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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을 사랑하라(호세아 3 :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나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워지는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8, 16) 이는 참으로 위대한 고백이요, 간증이며 결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이 잠깐 달에 다녀와서 하는 이야기가 달나라에 가보았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달 표면을 밟고 여행까지 하고 돌아온 어윈(Irwin) 대령은 우주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어윈 대령이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한 젊은 청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가가린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그랬더니 어윈 대령이 대답하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책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제가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통로, 오직 하나의 길, 그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논리적 이해로도, 분석적 성찰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사랑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보아서 눈으로 아는 것과 같이 사랑의 눈을 통하여, 사랑의 마음을 통하여, 사랑의 인격을 통하여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계시의 중심이 사랑이십니다. 주신 바 계명의 그 뜻과 의도도 사랑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역사 전체의 흐름과 그 방향이 바로 사랑의 교과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알도록,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사랑의 의미를 깊이 느끼고, 깨닫도록, 그리고 나아가 이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최후의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오늘도 성경 말씀과 세상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계속 사랑을 말씀하시며 가르치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효과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중에는 이 호세아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높은 의미의 교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신약에 있어서는 요한복음이나 요한 1서를 사랑의 복음이라고 하듯이 아마도 구약에서는 효세아서가 사랑의 복임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 호세아서에는 구체적인 사건, 즉 호세아의 가정 사건과 관련하여 계속 사랑을 말씀하고 계시며, 또 그것을 통하여 사랑을 알도록, 그리고 증거하도록 교훈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장가가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호세아의 생각에는 에덴 동산의 이브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동경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변이니까? 음란하기로 드러난 길거리의 여인인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으며 가정을 꾸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가끔 중매를 하다가 실수할 때가 있어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만 처음부터 이와 같은 중매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중매하십니다. 창녀와 결혼하라고. 이 또한 준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호세아는 부득불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 부정한 여자를 사랑합니다. 마침내 그 사랑의 열매로 2남 1녀의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제 이만하면 호세아의 사랑을 받으며 그 가정에 충실한 아내가 될 만도 한데 이 여자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딴 남자를 사랑하여 집을 나가 버립니다. 그리하여 다시 창녀가 되고 마지막에는 노예로 팔려가 종이 되고 맙니다.
이런 지경에서 호세아의 마음은 일단 아팠습니다만 일이 이 정도 되었으니 아예 처음부터 창녀였으니까 이만하면 나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 절반은 이렇게 버렸으니 다시 장가들어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시작해 봐야겠다고 어쩌면 시원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번째로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야 그 여인을 사랑하라! 다른 사람의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여러분! 이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한 사랑은 없습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종종 이와 같이 극단적인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만드십니다. 무엇으로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듭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고는 하지만 성경에 있는 욥의 고통 앞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호세아의 가정 생활을 두고 보면 이제 사랑에 실패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앞에서 아무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그 여인을 사랑하라! 이러한 모순이 어디에 있고,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불결한 이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그는 몸만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신도 혼도 다 더러워진 불가능한 이 인간을 또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원래 사랑은 최대의 모순이요 또한 최대의 모순을 낳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을 풀어 나가는 가장 귀중한 해결 자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에 실패의 원인이 있다면 첫째로 대상을 너무 고르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대한 저울질이 너무 심하단 말입니다. 저가 내 사랑을 받을 만한가 못한가? 그리고는 그 대상에 대한 원망이 많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사랑은 본래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과 한 율법사가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을 행하라는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되묻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히 되묻는 것 같으나 이는 대단히 건방진 말을 한 것입니다.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 내가 사랑하여야 할 그 정도의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그야말로 답답한 인간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을 몰랐고,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도 몰랐습니다. 영원히 정신적 병리 인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사랑이란 내게 오는 보상을 먼저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사랑하면 얼마의 이득이 있어질 것인가? 이것부터 계산하려 듭니다. 그래서는 부잣집 딸, 공부 많이 한 남자, 배경 좋은 사람 등 별별 조건을 다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오는 보상! 그것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원래 자기 망각입니다. 이런 것들이 생각나면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한 시간이든, 잠깐이든 저 사람을 사랑하다 죽어도 좋다는 그 마음을 한번 가지고 살아야 사람이 사람답게 산 사람입니다. 단 한번도 이 사랑을 위해서 죽자 하는 경험이 없다면 아무래도 그는 인생 공부 제대로 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게 오는 보상! 그것은 추호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톨스토이의 이야기처럼 헤엄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물에 빠졌을 경우 자기가 헤엄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아들이 물에 떠내려 가는데 내가 헤엄을 칠 줄 아나 모르나, 건질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랑은 그만큼 자기 망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쓰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미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역시 미치는 일입니다. 본래 미친다는 것은 남 보기는 딱해 보여도 본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은 그 가능성이나 미래를 믿지 않습니다. 진정 그것이 사랑입니다. 방탕한 아들이 있습니다. 가출한 자녀가 있습니다. 이래저래 속을 썩이는 아이들, 그러나 그 자녀의 손을 잡고 학교를 찾아가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자기 자식 대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어디에서 출발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미래를 점치지 맙시다. 사랑의 가능성이 있고 미래가 밝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눈으로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래가 보이는 것이지 미래가 소망적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하므로 저 앞에 있는 약속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성경 말씀은 우리의 거짓된 사랑을 너무나도 무섭게 심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깊은 반성을 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 여인을 사랑하라! 본래 이 여인은 창녀입니다. 부정한 것으로 알려진 여인이었습니다. 그 어떤 매력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하시니 사랑한 것입니다.
그 외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의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기분으로 알기 때문에 해보았다, 치웠다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심지어는 결혼이 무엇이냐 할 때 사회학적으로는 같이 살기로 한 하나의 사회적 계약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의지가 중요합니다. 사랑해서 행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결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정결케 하여야 합니다. 아름다워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의미요 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는 무던한 인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래가 창녀요 부정한 이 여인을 데려다가 3남매를 낳기까지 이토록 애지중지 사랑해 주었건만 아직도 과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타인의 연애를 받아 타락을 합니다. 계속 말썽을 부립니다. 그러나 끝까지 절망해서는 아니됩니다. 사랑은 영원히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너무나도 쉽게 실망한다는 말을 잘합니다. 실망은 최후의 말이요 마지막 순간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실망했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면 이제 더는 함께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실망은 끝을 의미하는 마입니다. 사랑에는 실망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몹시 피곤해 하는 것도 알고 보면 결국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해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다고는 하지만 당신 둘만이 사랑하면 이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이 세상도 분명 살 만한 세상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있게 된 원인이 있다면 이는 사랑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랑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사랑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계속 잘못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호세아가 다시 고멜을 찾아 함께 가자고 할 때에 정말 따라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순순히 그대로 따라왔다면 이 또한 굉장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엄청난 처지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사랑을 믿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왔다면 이 고멜도 훌륭한 여자입니다.
문제는 "나는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그 자체가 무자격자입니다. 그토록 많은 "사랑한다"는 말속에서 아직까지도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괴로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사랑 받을 만하다. 그것도 만인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치 성례와 같아서 무릎을 꿇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감지덕지해서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나는 사랑 받을 만하고, 당연히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니 이야말로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고멜은 사랑 받을 만한 여인이 못됩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또한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 창조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값을 지불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라고 하였습니다. 돈 받고 팔려 갔으니 또한 돈을 주고 사와야 합니다. 여기에서 왜 은 열 다섯이냐 하면 당시 노예의 값이 은 30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은 30에 팔리신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여자는 그 절반인 열 다섯으로 값이 쌉니다. 이는 육체 노동을 주로 하는 당시 사회에 있어서 남자 노예는 밖에서 힘든 일을 해야 하고 여자 노예는 주로 집안에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제 돈을 주고 샀습니다. 사랑의 값을 지불하였습니다. 사랑은 한다면서 공짜로 얻어지기를 바란다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저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값을 지불하여야 합니다. 이제 본인은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노예가 자기를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누군가가 대신 지불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자유할 수 없는 바로 그 여인! 그를 속량하여야 하고, 그를 대신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고서야 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호세아가 이 역겨운 여인을 다시 불러 놓고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다. 이 사랑의 고백이야말로 사랑의 절정이요 사랑의 진수입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나도 너만 사랑할 테니 제발 너도 나만 사랑해다오. 그리고 과거는 묻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는 오래오래 깨끗한 사랑을 해달라며 애원의 부탁을 합니다. 정결을 값으로 지불하고 있습니다. 진정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가끔 남편의 외도 문제로 속상하신 분들과 상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집에 들어오면 좀 잘 봉사해 드리지요"라고 하면 옷도, 음식도 그리고 보약까지 달여서 잘 해드 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합니까?" 하고 물어 보면 더러워서 안 됩니다. 자! 이것 보세요. 지금 서비스(service)가 문제입니까? 사랑이 문제이지! 밥은 아무 데나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친절을 어디에나 있습니다. 돈 몇 푼이면 다 해결이 됩니다. 문제는 진정한 사랑의 소재에 있습니다. 더러운 사람을 사랑하려면 내가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사랑하려면 또한 죄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죄인을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의인이면서도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셔야 했고 나아가서는 십자가의 죄인으로 죽으셔야 했던 것이 아닙니까? 사랑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는 싸구려 사랑을 말하지 마세요. 상상도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내 진실과, 내 순결을 대가로 지불하며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는 자기 고백을 하고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긴다. 그러나 여호와가 저를 사랑하나니! 너는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관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는 그 여인을 사랑하라. 그 여인을 사랑하고야 내 사랑의 뜻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로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 줄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래야 내 제자가 되고 그래야 나를 알며 또한 하나님을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 됨을 거기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이 사랑에 있고, 나의 본질을 깨닫는 것도 사랑에 있습니다. 내가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 길도 이 사랑에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 내가 태어나고 이 사랑을 베품으로 오늘 이 세대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분명 이 사랑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것입니다. 이는 사랑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사랑을 등지고 사는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거듭거듭 그 사랑을 배반하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그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나이다. 이미 죄인이요, 사랑 받을 자격도 없이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 앞에 있는 멀고, 가까운 그 여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미련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 것을 깨달아 그 은혜에 감격하며, 이제는 우리 앞에 있는 또 하나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되게 하사 이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또한 이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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