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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좁은 문(눅 13:22-30)

by 【고동엽】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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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좁은 문(1322-30)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현대인에게는 고질적인 정신병 같은 세 가지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안일주의요, 둘째는 상대주의, 그리고 셋째는 실리주의라고 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물질 문명은 사람들을 매우 편리하게 해주었습니다. 옛날에는 몇 달 몇 년이 걸려야 갈 수 있었던 거리를 지금은 자동차나 비행기로 불과 몇 시간 혹은 며칠이면 갈 수 있으며, 어느 계절이든지 원하기만 하면 사시사철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등 현대는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특히 요즈음은 동전을 넣고 원하는 상품의 버튼만 누르면 상품이 나오는 편리한 자동 판매기까지 있습니다.

물을 마시고 싶을 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점점 더 편리한 것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환각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리화나라는 환각제를 애용하는 미국 젊은 대학생들에게 어떤 상담자가 그 애용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젊은이들의 대답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나서, 물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수도꼭지를 틀거나 마시는 동작 없이도 시원해지고, 몸이 위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진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태여 피서 간다고 고생할 필요 없이 바다에 왔다고 생각하면 바다가 환하게 보이고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리는 바다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안일주의가 극에 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두 번째 문제는 상대주의입니다. 요즈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 물론 말 자체에 모순이 있지만 현대인들은 어떤 일에 임할 때 먼저 '이것은 절대가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오늘은 내게 절대적인 규범으로 임하지만 내 일은 달라진다는 이런 상대주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흐려 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젊은이들은 피땀 흘려 애쓸 것도, 뼈아프게 의로울 필요도 없다는 경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단 하나만은 절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내일이면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받은 사랑만은 절대적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절대적이지를 못합니다. 그렇게도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가 등을 대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곤을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영속하지 않는다는 이 상대주의 철학은 현대인을 비인간화된 세계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세 번째 경향은 실리주의입니다. 이 말은 결과주의와 서로 통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방법과 과정은 전혀 문제시하지 않고 오직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이러한 병리적인 철학이 그대로 스며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한 십자가의 고뇌와 고난은 제쳐놓고 다만 자신의 축복만을 구하고 이적만을 구합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한 뼈아픈 회개보다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재앙이 내릴까 두려워하여 안일한 용서만을 구합니다.

미국인들의 격언에 "차선(次善)은 최선의 최악의 원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실리주의, 실증주의, 혹은 실용주의(pragmatism)를 추구하는 이들은 항상 차선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영어에 맹랑한 두 단어가 있게 되었습니다. 차선(Second-Best)이라는 말과 최선 중에 하나(One of best)라는 말입니다. 최선은 오로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차선'이라는 말도 '최선 중의 하나'라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의 실용주의 철학은 '최선은 없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선만을 논할 뿐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더욱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값싼 은혜가 우리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원수다. 우리는 오늘 값비싼 은혜를 위해 싸우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인들은 너무나도 헐값의 은혜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을 받겠다고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도 하지만 너무나 값싼 복만을 구합니다. 왜 좀더 값비싼 복을 구하지 못하고 겨우 썩어 없어질 내 육체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이런 헐값의 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치명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들어 아시겠지만 예언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에 사는 누구에게 가서 기도를 받으면 그 사람의 운명을 말해준다고 합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고, 또 장래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잘 살 테니까 걱정 말라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이것이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들은 예수님 없는 교인들입니다. 한국의 원시종교인 샤머니즘이 교회 안에 침투한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기독교 무당(Christian-shaman)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현상은 '십자가 없는 은혜'만을 갈구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 번도 십자가를 떠나서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있고서야 부활이 있으며, 피를 흘린 죽음이 있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희생 속에서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한국 교인들은 십자가 없는 은혜를 논하며, 십자가는 예수가 졌으니 나는 평안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져주기를 바라는 식의 신앙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언제나 훈련을 통하여 주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식인이 되려면 공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은혜를 받기 위해 고된 훈련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훈련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적어도 욥이 당한 것과 같은 시련과 고난을 요구하십니다. 또한 그의 시련과 고난은 더 큰 은혜를 주기 위한 훈련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훈련 없는 은혜를 원하는 것은 망상이고 미신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본문에서와 같이 "구원 얻을 자가 없습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많고 적음을 말씀하지 않고 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만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 하반절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많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까닭은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혹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고 두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유대인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들은 못 들어간다는 대답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절대로 마술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격적인 것입니다. 어려운 시련과 훈련을 통하여 믿음을 얻게 하고 고백하게 하시며 강건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좁은 문입니다. 어떤 때는 좁은 길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이 길은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이라서 고독한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도 외로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예수님이 고독하게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구절에서 '힘쓰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영어로는 'strive'(노력하다)로 되어 있지만 원어로는 '아곤'이란 말로 되어 있습니다.

'아곤'이란 말의 뜻은 '고뇌'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 본문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은 마음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통을 치렀는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혹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성경 말씀을 보았습니다.'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믿음을 갖는 그 순간 자동적으로 또는 마술적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법적 관계만을 말할 뿐입니다. 우리의 노력을 배제한 말씀은 절대로 아닙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행함으로 얻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계시록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이 없고,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행함이 그를 따른다. 혹은 그의 행한 바가 그를 이룬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란 산 믿음이 보여주는 행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불법적인 행함이나 도덕적인 행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기 위하여 힘써 행함으로써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문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가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도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진실하게 산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적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말의 진실한 뜻은 계속적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한 번 진실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고통 속에서 계속 진실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의 갖은 고문과 학정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키고 진실했던 사람들이 해방된 후 좀 편해지고 구호 물자를 넉넉히 받자 믿음이 흐트러지고 탐욕스러워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한 순간 진실하기는 쉽고 한 번 충성하기는 쉽지만 계속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 같으신 분도 4년반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다가 마지막에 이런 기도를 했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이대로 계속하면 저는 순교할 수가 없습니다." 한두 번은 그런 대로 고통을 참을 수 있었지만 4년이 지나니 도저히 더 이상은 참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는 많지만 끝까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은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계속 힘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한 번 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그 문을 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좁은 문은 공간적으로만 좁은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지하시면 우리에게 다시는 그 곳으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오늘이 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타임지에 실려 있는 시계 광고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오래도록 들여다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방주를 만든 후 큰 홍수가 나니 그를 비웃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미 닫힌 방주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으나 이미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고 기회를 놓친 많은 사람들이 물에 그대로 떠내려가고 있는 내용의 그림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 앞에 충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회개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진실하고 싶을 때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네 번째는 닫힌 문 밖에서 열어 달라고 두드리던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우리가 다니는 길에서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 앞에서 먹고 마셨고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조건은 못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신학 박사이며 목사님인 한 학생이 미국의 어느 신학교로 공부하러 갔습니다. 어떤 신학생이 그에게 "당신 구원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이 저명한 신학 박사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가 신학교 교장입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자 그 신학생은 "당신 아버지가 신학교 교장인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고 의아해 하면서 반문을 하더랍니다.

우리도 가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십니까?"하는 질문에 "내 아버지가 어느 교회 장로요" 혹은 "내 아내가 어느 교회 집사입니다"라고 대답한 적은 없습니까?

기독교 문화권 속에 사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또 일상 생활 속에서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그야말로 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삽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내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심지어는 성경구절을 능란하게 암송한다 하여도 그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성경 암송 대회라는 것은 생각해볼 때 문제가 있습니다. 원래 이 성경 암송은 처음 한국 교회가 시작될 때에 '네비우스'라는 학자가 "한국 사람들은 무식하니 예배는 보지 말고 성경 암송만 시켜라" 하는 선교 정책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은 하지 않고 단순하게 암송하게만 한 것이 현재까지 계속 내려온 것입니다. 성경을 누가 가장 많이 암송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받아들여 생명의 말씀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들었고 그 가르침의 일부를 암송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생각할 것은 기득권(旣得權)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삼십 년씩 교회에 나와 주님을 믿었다는 관록이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옆에 있던 한 강도는 단 한 시간 예수를 믿고서도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까? 오래 믿었다는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하늘나라에서는 기득권이나 관록 또는 공로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잘 믿었다는 것, 심지어는 예수님 이름으로 병을 고쳤다는 것들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이 시간 내가 어떻게 믿느냐 혹은 내가 어떻게 끝냈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도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문 밖에 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722)라고 할 때에 주님이 가로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관록이나 공로나 기득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며 사는 현재적인 신앙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생각할 것은 좁은 문에 들어가려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지금의 남대문처럼 큰 성문이 하나 있고 그 옆에 조그만 문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큰문은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에 일정한 시간이 되면 닫아 버립니다. 그러나 그 옆의 조그만 문은 늦게까지 열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짐을 내려놓아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할 때 우리의 명예와 돈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현실적인 욕망들을 다 짊어지고는 들어갈 수 없음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좁은 문, 우리는 어려운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값비싼 은혜만을 구하도록 합시다. 우리를 유혹하는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교인이 되기 바랍니다. 마치 이 무더운 여름, 남들은 바캉스다 휴가다 하며 즐기려는 이 때에 어떤 목표를 위해 땀 흘리며 책과 씨름하는 학생과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넓은 세상을 한없이 넓게 살려던 저희들을 불러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지난날 우리가 얼마나 넓은 길을 활보하였었고, 얼마나 사망을 향해 줄달음쳤었던가를 깊이 반성하게 하여 주옵시고, 의롭고 고달픈 그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얻으신 생명을 우리도 종국에 가서는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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