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하나님
존 오트버그 지음 / 구지원 옮김 사랑플러스 / 2006년 7월
10000원
▣ 저자 존 오트버그
수년 동안 시카고 윌로크릭 커뮤니티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섬기다가 현재는 샌프란시스코의 멜노 파크교회를 섬기고 있다. 평범한 소재를 사용하여 평범하지 않은 메시지를 풀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그는, 이 책에서도 ‘누더기 인형’이라는 신선한 비유를 통해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사랑을 독특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설명했다. 저서로는 『평범 이상의 삶』,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야기』, 『물 위를 걸으려면 단순하게 믿으라』 등이 있으며 <크리스처니티투데이>지와 <리더십 저널> 등 여러 잡지에도 기고하고 있다.
▣ 역자 구지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했다. 역서로는 『헌금의 기쁨』,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만족』, 『그림으로 읽는 스펄전 전기』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 받을 만해서 사랑 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 받을 수 없을 때 사랑 받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누더기를 입으셨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랑이다. 기대하지도 못했던,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랑 이야기이다. 그 사랑 때문에, 천지의 주인이 이 세상의 종이 되셨다. 유일한 생명이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 가장 빛나는 분이 누더기를 입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사랑을 보이셨다. 친히 그 사랑이 되셨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머리에서 심장으로 옮겨 줄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차례
1. 이성을 넘어선 사랑
2. 사랑은 관심이다
3. 순결한 감염
4. 두 번째 기회
5. 당신은 어떤 집을 짓고 있는가
6. 만나와 해피밀
7. 우회도로
8. 사랑은 은혜에서 시작된다
9. 아무도 희생되지 않는 선택
10. 더할 수 없이 안전한
11. 숨바꼭질
12. 누더기 하나님
이성을 넘어선 사랑
인간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진리가 있다. “우리는 모두 누더기 인형이다.”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누더기 상태에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연약함에 고정시켜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누더기 인형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누더기 상태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어떻게든 우리를 사랑하신다. 인간에게는 전적인 타락조차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당신에게도 신비가 있다. 누더기는 당신의 정체성이 아니다. 누더기는 당신의 운명도, 나의 운명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사랑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고는 그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사람들은 사랑을 경험할 때 사랑스럽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에로스라는 하나의 사랑 위에 당신의 삶을 건축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당신은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큼 충분히 예쁘고 똑똑하고 강하고 영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이길 수 없는 경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누더기가 드러나게 될까 두려워질 것이다. 누더기 인형에게는 단순한 에로스보다는 더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사랑이 필요하다.
그런 사랑이 여기 있다. 이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 안에 가치를 창조한다. 누더기 인형을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물로 변화시키는 사랑이 있다. 누더기가 된 작은 피조물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계산을 초월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존재로 만드는 사랑이 있다. 바로 ‘이성을 초월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당신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바로 그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봉이 드러난 때는 우리가 죄 많고 사랑스럽지 못할 때였다. 선지자 이사야는 수천 년 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우리는 죄와 죄책에 의해 너무나 큰 손상을 입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유일한 길은 인류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없으셨다. 그래서 회복 수술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은 더러운 옷을 바꿀 수 있는 곳으로, 죄와 죄책을 제거할 수 있는 곳으로 인류를 인도하고자 하셨다.
그런 곳이 정말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항상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셨다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만약 내가 정말 누군가를 위한다면, 그리고 고통이 그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고통스런 일들을 하고자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주님도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훈련하셨다. 참된 사랑은 필요하다면 기꺼이 경고하거나 꾸짖거나 훈계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자라고 꽃 피우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우리 스스로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이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다. 사랑은 “저 사람은 사랑받을 수밖에 없어!”라고 외친다.
이것은, 사랑의 기쁨이 사랑 노래에서 가장 깊게 표현되는 이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신다. 시편 기자는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말한다. 당신은 아버지의 시선에 반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은 눈이 먼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만이 대상을 정확하게 본다. 보되 이중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은 오직 하나님께만 보이는 우리 안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바깥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결국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사랑은 주는 것이다. 주는 것은 사랑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구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로 시작한다. 주는 것은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종이 되지 않는 사랑은 기초 골격을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사랑을 지탱해 줄 것이 없다.
사랑할 대상에게서 가치를 찾는 사랑이 있다. 지위와 부와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사랑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있다. 매일 그 사랑을 본다. 하지만 여기, 사랑받는 대상에게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사랑이 있다. 당신과 나와 같은 누더기 인형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성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사랑이다. 만약 당신이 허락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재건 수술을 시작하실 것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요일 3:1-2).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라. 그리고 나의 누더기 인형들을 사랑하라.” 이것은 패키지 거래다.
사랑은 관심이다
인생의 위대한 기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그토록 자주 언급하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전 생애를 무시당하면서 살았던, 누가 보기에도 가치가 없는 한 남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소경이었고 거지였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은, 그를 보셨다. 의존과 익명의 세월을 살아 온 한 인생의 상처와 실망을 보셨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본 적은 없었다.
예수님이 이 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자 제자들도 그에게 주목했다. 제자들은 묻는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일반적으로 당시 사람들은 고통과 죄 사이의 인과관계를 믿었다. 어떤 사람을 정죄해 버리면, 우리는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눠야 할 의무감을 보다 덜 느낀다. 그리고 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제자들은 그저 흥미로운 신학적 토론의 대상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오셨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찾고 계신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면 보셨을 것을 나도 보고, 예수님이라면 보이셨을 반응으로 나도 관심을 갖고 반응하는 것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보는 영적 분별력으로 인해 눈이 멀어 있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요 9:16)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명기 5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안식일의 목적 중에는 소외된 이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도 있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린이와 종과 이방인에게도 확대 적용되어야 했다. 모든 이들이 안식할 수 있게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전에 소경이었다가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해 준 이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기뻐할 이유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 남자를 소환하여 심문한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한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것(그들은 세 차례나 “우리는 … 아노라”고 말했다)과 이 남자가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그는 세 차례나 “내가 알지 못하나”라고 말했다)을 계속 대조한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이제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요 9:27).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진실에 눈이 멀었는지 볼 수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헌신된 자들로 여기지만, 지나치게 자신들에게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하나님이 다가오시려 할 때에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토록 신실하게 섬긴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경’이라는 말 외에 달리 무슨 말로 그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첫 번째 일은 그분께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 그분의 백성조차도 영적인 소경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곧, 우리의 본성상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일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해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우주의 하나님이요, 하늘과 땅의 창조자란다. 내가 네 몸을 설계했고 네 세계를 형성했고 네 잠재력을 창조했단다. 내게는 지혜와 보호와 너와 의사소통하길 원하는 사랑이 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구나. 네 입과 마음과 삶은 너무나 시끄럽구나. 나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을 거다, 사랑한다, 얘야. 하지만 넌 네 입에 단추를 달아야겠구나.”
바실 페닝턴은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기 위한 ‘잔잔함’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호수의 비유를 든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은 넓은 파장을 만든다. 하지만 오직 호수가 잔잔할 때만 그렇다. 호수가 조용하고 잔잔할 때 돌이 들어오면 그것은 전 수면에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호수가 잠잠하지 않을 때, 이미 수면이 어지럽게 흔들릴 때에는 돌이 들어왔는지를 감지할 수 없다.
바람이 수면을 흔드는 곳에서는 돌이 파장을 일으킬 수 없다. 폭풍우가 치는 곳은 더욱 그렇다. 그 파장은 수면의 미친 듯한 움직임 속에 묻혀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잔잔함이 먼저이고 경청은 그 다음이다. 이 순서는 바뀔 수 없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만약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라. 그들을 주목하라. 특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목하라. 사랑은 행위의 한 형태다. 스캇 펙 박사는 “사랑의 행위가 취하는 주된 형태는 관심이다. 서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관심을 쏟는다. 우리는 그 사람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한다. 메릴랜드대학의 정신생리학 병원 연구소의 제임스 린치 박사는 ‘관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심장혈관 조직에 대한 진짜 치료는 ‘경청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혈압은 말할 때 올라가고 들을 때 내려갔다.
요한은 예수님이 관심의 기술에 있어서 최고의 달인이심을 설명한다. 제자들은 소경을 쳐다봤을 때, 흥미로운 신학 문제를 보았다. 이웃들은 그를 쳐다봤을 때,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보았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쳐다봤을 때, 그들은 안식일을 어긴 죄를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소경을 보았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보셨다. 예수님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를 보셨다. 예수님은 보셨고 감동을 받으셨다. 때로는 눈물로 반짝이고, 때로는 분노로 번쩍이며, 때로는 기쁨으로 춤추는 그 눈으로 보셨다.
평생 소경이던 이 남자는 새로운 눈을 선물로 받았다.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말이다. 그는 평생토록 소중히 여길 장면, 즉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최초이자 최고의 장면은 자기를 치료하신 그분의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은 자기를 잊지 않으셨음을 알았다. 무시당하며 산 세월을 끝내고, 이제 하나님이 누더기 인형 중 가장 비천한 자에게조차도 얼굴을 돌리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눈물을 세시는 분이다.
순결한 감염
마가복음에는 끔찍한 질병에 감염되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누구도 그를 만지는 것은 물론 근처에 다가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그를 만졌다. 이 이야기는 끔찍한 질병에 감염된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만지셨다. 그것은 당신과 나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당신과 나를 만지셨다.
예수님 시절의 종교 지도자들은 ‘격리의 전략’이라는 것을 선택했다. 문둥병자들, 이방인들, 세리들, 여성들,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을 흑사병자처럼 피했다. 그들과는 함께 먹지도, 함께 이야기하지도, 함께 일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전략의 배후에 있는 사상은 죄와 고통에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고통을 피하는 방법은 노출될 위험이 있는 사람과 장소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영적인 격리구역 안에 사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이러한 전략의 문제는 세상을 ‘우리’ 대 ‘그들’의 관점으로 보게 된다는 점이다. 격리구역은 가장 파괴적인 죄인 교만, 배타주의, 자기 의를 키우는 온실이 된다. 격리되면 사랑은 죽는다. 겸손과 긍휼과 영혼의 관용은 모두 질식해 버린다. 우리는 격리의 전략이 가져 온 최종 결과물을, 대량학살을 ‘인종 청소’로 미화한 구 유고슬라비아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즉 ‘남들’을 제거되어야 할 오물로 간주했다.
하나님은 격리의 전략을 철저히 거부해야 함을 예수님 안에서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분이셨다. 문둥병자만이 아니었다. 창녀와 세리, 이방인 등 온갖 종류의 누더기 인형들이 예수님께 다가갔다. 그러나 랍비들은 점점 종교적이 될수록 점점 더 다가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의 참된 영성은 누구든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힘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손길을 통해서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먼저 그를 손으로 만지셨다. ‘문둥병자가 아직 부정할 때에’ 그를 만지셨다.
적어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문둥병자를 만진다는 것은 문둥병에 감염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지자 ‘즉시’ 문둥병이 그를 떠났다고 말한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게 자기 병을 감염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에게 자기 생명을 감염시켰다! 이것이 바로 ‘순결한 감염’이다. 예수님 안에 넘치는 생명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문둥병은 그 생명과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질병과 죄와 고통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열정과 웃음과 믿음도 전염된다. 이것들을 소유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 보라. 그러면 열정과 웃음과 믿음에는 잡아끄는 힘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두 번이나 강조하셨다. 누룩은 전염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바리새인들의 ‘판단하는 마음’은 전염될 것이다. 죄는 그런 식이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그들의 종교의식으로 예방접종을 했다. 믿음에 대항하는 예방접종은 자기 의를 복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누룩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여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멈출 수 없다. 예수님 이래로 누룩은 일하고 있다.
영적인 삶의 비결은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격리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오염된 이 땅에서 사셨지만 죄는 전혀 없으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이 땅에서 정결해지는 유일한 비결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세상을 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우리를 감염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감염시키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집을 짓고 있는가
30년 전, 나는 바이에르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내 여동생과 나에게 5년간 피아노를 가르쳤다. 바이에르 부인은 전형적인 독일인이었다. 그녀는 5년간 우리 가족의 삶을 지배했다. 다른 피아노 선생님들은 기준을 꽤나 낮게 정한다. 연습은 할 수 있을 때에 하도록 하고, 그 페이스에 맞춰 진도를 나가는 등 말이다. 그러나 바이에르 부인에게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꾸짖고 명령했다. 어린 나이의 수준을 고려해 주지도 않았다. 누구든 그녀의 학생이 되면 그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했다.
우리는 그녀가 내 준 분량을 그녀가 요구한 시간 동안 연습했다. 하루에 30분씩 연습하라고 말하면, 하루에 30분씩 연습했다. 우리는 메트로놈을 그녀의 속도에 맞췄다. 허락받은 자세로 앉았고, 그녀가 말해 준 정확한 각도로 손가락을 구부렸다. 피아노 선반에 부딪히지 않도록 언제나 손톱을 짧게 깎았다.
바이에르 부인에게는 사람들이 그녀를 선생으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번은 그녀가 우리 부모님께 우리 집에 있는 피아노를 새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는데, 부모님은 바로 그 다음날 피아노를 새로 샀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던 십대 시절, 우리는 더 이상 그녀의 학생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레슨을 받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레슨이 아주 재미있었던 적도 종종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말 훌륭한 연주를 해 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이 그런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가끔 그녀는 우리를 앉혀 놓고 모차르트나 베토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다. 우리는 너무 황홀해져서 마치 또 다른 세계로 보내진 것 같았다. 그러면 그녀는 믿기 어려운 말을 하곤 했다.
“만일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내 손에 너희를 맡긴다면, 내가 너희에게 시킨 일을 한다면, 언젠가는 너희도 내가 하는 것을 할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너희 안에 음악이 있게 될 거야.”
그러나 당시 그 말을 깨닫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거나 어리석었다.
바이에르 부인이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 그녀의 손가락은 오그라져 있거나 구부러져 있었다. 그녀는 심한 관절염 환자였다. 고통 없이는 단 한 개의 건반도 누를 수 없었다. 그녀가 우리를 위해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흔들릴 때까지 라흐마니노프를 완주하려면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했다. 그녀는 우리가 음악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길 원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이 위대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견뎠다.
모든 위대한 선생들이 그렇듯이, 그녀를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은 사랑이었다. 음악에 대한 사랑, 학생에 대한 사랑……. 진실로 위대한 가르침은 언제나 사랑의 표현이다.
모든 부모도 이것을 안다. 이것이 자녀들이 걸음마를 배우도록 설득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쏟는 이유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들으면서 신나 하는 이유다. 냉장고에 아이의 그림을 빼곡히 붙이는 이유다.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억지로 레슨을 받게 하고, 부모가 훨씬 더 빨리 할 수 있음에도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돕도록 시키는 이유다.
우리는 헬렌 켈러의 영혼을 일깨웠던 설리반 선생의 이야기에서 이것을 본다. ‘홀랜드 오퍼스’나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영화가 우리를 감동시킨 것도 이 요소다. 위대한 선생들은 단순히 정보와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 이상을 한다. 그들은 우리의 누더기 됨을 초월해서 본다. 그들은 우리의 지성과 감성에 새로운 세계를 활짝 열어 준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를 그들의 선생으로 받아 달라고 요구하신다. 그분은 혈과 육을 가진 인간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셨다. 그분에게 주목하고 경청하던 사람들은 황홀하게도 새로운 세계로 보내졌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감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여기에 너희의 기회가 있단다. 만약 너희가 나를 신뢰한다면, 내 손에 너희 생명을 맡긴다면, 내가 너희에게 하라고 시킨 일을 한다면, 언젠가는 너희 안에 ‘음악’이 있게 될 거야.”
가르침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을 선생으로 신뢰할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선생으로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길 원한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중요한 선물을 받아야 한다. 바로 그 분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을 내 삶의 개인 교사로 초청해야 한다.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옳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집을 짓는다. 당신도 당신의 인생을 건축하고 있다. 당신이 하는 선택의 질은 당신의 성품과 영혼의 질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집에 대한 책임이 있다. 폴 트루니에는 “산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잇따른 결연한 선택을 통해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선택에 실망할 것이 두려워 선택 자체를 회피해도 당신이 사는 집은 그곳이다. 혹은, 실망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꾸물거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그 집에서 산다. 우리는 모두 집을 짓는 자다. 다른 대안은 없다. 우리는 인생을 건축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또 하나의 공통적 특성은 누구나 폭풍우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마 7:25, 27). 집의 안전도가 드러나는 것은 폭풍우가 칠 때이다. 어느 날 우리 집의 진실성이 드러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들이 내 집을 통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나는 모든 일들을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로 보기 위해 애써야 한다. 예수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면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안전할 수 없다. 결국 언젠가는 파멸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생으로 오셨다. 어리석은 건축자들에게 확실한 기초를 주기 위해 오셨다. 부주의한 아기돼지 삼형제에게 안전히 거할 장소를 주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는 그분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건축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갖기 힘든 최대의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같은 누더기 건축자들로서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랑의 벽돌이다. 그분은 자신의 지혜를 우리에게 나눠주셨다. 당신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당신의 선생으로도 오셨음을 잊지 말라.
자, 아기돼지여.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짚으로 짓겠는가, 아니면 벽돌로 짓겠는가? 모래 위에 짓겠는가, 아니면 반석 위에 짓겠는가?
누더기 하나님
우리가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주목하는 이유가 뭘까? 유한되고 제한되고 평범한 육신인데 말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셨는가? 왜 구유에 누이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왕좌나 왕관의 영광이 아니었다. 누더기처럼 죄로 가득한 비천한 평민들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그분의 영광이었다.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 4:12)라고 말한다. 이 표현의 참 뜻은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온전히 경험해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과 그림을 갖고 있지만 우리 자신의 견해와 오해가 항상 우리의 관점을 어느 정도는 왜곡시킨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 기도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이 차이를 기억할 때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사탄이 가장 꺾고 싶어 하는, 가장 위험한 기도다.
하나님은 영광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하신다. 구약에 이에 대한 힌트가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에 목말라 있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나님은 그러겠노라고 말씀하신다. 자기의 영광을 모세에게 드러내시겠다고 동의하신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출 33:19).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힘이나 위엄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들이 위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그분이 얼마나 순전하시고 변함없이 선하신가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온전히 알기 위해, 인류는 갈릴리 출신의 목수를 기다려야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영광과는 달랐다.
엘리 위젤은 우리 시대에 인생의 누더기 됨에 대해 잊혀지지 않는 글을 남겼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소설가인 위젤은 청년 시절에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거기서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을 잃었다. 그는 그런 끔찍한 고통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가 쉽게 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은 가마로부터 하늘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나는 그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첫날밤이었다. 그 시간은 내 인생을 하나의 긴 밤으로 바꿔놓았다. 일곱 번 저주했고 일곱 번 밀봉했다. 나는 그 연기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몸뚱이가 조용한 푸른 하늘 아래 연기가 되어 피어오르는 걸 보았다. … 나는 나에게서 삶의 소망을 영원히 빼앗아 버린 그 한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 하나님을 죽이고 내 영혼을 죽이고 내 꿈을 먼지로 만들어 버린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위젤은 또한 슬픈 얼굴을 한 열세 살 소년을 공개적으로 목매달았던 사건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어디 계시냐고? 내 뒤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독일병사들은 모든 수감자들의 뇌리에 ‘무조건 복종’을 심어주기 위해 교수대 앞으로 행군하며 그 소년의 모습을 보게 했다. 30분 이상 그는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투쟁하면서, 우리의 눈 앞에서 서서히 고통으로 죽어 가면서…… 내 뒤에서 좀 전의 그 사람이 또 다시 물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지?“ 그리고 나는 내 안에서 한 목소리가 그에게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여기에 계시다. 그분은 지금 이 교수대에 매달려 계신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인 프랑소와 모리악은 위젤에게 반드시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진실을 반드시 세상에 보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위젤은 모리악에게 자기의 첫 번째 책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 서문의 끝부분에는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위젤이 처음으로 모리악을 찾아와 물었던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모리악이 썼던 글이 적혀 있다.
그의 눈은 목 매달린 소년의 얼굴 위에 나타났던 천사의 슬픔을 여전히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는 내가, 이 질문을 던지는 젊은이에게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와 닮은 그의 형제, 그 이스라엘 청년에 대해 말했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그분의 십자가는 세상을 정복하지 않았던가? 그의 믿음의 걸림돌이 내게는 모퉁이돌이라는 사실을, 십자가와 인간의 고통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믿음이 사라진 곳에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내가 설득했던가? … 우리는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의 가치도 모른다. 영원이 영원하다면, 우리를 위한 마지막 말은 그분께 속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유대인 소년에게 해야 했던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를 끌어안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과 죄는 십자가로 인도될 수밖에 없다. 항상 십자가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십자가에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7:1).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권력과 지배와 통제의 ‘영광의 신학’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신학에 기초한다고 말했다. 그러한 영광은 예수님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그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빛으로 하나님을 볼 때 그분의 영광을 가장 분명하게 본다.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분이 타락하고 평범한 인간에게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만군의 주께서 자발적으로 만물 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천지의 창조주께서 톱과 망치와 못을 사용해서 의자와 탁자를 만드실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만주의 주께서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생명의 조성자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죽음이 그분을 붙잡을 수 없고 무덤도 그분을 가둘 수 없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영광 중의 영광은, 어느 날 그분이 자기의 위엄과 기쁨을 내려놓고 당신 집 문을 두드리러 오셨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분은 오직 당신만을 위해 오셨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의 기도 손기철 지음 규장 문화사. (0) | 2022.03.04 |
---|---|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손기철 지음, (0) | 2022.03.04 |
하나님을 아는 지식 (0) | 2022.03.04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지은이 : 쟈크 엘룰 출판사 : 대장간 (0) | 2022.03.04 |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에이든 토저, 생명의 말씀사) (0) | 2022.03.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