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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헨리 나우웬-

by 【고동엽】 2022. 3. 4.

'긍휼은 특권적인 위치에서 허리만 구부려 소외된 자들에게 향하는것이 아니다.

높은곳에서 낮은곳에 있는 좀더 불쌍한 자들에게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니다.

상향성의 삶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정어린 태도를 취하는것이 아니다.

긍휼은 직접 그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고난이 가장 극심한 그곳으로 들어가 거기에 자리잡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선하고 온화하며 이해심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인간답다는것과 긍휼이 많다는것을 즉각 동일시한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 compassion 은 라틴어 '파티' 와 '쿰'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고통과 깨어진 아픔,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나누라고 촉구한다.

비참한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흘리는자들과 함께 울며

연약한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는것을 의미한다.

이런의미에서 긍휼은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과 관련되어있는것이다.

어떤이들은 긍휼어린 태도를 싫어하거나 저항한다.

긍휼어린 생각을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간주한다.

이 경쟁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이 긍휼어린 사람이 되기 보다

가능한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살도록 노력하는것이 최선의 삶인가?

이책은 단호히 아니다 라고 얘기하고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라고 말씀 하셨을 뿐만아니라

그분 자신이 세상속에서 이러한 긍휼의 삶을 구체적으로 사셨다.

무지한 자들, 배고픈 자들, 눈먼자들 문둥병자들, 과부들 그리고 나름의 고통을 안고 예수님께 나아온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고 고치셨다. 냉소주의자는 예수님당시 고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대다수였으며 고침받은 이들때문에 고침 못받은 이들이 더 비참해졌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것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친것이 아니라 그런치유가 일어나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깊은 긍휼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 말할때만 쓰이는 배타적인 표현이 딱 열두번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라는 표현이다. '스플랑크니조마' 라는 헬라어 동사는 이표현이 얼마나 심오하고 강력한지를 보여준다. 스플랑크나 는 우리몸의 내장을 말하며 복음서가 예수님의 긍휼에대해 말하면서 내장이 움직였다고 말하는것은 무언가 아주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것이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였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되는것이다. 바로여기에서 거대하고 마르지 않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드러난다. 그분은 인간의 모든것을 긍휼에서 비롯되는 무한한 온유로 감싸안으신다. 즉 진정 위대한 신비는 치유가 아니라 치유의 근원이 되시는 그 무한한 긍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 삶의 기초이자 근원으로 삼을수 있겠는가?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긍휼어린 임재를 드러나게 보여줄수있는 영역은 어디인가? 깨어지고 죄인된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을 보여주는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신약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메세지는 긍휼어린 삶이란 함께하는 삶이라는것이다. 긍휼은 개인의 인격적인 특징도 개인의 태도도, 개인의 재능도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긍휼어린삶을 살라고 권면하면서, 그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 2:3-4) 긍휼어린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교제속에서 드러나는 삶이다.

우리시대의 비극은 우리가 이전 어느때보다도 세계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많이 알고 접하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비율이 낮아지고 있는것이다. 우리는 매일 전쟁, 암살, 지진, 기아와 전염병, 고문, 홍수와 가뭄 굶어죽는 아이들 죽어가는 군인들 찌그러진 자동차등 기타 셀수없는 인간고통에 대한 소식들을 접하지만 그것이 긍휼로 이어지는가? 어떤이들은 이러한 일들에대해 무감각과 분노로 반응하기도 한다. '어차피 그것에 대해 내가 할수있는일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뭐' 인간의 고통에 직면하는동시에 우리의 무기력함을 느끼게 될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무감각과 분노로 자신을 방어한다. 또한 매체를 통해 알게된 사실에대해 긍휼어린 마음으로 반응하기 어려운것은 그매체들의 중립성 때문이다. 뉴스특파원은 전쟁 살인 등의 뉴스를 형식화되고 의례화된 어조와 표정으로 보도한다.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는곳마다 긍휼이 생겨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이름아래 하나로 뭉쳐 마음의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곳이면 어디서나 긍휼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공동체 안이기 때문이다. 이시점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어떻게 공동체를 세울수 있겠는가? 하는것이다. 우리는 공동체라고 하면 함께 음식을 먹고 기도하는것, 함께 밥을 먹고 한집에서 사는것, 혹은 어떤일을 함께 하는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은 피해야한다. 이런것들도 공동체의 표현일수있지만 공동체는 훨씬 더 심오한 실재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것은 아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동체 없이 사는것도 아니다. 물리적으로 멀고 가까움은 두번째 문제이다. 공동체의 가장 우선적인 특성은 하나님에 의해 함께 모였다는 깊은 의식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역설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인 이동을 선택함으로써 함께 모인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은 평범하고 적당한 자리에서 나와 이동하라는 부르심이다. '네가소유한것을 팔아서 가난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고 복음은 우리에게 편안하게 느끼는곳에서 이동하라고 초청한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자발적인 이동을 통해서 착실한 생활의 환상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진정한 조건을 경험하기 시작하기때문이다. 자발적인 이동의 역설은 바로 다음과 같은점에 있다 그것이 우리를 이세상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 , 가족, 친구들- 과 갈라놓는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이세상과 더욱깊이 연합되게 해준다는 점이다. 자발적인 이동은 긍휼어린 삶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자발적인 이동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천차만별이다. 마틴루터에게 자발적인 이동은 성직자들의 추잡한 행태를 고발하는것이었고 본회퍼의 경우 미국에서 독일로 와서 나치 치하의 수감자가 되는것을 의미했고 마틴루터킹에게는 인종차별에 저항하는것을 의미했다. 자발적인 이동은 물리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깨어진 인간조건을 가장 눈에띄게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긍휼어린 결속의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하다. 이 자발적인 이동이야말로 모든 위대한 종교 개혁의 원천이라 할수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발적인 이동이 '극적인 행동으로의 초대'라고 오해하지 말아야한다. 꼭 가족과 친구들 과 고별하는것이 아니다. 먼저 우리가 이해해야할것은 자발적인 이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일때만 진정한 제자도의 표현이 될수 있다는 사실이다. 감동적인 이동의 삶을 산 여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들의 자발적인 이동이 칼로 자르듯 분명한 목표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주도한것이 아니라 보통 오래시간에 걸쳐서 듣고 이해하게 된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었다는것이다. 성프란체스코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수년간 해온 내면적 고투후에 그는 서서히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한 가난의 삶으로 부르셨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마더테레사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 캘커타에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사역하게 된것은 단지 이것이 선한 사업이거나, 필수적인 과업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것을 들었고 확증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성찰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인식하는가? 아니면 그부르심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런순간이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가? 일차적으로 자발적이동은 무언가를 이루는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심의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회심이 일어?날수있다. 우리는 마냥 십자가를 추구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감당해야할 십자가를 끝까지 져야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것은 우선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독특한 소명을 발견하는것이다.

긍휼은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비워야한다. 다른사람들을 우리의 가장 내밀한 공간으로 받아들일수 있으려면 자신을 비워야한다. 경청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이유도 바로여기에 있다. 경청이란 우리 자신이 관심의 중심에서 떠나 다른사람을 그공간으로 초대하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초대가 얼마나 치유하는 힘이 큰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있다. 누군가가 우리의 말에 진정으로 관심을 쏟아주고 우리의 갈등과 고통에 대해 진실로 보살피는 마음을 표현할때 우리는 마음 가장깊은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서서히 두려움이 녹아지며 긴장이 해소되고 불안감이 사라지고 신뢰가 자라며 재창조적힘을 발휘한다. 남과 다른점을 경쟁의 기초로 삼지 않고 이차이가 오히려 함께하는 풍요로운 삶에 기여할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을 듣기 시작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날마다 긍휼을 실천할 방법이 있는가? 지금까지는 제자도에 중점을 두고말했지만 여기서는 훈련에 중점을 두고 말하고자 한다. 긍휼의 길은 무엇인가? 긍휼의 길은 바로 인내의 길이다. 인내는 긍휼의 훈련인것이다. 자칫 인내 라는 단어는 무력함, 무능력,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기다림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정한 인내의 의미는 치열한 삶의 현장속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내면과 주변에 있는 고난을 충만히 견뎌내는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또한 인내에대해 말씀하실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훈련이라고 설명하셨다.

'좋은땅에 있다는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자니라(눅 8:15)

너희의 인내로 너희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적극적이고 강력하며 결실있는 인내에대해 바울은 우리에게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친구인 디모데에게 인내하고 온유할것을 부탁하고(담전 6: 11)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애기한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입고(골3:12) 그는 주저없이 자신을 인내의 본보기로 제시하고(딤후 3:10) 인내를 그자신과 주위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결속의 근원으로 본다. (고후 1:6-7)바울이 보기에 인내는 긍휼의 삶에 꼭필요한 훈련이었다. '우리가 환난중에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롬 5:3) 우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인내를 통해 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옛시간과 새로운시간의 차이점을 좀더 파헤치고 인내 훈련의 중요성을 좀더 깊이 인식하기 위해 우리가 참지못하는 조급한 순간을 한번 살펴보자 조급함은 항상 시간과 관계되어있다. 어린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참지못하고 조를때, 기차시간이 연착되어 1시간을 기다릴때 , 지루한 설교가 이뤄질때 조급함은 일어난다. 근본적으로 조급함이란 공허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한 시간을 경험하는것이다. 때로는 이 조급함에 사로잡혀서 더이상 그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때가 있다. 비행기가 세시간 연착되었을때 그사이에 급한일은 없지만 빈둥빈둥 할일없이 시간을 때우고 만다. 이런 조급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시계 시간에 맞춰 사는것이다. 시계 시간은 일직선적인 시간 개념으로 이런 측정단위로 우리에게 몇달 며칠 몇시간 몇초가 남았는지를 말해주고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시계시간은 외적인 시간 , 즉 엄격하고 무자비한 객관성만을 지닌 시간이다. 시계시간은 조금함을 양산하고 긍휼어린 함께함을 막아버린다. 하지만 다행스러운것은 우리들 대부분의 삶에 다른 순간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인내의 경험이 편만한 질적으로 다른 순간들 말이다. 삶에서 그런순간이 많지는 않았을수도 있지만 그런 순간들이 너무도 소중한 기억이어서 우리가 불안하고 긴장한 시기에 소망과 용기를 줄수있다. 이시간은 바로 그 순간을 충만하고 풍요로우며 의미있게 보냈던 경험이다. 이런 인내의 순간은 사람마다 상당히 다르다. 때로는 그저 아픈 사람의 병상에 앉아서 함께하는 시간속에 깨달을수도 있고 혹은 일상적인 일을 하다가 갑자기 살아있다는것, 일을 할수있다는것이 얼마나 좋은일인지를 깨닫는 순간일수도 있고, 조용한 교회에서 기도할때 일수도있다. 이런순간들이 항상 기쁘고 행복하고 황홀한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거나 고뇌와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을수도있다. 중요한것은 충만함, 내면의 중요성, 성장을 경험하는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진정 우리의 삶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하는것이다. 인내의 훈련을 통해서 발견할수있는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충만함이다.

이제 이러한 인내의 훈련이 기도의 삶속에서 어떤 특성과 모양을 지녀야할지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

 

인내의 훈련은 기도와 행동속에서 실천된다. 지금까지는 성령에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거룩한 삶의 친밀함으로 이끄시기 위해 보내주신 성령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기도에 대해서 말할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영안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영적인 삶이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간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이영적인 삶이다. 이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도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기도는 우리안에 있는 성령의 삶의 표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는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하신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애기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수 없습니다.(고전12:3)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함이니라.(롬8:26~27)' 긍휼어린 삶을 살려면 우리는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것이 아닌가? 가난한자들 억압받는 자들, 짓밟힌 자들과 결속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는가?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가서 소외된 자들과 힘겨운 생존현실을 경험해야하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기도가 긍휼의 훈련이 될수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질문을 던질것이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기도를 생각할때 흔히 다른 사람들과의 분리를 연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정한 기도는 동료 인간들과 더 가까워지게 한다. 기도는 긍휼의 첫번째요, 없어서는 안될 덕목이다. 왜그런가? 우리안에서 기도하시는 영은 모든 인류를 연합과 공동체 안에서 하나로 불러모으시는 영이시기때문이다. 평화와 연합과 화해의 영이신 성령은 자신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드러내시되, 그능력을 통해서 가장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인종적,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분으로 드러내신다. 긍휼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경험중 하나는 온세계를 품을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우리 마음을 확장하는것이다. 기도는 긍휼어린 심장의 박동 그자체이다. 아픈친구, 낙담한 학생, 갈등을 겪는 교사, 감옥이나 전쟁에 있는 사람들, 불의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 굶주리고 가난하고 피난처가 없는 사람들, 사회정의를 위해 직업 건강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고 투쟁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것은 무익한 노력이 아니라 이웃을 우리마음의 중심으로 초청하는 따뜻한 몸짓이다. 다른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것은 그들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품는 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것은 그들의 고통과 고난 염려와 외로움,혼동과 두려움을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속에 널리 울려 퍼지게 하는것이다. 이런 긍휼어린 기도는 긍휼어린 행동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기도와 행동은 절대로 모순되거나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행동없는 기도는 무력한 경건주의 가 되기 쉽고, 기도없는 행동은 의심스러운 조작으로 전락해버린다. 기도가 우리를 긍휼어린 그리스도와의 좀더 깊은 연합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동반한다. 신약의 저자들 중에서 구체적인 섬김의 행동에 대해서 야고보만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7) 또한 그리스 로마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체적인 섬김의 중요성을 말한다. '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는데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습니까?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당장먹을 양식이 없는데 여러분중에 누구든지 그사람에게 평안히 가세요, 몸따뜻하게 하세요, 배부르게 지내세요. 라고 말하면서 정작 필요한것은 주지 않는 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자체가 죽은것입니다.(야고보서 2:14-17) 그리고 아브라함과 라합의 삶에서 믿음과 행위가 어떻게 작용하는 지 설명하고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것 이니라.(약2:26) 예수님또한 진정한 제자도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것을 집요하게 강조하신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들어가는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니라(마7: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말이 아니라 행동인것이다. 긍휼어린 행동을 할때에 때로는 맞대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과 사회구조속에서 악의 힘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단호한 맞대결이 불가피 해지는것이다. 선지자들의 전통이 이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며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직하고 솔직한 맞대결은 긍휼의 진정한 표현이다. 맞대결없는 긍휼은 아무런 열매도 없는 감상적인 동정으로 쉽게 퇴색하고 만다. 중요한것은 이러한 맞대결은 겸손해야하며 긍휼은 품은 맞대결이어야한다. 우리의 맞대결이 공격적인 것이 아니라 긍휼어린것인지, 또한 자기의 의가 아니라, 진정한 의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최선의 기준은 우리 역시 그런 맞대결을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는지 자문해 보는것이다.

우리가 인종차별의 불의 를 보고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완고함을 직시하는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의 굶주림에 대해 '아니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부요함을 깨달을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전쟁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내려놓아야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압제와 고문에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자신자신의 타인의고통에 대해 무감각함을 솔직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우리가 표현하는 모든'아니오'는 우리자신의 회심을 요구한다. 이런의미에서 맞대결은 항상 자신과의 맞대결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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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쓰는동안 한가지 의문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그것은 우리처럼 잘먹고 잘입고 잘살고 잘보호받으며 사는 사람이 긍휼에 관해 책을 쓸수 있을까? 우리가 고난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할수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문자그대로 삶이 깨어진 사람들과의 결속으로 진솔하게 들어갈수있을까?우리는 이책을 쓰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가정에대해 읽고 원주민을 체계적으로 살상하고 있는 행태에 대해 들었으며 세계곳곳 사람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투억시키고 고문하는 실상을 매일매일 접하였다. 때로 이런 소식들은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들어와서 우리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유혹을 계속 뿌리쳤다. 우리의 글이 위선을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이세상속에 있는 엄청난 불의에 맞대결해서 그것을 없애 버리는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우리의 신실한 열망의 표현이 될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긍휼은 고된 작업이다. 긍휼은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부르짓는것이다. 긍휼은 그들의 상처를 돌보아주고 그들의 삶을 돌보아 주는것이다. 긍휼은 정의를 위해 투쟁하며 불의한자들을 강력하게 고발하는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긍휼은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내려놓는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글쓴이 : 大命敎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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