설득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이 갈급함에 의해 헌신의 요소를 더할 수 있도록 그 시간 그 장소에 한나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한나가 사무엘을 낳기 전에 먼저 기도와 헌신으로 가득 채운 뒤 하나님의 선지자를 낳기 원하셨습니다.
마일스 커버데일도 심한 박해 속에서 강력한 헌신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거스틴 수사였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핵심 지도자들의 저작을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는 사명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경과 유럽 개혁가들의 많은 저작을 당시의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그는 박해 받는다는 것, 투옥이나 신체적 위험의 끝없는 위협과 협박 속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심한 박해와 신체적 위험과 죽음의 끝없는 위협 속에서도 커버데일은 헌신의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헌신은 하나님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기초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헌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에덴동산을 아담에게 맡기신 위대한 헌신으로까지 확장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아버지 손에 자기 목숨을 부탁하신 갈보리 십자가의 헌신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부활의 소망이 없는 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야 합니다. 그분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상처의 사건, 질병과 상실의 고통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를 믿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분이 우리를 암에서 고치시거나 치매에서 건지시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헌신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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