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권능의 성령(사도행전 1:4-8)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나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정․의로서 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과 의지적인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균형입니다. 대체로 지적인 사람은 의지에 약하고 감정적인 사람은 지성이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또 의지적인 사람은 분위기가 부족하고,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가 의지가 약하며 변덕이 많습니다. 그리고 보면 사람의 심리가 그 어느 쪽으로든 조금씩은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성 쪽으로, 어떤 이는 감정 쪽으로, 혹은 의지 쪽으로 다소 기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완벽한 줄로 착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시비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인간은 드뭅니다. 그러나 원리적으로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적절하게 균형이 되고 합쳐질 때 비로소 힘이 되고 온전한 인격형의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이라 함은 대체로 과거에 의한 합리적인 이해입니다. 고로 지식이 많다는 것은 지나간 얘기를 많이 안다는 것입니다. 역사이든 과학이든 어쨌든 지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란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함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깊은 곳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많아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분명하나 지금 현재 어떤 사건에 부딪치게 되면 한 가지도 처리하지 못하고 당황합니다. 이 사람은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가 지식보다 더 소중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능력입니다. 알기도 하고 깨닫기도 했지만 능력은 별개의 것입니다. 능력은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는 새로운 생명적인 힘이요, 내적인 동력입니다. 이것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그 지식으로 용기가 생길 것 같지만, 알면 알수록 잔소리만 많아지고 점점 약해집니다. 생각만 복잡해질 뿐입니다.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확신에서 합리적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고 깨닫고, 느끼고 그리고 가르치면서도 자기는 나약하여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에서 오는 능력의 활동이 없는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3년 동안 역사 하시는 중에 기록상으로 보면 대략 삼분의 이의 시간을 제자 훈련에 소비하셨습니다. 많은 시간을 가르치셨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에게보다는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정력과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고, 보여주고 때로는 실습도 했습니다. 제자들만 보내시며 내 이름으로 전도하고, 귀신 쫓고, 병도 고치라고 실습을 시킨 것입니다. 제자 편에서 보면 그들은 들었고,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요한일서 1:1에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즉 완전히 깨닫고 완전히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으며 자기 체험에 그쳤습니다. 좋은 예로, 수제자 베드로는 원래 갈릴리 어부였는데 주께서 불러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3년 동안 보여주셨고, 가르쳤고, 또 수제자로서 권위도 부여하셨습니다. 3년 동안 완전히 예수님과 동행했고 십자가 사건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도 만나는 경험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일을 위해 돌아갔습니다.
친구 6명과 함께 3년 전에 버렸던 그물을 다시 잡고 밤 새워 고기를 잡으려 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보았고, 들었고, 경험했고, 깨닫기까지 했지만 무기력했습니다. 알았지만 행할 수가 없었고 합리적인 이해가 있었지만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끊어야 됨을 압니다. 그러나 끊지 못하고, 가야 할 줄 알지만 가지 못합니다. 용서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남에게 가르치기도 하지만 자기는 용서 못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지식이 능력을 준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가 능력의 전부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능력은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의 뜻은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된 줄을 아느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알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장담도 하고, 결심도 했지만 사랑이 없어서 비겁해진 것이다라고 그의 실수를 분석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무기력의 원인은 사랑과 믿음의 결핍에서 온 것입니다.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그 비참한 형편과 원인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여라." 너는 물고기를 잡을 것이 아니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와 같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와 같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나의 심부름꾼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버리고 그의 일이 더 좋아서 따르겠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을 내 뜻대로 못하는 데 있습니다. 내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으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또 다른 은사입니다.
지식의 결과라고 말하지 말고 못나서 그렇다고 말하지 맙시다. 마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마음의 불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본문 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8절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다리라, 받으리라, 되리라, 이 세 마디는 아주 중요합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증인이 되라고 다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증인될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줄 알고 선행을 해야 되는 줄 알지만 안 되는 것을 어떡합니까? 마음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49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위로부터 능력이 내려와서 그 능력에 붙들릴 때까지 이 성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그분이 하실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능력을 힘입으면 성령을 받을 것이고, 받으면 능력을 얻을 것이요, 능력을 얻으면 증인이 될 것입니다. 증인이 되겠다고 우리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힘입어야 합니다. 알고, 느끼고, 깨닫고, 결심했어도 무기력합니다. 위로부터 능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생기기 전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결심이 아니라 다만 위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의 불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란 단순한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이요, 순종과 헌신과 인내의 마음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기간이 없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이 주어질 때까지는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그의 능력에 의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준 바를 알게 하리라 깨닫게 하리라 감당하게 하리라 기억나게 하리라." 사도행전 1:8에는 "권능을 받으리라", 즉 권능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에서는 각종 가전제품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리하지만 정전이 되면 무용지물입니다. 지식도, 경험도, 지혜도 좋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끊어지고 나면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맙니다. 거치장스럽기만 합니다. 성령 없는 지식은 망상이며, 성령없는 용기는 만용입니다. 성령 없는 고집은 우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내 지식과 경험의 모든 것이 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귀하게 쓰여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의 특징은 능력이며, 권능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증거의 능력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하고 사랑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사랑과 용기에 담대함을 주어서 증인 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은 자기를 이기게 하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받은 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정욕과 자기 본위적인 이기심이 다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고집하지 않고 서로 유무상통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자기 나약성을 이기게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그는 어부였고 무식했으며 수제자였지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었고 갈릴리로 도망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체면으로 수많은 사람 앞에서 감히 예수를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임할 때 베드로는 자기 갈등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자기 갈등처럼 사람을 스스로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거의 재기 불능입니다. 이러한 자기 갈등을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로 극복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운 과거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자기의 갈등을 극복하는 능력을 입었습니다. 죄를 이기고, 가책을 이기고, 율법을 이기는 능력이 성령에 있습니다.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룸 8:2). 성령의 법이 우리를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협소한 민족주의, 풍습, 전통적인 관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용기도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먹고 유하며 세례까지 주었습니다. 이 문제에 시비가 붙었을 때 "누가 성령을 거역하겠느냐"고 베드로는 되물었습니다. 성령이 있습니까? 말하는 것, 이치를 노하는 것,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냐? 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이같이 성령은 협소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과 고집을 다 버리고 자유하게 했습니다. 개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고난을 이기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에 고난이 무섭고 죽는 것이 두렵고 핍박이 싫어서 사랑하는 주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는 죽음이 문제되지 않고 담대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렇게 기탄 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고난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41에 보면 그는 무지하게 매를 맞고 감옥 문을 나설 때 '이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을 기뻐하며 감옥을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매맞고 좋아하며, 고난받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고난받는다고 저주라 생각하고, 고난받는다고 복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 받은 자는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압니다. 고난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압니다. 그러기에 고난을 기뻐합니다.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치심이 처음에는 베드로의 귓가에 맴도는 격언이었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알았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겼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겼고, 은혜로 율법을 이겼습니다.
아는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지혜도 많은 여러분! 생명력이 먼저 임했는데 내가 어떻게 거역하겠으며, 누가 성령을 거스리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무력하고 용기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위로부터 내려지는 생명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능력, 사랑으로 말미암은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참회와 함께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약속대로 주시는 이 능력을 허락하실 때까지 겸손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 권능을 받을 때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환난을 이기고, 모순과 부조리를 이길 것입니다.
이 능력으로 능력의 증인, 권능의 증인, 승리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알고도 행할 수 없고 깨닫고도 발길을 돌리기 어려운 저희들, 나약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인 저희들, 오늘도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전날에 비겁하기 그지없었던 베드로가 이제 담대한 주의 사도가 된 것처럼 우리도 그 같은 능력을 힘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기도하고 회개하고 순종하여 주의 능력을 힘입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그 능력에 살고, 나를 이기고, 율법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를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세의 침묵(마태복음 21 : 23-32) (0) | 2024.11.27 |
---|---|
권세 있는 생활(마가복음 1:21-28) (0) | 2024.11.27 |
궁극적 관심(마태복음 6장 25절~34절) (0) | 2024.11.27 |
군중 속에 버려진 자(누가복음 8장 43~48절) (0) | 2024.11.27 |
구원의 좁은 문(눅 13:22-30) (0) | 2024.11.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