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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하박국 2장 1절~4절)

by 【고동엽】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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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하박국 214)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다 같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형태의 사람이 있고, 두 형태의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리액션(reaction)으로 사는 사람 혹은 삶이요, 또 하나는 리스판스(response)로 사는 것입니다. 반사적으로 사는 부류와 응답적으로 사는 부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복잡한 시내버스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 발등을 밟았다고 가정해봅시다. 밟히는 순간 먼저 소리부터 질러 놓고 상대방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한바탕 욕을 올려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사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아지가 꼬리를 밟히면 제 주인이건 누구건 반사적으로 물려고 덤비는 그것과 똑같은 반사작용입니다.

한편, 응답적으로 사는 사람은 물론 밟힌 발이야 아프겠지만 먼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모르고 밟은 거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구 발을 밟았는 줄도 모르겠지.' 그렇게 믿고 보면 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면 저 사람의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미안스럽고 무안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참고 견디어봅니다. 정 못 견뎌서 신음소리를 내었다 하더라도 저쪽에서 "어이쿠 미안합니다."하면 금새 이쪽에서도 ", 괜찮습니다." 합니다. 좀더 신사적인 사람은 여기에 한마디 더 덧붙입니다. "저도 종종 남의 발등을 밟지요."미안해할 사람 마음부터 생각하면서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한다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은 이 두 가지 타입의 어느 쪽에 속합니까? 만일 전자처럼 산다면 여러분은 회개할 것이 많습니다. 반사적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감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며 느끼는 대로 행동합니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고, 미움받으면 미워하고, 맞으면 때리는 식의 반사적인 행동, 반사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간 유형입니다. 그러나 응답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영국 속담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고삐 없는 말과 같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 입장에서 고삐란 어지간히 괴롭히는 물건입니다. 고삐를 잡아챌 때마다 그 턱뼈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 때문에 몸집 큰말이 코흘리개 어린아이한테도 순순히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째든 말고삐란 말한테는 몹시 고통스러운 애물단지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고삐가 말을 인도합니다. 자기가 전혀 모르던 길도 그 고삐에 끌려가다 보면 어느새 푸른 초장이 나타납니다. 그 고삐가 잡아끄는 대로 달리다가 영광을 얻는 수도 있습니다.

말이 고삐의 인도를 받듯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마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믿음 없이 사는 사람,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전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그러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어려서는 부모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부모를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어머니가 크다고 하면 큰 것이고 작다고 하면 작은 것이다, 어머니가 좋다고 하면 좋고 나쁘다고 하면 나쁘다'-이렇게 믿을 수 있어야 하겠는데 '어머니가 쓰다는 것은 달고 달다는 것은 쓰더라' 한다면 기막힌 노릇입니다. 부모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 때에 그 아이가 행복한 아이요 정상적으로 자라는 아이라 할 것입니다. 부모를 믿는 단계에서 좀더 크면 스승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못 믿고 학생노릇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도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그가 행복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친구를 믿고 애인을 믿고, 나중에는 자녀를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녀를 믿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차를 타십니까? 내가 탄 자동차를 믿어야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신호등을 믿고 교통법규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믿음이 용기를 주고 담력을 주고 지혜를 줍니다. 여러분의 담력의 소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몇 푼 안 되는 돈에 있습니까, 아니면 쥐꼬리만한 내 지식에 있습니까? 아무 쓸모 없고 가치도 없는 만신창이 된 지나간 경험에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담력을 주고 있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런 가치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마는 하나는 율법적인 신앙이요 또 하나는 은총적인 신앙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율법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내가 남을 속였으면 나도 속아야 하고, 내가 남의 물건을 빼앗았으면 나도 빼앗겨야 합니다. 내가 부모님께 불효했으면 내 아들이 나에게 불효할 것이 당연하고, 내가 남에게 불친절하고 괴로움을 주었으면 나 또한 괴로움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남을 악하게 대했으면서 선한 대접받기를 바라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율법적 신앙,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요, 또 하나의 신앙은 은총적인 신앙입니다.

율법만 가지고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사랑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사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 덕분이요, 내가 오늘 하나님의 자녀 된 것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이지 내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너무 커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과거에 주신 은혜를 깊이깊이 감사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수백 번 맹세를 한다 해도 내가 반드시 진실하게만 살고 선하게만 살고, 이제부터 아름답게만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거듭 실수하고 거듭 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가 엄청난 불의의 길을 갈 때에 그 길을 가로막으시고 강한 힘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힘이, 그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기에 앞으로도 나를 붙들어주실 것이라고 든든히 믿습니다.

이것이 은총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분명하게 믿고 안심합니다. 내가 나를 못 믿어도 하나님은 믿습니다. 내 의지 내 결심도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만은 내가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은총적 신앙이 있습니다. 율법적 신앙은 과거를 통하여 오늘과 내일을 봅니다. 그러나 은총적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저 앞에 있는 축복의 약속,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하박국 선지의 질문과 고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엄청난 민족적 수난이 있었습니다. 그 수난 직전의 상황 가운데에서 하박국 선지의 이 메시지가 기록됩니다. 그에게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1장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맥을 잘 보면 여기에 그의 큰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죄악 세상을 왜 보고만 계십니까? 저렇게 악한 사람은 망해야 되지 않습니까? 저 거짓말하는 사람, 당장 벌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 죄악된 세상을 어찌 내버려두십니까,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 좀더 심각합니다.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하심에 왜 의인을 통하여 벌하시지 않고 더 악한 자를 통하여 벌하시는 것입니까?' 하박국 선지에게서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봅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지금 타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죄악의 도시입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하여서 이대로는 견딜 수 없는 죄가 관영(貫盈)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답답한 사정을 보면서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이 죄악된 성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북쪽에 있는 바벨론입니다. 이 바벨론에는 느부갓네살이라고 하는 포악한 왕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 온 땅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짓쳐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하박국은 묻습니다. '하나님, 예루살렘 성도 죄가 많지만 저 느부갓네살은 더욱 악하지 않습니까? 저런 것을 왜 내버려두십니까?'

느부갓네살은 악할 뿐만 아니라 교만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위협이 다가올 때에 이스라엘 정치가들은 어찌했습니까? 공의를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애굽에 원정을 청했습니다. 뇌물까지 보내면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정치가들은 아예 애굽으로 피난을 가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느부갓네살이 호령합니다.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썩은 막대기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선지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받는다!" 하는 외침이 있는 것을 알고 저가 엄청난 훼방을 놓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망언을 합니다. "어느 하나님이 내 손에서 너희를 건질 성싶으냐!" 느부갓네살이 이처럼 교만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고민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이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왜 저 악한 느부갓네살로 이스라엘을 유린하게 하시는가-이 두 가지가 하박국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고민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예루살렘 거리를 왕래하며 외쳐도 이 백성이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살리라!" 해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박국의 마음은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있는대로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고 성루에 올라가 기다립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당신의 대답을 명백히 새겨서 성문에 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정한 때가 있나니……"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종말이 속히 이를 것이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그런고로 기다리라-이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아무 두려움 없이 기다리면 됩니다. 알프레드 플러머의 명언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기 위하여 때를 늦추십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서 정한 때가 따로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무리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올 것이니까요.

칼뱅 신학은 성도의 견인(堅忍)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데 이것이 칼뱅 신학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있으므로 이 인내를 믿는 성도는 인내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의 뜻을 아는 사람은 그 믿음 안에서 나도 참을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고난 당하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신앙적 역사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오늘 참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까?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맞받아 욕을 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 쪽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란스럽던 청중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중을 뜨겁게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 바로 그 시간을 향해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정녕 응하리라"하신 말씀을 믿고 굳게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이 들려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절에서도 말씀되고 있는 아주 소중한 요절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눈앞에 보이는 것은 죄악이요 멸망이요 심판이요,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위협입니다.

말 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전혀 앞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절망뿐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서 들려오는 음성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보는 것은 믿음으로 압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 봅니다. 새로운 역사 의식으로 저 앞을 내다봅니다. 죄가 있고 심판이 있고, 그리고 또 죄가 있으나 이 언덕 저 너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 뒤에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이 있음을 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압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비록 더딘 것 같아도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심판뿐만 아니라 약속도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한 이스라엘 청년이 약혼을 하고 장사를 떠나면서 그 약혼녀에게 말했습니다. "한바퀴 두루 돌아서 올 테니까 돌아온 다음에 결혼식을 올립시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신혼생활을 꿈꾸면서 기다리라고, 기다리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장사를 떠난 지 얼마 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꼭 돌아가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겠노라고 다짐하는 사연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무엇이 좀 잘못되어서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이 10년만에 돌아와 보니 약혼자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반가워서 청년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10년 동안이나 나를 기다릴 수 있겠소?" 그러니까 이 약혼녀가 10년 전에 받았던 낡아빠진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이면서 여기에 '꼭 돌아가서'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이 말을 믿고 위로를 받으며 기다렸노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도 약속과 믿음의 의미가 이처럼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우리는 "정녕 응하리라"하신 약속, 이 종말론적인 약속을 믿고 그 약속 안에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며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사랑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잠시 어렵게 보일 때도 있지만, 지금은 심판처럼도 보이고 저주처럼도 보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거기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지혜를 믿습니다.

그분께서 정하신 때를 믿고 그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더딜지라도 기다립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을 믿고 '네게 주리라, 네 손에 부쳤느니라' 하신 약속을 믿기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지혜를 믿기에 그 믿음에서 나오는 힘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머슨은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종달새의 알에서 그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약속된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저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은 믿음이 없는 고로 그 시선이 현재에 머물렀습니다. 현재만을 보고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졌던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에는 언제나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태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부정이나 절망은 없습니다. 소극적인 자세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에 살고 약속에 살고, 긍정과 소망에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과 위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암담하기만 합니다. 정치적으로 답답합니다.

경제적으로 막연합니다. 미래를 밝게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두움을 뚫고 저 언덕을 넘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기다리라, 정한 때가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바로 이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하박국 214)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다 같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형태의 사람이 있고, 두 형태의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리액션(reaction)으로 사는 사람 혹은 삶이요, 또 하나는 리스판스(response)로 사는 것입니다. 반사적으로 사는 부류와 응답적으로 사는 부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복잡한 시내버스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 발등을 밟았다고 가정해봅시다. 밟히는 순간 먼저 소리부터 질러 놓고 상대방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한바탕 욕을 올려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사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아지가 꼬리를 밟히면 제 주인이건 누구건 반사적으로 물려고 덤비는 그것과 똑같은 반사작용입니다.

한편, 응답적으로 사는 사람은 물론 밟힌 발이야 아프겠지만 먼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모르고 밟은 거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구 발을 밟았는 줄도 모르겠지.' 그렇게 믿고 보면 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면 저 사람의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 미안스럽고 무안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참고 견디어봅니다. 정 못 견뎌서 신음소리를 내었다 하더라도 저쪽에서 "어이쿠 미안합니다."하면 금새 이쪽에서도 ", 괜찮습니다." 합니다. 좀더 신사적인 사람은 여기에 한마디 더 덧붙입니다. "저도 종종 남의 발등을 밟지요."미안해할 사람 마음부터 생각하면서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한다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은 이 두 가지 타입의 어느 쪽에 속합니까? 만일 전자처럼 산다면 여러분은 회개할 것이 많습니다. 반사적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감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며 느끼는 대로 행동합니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고, 미움받으면 미워하고, 맞으면 때리는 식의 반사적인 행동, 반사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간 유형입니다. 그러나 응답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영국 속담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고삐 없는 말과 같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 입장에서 고삐란 어지간히 괴롭히는 물건입니다. 고삐를 잡아챌 때마다 그 턱뼈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 때문에 몸집 큰말이 코흘리개 어린아이한테도 순순히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째든 말고삐란 말한테는 몹시 고통스러운 애물단지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고삐가 말을 인도합니다. 자기가 전혀 모르던 길도 그 고삐에 끌려가다 보면 어느새 푸른 초장이 나타납니다. 그 고삐가 잡아끄는 대로 달리다가 영광을 얻는 수도 있습니다.

말이 고삐의 인도를 받듯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마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믿음 없이 사는 사람,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전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그러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어려서는 부모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부모를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어머니가 크다고 하면 큰 것이고 작다고 하면 작은 것이다, 어머니가 좋다고 하면 좋고 나쁘다고 하면 나쁘다'-이렇게 믿을 수 있어야 하겠는데 '어머니가 쓰다는 것은 달고 달다는 것은 쓰더라' 한다면 기막힌 노릇입니다. 부모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 때에 그 아이가 행복한 아이요 정상적으로 자라는 아이라 할 것입니다. 부모를 믿는 단계에서 좀더 크면 스승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못 믿고 학생노릇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도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그가 행복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친구를 믿고 애인을 믿고, 나중에는 자녀를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녀를 믿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차를 타십니까? 내가 탄 자동차를 믿어야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신호등을 믿고 교통법규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믿음이 용기를 주고 담력을 주고 지혜를 줍니다. 여러분의 담력의 소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몇 푼 안 되는 돈에 있습니까, 아니면 쥐꼬리만한 내 지식에 있습니까? 아무 쓸모 없고 가치도 없는 만신창이 된 지나간 경험에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담력을 주고 있습니까? 사실 알고 보면 믿음밖에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런 가치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마는 하나는 율법적인 신앙이요 또 하나는 은총적인 신앙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율법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내가 남을 속였으면 나도 속아야 하고, 내가 남의 물건을 빼앗았으면 나도 빼앗겨야 합니다. 내가 부모님께 불효했으면 내 아들이 나에게 불효할 것이 당연하고, 내가 남에게 불친절하고 괴로움을 주었으면 나 또한 괴로움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남을 악하게 대했으면서 선한 대접받기를 바라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율법적 신앙,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요, 또 하나의 신앙은 은총적인 신앙입니다.

율법만 가지고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사랑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사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 덕분이요, 내가 오늘 하나님의 자녀 된 것도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이지 내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너무 커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과거에 주신 은혜를 깊이깊이 감사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수백 번 맹세를 한다 해도 내가 반드시 진실하게만 살고 선하게만 살고, 이제부터 아름답게만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거듭 실수하고 거듭 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가 엄청난 불의의 길을 갈 때에 그 길을 가로막으시고 강한 힘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힘이, 그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기에 앞으로도 나를 붙들어주실 것이라고 든든히 믿습니다.

이것이 은총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분명하게 믿고 안심합니다. 내가 나를 못 믿어도 하나님은 믿습니다. 내 의지 내 결심도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만은 내가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은총적 신앙이 있습니다. 율법적 신앙은 과거를 통하여 오늘과 내일을 봅니다. 그러나 은총적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저 앞에 있는 축복의 약속, 거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하박국 선지의 질문과 고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엄청난 민족적 수난이 있었습니다. 그 수난 직전의 상황 가운데에서 하박국 선지의 이 메시지가 기록됩니다. 그에게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1장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문맥을 잘 보면 여기에 그의 큰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죄악 세상을 왜 보고만 계십니까? 저렇게 악한 사람은 망해야 되지 않습니까? 저 거짓말하는 사람, 당장 벌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 죄악된 세상을 어찌 내버려두십니까,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 좀더 심각합니다.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하심에 왜 의인을 통하여 벌하시지 않고 더 악한 자를 통하여 벌하시는 것입니까?' 하박국 선지에게서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봅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지금 타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죄악의 도시입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하여서 이대로는 견딜 수 없는 죄가 관영(貫盈)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답답한 사정을 보면서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이 죄악된 성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북쪽에 있는 바벨론입니다. 이 바벨론에는 느부갓네살이라고 하는 포악한 왕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 온 땅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짓쳐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하박국은 묻습니다. '하나님, 예루살렘 성도 죄가 많지만 저 느부갓네살은 더욱 악하지 않습니까? 저런 것을 왜 내버려두십니까?'

느부갓네살은 악할 뿐만 아니라 교만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위협이 다가올 때에 이스라엘 정치가들은 어찌했습니까? 공의를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애굽에 원정을 청했습니다. 뇌물까지 보내면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정치가들은 아예 애굽으로 피난을 가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느부갓네살이 호령합니다.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썩은 막대기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선지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받는다!" 하는 외침이 있는 것을 알고 저가 엄청난 훼방을 놓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망언을 합니다. "어느 하나님이 내 손에서 너희를 건질 성싶으냐!" 느부갓네살이 이처럼 교만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고민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을 이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왜 저 악한 느부갓네살로 이스라엘을 유린하게 하시는가-이 두 가지가 하박국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고민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예루살렘 거리를 왕래하며 외쳐도 이 백성이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살리라!" 해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박국의 마음은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있는대로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고 성루에 올라가 기다립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당신의 대답을 명백히 새겨서 성문에 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정한 때가 있나니……"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종말이 속히 이를 것이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그런고로 기다리라-이것이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아무 두려움 없이 기다리면 됩니다. 알프레드 플러머의 명언이 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기 위하여 때를 늦추십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서 정한 때가 따로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무리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올 것이니까요.

칼뱅 신학은 성도의 견인(堅忍)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을 말하는데 이것이 칼뱅 신학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있으므로 이 인내를 믿는 성도는 인내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의 뜻을 아는 사람은 그 믿음 안에서 나도 참을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고난 당하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신앙적 역사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오늘 참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까?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맞받아 욕을 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다 당하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 쪽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란스럽던 청중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중을 뜨겁게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소리가 우레처럼 터져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정한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 바로 그 시간을 향해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정녕 응하리라"하신 말씀을 믿고 굳게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대답이 들려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17,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절에서도 말씀되고 있는 아주 소중한 요절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눈앞에 보이는 것은 죄악이요 멸망이요 심판이요,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위협입니다.

말 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전혀 앞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절망뿐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서 들려오는 음성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보는 것은 믿음으로 압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 봅니다. 새로운 역사 의식으로 저 앞을 내다봅니다. 죄가 있고 심판이 있고, 그리고 또 죄가 있으나 이 언덕 저 너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 뒤에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이 있음을 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압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비록 더딘 것 같아도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심판뿐만 아니라 약속도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한 이스라엘 청년이 약혼을 하고 장사를 떠나면서 그 약혼녀에게 말했습니다. "한바퀴 두루 돌아서 올 테니까 돌아온 다음에 결혼식을 올립시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신혼생활을 꿈꾸면서 기다리라고, 기다리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장사를 떠난 지 얼마 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꼭 돌아가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겠노라고 다짐하는 사연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무엇이 좀 잘못되어서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이 10년만에 돌아와 보니 약혼자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반가워서 청년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10년 동안이나 나를 기다릴 수 있겠소?" 그러니까 이 약혼녀가 10년 전에 받았던 낡아빠진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이면서 여기에 '꼭 돌아가서'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이 말을 믿고 위로를 받으며 기다렸노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도 약속과 믿음의 의미가 이처럼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우리는 "정녕 응하리라"하신 약속, 이 종말론적인 약속을 믿고 그 약속 안에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나를 사랑하시며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사랑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잠시 어렵게 보일 때도 있지만, 지금은 심판처럼도 보이고 저주처럼도 보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거기서 사랑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지혜를 믿습니다.

그분께서 정하신 때를 믿고 그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더딜지라도 기다립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을 믿고 '네게 주리라, 네 손에 부쳤느니라' 하신 약속을 믿기에,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지혜를 믿기에 그 믿음에서 나오는 힘으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머슨은 말했습니다. '믿음이란 종달새의 알에서 그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약속된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저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은 믿음이 없는 고로 그 시선이 현재에 머물렀습니다. 현재만을 보고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졌던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에는 언제나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태도만이 있을 뿐입니다. 부정이나 절망은 없습니다. 소극적인 자세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에 살고 약속에 살고, 긍정과 소망에 살아갈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과 위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암담하기만 합니다. 정치적으로 답답합니다.

경제적으로 막연합니다. 미래를 밝게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두움을 뚫고 저 언덕을 넘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기다리라, 정한 때가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바로 이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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